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지적 자산이 기업가치 결정해
상품경쟁력의 세 요소는 기획력, 기술력, 디자인력
젊은이와 대화하고 인기 드라마 보며 감각 키워야
디자인 경쟁력은 결국 사람…‘디자인 천재’ 키우라
제품, 어느 회사 것인지 알아보게 만들어야
남의 것 베끼더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라
설계 괜찮아도 디자인 때문에 망칠 수 있어

삼성전자는 국제 디자인 공모전 ‘IDEA 2024’에서 금상 2개, 은상 1개, 동상 2개, 입상(파이널리스트) 40개 등 총 45개의 상을 받았다. 사진은 금상을 수상한 가전 소모품 선행 콘셉트 디자인. 삼성전자
지금으로부터 29년 전인 1996년 이건희 회장의 신년사다. 이른바 ‘디자인 혁명’ 선언이었다. 지금이야 제품의 디자인이 품질을 결정짓는 열쇠라는 것이 당연시되지만 당시만 해도 이 회장의 말은 낯설게 다가왔다.
“설계와 디자인이 기업의 핵”
이 회장의 디자인 선언은 그가 디자인을 철학의 한 요소로 삼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후 삼성 제품의 외형뿐 아니라 기업문화, 소비자 감성, 글로벌 정체성, 더 나아가 대한민국 산업 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돌아보면 이는 매우 중요한 선언이었다. 생전에 디자인에 대한 그의 어록을 중심으로 그의 디자인 철학을 탐구해 보자.“앞으로는 설계와 디자인이 기업의 핵이다.”(1993. 7. 12. 오사카)
“모든 제품의 디자인을 21세기에 어떻게 가져가야 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디자인 혁명’이다.” (1993. 6. 4. 도쿄)
“소니나 마쓰시타나 삼성이나 어느 시점에 가면 불량률은 똑같아질 것이다. 그다음에는 모양과 색깔, 결국 디자인 싸움이다. 업종별 제품별로 불량을 없애되 더 고급으로 만들고, 더 디자인화(化)하는 것, 더 개성화하는 것이 바로 질 경영이다. 따라서 질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수백 가지다.” (1993. 6. 13. 프랑크푸르트 회의)
“전자, 합섬, 모직, 제당 전부 디자인이 필요하다.” (1993. 7. 30. 도쿄)
“전자, 반도체, 통신부터 나라에 납품하는 교환기까지 전부 개념을 달리해서 디자인해야 한다.” (1996. 3. 6. 일본 출장 중 비행기 안)
이 회장은 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의 ‘디자인이 경영한다’ 편 서두에 자신이 왜 디자인에 꽂혔는지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몇 년 전 미국의 어느 경영학자가 쓴 글에서 ‘과거 기업들은 가격으로 경쟁했고 오늘날은 품질로 경쟁한다. 그러나 미래에는 디자인에 의해 기업의 성패가 좌우될 것이다’라는 내용을 읽고 공감한 적이 있다. 그 후 실제로 유럽 지역을 대상으로 제품 구매를 결정하는 요인을 조사했더니 디자인의 중요성은 미래가 아니라 이미 눈앞에 닥친 현실이었다. 당시 고객들이 물건을 사면서 디자인을 고려하는 정도가 전자제품은 48%, 자동차는 38%, 산업용 장비는 34%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소비자가 외국 제품을 구매하는 동기를 조사해도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디자인이 좋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디자인의 중요성은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이라는 일종의 경고다. 그는 숫자를 제시하며 이를 설명했다. 단순한 마케팅 트렌드에 대한 감(感)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다.
이어 이 회장은 “골프장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골프웨어를 만들고 있다”며 디자인을 기술에 덧붙이는 부차적 요소로 보는 관행을 강하게 비판했다. 디자이너를 단순한 ‘쟁이’로 보는 기업문화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앞으로는 고객들이 원하는 대로 하나하나 다른 제품을 만들고 제공하는 시대가 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상품을 보면 한결같이 디자인 마인드가 있는지 궁금할 정도다. 아직도 우리는 디자인을, 제품을 기술적으로 완성한 뒤 거기에 첨가하는 부차적 요소 정도로 여기고 있다.
