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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내입으로 미당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내입으로 미당을 말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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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 고은씨가 ‘미당 파문’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인터뷰에서 고시인은 남북정상회담 당시 북한 방문 비화,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 YH사건을 비롯한 각종 시국사건에 관여한 얘기 등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스승인 미당 서정주를 둘러싼 친일문학논쟁에 대해서는 직접 언급을 삼가는 대신 친일역사의 청산을 강조함으로써 완곡하게 소신을 드러냈다.
고은(高銀·68) 시인이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젊은 시절 ‘시의 정부’라고 칭송했던 미당 서정주 시인을 비판한 ‘미당담론’을 발표한 이후 문단이 찬반논쟁으로 소연하다. 고시인은 미당담론 이후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을 일절 사절하고 외국에서 열리는 시 축전에 다녀오고 백담사에서 열린 만해 한용운(韓龍雲) 축전에 참석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고시인은 왜 이 시점에서 시의 사부(師傅)였던 미당의 친일 친독재 행적을 비판하고 나섰을까. 그는 아직 독자들의 궁금증에 답하지 않고 있다. 어쩌면 미당담론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고시인은 1970년대 중반을 고비로 시의 세계는 물론 삶과 사유의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이쪽으로 흐르던 물이 다른 쪽으로 급격하게 돌아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시는 허무에서 민중으로 방향을 틀었고 술과 자학으로 방랑하던 시인은 사회의 모순, 분단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치열한 운동가로 변신했다. 그가 국민연합, YH사건 등 이 나라 반독재 민주화 운동사에 남긴 족적은 실로 만만치 않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인 작가 유시춘씨를 통해 인터뷰 교섭에 성공했으나 질문요지를 보냈더니 ‘싫다’는 응답이 왔다. 미당과 소설가(이문열씨)에 대한 질문은 답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고시인은 북한의 문화재와 자연을 탐방하기 위해 두 차례 북한에 다녀왔고 작년에는 남북정상회담 수행원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동석한 만찬장에서 시를 낭송했다. 미당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물어볼 거리가 많았다.



삶과 문학, 그리고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묻기로 약속하고 인터뷰를 성사시켰다. 그러나 시사잡지의 인터뷰를 하면서 세인들이 관심을 갖는 현안을 비켜갈 수는 없는 것이니 기회를 보아 물어보리라는 결심을 하고 안성을 찾아갔다.

고시인은 중앙대학교 안성 캠퍼스에서 멀지 않은 대림동산 전원주택 단지에 산다. 집 앞에 키 큰 오동나무가 서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근처에 비슷비슷한 형태의 집이 많아 찾기가 쉽지 않았다.

1984년 ‘법에 사는 사람들’ 효봉 스님 편을 취재하기 위해 이 집에 왔던 적이 있으니 두 번째 방문이지만 고시인은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현재 영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고차령(高車嶺·16)양도 태어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징역을 살고 나와 1983년 중앙대 영어과 이상화(李相華·54) 교수와 결혼한 뒤 부인의 직장이 있는 안성으로 내려와 18년째 살고 있다.

집에 에어컨이 없는 모양이었다. 고시인은 “더워서 이야기가 안 될 테니 냉방이 되는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전원주택 단지 인근 식당에서 파전과 백세주를 시켜놓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민감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부담이 덜한 북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남쪽에서 생각하는 것하고 실제로 가보면 많이 다르지 않나요? 북한 사회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개성 만월대에 오르니 서울 도봉산과 북한산이 가깝게 보여요. 거기서 남쪽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니까 이제까지 남쪽에서 태극기를 보던 것과 전혀 다른 뭉클한 감회가 일어요. 비로소 내가 살았던 땅과 전혀 다른 곳에 서 있구나 하고 실감했습니다.

북한의 사회구조는 우리와 달리 매우 인공적입니다. 어떤 개인이 다른 고장으로 이동하고 싶어도 개인의 자유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야 할 이유가 있다고 판단될 때에만 이동이 허용되거든요.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가 훨씬 우월하다든지, 그쪽이 답답하다든지, 이런 판단을 떠나 전혀 다른 사회라는 것을 기본적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북한에도 새로운 도로가 많이 건설돼 있습니다. 남쪽의 도로는 교통량이 너무 많아 체증이 심하지 않습니까. 거기는 도로가 거의 적막합니다. 도로에서도 사회구조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장차 그곳의 교통량이 많아지는 것을 좋아해야 할지, 걱정해야 할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 중에서도 활약이 눈부시지 않았습니까. 고시인이 평양 목란관에서 열린 만찬장에서 ‘대동강 앞에서’라는 시를 낭독했지요? 다음날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환송 오찬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손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를 때 두 분 사이에 고시인의 모습이 보이더군요.

“여기서 떠날 때 몇몇 신문사에서 시 청탁을 받았습니다. 시가 나올지 몰라 확답을 하지 않고 떠났어요. 비록 북한을 처음 여행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역사적인 현장의 증인이 된다는 생각에 잠이 잘 오지 않더군요. 방에 준비된 북한 술을 조금씩 따라 마시다가 감회가 깊어져 새벽 3시쯤 시가 나왔습니다.

친구로 지내는 민화협 공동의장 강만길 교수와 새벽에 대동강변으로 산보를 나갔습니다. 강가에서 친구에게 시를 읽어줬어요. 친구도 좋다고 말하더군요. 목란관 만찬 때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 이종혁씨(월북 소설가 이기영씨 아들)와 한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셨습니다. 그 자리에 공동 성명 초안이 도착하고 남북의 정상이 서명을 해 장내 분위기가 고조됐습니다.

강만길 교수가 박재규 통일부장관에게 내 시 얘기를 했던 것 같아요. 보고를 받은 김대통령이 “나는 괜찮지만 상대방이 있지 않으냐”고 말했고 북한 쪽도 좋다고 해 박장관이 연단에 올라가 소개를 했지요. 술 마시다가 갑자기 불려나갔습니다. 순서에 전혀 없던 겁니다. 외교 관례상 시 읊는 경우가 흔하지 않지요. 시를 낭독하자 가슴이 뜨거워져 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떠나는 날 백화원 오찬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내 시에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더군요. 옆에 있는 우리와 포도주 몇 잔을 주고받았죠. 그 자리에서 꼭 북한에 다시 오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남북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다시 오겠다고 대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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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 동아일보 논설위원 >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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