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호

“넷플릭스 대세지만 독서로 내면 성찰해야 행복”

[플라톤 아카데미-마지막 회] 지역사회에 숨결 불어넣는 ‘인문 아지트’ 지관서가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5-05-10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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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자체·SK그룹·플라톤아카데미 협업한 ‘복합 인문 문화공간’

    • 북 카페 넘어선 인문활동공간 목표로 각 지역에서 운영

    • 생애주기별 마주하는 물음 키워드로 숙고하는 공간

    • 코로나19 팬데믹에도 하루 200명 찾는 등 인기

    ‘신동아’는 인문학재단 플라톤아카데미와 함께 이 시대에 새로운 통찰을 주는 다양한 사람들의 시리즈를 진행했다. 플라톤아카데미는 2010년 11월 설립된 국내 최초 인문학 지원 재단으로 인류의 오랜 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삶의 근원적 물음을 새롭게 전한다는 취지로 연구 지원, 대중 강연, 온라인 포털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제 마지막 시리즈로 플라톤아카데미가 펼치는 복합 인문 문화공간 ‘지관서가’이야기다. <편집자 주>

    울산 북구에 위치한 박상진호수공원 지관서가 전경. 허문명 기자

    울산 북구에 위치한 박상진호수공원 지관서가 전경. 허문명 기자

    3월 19일 경북 안동시 서동문로 203번지에 안동 지관서가가 문을 열었다. 지관서가(止觀書架)는 지방자치단체에서 공간을 제공하고 SK그룹이 재원 기부, 재단법인 플라톤아카데미가 기획해 탄생한 ‘복합 인문 문화공간’이다. 울산에 6개소, 경기 여주에 1개소가 조성됐다. 안동 지관서가는 8번째로 개관했다. 지관서가가 울산에 집중된 것은 SK그룹의 에너지 화학 부문을 담당하며 울산에서 국내 최대 규모 정유 석유화학 단지를 운영하고 있는 SK이노베이션의 영향이 크다. 

    지관서가는 대기업 사회공헌사업의 확장성 측면에서 여러 가지로 주목할 만하다. ‘멈추어 바라봄’을 뜻하는 ‘지관(止觀)’이라는 말은 불교 용어에서 빌려왔다. 2021년 4월 울산대공원을 시작으로 장생포, 선암호수공원, 울산과학기술원(유니스트), 울산시립미술관, 박상진호수공원, 경기 여주 여백서원 괴테마을 등에 열었다. 이번 안동에 이어 경기 평택, 수원에도 문을 열 예정이다.

    지관서가는 지방자치단체가 소유하고 있지만 비어 있거나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공용시설을 리모델링해 사용한다는 점에서 환경친화적이다. 안동 지관서가처럼 기존에 문화원으로 사용하던 곳을 개·보수한다든지, 장생포나 선암호수공원처럼 숲이나 바다로 둘러싸여 풍광이 아름답지만 접근성이 떨어진 곳에 있는 공공건축물을 리모델링해 북 카페 형태로 꾸미는 등 그 방식도 다양하다. 주로 숲이나 호수, 바다, 공원에 둘러싸인 지역에 위치한 덕분에 젊은이들 사이에 ‘뷰 맛집’으로 소문나 ‘지관서가 도장 깨기’를 할 정도로 순례객도 생겨났다. 이처럼 공공건축물을 재활용하는 것이 지관서가의 하드웨어적 특성이다. 

    지난해 말 문을 연 경북 울진군에 위치한 울진금강송숲 지관서가 인문토크 광경. 해당 지관서가는 4월 25일 정식 개관한다. 허문명 기자

    지난해 말 문을 연 경북 울진군에 위치한 울진금강송숲 지관서가 인문토크 광경. 해당 지관서가는 4월 25일 정식 개관한다. 허문명 기자

    비어 있는 공공건축물에 인생 테마 부여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도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 각 지역의 특색에 맞게 도서 큐레이션의 주제를 정하고, 해당 주제에 맞는 도서를 집중 배치한 것이다. 지역의 사회적 협동조합에 카페 운영의 기회를 주는 점 역시 지역 사회사업의 새로운 유형으로 평가할 만하다.



    플라톤아카데미는 ‘인생 테마’와 관련된 인문학 주제를 설정하고, 관련 책을 출간하는 등 한국 사회에 다양한 정신문화를 알려왔다. 관련 맥락에서 지관서가는 ‘인생 테마를 공간으로 구현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각 장소의 지관서가는 다양한 키워드를 품고 있다. 울산대공원점은 ‘관계’, 장생포점은 ‘일’, 선암호수공원점은 ‘나이 듦’, 유니스트점은 ‘명상’, 울산시립미술관점은 ‘아름다움’, 박상진호수공원점은 ‘영감’, 괴테마을점은 ‘극복’이 핵심 키워드다. 앞으로도 플라톤아카데미는 지관서가를 통해 가치, 몸, 쉼, 건강, 사랑과 같은 키워드를 확산할 계획이다.