골프를 쳐본 적도 없고 골프장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골프웨어, 골프용품을 디자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 보니 삼성은 물론 대부분 기업의 상품 디자인에서 통일된 이미지를 찾을 수 없다. 자동차의 벤츠, 전자의 소니 등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말이다.”
기업 철학이 들어간 디자인
그는 디자인을 단순한 부가 요소로 보지 않는 것을 넘어 “디자인이 빠진 제품은 존재할 수조차 없다”고까지 했다.“상품경쟁력의 요소는 기획력, 기술력, 디자인력의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과거에는 세 요소가 각각 더해지는 합(合)의 개념이었으나 이제는 각각 곱해지는 ‘승(乘)의 개념’이 됐다. 이전에는 세 요소 중 어느 한 가지가 약하더라도 다른 요소의 힘이 강하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곱셈식으로 표시되는 요소들에는 기획력과 기술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디자인이 약하면 다른 요소까지 그 힘을 발휘할 수 없고, 결국 경쟁이 불가능해진다.”
합(+)의 시대에는 어느 하나가 부족해도 다른 요소로 보완이 가능하다. 하지만 곱(×)의 시대에는 단 하나라도 0이면 전체가 0이 된다. 아무리 기술력과 기획력이 좋아도 디자인이 0이면 상품 가치가 0이 된다는 의미다. 디자인이라는 키워드를 기업의 생존 공식으로 말했다는 점에서 이전까지의 경영 철학의 근본을 뒤집는 사고의 전환이라 할 만하다.
“우리 제품이 해외시장에 나가 일본 제품과 상대하다 보면 꼭 ‘마무리(final touch)’가 부족해서 문제였다. 그런데 지금은 마무리뿐 아니라 외관도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 제품의 외관이 선진 제품보다 뒤지는 탓에 국내외 시장에서 고객에게 당하고 제값을 못 받고 있다. 한국의 문화가 배어 있고 자기 회사의 철학이 반영된 디자인 개념을 정립하는 작업을 그야말로 혁명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더욱 치열해지는 경제 전쟁에서 배겨낼 수가 없다.”
이 회장은 제품의 마무리 문제가 외관의 경쟁력 결여로 이어져 국내외 시장에서 제값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한탄했다. 디자인이라는 마지막 한 끗이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경고다. 디자인 문제가 가치의 손실로 이어져 가격 및 브랜드 신뢰도의 하락을 초래하고, 더 나아가 경제 전쟁에서 배겨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는 지적은 날카롭다. 디자인력을 단순한 미적 요소가 아닌 수익 구조를 결정짓는 핵심 요인으로 본 것이다.
이 회장이 말하는 디자인은 단순히 예쁘고 세련된 겉모습이 아닌 기업의 철학을 시각적 언어로 번역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기업이 어떤 철학을 품고 있으며, 고객의 삶을 어떻게 존중하고 이해하는지를 전달하는 언어 말이다. 실제로 오늘날 소비자들은 디자인을 통해 브랜드의 진정성, 감성, 세계관을 읽고 있다.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한 디자인이 나오려면 사용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감성을 읽고 그 시대의 미학을 읽으려는 노력이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예언대로 디자인은 이제 우리가 경쟁해야 할 가장 현실적인 ‘전선(戰線)’이 됐다. 그런 점에서 이 회장은 전쟁에 나서는 경영자들부터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경영자는 젊은이들과 자주 대화하고, TV 인기 드라마도 보면서 유행을 알고 디자인 감각을 키워야 한다. 10대들이 쓸 상품 디자인을 50대 경영자가 결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칫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결과를 가져온다.
