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그룹이 잇딴 악재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해 중반부터 ‘현대 다음은 LG’라는 유동성 위기설이 불거지더니 12월 들어서는 기대했던 IMT-2000 사업자 선정에서 탈락한 데 이어 계열사인 데이콤도 위성방송 사업자 선정에서 물을 먹었다. LG화학이 개발한 퀴놀론계 항생제 ‘팩티브’가 미국 식품의약국에서 신약 허가를 받지 못한 것도 실망스럽긴 마찬가지.
지난해 증시 폐장일 LG그룹 주식의 시가총액은 개장일에 비해 무려 78.1%나 떨어져 한 해 내내 몸살을 앓았던 현대(71.6%)보다 하락률이 더 높았다.
특히 구본무(具本茂) 회장이 취임 초기부터 그룹 차원에서 총력을 쏟아온 정보통신사업 부문이 가뜩이나 막대한 적자에 허덕이는 마당에 이처럼 신사업 진출마저 거듭 차단되자 LG가 곧 이 부문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리라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최근 LG가 한국통신에 LG텔레콤 인수를 제의했다는 루머가 나돌며 두 회사가 입단속에 나선 것도 ‘아니 땐 굴뚝‘에서 나온 연기로 보긴 어렵다.
LG 구조조정본부 정상국 상무는 “지금으로선 LG가 동기식 IMT-2000 사업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확정된 게 없다”며 루머를 일축했다. 하지만 “우리가 통신사업을 어떻게 끌고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통신정책과 기술, 시장여건의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해볼 수도 있다”고 여운을 남겼다.
IMT 탈락은 자업자득?
지난해 12월15일 LG가 IMT-2000 사업자 선정에서 탈락한 이후 LG전자 등 그룹 계열사 주가가 대부분 상승한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탄탄한 사업전략도 없이 새로운 일에 뛰어들면 시장에 불투명성이 확산된다. 통신사업은 엄청난 투자를 요하므로 LG처럼 들어왔다간 자칫 그룹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고 말한다.
증시에선 LG가 IMT-2000 사업에 참가하지 않으면 수천억 원대의 초기 투자를 안하게 돼 오히려 유동성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본 것. 시장이 LG의 통신사업 드라이브에 그만큼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얘기다.
비동기식 IMT-2000 부문에서 상당한 기술력을 확보했다고 자부한 LG가 사업자 선정에서 탈락한 것도 LG의 전략적 판단 착오가 낳은 ‘자업자득’으로 볼 여지가 있다.
지난해 IMT-2000 사업자 신청업체들은 기술표준을 놓고 동기식과 비동기식 진영으로 나뉘어 지리한 논란을 거듭했다. SK텔레콤 한국통신 LG글로콤 등 3개 서비스업체들은 비동기식을 주장했고, 동기식 장비시장에서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는 삼성과 현대 컨소시엄은 동기식을 주장했다. 정책 주무부서인 정보통신부는 소신껏 방향 설정을 해주지 못하고 업체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기술표준 방식은 9월 이전까지만 해도 ‘업계 자율’에 맡겨졌다. 3개 서비스업체 모두 비동기식을 주장했으므로 업계 자율에 맡겨진다면 ‘3비’로 가는 게 당연했다. 6월 안병엽(安炳燁) 정통부 장관은 국회에서 “3개 사업자 모두 비동기식으로 가도 개입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9월 이후 돌연 ‘2동 1비’설이 대두됐다. 정통부 고위 관계자들이 사업자들에게 동기식 채택을 강요했다는 설이 무성했다. 사업자들은 이를 ‘삼성의 힘’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사업자들이 “3세대 이동통신인 IMT의 경우 비동기식으로 가는 게 세계적 추세”라며 반발, 추석 이후 다시 업계 자율로 반전됐다. 그러다가 다시 ‘1동 1비 1임의대역’으로 갔다가 10월, 삼성의 막판 뒤집기가 먹혀들면서 ‘1동 2비’로 확정됐다.
눈여겨 볼 것은 SK텔레콤, 한국통신과 함께 줄곧 ‘3비’를 주장했던 LG가 10월 들어 갑자기 ‘1동 2비’로 선회했다는 점.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LG가 정부로부터 뭔가 귀띔을 받은 게 분명하다”고 추측했다. 업계의 시각은 이렇다.
