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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전략·기획·재무통 列傳

그룹 총수 대리하는 무대 뒤의 핵심실세들

대기업 전략·기획·재무통 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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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조조정본부장, 경영관리본부장, 기획총괄본부장, 전략경영본부장, 투자사업본부장…. 이름은 달라도 기능과 파워는 유사하다.
  • 오너 패밀리를 최측근에서 보좌하며 그룹의 미래를 디자인하는 실질적 2인자가 바로 그들. 외부에 노출되기를 꺼리며 총수의 ‘그림자’를 자임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한국 재계를 대표하는 전략·기획·재무통들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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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틈없는 재무관리로 외환위기 파고를 넘고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견인한 이학수(李鶴洙·57)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사장). 그의 치밀함은 집안 내력이다.

1976년 12월 어느날 밤. 급성간염으로 대구병원 6층 병실에 입원해 있던 이학수 제일모직 관리부장은 “불이야!” 하는 고함소리에 잠을 깼다. 순간, 며칠 전 부친이 당부하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아까 봐뒀는데, 이 병실 복도에는 비상구가 두 개더라. 오른쪽 비상구는 잠궈놨고 왼쪽 것은 열렸어. 혹시 모르니까 새겨들어라. 사람은 항상 준비를 해야 되는 기라….”

이부장은 침대 시트를 물에 적셔 뒤집어쓰고 문을 나선 뒤 무작정 왼쪽을 향해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떻게 6층을 뛰어내려 왔는지는 몰라도 잠시 후 불길에 싸인 병동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살았다는 안도감에 무릎이 탁 풀렸다.

‘元祖 구조조정본부장’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1971년 공채 12기로 삼성그룹에 입사한 이사장은 현장 실무부터 깨칠 요량으로 아무 연고도 없는 제일모직 대구공장 경리과 근무를 지망했는데, 24시간 돌아가는 공정을 속속들이 관찰하기 위해 숙직과 일직, 야간 근무를 자청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가 입사 이듬해 국내 모방직업계 최초로 개발한 원가 분석 시스템은 최근까지도 이 분야의 기본 매뉴얼로 통했다.

몸에 밴 성실성을 인정받은 그는 1982년, 회장 비서실에 계열사 경영관리를 챙기는 운영팀이 설치되면서 운영1팀장으로 발탁됐고, 이후 20년 넘게 이병철(李秉喆)·이건희(李健熙) 부자(父子) 회장의 핵심 브레인으로 ‘간택’ 받았다. 이사장은 비서실 재무팀 이사·상무·전무를 거치며 그룹 재무 전문가로 돈줄을 쥐락펴락했다.

1992년 비서실 차장(부사장)에 오른 뒤에는 비서실 재무팀을 총괄한 것은 물론, 골칫거리로 떠오른 그룹 계열분리 실무작업을 주도하며 이건희 회장을 밀착보좌했다. 이병철-이건희, 이건희-이재용(李在鎔·삼성전자 상무) 승계 과정의 지분관리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그가 외환위기 극복과 구조조정 과정에서 이끌어낸 성과를 보면 가히 ‘원조(元祖) 구조조정본부장’이라 불릴 만했다.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지자 이사장은 그룹의 모든 역량을 현금 흐름의 정상화에 집중시켰다. 전 계열사의 현금 흐름도를 하루 단위로 보고받으며 물샐 틈 없는 철벽수비에 골몰했다. 그 결과 삼성은 시장금리가 연 30% 가까이 치솟았을 때도 수조원의 현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건희 회장의 전폭적인 신뢰가 뒤따랐음은 불문가지. 회장실장을 겸하고 있는 이사장의 집무실은 서울 태평로 삼성 본관 최상층인 28층 이건희 회장 방과 붙어 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은 “전자와 금융업 외에는 어떤 회사를 처분해도 좋다”며 이본부장에게 구조조정 전권을 위임했다. 국내 대기업 구조조정본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삼성 구조본은 인력의 3분의 1이 재무팀에 집중돼 있다. 이는 그룹 구조조정의 최우선 기준이 재무적 판단임을 시사한다. 이사장은 ‘돈 먹는 하마’가 된 자동차와 한계 사업부문은 물론, 업종 전망이 밝지 않은 일부 수익 사업부문도 과감하게 정리, 삼성이 세전이익 15조원(2002년)의 국내 최우량 기업으로 거듭나는 기반을 닦았다.

지난해 11월, ‘만년 준우승팀’ 삼성라이온즈가 창단 21년 만에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자 이사장은 이렇듯 재무통다운 소회를 털어놨다.

“기쁘다. 그저 우리 구단이라서가 아니라 삼성이 그간 바보처럼 돈만 많이 쓰고 우승 한번 못해봤기에 정말 기쁘다….”

노무현(盧武鉉) 정부 초기부터 대기업 구조본 해체 논란이 빚어지면서 일부 기업은 실제로 구조본을 폐지하기에 이르렀지만, 삼성 구조본은 요지부동이다. 삼성 구조본 임원들은 “삼성의 힘은 회장·구조본·계열사 사장단의 삼각편대에서 나온다”고 공공연히 강조한다. 이사장 자신도 “구조조정은 일회성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조직적으로 계속되는 회사의 일상 업무가 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삼성 구조본은 재무·인사·경영진단·홍보·비서·법무·기획 등 7개 팀으로 구성돼 있다. 각 계열사에서 선발된 100여 명의 정예요원들이 최신 정보를 수집·가공하고, 계열사 경영상태를 진단해 처방전을 내놓는다. 한시적 비상기구의 성격을 훨씬 뛰어넘는 핵심 참모조직으로 뿌리내린 지 오래다. 더구나 이건희 회장을 빼면 삼성에서 이사장만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도 없다. 삼성으로선 ‘대안부재’ 때문에라도 구조본을 계속 끌고가야 할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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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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