아들, 딸과 대화가 되는가? 잘 안될 것이다. 요새 신세대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다. 아이들이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아들, 딸들하고 대화를 해보라. 미래세대의 소비자 성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기 드라마도 꼭 챙겨 보라. 요즘 유행하는 옷, 신발이 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993. 6. 16. 프랑크푸르트 회의)
“아들, 딸과 대화해 보라”는 말은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상적 감각부터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인기 드라마까지 챙겨 보라는 말은 시장 변화의 속도, 고객의 정서를 민감하게 느끼라는 의미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그 시절 삼성은 “인기 드라마를 챙겨 보라”는 말이 임원 회의에서 나올 수 있었던 시대였나 하는 생각도 든다.
“10대들이 쓸 상품 디자인을 50대 경영자가 결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선무당이 사람 잡을 수 있다”는 말도 재미있다. 단순한 세대차에 대한 지적이라기보다 디자인을 감각적·문화적 언어로 인식하지 못하는 ‘감각 없는 리더십’에 대한 경고이자 경영자부터 지적 유연성, 문화 감수성, 시대 흐름에 대한 감각을 가져야 한다는 주문이다. 제품을 잘 만들려면 기능과 기술뿐 아니라 문화 코드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디자인 감각 없는 리더는 위험하다
그가 말하는 디자인 감각은 단순히 ‘센스’가 아니었다. 시대와 세대, 감성과 시장을 연결하는 ‘공감력’이었다. 10대를 위한 디자인을 50대가 판단할 수 없는 이유는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그 세계를 살아보지 않은 데 있을 것이다. 이 회장은 저서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결국 ‘사람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1997년 6월 2일 미국의 경제 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삼성전자의 디자인을 주제로 표지를 만들었다. 삼성 50년사
기술, 유통, 생산이 평준화한 시대에 마지막 승부는 결국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머리싸움이다. 자동차, 전자제품도 ‘이런 모양으로 이렇게 만들어주시오’ 전부 주문형으로 갈 것이다. 한마디로 디자인화된다는 거다. 판매사라는 건 결국 디자인 회사다. 모든 상품이 다품종 소량, 개성화로 간다. 따라서 설계도 자꾸 바꾸고 디자인도 자꾸 바꾸어야 한다. ‘나는 만드는 사람이고 너는 디자인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이 전부까지는 아니어도 80%는 다 알아야 한다. 특히 과장급 이상은 판매, 제조, 디자인 개념을 모두 알아야 한다. 하루아침에 하라는 게 아니다. 노력해야 한다.” (1993. 6. 13. 프랑크푸르트 회의)
이 회장이 말하는 두뇌는 문제를 입체적으로 보고, 감성·기술·기획을 통합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창조적 두뇌다. 기술 하나만 아는 사람이 아니다. 기술을 고객 감각으로 번역할 줄 아는 사람, 그런 통섭형 인재가 미래를 만든다고 본 것이다.
“학교 성적 우수하고 수학 잘한다고 해서 잘하는 게 아니다. 앞으로는 디자인하는 사람이 제일 중요해지고 개성화로 간다. 생산 공장은 자동화돼 로봇이 만들 것이다. 개성의 상품화, 디자인화 등 인간공학을 개발해 어떻게든 고부가가치 제품을 다품종 소량 생산해야 한다. 그래야 영원해진다.” (1993. 6. 13. 프랑크푸르트 회의)
“공부 잘하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시대는 끝났다. 디자인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해지는 시대가 온다”는 말은 당시로서는 역발상이었다. 단순히 미적 감각의 중요성에 대한 통찰을 넘어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시대가 되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창조’이며 ‘개성의 구현’이라는 것이다. 표준화된 시스템 아래 로봇은 정형화된 제품을 대량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개개인의 삶을 이해하고, 감성을 담아내고, 그에 맞는 제품을 디자인하는 일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개성을 상품화하고 디자인화해 어떻게든지 다품종의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포스트 산업화 시대의 생존 공식이라는 것을 그는 30년 전에 내다봤다.
