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보세요.”
“귀국 일정을 늦추시는 겁니까. 국내 일정이 여럿 잡혀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내가 직접 슬로바키아를 가봐야겠어요.”
“대우차 관련해서입니까.”
“그래요. 전 대리라고 했던가요?”
“네. 전춘근 대리가 대우자동차 슬로바키아 지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대리에게 법인장을 맡기다
정인섭 대리는 예정에 없던 지시에 부랴부랴 슬로바키아행 교통편을 수소문했고 김 회장은 귀국 일정을 늦춰가면서까지 오스트리아 빈을 거쳐 자동차를 이용해 슬로바키아로 향했다. 기업 총수가 대리를 격려하기 위해 일정까지 변경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996년 1월. 대우그룹 정기인사에서 대우자동차 수출본부 동구CIS팀에서 슬로바키아를 담당하고 있던 전춘근 대리는 슬로바키아 지사장으로 발령 받았다. 법인장에 해당하는 직책에 대리 직급이 임명된 것. 요즘이라면 이 같은 파격적인 인사가 경제뉴스에 소개됐겠지만, 당시 대우자동차 수출본부에서는 그리 놀랄 만한 인사가 아니었다. 전 대리 외에도 대리나 과장, 차장급 인사가 해외 법인장으로 인사명령을 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 때문. 김우중 회장은 “배울 만큼 배웠으면 열정과 패기로 무장한 젊은 직원에게 책임 있는 직책을 맡긴다”는 인사원칙을 갖고 있었다.
지사장을 맡은 전 대리는 딜러들을 모집하며 내수 판매망 구축에 착수했다. 직영할 수 있는 한두 곳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현지인 딜러를 모집했다. 판매망이 어느 정도 구축되자 전 대리는 딜러들로부터 자동차 주문을 받았다. 모두 1만대 이상의 주문이 들어왔다.
전 대리가 서울 본사로 오더(order·주문)를 내자 대우차 본사는 발칵 뒤집혔다. 물론 체코에서 독립한 슬로바키아에 독립법인을 설립하기 위해 준비기간을 갖기는 했지만, 부임한 지 몇 개월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1만대가 넘는 오더를 낸 슬로바키아 지사 얘기는 단연 화제였다. 이 같은 소식은 보고라인을 타고 유럽 출장 중이던 김우중 회장에게 보고됐고 이에 김 회장은 즉석에서 일정 변경을 지시한 것. 이듬해 인사에서 전 대리가 입사 동기들보다 일찌감치 과장 승진을 했지만, 사내에서 이상하게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수입차 업계에 포진한 대우맨들
위의 얘기는 수입차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대우차 출신 인사들을 취재하면서 알게 된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다. 대리 직급을 법인장으로 인사발령 낸 것도 그렇지만, 맡은 직책을 훌륭하게 해내고, 또 그런 직원을 격려하기 위해 그룹 총수가 일정까지 변경해가며 직접 찾아간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마치 역전의 용사들 무용담을 듣는 것 같았다.
국내 수입차 업계에 진출한 대우차 출신은 줄잡아 30여 명. 이들 가운데에는 전 대리의 경우처럼 대리나 과장 직급에서 법인장으로 일한 이도 있지만 차장, 부장, 혹은 임원으로 대우자동차 수출본부를 이끌었던 간부급도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