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사오이는 1882년 톈진에 있는 세무아문의 통역관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웠다.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잡아간 청나라는 조선을 실질적 속방으로 삼기 위해 위안스카이(袁世凱·1859~ 1916)가 지휘하는 군대를 서울에 상주시켰다. 또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여하기 위해 독일인 묄렌도르프(1847~1901)를 조선의 외교 고문으로 추천했다. 탕사오이는 묄렌도르프의 비서로 발탁돼 1882년 12월8일 조선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조선에서도 근대화를 이루려는 열망이 들끓었다. 선두에 선 인물은 김옥균(1851~1894)이었다. 그는 근대화에 걸림돌이 되는 수구파를 없애기 위해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이 급진적인 정변은 ‘삼일천하’에 그치며 실패했다. 정변 때 칼부림을 당한 민영익(1860~1914)은 피투성이 몸으로 묄렌도르프 자택에 업혀왔다. 탕사오이는 선교사 겸 의사인 알렌을 불러와 민영익을 치료하게 했다. 이 인연으로 탕사오이와 민영익은 두터운 우정을 쌓는다.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은 시·서·화에 출중한데다 보빙사 대표로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어 탕사오이와 대화가 통했다.
소설가 김원우는 ‘우국의 바다’라는 다섯 권짜리 대하소설에서 “당소의(탕사오이)는 이씨 성을 가진 조선 여자를 정실로 삼을 만큼 조선에 미혹되어 있는데, 그 중신아비가 바로 민영익이다”고 썼다. 소설의 이씨는 사실 정씨가 맞다.
부인 정씨, 아들 낳고 급사
저자는 정씨에 관한 자료를 찾으려 애썼으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탕사오이와 함께 조선에 체류한 위안스카이는 조선 여인 3명을 첩으로 두었다. 이들에게서 모두 7남8녀의 자식을 얻었다. 세도가 안동 김씨 처녀도 위안스카이의 첩으로 들어갔는데 그녀의 손자인 위안자류(1912~2003) 박사는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군벌 출신 위안스카이는 고종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은 야심가였다. 그는 조선에 9년간 머물며 최고 권력가로 군림했다. 탕사오이는 위안스카이의 오른팔 노릇을 했다. 조선에서 위세를 떨치던 청 세력은 1894년 청일전쟁이 벌어지면서 기세가 꺾인다. 아산만에서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일본의 일방적인 우세로 진행됐다. 위안스카이는 탕사오이와 함께 7월에 중국으로 피신했다. 전쟁 이듬해인 1895년 4월 리훙장과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맺어진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청국은 조선을 속방에서 제외할 것임을 밝혔다.
탕사오이는 1895년 12월 조선상무총동이라는 직함으로 1년 반 만에 조선으로 돌아왔다. 청국 상인의 권익을 보호하고 조선 동태를 본국에 보고하는 업무를 맡았다. 조선에서는 일본 세력이 급성장해 탕사오이는 제대로 행세하지 못했다. 그는 1897년 1월30일 총영사로 승진했다. 그해 2월20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남으로써 러시아 세력이 일어서는 바람에 청국의 지위는 더욱 약해졌다.
1898년 10월 탕사오이는 부친상을 당해 조선인 부인 정씨를 데리고 귀국했고 이후 다시 한국에 오지 않았다. 그는 리훙장, 위안스카이 등 실세에게서 성실성을 인정받아 탄탄대로 출세 가도를 걷는다. 영어에 능통한 그는 1904년 인도에 가서 영국과 티베트 문제를 논의하는 중국 대표로 참석한다. 이어 1905년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이 문제를 다시 토의한다.
탕사오이는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위안스카이 측의 대표로 혁명군과 평화교섭을 진행했다. 1912년 청 왕조가 멸망하면서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위안스카이가 임시 대총통에 취임했다. 위안스카이는 오랫동안 자신을 보좌한 탕사오이를 초대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총리 지위는 오래가지 못하고 100여 일 만에 끝났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부인 정씨가 숨졌다. 산후 조리에 좋다며 먹은 방게가 화근이었다. 독살설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겠다.
탕사오이는 1918년 쑨원(孫文·1866~ 1925)의 광둥군 정부에서 재정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정치적인 유혹을 뿌리치고 1921년 낙향해 조그만 지방도시 중산현에서 현장(縣長)으로 활동한다. 이곳에서 그는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얻었고 중산현을 전국 최고 모범현으로 부각시킨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 머물렀다. 그는 장제스(蔣介石·1887~1975)에게 협조하지 않아 국민당 특무대원들에 의해 1938년 9월30일 살해당했다. 향년 77세.
저자는 “한 장의 흑백사진으로 남은 그녀를 만나면서 쓰게 된 이 글을 읽은 그 누가 오늘의 안타까움을 풀어줄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면서 “이 글이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에 이르는 조그만 디딤돌이 될 수 있다면 무척 행복할 것”이라 밝혔다.
역사에 대한 시야를 넓혀주는 이런 교양서가 국내 저자에 의해 자주 출판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려면 독자가 관심을 기울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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