사람에 대한 중요성을 지적하는 그의 말은 조직 내부에 대한 비판을 넘어 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사장, 부사장, 전무들이 기술과 설계에 대한 실력이 부족하고 설계와 디자인이 중요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이다. 지금 우리 회사가 그렇고 대한민국이 다 그렇다. 교육부는 기술자의 설계력을 어떻게 키워야 하고, 디자인력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걱정조차 하지 않는다.” (1993. 7. 28. 후쿠오카 회의)
새로 쓰는 제조업
그는 우수 인재를 조기에 선발하고 집중 육성해야 한다는 ‘인재 선점론’을 설파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삼성디자인학교’(SADI·사디)였다. 그러면서 디자인 교육을 미래세대에 대한 가장 현실적 투자로 보았다.“R&D와 설계, 디자인의 경쟁력은 결국 사람이다. 국민(초등)학생 때부터 키워야 한다. 지금부터 각 대학 디자인 관련학과에도 신경을 써서 디자인 천재들을 키우자. 머리 좋은 학생들, 발상 좋은 학생들이 공업, 산업 디자인 쪽으로 자꾸 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1993. 7. 28. 후쿠오카 회의)
“산업디자인이 매우 중요한 시대가 올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일류 디자인 학교에 사람을 보내 교육하자. 교재, 강사, 컴퓨터까지 그 나라 것 그대로 쓰고 영어를 미리 공부시킨 다음 보내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1994. 6. 2. 본관 집무실)
디자인 혁명을 선언하기 훨씬 전인 1989년부터 “미국과 유럽 현지에 아예 디자인 센터를 만들라”고도 했다.
“1986년 미국 방문을 했을 때 미국 수출용 제품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 센터를 미국에 만들라고 지시한 적이 있는데 유럽 현지법인도 검토해야 할 것이다.”(1989. 10. 15. 도쿄)
“디자인 국제센터를 만들어 NEC와 소니에서 일하는 우수한 사람들이 오기만 한다면 다 받아주겠다.”(1996. 3. 6. 일본 출장)
“우선 처음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인 전문회사에 용역을 주고 2단계로 미국에 우리 연구소를 만들어 우리의 독자적인 힘으로 디자인력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1996. 3. 6. 일본 출장)
이건희 회장은 디자인 개념을 넣으면 생산이나 공장의 개념도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생산이 뭐냐’고 물어보면 부품과 원료를 사서 컨베이어벨트에 올려 라인을 돌리는 것만 생각한다. 하지만 디자인도 생산이다. 더 나아가 설계, 경리, 협력업체 관리도 모두 생산에 포함된다.
물건이 공장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나? 아니다. ‘좋은 물건을 싸게, 빨리’ 만들려면 공장이 좌우하는 비중이 흔히 90%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작정 공장 건설에 돈을 쓰고 공장장만 들볶는다. 하지만 공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30~40%다. 열쇠는 설계와 디자인이다. 설계, 디자인, R&D가 70%다. 설계실장이 그래서 중요하다. 미래에는 생산 공장 개념이 없어질 것이다. R&D, 디자인력, 판매(마케팅) 능력이 좌우할 것이다.”(1993. 6. 13. 프랑크푸르트 회의)
“설계가 중요한 이유는 디자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구찌, 크리스챤 디올, 포르셰 전부 다 디자인이 좌우한다.”(1993. 6. 24. 프랑크푸르트 회의)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생산’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낡았다고 봤다. 기존 산업사회의 핵심 개념이던 ‘공장’은 향후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40%로 낮아지고 나머지 60~70%를 설계와 디자인, R&D가 좌우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단순히 부품과 원료를 조립해 내는 공정만을 생산이라 여기는 인식을 정면으로 반박한 말이다. 다시 말해 제조의 본질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물리적 조립이 아닌 지적(知的) 설계라는 의미다. 이 말은 제조업의 중심축을 ‘공정 중심’에서 ‘지식 중심’으로 옮겨야 한다는 통찰이었다.
그의 상상력에 따르면 공장은 도구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철학을 설계하느냐” “제품에 어떤 감각을 담아내느냐” “어떻게 고객에게 도달하느냐”다. 제조란 단순히 공장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머리에서 시작해 시장에서 완성되는, 창조와 설계의 흐름인 것이다. “디자인도 생산이다”라는 말은 제조업의 개념을 바꾼 말이었다.