    각 지관서가의 인테리어 역시 키워드에 맞게 구현했다. 유니스트 지관서가는 캠퍼스 내 호수인 가막못 인근의 학술정보원 1층에 자리하고 있다. ‘명상’이라는 키워드에 맞춰 서가를 분리해 독서와 사색을 함께 하도록 만들었다. 명상을 주제로 하는 서가는 다시 ‘침묵’ ‘집중’ ‘비움’ ‘드러남’ 등의 섹션으로 나뉜다. 서가는 각 섹션에 맞춰 책을 엄선했다. 서가에 비치해 둔 QR코드를 찍으면 각 명상 테마에 어울리는 차분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박상진호수공원 지관서가는 호숫가에서 ‘영감’이라는 키워드로 큐레이션한 책에 빠져들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다. 이 지관서가는 울산 시내가 아닌, 북구 박상진호수공원 산책길에 있다. 박상진호수공원은 울산의 독립운동가 송정 박상진의 이름을 딴 공원으로 입구의 호젓한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넓은 호수가 펼쳐진다. 

    울산공단과 장생포 항만이 내다보이는 장생포 지관서가의 키워드는 ‘일’이다. 이곳은 울산의 명소인 장생포고래문화특구 내 복합 문화공간인 장생포 창고 6층에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촬영 장소로도 유명하지만 이곳은 1970년대와 1980년대 국내 포경 산업의 중심지였다가 상업 포경 금지 조치 이후 쇠락했다. 지금은 고래 관광과 생태교육 중심으로 테마파크가 조성됐다. 한때 활기찼던 도시의 정체성을 살려 일과 노동에 관한 책을 엄선해 놓았다. 

    경기 여주에 위치한 괴테마을 지관서가는 독문학자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가 여주에 조성한 ‘젊은 괴테의 집’에 있다. 마을 안쪽 길을 걸으면 프랑크푸르트 괴테하우스를 본뜬 집이 보이는데, 더 안쪽으로 들어서면 젊은 괴테의 집이 있다. 이곳 1층에 괴테마을 지관서가가 위치한다. 이곳의 인생 주제는 괴테의 생을 닮은 ‘극복’이다. 

    지관서가에서 발견하는 지역공동체의 씨앗

    지관서가는 북 카페를 넘어 ‘인문활동공간’을 목표로 운영되고 있다. 문화적 인프라가 취약한 지방도시를 중심으로 조성했으며, 지역 주민을 하나로 묶는 행사를 끊임없이 기획했다. 서가를 중심으로 지역 주민과 인문활동가가 모일 수 있는 장을 마련한 것이다. 단순히 공간만 조성한 채 운영은 해당 지역에서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방치하지 않은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지관서가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온 최선재 플라톤아카데미 실장을 만났다. 

    울산대공원에 1호점을 낼 때부터 지켜봤는데 어느덧 울산을 넘어 안동, 경기도 여주·평택·수원까지 지관서가가 확장돼 반갑다. 당초 지관서가라는 콘셉트는 어떻게 나온 건가.

    “그동안 지역사회에 체육관, 어린이집, 양로원 등 공공시설을 증축하는 일이 사회공헌사업으로 이뤄졌다. 공간이 가진 다양한 효용을 극대화할 방법을 고민하다 재단 이사회에서 ‘책 공간이 좋겠다’는 의견을 줬다. 

    ‘온라인 시대인데 오프라인 공간에, 그것도 넷플릭스나 유튜브 등 각종 영상 콘텐츠가 대세인 상황에서 물성(物性)을 지닌 책에 집중하는 게 맞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성찰과 사유를 통해 행복의 마인드셋을 해야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수 있다’는 사업 취지에 대해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관련 우려도 잦아들었다. 내면을 이해해야 행복에 도달할 수 있으며 ‘독서가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방향으로 이사진의 의견이 모였는데, 결과적으로 정확한 방향이었다.”

    플라톤아카데미의 사업이라고 하면 인문학 강연이나 콘텐츠 확산 등이 떠오르는데.

    “맞다. 2010년 11월 4일부터 시작된 재단 사업은 10여 년간 동서양 고전 강연과 연구 지원 등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인문학의 심화 및 확산을 위한 사업 위주였고, 장학사업도 더해졌다. 그렇게 10여 년이 흘렀고, 새로운 10년을 어떻게 펼쳐갈 것인지를 고심했다. 그러던 차에 ‘고전에서 현실의 인문학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오자’고 방향을 잡았다. 

