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仙風이 깃든 한국 최고의 장원

仙風이 깃든 한국 최고의 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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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물 10동에 총 120여 칸의 규모를 자랑하는 선교장은 민간주택으로는 처음으로 국가지정 문화재로 선정된 고택이다. 한국의 선풍(仙風)과 풍수사상이 집안 곳곳에 깊숙이 밴 선교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장원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仙風이 깃든 한국 최고의 장원
옷도 대충 입고, 먹을거리도 되는대로 먹고 산다 하더라도 집만큼은 푸른 소나무 숲이 우거진 아름다운 집에서 살고 싶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의(衣)와 식(食)이 주는 멋과 맛보다도 주(住)가 지니는 건축적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 주(住)가 다른 무엇보다 나의 문화적 욕구를 중층적으로 충족시켜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강원도 강릉에 있는 선교장(船橋莊). 산수화에 즐겨 등장하는 수백년 된 벽송(碧松)들이 집 뒤를 지키고 있고, 집 앞으로는 활래정(活來亭)의 홍련(紅蓮)들이 향기를 뿜어내는 집. 뒤를 보니 벽송이요 앞을 보니 홍련이라! 푸른 소나무 숲과 붉은 연꽃들이 조화를 이루는 선교장은 한국사람들이 가장 선망하는 집이라 할 것이다. 이 분야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은 어디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도 1위로 꼽힌 곳이 바로 선교장이다. 아무튼 선교장은 9대에 걸쳐 240여 년간 유지되어온 고택이자,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면서도 아름다운 전통가옥이다.

집의 명칭도 다른 집과는 달리 ‘장(莊)’자가 들어가 있다. 장은 장원(莊園)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선교장은 일반 주택이 아니라 장원임을 표방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서울에도 이화장, 혜화장, 경교장과 같은 장 자 이름을 가진 저택이 몇몇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름뿐이었지 실질적인 규모에서 장원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장 자 이름에 걸맞은 집은 강릉의 선교장이라고 생각된다.

국가지정 문화재로 등록된 민간주택

그만큼 집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선교장의 대지는 3만평에 달한다. 건물 규모를 보자면 큰 사랑채인 열화당, 작은사랑채, 행랑채, 연지당, 동별당, 안채, 안사랑채, 활래정, 서별당을 합쳐 건물 10동에 총 120여 칸이다. 민간 주택의 최대 한계선이라고 여겨지는 99칸을 초과한 저택이다.



장원으로서의 웅장함을 확인하게 해주는 건물은 뭐니뭐니 해도 선교장 정면에 한 일(一)자로 길게 늘어선 23칸의 행랑채다. 횡렬로 길게 늘어선 행랑채는 이 집 대문에 들어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중세의 위엄’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이러한 독특한 아름다움과 웅장함으로 인해 선교장은 1965년 국가지정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궁궐이나 공공건물이 아닌 민간주택이 국가지정 문화재가 된 것은 선교장이 처음이라고 한다.

선교장은 일찌감치 전국에 명성이 알려졌기 때문에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이 집에 대한 소감을 글로 남긴 바 있다.

1970년대 중반에 건축학자 정인국(鄭寅國, 1916∼1976)은 “한국 상류주택의 두 가지 유형인 집약된 건물배치와 분산 개방된 건물배치 가운데 선교장은 후자에 속한다. 통일감과 균형미는 적지만 자유스러운 너그러움과 인간생활의 활달함이 가득 차 보인다”(‘한국건축양식론’)고 평가한 바 있다. 인간미가 넘치는 활달한 공간구조로 선교장을 규정한 건축학자적 관점이다.

또 다른 건축학자 김봉열(金奉烈,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은 “가족용 주택 영역을 대외적 영역이 감싸고 있는 중첩적인 구성이다. 선교장을 통해서 한국건축의 집합구성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건물군의 형태적인 집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선교장의 조영사가 축적해온 시간적 집합의 모습이기도 하다”(‘앎과 삶의 공간 2’)고 해석한다.

한옥 전문가 신영훈(申榮勳)은 특히 선교장의 활래정에 대해 “얼핏 보면 ㄱ자형의 정자로 보이나 구조는 두 채가 하나로 이어진 것이다. 결구도 지붕도 각각 형성되어 있다. 이런 쌍정(雙亭)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어렵다”(‘한옥의 향기’)고 평가했다. 한옥을 직접 지어본 사람이 갖는 현장감이 묻어 있는 코멘트다. 그런가 하면 차(茶) 전문가인 김대성(金大成)은 다인(茶人)의 시각에서 활래정을 주목하고 있다.