디자인 아이덴티티,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정신
“왜 사람들이 소니는 멀리서 봐도 ‘소니 것이구나’ 알아보는가. 파나소닉도 마찬가지다. 자동차도 도요타, 닛산, 벤츠, BMW는 멀리서도 알아본다. 이런 게 아이덴티티다. 그런데 우리 제품은 이름을 보고서야 겨우 안다. 사업부별로 디자인을 제멋대로 해버리니까 소니 것을 카피한 건지 도시바 것을 카피한 건지 국적도 알 수 없다.”(1993. 6. 4. 도쿄)
1991년 도쿄에 설립된 삼성 디자인 연구소. 동아DB
“금성사(현 LG) 제품 아이덴티티가 우리 것보다 낫다. 몇 번씩 이야기해도 개선이 안 되는 건 왜인가. 상품 기획력 자체가 아예 없어서인가. 아니면 디자인 부서가 센터화되지 않아 그런 건가. 그것도 아니면 디자이너들을 단순히 ‘쟁이’로 취급해서 그런 것인가.”(1993. 6. 4. 도쿄)
앞에서 필자는 디자인을 ‘시각적 언어’라고 했다. 이건희 회장은 그것을 “멀리서도 알아보게 하라”는 단 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그가 말한 아이덴티티란 무엇인가? 그것은 겉이 아닌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정신이다.
그는 삼성의 제품들이 누군가의 모방품처럼 느껴지는 원인에 대해 사업부별로 제멋대로인 디자인, 디자인 부서의 비센터화(조직적 통합 부족), 디자이너를 ‘쟁이’로 취급하는 문화,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한탄했다.
“삼성그룹의 제조업 가운데 전자가 특히 심한데 모두가 자기들 마음대로 갈라져서 만든다. 광고, 판매, 디자인, 설계, 금형, 캐드(CAD) 담당자들이 모여 어떤 물건을 어떤 크기로 만들 것인지, 경쟁자는 누구인지, 수요층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분석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나온 95% 이상이 데드 카피(dead copy·모조품)다. 5%만 자기 것이다.”
“처음부터 창작이라고는 해보질 않은 사람들이다. 내가 ‘마쓰시타의 비디오테이프리코더(VTR)가 좋다’ 한마디하면 그걸 바로 카피한다. 시장에서 ‘소니 잘 팔린다더라, 금성사에서 이거 히트했다더라, 대우 세탁기가 최고라더라’라고 하면 그냥 똑같이 만들 생각만 한다. 베낄 실력도 없으니, 카피도 90%만 하고 나머지는 그냥 넘어간다. 그 안에서 모든 사고가 다 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니 제품 기종만 수백 가지가 넘는다. 삼성전자에서 나온 것이든, 삼성전기에서 나온 것이든 다 제각각이다. 남의 것만 카피하니까 그렇다.”(1993. 6. 20. 프랑크푸르트 회의)
당시 삼성의 제품 개발 구조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이다. 디자인과 설계, 상품 기획이 창의적인 것이 아닌 모조품을 만들어내는 구조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품 기종만 수백 가지가 넘는다”거나 “삼성전자든 삼성전기든 제각각인 것은 마찬가지”라는 말은 문제의 본질이 창작력의 결핍이며, 더 깊게는 창작을 가능하게 하는 조직과 문화의 부재라는 지적이다. 직원들을 향해 “처음부터 창작이라는 걸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도 단순하게 디자인적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아니라 경영시스템 전반이 ‘카피 중심 체질’로 굳어져 있음을 직시한 자기 고백이었다.