    국영수를 열심히 공부하고 대학도 졸업했지만, 정작 살면서 마주하는 문제에 대해 숙고할 기회는 많지 않다. 관계란 무엇이며 우정을 잘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랑이란 본질적으로 뭔지, 왜 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잘 늙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 떠오르는 물음도 다양하다. 이처럼 생애주기별로 다양한 질문을 마주하지만 마땅한 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자연스레 관련 주제를 고민하는 일이 재단 사업이 됐다. 앞선 고민은 우리 시대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인류 역사상 지속된 고민이었다면 누군가는 이를 생각하고 기록했을 테니 관련 내용을 집대성해 나가자고 방향을 세웠다. 서울대 행복연구센터와 함께 재단이 설립한 카이스트 명상과학연구소, 고려대 기반으로 만들어진 엠랩(마인드랩), 서강대 희망연구소 등과 협업하고 있다.”

    관공서 문화 프로그램의 한계 뛰어넘다

    이와 관련된 축적을 공간으로 풀어낸 것이 지관서가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지관서가 사업은 그간 재단이 해온 ‘인생 테마 축적’의 연장이다. 2019년 9월 ‘공간에 인생 테마를 부여해 보자’는 차원에서 도서 큐레이션을 했다. 그렇게 처음 문을 연 곳이 ‘관계’를 키워드로 한 울산대공원점이다. 

    전국을 다녀보면 서울, 경기를 제외하고는 인구 감소 현상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지역에 가면 정말 썰렁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부자 도시라는 울산 역시 청년, 특히 여성을 중심으로 인구가 빠르게 감소했다. 120만 명이던 인구도 어느덧 110만 명으로 줄었다. 

    일자리 감소, 교통 등 주거환경의 불편 등이 인구 감소의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지역 주민이 활용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 없다는 것 역시 문제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한마디로 지방에 살면 경험의 폭이 좁아진다는 것이다. 관공서에서 운영하는 문화 프로그램이 꽤 있지만 대부분 낮 시간에 운영돼 직장인이 참여하기 어렵다. 

    울산에 지관서가 프로젝트를 하면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을 알게 됐다. 특히 과거 야학처럼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인문활동가를 보며 큰 감동을 받았다. 작지만 특색 있는 동네 책방들에 힘을 보태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역 특색에 맞게 주제를 정해 도서를 큐레이션한 것은 신선한 발상으로 보인다.

    “3호점인 선암호수공원점은 지역 노인복지관 앞에 있다. 여기에 착안해 ‘나이 듦’을 주제로 큐레이션을 했다. 울산에는 공장이 많다. ‘퇴직자에게 제2의 삶을 위한 사유의 공간을 제공하자’는 취지를 살려 조성했다. 

    4호점인 유니스트점은 ‘경쟁이 치열하고 두뇌를 많이 사용하는 대학 특성상 명상을 주제로 한 공간으로 꾸미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있어 그렇게 만들었다. 쉼과 안식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자는 취지다. 

    괴테마을점의 경우 전영애 명예교수가 영향을 미쳤다. 전 명예교수는 생애 전부를 괴테라는 인물에 천착해 왔는데 그분의 업적이 놀라웠다. 인문학적으로 매우 훌륭한 호스트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해 협업했고, 젊은 괴테의 집 1층에 서가를 만들었다. 평생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간 괴테의 삶에서 착안해 ‘극복’이라는 키워드를 선정했다.”

    지자체의 협업 제안이 많을 것 같은데.

    “울산대공원에 1호점을 열 당시만 해도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이었다. 방문객이 없을 줄 알았는데 하루 입장객이 200명이 넘어 놀랐다. ‘공간의 힘’에 대해 깨닫는 순간이었다. 감사하게도 지관서가의 활동이 제법 알려지면서 다양한 연락이 오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예술위원회도 힘을 보태 소프트웨어를 함께 만들기로 했다.” 

    요즘 지방마다 인구 소멸 때문에 걱정이 많다. 지관서가를 운영하며 느낀 점이 있나.

    “예전보다 희망적인 부분은 청년들이 하나둘 귀농과 귀촌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지역 신문 및 방송국이 운영되기 시작했고, 독서 모임도 생겼다. 앞으로 지관서가가 지역 인문활동가의 아지트가 됐으면 좋겠다.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책 정리, 망가진 책 복원, 분실 도서 확인 등 서가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모임 및 활동이 생기고 있는데, 이것 역시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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