“활래정은 온돌방과 누마루 사이에 ‘부속차실’을 갖춘 조선시대 상류층의 차실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는 손님을 찻상 앞에 모시고 앉아서 직접 차를 끓이지 않고 부속차실에서 준비된 차를 다동(茶童)이나 시동(侍童)이 찻상에 들고 내오게 하였다. 활래정에 설치된 부속차실은 이러한 조선시대 차 풍습을 보여주는 증거다.”(‘차문화 유적 답사기 下’)

한편으로 이 집안 자손으로 선교장에서 태어나고 자란 고려대 이기서(李起墅) 교수는 1980년에 선교장 사랑채 이름을 딴 저서 ‘강릉 선교장(江陵 船橋莊)’을 펴냈는데, 집 주인의 시각으로 선교장 역사와 함께 선교장의 과거 시절 사진을 실어놓았다.

여기에다 필자가 하나 첨가하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풍수에 대한 내용이다. 선교장을 다녀간 한국 문화계의 여러 선지식(善知識) 가운데 풍수를 언급한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선교장과 족제비 사건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해지는 장년에 접어든 한국남자들이 유서 깊은 고택을 볼 때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이 다름아닌 풍수라고 생각된다. 고택을 감평하는 데 제일 먼저 풍수부터 보는 것은 한국의 오랜 지적 전통일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들은 명당 설화들을 장년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교장 전체에 밑그림으로 깔려 있는 인문학적 문법(文法)이 바로 풍수이고, 이 문법을 해독하다 보면 숨겨져 있던 몇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발견되기도 한다.

먼저 족제비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조선조 효령대군의 11세손인 가선대부 이내번(李乃蕃)은 충주에서 살다가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안동 권씨)와 함께 외가 근처인 강릉 경포대 쪽에 옮겨와 살았다. 어느 정도 재산이 불어나면서 좀더 넓은 집터를 물색하던 중, 한 떼의 족제비가 나타나 일렬로 무리를 지어 서북쪽으로 이동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이내번이 그 족제비들을 따라가 보니 현재의 선교장 터 부근 숲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를 계기로 이내번은 이곳에다 집터를 잡았으므로 선교장은 족제비와 인연이 있다.

집터를 잡을 때 동물을 이용하는 경우는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경북 영양 일월산 아래의 호은종택(조지훈 생가)은 매를 날려 잡은 터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오리를 날려 잡은 절터도 몇 군데 있다.

동물은 인간보다 본능과 감각이 수십, 수백 배 발달해 있어서 대개 동물들이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는 지점은 명당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노련한 풍수가는 동물들이 지닌 감각도 중요한 정보로 이용한다. 아마도 족제비 뒤를 따라간 이내번은 이러한 이치를 터득한 인물일 것으로 유추된다.

풍수가에서는 동물의 직감 외에도 나무꾼이 나무를 하다가 지게를 받쳐 놓고 자주 쉬는 곳, 겨울에 눈이 왔을 때 제일 먼저 녹는 곳도 명당으로 친다. 나무꾼은 이성적 판단이 아닌 직감적이고 무심한 상태에서 제일 편하다고 여겨지는 지점에서 쉬게 마련이니 그곳이 명당일 것이고, 눈이 제일 먼저 녹는 장소는 따뜻하고 양명한 곳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굳이 풍수 이론을 따지지 않더라도 이런 곳은 대체적으로 사람이 살기 좋은 터다.

선교장의 전체 지세를 살펴보자. 대관령에서 동해 쪽으로 내려온 산세(山勢)의 한 가닥이 오죽헌 자리를 만들고 거기서 다시 동북쪽으로 흘러가 시루봉(甑峰)으로 솟았다. 시루봉에서 일차 뭉친 맥은 경포대 방향으로 올라가면서 여러 개의 자그마한 내청룡과 내백호를 분화(分化)해 놓고 있다.

이 자그마한 내청룡과 내백호는 흡사 알파벳의 유(U)자 모양 같다. 유자 모양의 산세는 그 가운데에 들어서면 기운이 아늑해서 편안하게 느껴진다. 시루봉에서 삼국시대의 고찰 월인사(月印寺) 터까지 약 4km 구간에 걸쳐 이러한 유자 모양의 집터가 줄잡아 10여 개 이상 자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산세도 200m 내외로 그리 높지 않아서 위압감을 주지 않고, 주변에 날카롭게 솟은 암산도 보이지 않아서 강렬한 살기도 눈에 띄지 않는다. 문사(文士)들이 선호할 만한 터임이 분명하다.

시루봉에서 약 2.5km 거리에 위치한 선교장 터도 바로 그러한 유(U)자 모양 집터 가운데 하나다. 선교장 터에 들어서면 곧바로 느껴지는 아늑함은 유자 모양, 즉 부드러운 청룡 백호가 활처럼 둥그렇게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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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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