“데드 카피를 하더라도 제품이 가진 설계의 기본 정신, 철학을 가져와야지 껍데기만 베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모토로라를 이겨보겠다고 할 때 그런 결심은 아주 좋다. 하지만 모토로라를 이기려면 그 회사 강점인 디자인력과 설계력을 완전히 분석한 상태에서 우리의 설계력, 디자인력, 금형, 마케팅력을 비교 분석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 5개년, 10개년 계획을 시뮬레이션해 놓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1993. 6. 24. 프랑크푸르트 회의)

2009년 11월 한국에 출시된 ‘조르지오 아르마니폰’. 삼성 50년사
창조라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토로라의 예처럼 분석해야 한다. 분석 없는 경쟁은 맨주먹을 갖고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감정이 아닌 전략으로, 자존심이 아닌 시스템으로 경쟁하라는 주문이다. 그의 질타는 이어진다.
“수십 년간 남의 것을 훔쳐서 만들고 있으니, 창조가 어디 있겠는가. 멀쩡하게 명문대 전자과 나온 사람들이 데드 카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1993. 6. 24. 프랑크푸르트 회의)
단순히 디자인을 베낀다는 수준을 넘어 아이덴티티를 담은 상품기획 자체가 없는 구조적 문제, 기획을 철학이 아니라 단순히 ‘반응’으로 대하는 후진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명문대 전자과 나온 사람들이 하는 일이 카피나 하고 있다”는 한탄도 앞에서 언급한 “학교 성적과 창의력이 무관하다”는 말처럼 학력이나 학문적 우수성이 창조적 기획력과는 무관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시장 평판, 소비자 신뢰는 조작할 수 없다
“기업이라는 건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바뀌지 않고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물건이 일주일, 한 달 후에 나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2주 후에 팔리고 3주 후에 수금돼야 하는데 불량이 나고 디자인이 나쁘면 석 달 후 반품돼 돌아온다. 그런데도 실무자가 덮어버리고 ‘팔렸습니다’라고 장부에 써버린다. 이런 풍조가 지금 우리 안에 만연해 있다.”조직 내부에 만연한 자기기만과 보고주의 등 병든 문화에 대한 고발이다. 진짜 문제는 불량을 만드느냐 안 만드느냐가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덮어두고, 형식적으로 처리해 버리는 관행이다. 불량 제품이 반품돼 돌아와도 “팔렸습니다”라고 장부에 써버리는 풍조, 이것이 바로 그가 지적한 ‘내부 리스크’였다.
“팔렸습니다”라는 한 줄의 착각이 기업을 무너뜨리고, 반품은 단순한 상품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문화의 결과라는 것, 경영은 숫자가 아니라 정신과 태도의 문제임을 일깨워 주는 말이다. 장부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고 수치도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 시장에서 평판과 소비자의 신뢰는 조작할 수 없다. 석 달 후에 반품돼 돌아오는 제품이 삼성 전체의 브랜드를 흔들 수 있다는 위기의식, 이건희 회장은 이걸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 회장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디자인 정신을 제품에 구현하려 했는지로 넘어가 보자.
“불필요하게 장소만 넓게 차지하게 디자인된 가전제품들은 키를 높이는 스타일로 바꿔보자.”(1992. 8. 1. 스페인)
“냉장고의 경우 수납공간이 넓고 폭을 최대한 좁게 해 공간을 많이 잡아먹지 않게 만드는 게 경쟁력이지, 딴 게 경쟁력이 아니다.”(1993. 6. 4. 도쿄)
“대형 냉장고는 문을 열 때 손가락이 3분의 1 정도밖에 들어가지 않아 힘이 든다. 냉장고 근방에 왔을 때 자동으로 문이 열리고 닫히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대가족용, 독신자용, 의사용 등 용도에 따라 제2, 제3의 냉장고도 필요하다. 일본에서 잘하는 업체와 제휴해서 소리 안 나는 냉장고용 팬 모터도 연구해 봐야 한다.”(1994. 1. 3. 신년 하례식)
전자제품의 폭이 아니라 키를 높여 공간을 덜 차지하게 만들라는 주문은 ‘기술’이 아니라 ‘생활’을 설계하라는 주문으로 들린다. ‘낭비 없는 공간’이라는 미학, 설치 환경과 문화를 고려한 실용성 중심의 디자인에 대한 강조는 기능 중심의 공학적 발상에서 벗어나 “사용자 관점에서 공간과 경험을 디자인하라”는 철학이 담겨 있는 말이다.
