‘북쪽 거실’<br>배수아 지음, 문학과 지성사, 287쪽, 1만원
1998년 9월 나는 독일로 떠나는 길에 김포공항에서 그녀를 잠깐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그녀는 출국하는 한국 청년들의 서류에 병역 확인 스탬프(도장)를 찍어주는 일을 하느라 공항에 파견근무 중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내 모습이 문단 모임에서와는 다른, 후일 그녀의 표현에 의하면, ‘파리로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여자’처럼 여행자의 차림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모자를 벗자 그녀는 단박에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마치 오래전에 헤어졌던 동창을 만난 듯 내 이름을 길고 진하게 부르며 반겼다. 우리는 얼떨결에 두 손을 맞잡았고, 그리고 공항 식당에 올라가 점심을 함께 먹었다.
설렘과 안도가 공존하는 곳
그녀는 공항에 파견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늘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것을 볼 뿐 한 번도 비행기를 타고 이국으로 나가본 적이 없다고 시무룩하게 말했다. 일산 호수공원 옆에 살면서 나는 호수공원 너머 한강과 김포 벌판 위로 비행기가 선회하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먼 곳으로의 떠남을 동경하곤 했었기에 공항에 붙박인 그녀의 기분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공항이란, 열차역과 마찬가지로, 얼마나 매혹적인 공간인가. 낯선 공기를 머금은 이방인들이 어디론가 떠나고 돌아오는 곳. 슬픔과 기쁨, 떠남의 설렘과 귀환의 안도가 공존하는 곳…. 그러니 공항 예찬자인 에세이스트 알랭 드 보통이 아니더라도 공항에서는 누구나 한번쯤 사색가가 되고,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되지 않던가.
그날 공항에서 배수아 작가와의 만남은 극적이었고, 그런 만큼 짧았지만 긴 여운을 남겼다. 입국장으로 들어서며 나는 그녀와 아쉬움이 뒤섞인 즉흥적인 이별을 했고, 이후 시간은 흘러 우리는 21세기로 진입했다. 그때 나의 유럽 여행은 길지 않았고, 귀국 후 가을 동안 두어 번 일산에서 그녀와 재회했다. 그런데 무엇이 공항에서의 반갑고도 아쉬운 만남을 이어가게 놔두지 않았던지 나는 나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이전의 무연했던 상태로 돌아갔고(나는 경주로, 파리로 어린 아들을 끼고 떠돌아다니기 일쑤였다), 문단의 여느 문인 소식처럼 지인을 통해 그녀의 소식을 띄엄띄엄 듣게 되었다.
그 소식 중에 내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것이 그녀의 베를린행이었다. 나는 순간 공항에서의 극적인 만남과 그녀의 얼굴에 어리던 먼 곳에의 동경을 떠올렸다. 그녀는 형광등 불빛이 희미한 공항 구석의 병무청 창구에 붙박여 있기에는 이방인의 자유로운 피와 작가만의 반항적인 혼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공항의 만남에서 공유했던 오래된 동창의 친숙함과 낯선 흥분을 ‘베를린의 배수아’에서 느꼈다. 마치 배수아를 위해 베를린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고, 이제 나는 불온한 여행자, 베를린의 이방인 배수아의 소설을 기다리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우리는 이바나와 함께 있었다. 나는 K와 함께 있었고 K는 잠과 함께 있었다. K는 잠을 원했고 나는 침묵을 원했다. 길을 걷다가 가끔 멈추어 선 채 이바나, 하고 중얼거린다. 사람들이 그런 나를 쳐다본다. 우리가 이바나, 하고 말하는 것은 집시, 라고 불리는 한 마리 개와, 그리고 나머지 분석되지 않은 체험을 의미한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를 떠났고 아는 사람이 없는 방식으로 살기를 원했다. 그것은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저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사용하는 이방인이 간다. -배수아, ‘이바나’에서
이방의 공간들
배수아의 베를린뿐만 아니라 21세기 들어서면서 작가에게 장소, 특히 이국의 공간이 갖는 메타포(은유)의 울림은 매우 크다. 지난 세기 작가의 독창성을 규정하는 것은 작가의 태생지에서 연유하는 언어, 곧 삶의 언어(사투리)적인 의미가 컸다. 리얼리스트냐 모더니스트냐의 구별도 따지고 보면 그 작가의 언어 감각과 언어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서울토박이의 삶과 의식을 서울말로 그려낸 리얼리스트 염상섭과 소설(‘삼대’), 1930년대 근대 식민지의 수도 경성의 모던 보이의 근대적인 삶과 형식을 근대어로 창조한 모더니스트 박태원과 이상의 소설들(‘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과 ‘날개’), 충청도의 순진하면서서도 의뭉스러운 심성을 장삼이사들의 입을 통해 구수하게 불러낸 리얼리스트 이문구의 소설들(‘관촌수필’, ‘우리동네 이씨’ 등).