현재 국내 이동통신시장의 시장점유율은 SK텔레콤(53%)-한국통신(32%)-LG텔레콤(15%)의 순으로, 1위는 물론, 2위 업체와도 격차가 큰 LG는 만년 3등을 벗어나기 어려운 처지다. 이런 상황에 세 회사가 IMT-2000에서 모두 비동기식으로 갈 경우 LG는 차세대 이동통신인 IMT-2000 시장에서도 꼴찌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LG가 비동기 장비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기술력을 갖췄다고 하지만, 통신시장에서는 극히 획기적인 기술을 갖지 못한 이상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추월하긴 어렵다. 2세대 이동통신에서 후발주자들이 기술적으로 개선됐다는 PCS폰을 앞세워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결국 SK텔레콤의 시장선점 효과와 브랜드 이미지를 뛰어넘지 못했던 게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LG로선 SK와 한통 중 한 곳이 동기식으로 전환하고 비동기 시장은 자신을 포함한 두 사업자로 양분되는 구조가 가장 바람직했다. 이런 고려 때문에 ‘3비’에서 ‘1동 2비’로 노선을 바꿨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LG와 정부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결과를 놓고 보면 설령 교감이 있었다 해도 ‘보증수표’는 아니었던 듯하다. 아무튼 LG는 ‘1동 2비’로 갈 경우 자신이 ‘2비’에서 밀려나 ‘1동’으로 몰리게 되리라곤 예상치 않았을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것이 LG의 결정적인 판단 착오였다”고 지적한다.
장비시장도 불투명
“SK텔레콤에겐 ‘어느 나라에서도 2세대 이동통신 1위 업체가 3세대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는 명분이 있었다. 확고한 가입자 기반과 통신망, 자금력과 기술력까지 갖췄기 때문이다. 한국통신도 LG텔레콤보다 사업기반이 훨씬 탄탄한데다, 민영화를 앞두고 기업가치를 높여야 할 상황이라 탈락할 가능성이 낮았다. LG는 ‘1동 2비’로 가면 자신이 가장 불리해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그 결과 LG는 IMT-2000 사업자 선정에서 탈락한 것은 물론, 기대했던 비동기 장비시장 선점 목표에도 차질을 빚게 됐다. LG는 국내 비동기 장비기술 분야에서 다소 비교우위에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때문에 비동기 서비스업체로 선정되지 못해도 비동기 장비시장은 선점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1동 2비’ 구도가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LG가 배제된 ‘2비’ 업체가 IMT-2000 서비스 상용화 시기를 늦추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2비’ 업체에게 거의 독점적으로 자사 장비를 납품하려던 LG의 계획은 ‘희망사항’에 그칠 수도 있다.
IMT-2000 서비스 상용화 시점은 2002년 5월로 예정돼 있다. 하지만 이미 사업권을 따내 아쉬울 게 없는 업체들로선 상용화 시점을 연기하면 연기할수록 유리하다. SK텔레콤과 한국통신은 2세대 이동통신망은 물론, IMT-2000의 직전 단계인 2.5세대 이동통신망(IS-95C) 설비투자까지 이제 막 끝낸 상황.
따라서 이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돈이 굴러들어올 텐데 굳이 3세대 상용화 서비스를 서두를 이유가 없다. 더욱이 상용화 시점을 전후해 투자해야 될 돈도 만만치 않거니와 아직은 IMT-2000의 수익모델도 불분명하다.
삼성증권 리서치센터 장성민 연구위원은 “현재로선 IMT-2000의 확실한 수익모델이 될 서비스가 영상전화인지, 게임인지, 음악인지 장담하기 어렵다. 구체적인 가격정책도 마련돼 있지 않다. IMT-2000은 2세대 이동통신과는 달리 이용시간이 아니라 전송된 데이터의 양에 따라(packet base) 요금이 책정될 전망인데, 모 서비스업체가 추산해본 결과 지금의 기술수준으로는 노래 한 곡을 다운받는 데 2000원은 받아야 수지가 맞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서비스 초기에는 당연히 단말기 값도 비싸다. 이런 여건이라면 ‘손님 끌기’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한국통신 이상철(李相哲) 사장은 이미 새해 벽두부터 “IMT-2000 상용화는 시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연기할 수도 있다”고 바람을 잡았다. SK텔레콤은 겉으로는 “예정대로 실시돼야 한다”고 밝히고 있지만 속마음은 한국통신과 다를 게 없다. 다만 이사장은 자신이 취임하기 전에 IMT-2000의 일정이 잡히고 사업자 선정이 끝났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이런 주장을 펴기에 부담이 덜하다.
상용화 연기는 삼성에게도 호재다. 최근 삼성전자는 IMT-2000 장비 부문에서 지금까지의 동기식 일변도에서 탈피, 비동기식 장비 개발을 본격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상용화 시점이 1년 정도만 늦춰져도 LG의 비동기식 장비 기술수준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본다. 정부로서도 상용화를 연기해 삼성에게 시간을 벌어줌으로써 상용화 이후 해외로부터의 장비 수입량을 줄일 수 있다고 기대하는 눈치다.
결국 LG만이 상용화 연기에 반대하고 있는 형국이다. LG측은 “사업자 선정의 대전제가 ‘2002년 5월 서비스 개시’였으므로 사업계획서도 이 일정에 따라 만들었는데, 이제 와서 업자의 편의에 따라 통신정책이 춤을 춘다면 사업자 선정 자체가 원인무효”라며 반발하고 있지만 귀 기울여주는 곳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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