사용자 처지에서 생각하는 것
이건희 회장이 말하는 ‘디자인력’은 결국 사용자가 겪을 수 있는 불편을 해소하는 능력이었다. “냉장고 근방에 가면 자동으로 문이 열리고 닫히는 기술은 안 될까” “대가족용, 독신자용, 의사용으로 제2, 제3의 냉장고를 만드는 건 어떨까”라는 제안은 그런 바탕에서 나온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아이디어도 냈다.“TV 위에 서랍을 만들어서 약, 파스, 면봉, 손톱깎이 등 맨날 없어서 찾는 것들을 몽땅 집어넣으면 어떨까. TV 디자인하는 사람들이 이런 생각도 해야 한다는 말이다. TV도 폭은 줄이고 키는 높이는 것을 생각해 보자.”(1993. 7. 17. 오사카 회의)

2006년 출시된 보르도TV. 거꾸로 든 와인 잔을 형상화해 화제가 됐다. 동아DB
TV는 거실 한가운데 놓이는 대표적 가전제품이다. 가장 자주 마주하는 물건이지만 사용까지는 생각하지 않는 대상이다. 그런데 TV 위에 서랍을 올려놓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맨날 없다고 찾는 사소한 것들’을 자연스럽게 담아낼 수 있는 수납의 발상, 이것이야말로 그가 말하는 생활 밀착형 디자인이었다.
그가 남긴 말들을 새겨보면 디자인 혁신이란 것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 ‘사용자 처지에서 생각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상상력은 바로 내가 발 딛고 있는 생활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시작한다는 생각도 함께 든다. 이는 호텔에도 R&D가 필요하다는 말에서도 확인된다.
“호텔도 반도체처럼 연구개발실이 있어야 한다. (거기서) 화장실 변기, 세면대를 어떻게 디자인해야 할지 연구하자. 접시도 종류별로 100가지, 1000가지가 있으니, 그것을 다 갖다놓고 계절마다 바꿔야 한다. 또 미국·일본·영국 사람마다 특색에 맞춰 내줘야 한다.” (1993. 7. 21. 후쿠오카 회의)
R&D는 보통 기술 산업의 전유물로 여겨지지 않는가. 하지만 그는 반도체와 호텔, 공장과 세면대, 스마트폰과 식기 사이에 아무런 위계를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사물을 보는 경계를 허물었다.
“왜 반도체만 연구하고, 호텔은 연구하지 않는가”라는 그의 질문을 곱씹어 보면 디자인 경영을 통해 기억, 감각, 문화까지 설계하려 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국적별로 손님에게 내줄 접시를 차별화하라는 말은 호텔 R&D란 것이 단순한 편의성 개선 차원이 아니라 문화권별로, 계절별로, 상황별로 감성을 분석하고 대응하는 것을 내포한다.
접시에 대한 언급처럼 그에게는 모든 사물이 연구 대상이었고 고객 경험을 혁신할 수 있는 기술과 감성의 결합체였다. 그뿐만 아니라 병, 상자, 패키지 같은 용기조차 결코 가볍게 보지 않았다.
“각종 용기의 디자인도 프랑스, 미국, 독일의 특급 메이커 전 제품을 모두 모아보고 결정하자. 자료조사에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없을 것 같으면 미국, 일본, 영국에 용역을 주자.” (1994. 1. 8. 한남동)
“선진국 특급 브랜드의 전 제품을 수집해 비교해 보라”는 주문은 국내의 시선에서 머무르는 디자인은 결국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자료 조사에 돈을 아끼지 말라”는 말은 “디자인은 창의력으로만 되는 일이 아니므로 세계 최고들과의 비교 속에서 자기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우리가 할 수 없다면 용역을 주자”는 것은 “자존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과가 중요하다”는 실용주의적 철학을 반영한 말이다. 이건희 회장은 “세계 최고”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지만, 감탄이나 경외만 하지 않았다. 수집하고, 분석하고, 뛰어넘기 위한 실천의 기준으로 사용했다.