이들의 소설은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각각의 공간이 고유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이 초고속 인터넷 매체 환경의 21세기가 시작되면서 공간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바로 배수아를 비롯해 김영하, 김연수, 한유주, 김사과 같은 젊은 작가들의 소설에 이방의 공간이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세계의 여러 곳으로 이동하며 작업한다. 이러한 형태는 이미 200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작가 르 클레지오가 선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 출생한 그는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모리셔스섬에 집을 가지고 있고, 틈틈이 멕시코와 태국, 한국에서 반년씩 머무르며 새로운 인간과 환경을 소설의 질료로 사용한다. 나는 르 클레지오를 비롯해 배수아, 김영하, 김연수와 같은 작가군(群)을 노마드형(型) 작가라고 부르며, 외국 여행의 경험을 소설화한 1990년대까지의 여행소설과 구별하여 ‘여행서사’라 명명한다. 이때 이들의 소설 무대의 이국성은 문화사 및 인류사의 차원으로 확장된다.
토포필리아, 베를린
예전 내가 독일을 가려고 했을 때 목적지는 뮌헨이나 쾰른, 또는 튀빙겐과 같은 곳이었다. 뮌헨에는 전혜린의 족적이, 쾰른에는 대성당이, 그리고 튀빙겐에는 오랜 동창 녀석이 10년 넘게 철학에 빠져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뮌헨은 나 같은 외국문학도에게는 곧바로 전혜린으로 통했다. 1960년대 아스팔트 킨트로 불리던 전혜린의 폐부 깊숙이 불어넣어주던 불온한 감염의 정서를 뮌헨의 구석구석에서 확인하며 전율하고 싶었다. 그리고 2000년대, 이제 베를린은 배수아로 통했다. 2002년 여름 나는 동유럽 기행의 출발지로 베를린에 도착해 사흘을 보낸 적이 있다. 그때 나의 관심은 발터 벤야민과 헤겔의 흔적, 그리고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천사가 흑백 필름으로 보여주던 구동독과 서독의 무너진 장벽의 파편들과 공사 중인 도시의 공터들에 있었다. 내가 그들을 돌아보기 직전 베를린에 도착했던 배수아는 이방인의 느낌으로 곧바로 ‘이바나’를 썼고, 이어서 ‘동물원 킨트’를 발표했다. 그리고 그 즈음 공지영은 베를린 사람들이라는 부제를 단 ‘별들의 들판’ 연작을 쓰고 있었다. 바야흐로 베를린은 한국 소설가들이 사랑하는 장소, 곧 토포필리아(topophilia·場所愛)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동물원 킨트’ ‘이바나’ ‘마짠 쪽으로’ ‘훌’ ‘무종’ 등 배수아는 베를린을 근거지로 삼은 뒤 소설의 공간을 독일과 베를린에 집중하고 있다. 1993년 ‘1988년의 좁고 어두운 방’으로 데뷔한 배수아는 독일로 떠나기 전까지 분위기가 독특한 이미지를 거느린 반면 비문(非文)이 많은 문장의 작가로 평가되곤 했다. 그런데 독일로 떠난 뒤 배수아 소설에서 비문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매우 놀랍게도 논리적이고 사색적인 문장으로 변화했다.
이 글(‘독학자’)을 쓰는 동안 나는 독일어를 배우고 있었다. 마지막 기간 동안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작문을 통해 독일어를 공부하는 작문수업을 받았다. 한 주일에 한 번 우리는 선생님이 제시하는 테마에 맞는 작문숙제를 제출해야 했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곧, 내가 원하는 문장과 내가 쓸 수 있는 문장의 간극 사이에서 투쟁을 벌였다는 뜻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독학자’는 그동안의 내 작문숙제에 대해서 내가 독일어로 제출할 수 없었던 보충 부분이자 한국어 주석이 된다. 성 안토니우스와 독일어 작문시간. 이 두 가지가 ‘독학자’를 쓰게 된 가장 강한 모티프가 되었다. -배수아, ‘독학자’ 작가의 말에서
배수아의 장편 ‘북쪽 거실’은 독일도 베를린도 한국도 서울도 모두 지워진, 그러니까 한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을 가지고 최대한의 몽상을 끌어내는 이채로운 소설이다. 이때 공간(거실)은 현실이 되고, 몽상(북쪽)은 무의식, 꿈, 비현실, 현실 너머가 된다. 소설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수니라는 인물이 정체불명의 남자를 찾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찾는 이유나 목적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정체불명의 남자에 대한 수니의 상상과 회상이 소설의 골격을 이루고 있을 뿐이다. 일상 언어의 순조롭고도 순차적인 진행을 거부한, 개연성이라고는 찾기 힘든, 잦은 분절과 지루한 지속. 밑도 끝도 없는 배수아식 사변의 극단을 보여주는 ‘북쪽 거실’은 신년 정초, 새해를 빈틈없이 계획한 현대인에게 잠시 함정에 빠져든 듯한 엉뚱한 몽상의 여행 차원에서 체험을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극동아시아의 낯선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는 이것은 참으로 먼 곳으로 부쳐질 엽서였으니, 세계의 반대편에 있다는 키질이나 샹그릴라보다도 더욱 먼 곳으로, 나는, 우리는,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꿈은, 그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잠기게 되는데, 이미 그때 내 몸은 흙 속으로 파고드는 중이니, 누구인가, 내 육신을 사랑하는 이는…-배수아, ‘북쪽 거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