“생활 속에서 불편함을 없애는 것이 디자인”이라는 철학을 상징하는 대표적 제품으로 자동차가 있다. 전통적인 자동차산업은 엔진의 힘과 기술력으로 평가받았지만, 그가 주목한 것은 전혀 다른 요소, 즉 인체공학, 무게중심, 가벼운 소재, 넓은 실내 공간, 감성적 외관 등이었다.
“자동차 구매자들을 잘 분석해 보라. 성능을 보는 사람은 적다. 대부분 외관을 본다. 자동차 디자인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좁은 공간을 넓게 활용하는 것이다. 도요타는 자가운전용 자동차라도 뒷좌석이 닛산보다 넓다. 그래서 ‘설계 디자인력’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경영진은 아직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1995. 6. 7. 호텔신라)
이 회장은 자동차를 단순히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공간, 소통하는 감성 매체, 브랜드의 총체적 표현으로 바라봤다. 그는 탄소 배출 문제로 인해 친환경 자동차까지 고민하고 있었다.
“앞으로 자동차는 디자인과 마케팅에서 결정이 날 것이다. 차라는 것이 앞으로 가고 뒤로 가고 하는 시대는 끝났다. 얼마나 안락하고 쾌적하고 안전하고 모양이 좋은가, 또 그 자동차를 사용함으로써 자연에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공해를 배출해서는 안 된다는 것까지 신경 써야 한다.” (1993. 7. 16. 오사카 회의)
이건희 회장은 또 가전제품의 주 구매자이자 사용자층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도 주목했다.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수요자는 주로 여성이다. 따라서 결혼 적령기 여성, 주부층에 관해 연구해야 하며 디자인, 상품 콘셉트를 정할 때 여성을 참여시켜야 한다.” (1994. 4. 18. 일본 출장)
이는 제품개발에서 단순히 여성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수준이 아니라 상품기획의 시작부터 여성의 시각이 반영돼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말하는 ‘고객 참여형 디자인(Participatory Design)’을 연상시킨다.
혁신은 사용자의 손끝에서 시작된다
이건희 회장은 체험을 경영의 핵심 도구로 제시하기도 했다. 설계자, 디자이너, 관리자 모두가 제품의 사용자여야 한다는 철학이었다. 만드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분리되면 제품은 그저 책상 위의 완성물이 된다는 거였다.“배를 만드는 사람은 늘 배를 타보면서 ‘속도를 빨리해야겠다, 소리가 많이 들린다, 진동이 적어야 하겠다’고 말해야 한다. 전자제품도 만들고 설계하고 디자인을 한 사람들이 직접 다 써보면서 무엇 때문에 제대로 안 나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설계는 괜찮았는데 디자인 때문에 망쳤다’라는 말도 해야 한다.”(1993. 6. 30. 런던 회의)
“포르셰 회사도 중역 이상급들에는 차를 30% 할인해서 판다. 1년 이상 의무적으로 타되 1년 내 1만km 이상 타면 남에게 팔 수도 있다. 포르셰 가격은 1년에 10%밖에 떨어지지 않으니까, 중역들은 다 포르셰를 타게 된다. 그러면서 ‘소리가 난다’ ‘바퀴가 미끄러진다’ 등 뭐가 어떻다 하는 아이디어가 자꾸 나오게 되는 것이다.”(1993. 6. 8. 프랑크푸르트 회의)
“‘설계는 괜찮았는데 디자인 때문에 망쳤다’라는 말도 해야 된다”는 것이 바로 일종의 책임 기반 체험주의다. 이 말 속에는 “내가 쓰지 않을 제품을 왜 남에게 파는가”, 결국 혁신이란 경영자의 책상이 아닌 사용자의 손끝에서 시작된다는 근본 철학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