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호

차가운 반도체·따뜻한 안내견, 두 세계를 관통한 경영 본질은?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 냉혹한 경쟁, 따스한 돌봄 사업 동시에 설계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6-02-03 1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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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육사들을 가족처럼 챙겨주셨다”

    • 효율적 시스템 중요하지만…관건은 ‘사람’

    • 개를 분양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다

    • 견사에 TV·냉장고? “강아지 입장에서 생각하라”

    • ‘산업 무기’로 변화 가능한 생물 자원, 우습게 보지 마라

    집무실에서 강아지를 안고 있는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 동아DB

    집무실에서 강아지를 안고 있는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 회장. 동아DB

    필자는 삼성의 안내견 사업을 취재하면서 생전에 이건희 회장과 스스럼없이 지낸 퇴임 사육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의 말이다. 

    “용인에 본격적으로 견사(犬舍)가 만들어지기 전엔 원래 한남동 댁 옆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먹고 자며 강아지들을 돌보던 사육사들이 계셨어요. 이분들이 회장님을 직접 경험하며 한 이야기가 지금도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죠. 

    회장님은 처음에는 저희들을 조금 낯설어하시고 어려워하시기까지 하는 듯했지만 차츰 스스럼없이 대해주셨습니다. 견사에 들르실 때에도 그냥 댁에서 입고 계시던 편한 옷차림으로 오시곤 했습니다. 우리나라 최고 대기업 회장님이 그렇게 편안한 차림으로 불쑥 견사까지 오신다는 것 자체가 사실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었죠. 

    키워본 분들은 알겠지만 자신들이 키우는 강아지를 주제로 하는 대화라는 게 무궁무진하잖아요. 대·소변 훈련은 어떻게 하는지, 강아지가 사료는 잘 먹는지, 낯선 강아지나 사람을 만날 때 짖지는 않는지, 성격은 어떤지 같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친밀감을 느끼게 되지요. 회장님이나 저희들도 누구보다 강아지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강아지를 소재로 한 대화는 늘 끊이지 않았고, 그러면서 느끼는 친밀감이 컸습니다. 

    한번은 사육사 한 분이 강아지를 목욕시키고 드라이어로 말리는 중이었는데 잘 마르지 않아 애를 먹고 있었어요. 회장님은 강아지를 직접 씻기기도 하시는지 그걸 보시더니 ‘아마 샴푸를 제대로 씻어내지 않아서 그럴 거야. 제대로 씻기고 다시 해봐요’ 하셨어요.”



    “사육사들을 가족처럼 챙겨주셨다”

    이건희 회장은 사육사들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고 했다. 

    “너무 소탈하시고 따뜻하셔서 저희가 감동할 때가 많았습니다. 당신도 어릴 적 집을 떠나 외롭게 살았다면서 평일에 견사에서 먹고 자는 저희들이 잘 지내는지 이것저것 챙겨주셨어요. 어떤 날은 냉장고까지 열어보시면서 먹을거리, 반찬거리들을 챙겨 보내신 적도 있습니다.

    회장님이 이렇게 대해주시니 저희도 편하게 다가가게 됐습니다. 나중에 견사가 용인으로 모두 옮겨졌을 때 여기서 일하던 여성 사육사들은 회장님을 만나면 너무 반가워하면서 스스럼없이 팔짱을 끼기까지 했으니까요. 삼성의 그 많은 직원 중에 회장님을 그렇게 편하게 대하는 직원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회장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면 오히려 ‘나를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당신들이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이건희 회장은 사육사들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생전 그의 육성이다. 

    용인의 견사나 에버랜드 동물원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모두 동물을 사랑하고 또 동물과 함께 생활하면서 얻는 보람과 즐거움으로 일하고 있다. 그중에도 특히 안내견학교에는 개와 함께하는 삶을 특별한 소명으로 여기며 혼신을 다하는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있다. 

    동물을 좋아하는 탓인지 나는 견사에서 일하는 직원들뿐만 아니라 에버랜드 동물원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다른 누구보다 가깝게 느껴진다. 그들의 동물에 대한 순수한 사랑에 감동할 때도 많다. 견사나 동물원에는 자원자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들 중에는 내로라하는 일류 대학 출신들도 있다. 그들은 돈이나 명예를 바라지 않는다. 그런 것을 중시했다면 개나 동물을 돌보는 일에 자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동물에 대한 사랑 하나만으로 더러운 동물의 배설물을 거리낌없이 치우고, 자기가 돌보던 동물이 아프기라도 하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밤을 새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가슴앓이를 되게 겪는다고 한다. 사육사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알다가도 그럴 때는 괜히 사육사가 됐나 보다 하고 후회스럽기까지 하단다. 정말 그 강아지를 자기보다 더 사랑해 줄 주인을 찾아줄 때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는 것이다.  일을 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행운이다. 순수하게 개를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개 사업에서는 최고의 인재가 갖춰야 할 조건인 것이다. 그들에게 보내는 갈채는 아무리 많아도 모자람이 없다.

    견사의 직원들은 오직 개에 대한 사랑 하나로 힘든 생활을 감내하고 있다. 결혼한 직원들 중에는 용인 시내에서 가족과 살면서 출퇴근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직원들은 견사 내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개와 늘 가까이 하고 있다. 

    개 키우는 일을 그렇게까지 생각하다니 참 대단하구나 감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개 기르는 것을 일류로 해봐야 무슨 소용이냐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미래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삶의 질이다. 삶의 질은 곧 문화와 직결된다. 미래까지 갈 것도 없이 이미 문화는 거대한 산업이 되고 있다. 머지않아 개 한 마리가 공장 하나와 맞먹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쯤이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개에 대한 사랑 하나로 묵묵히 감내해 온 우리 사육사들의 아름다움을 모두 다 알아주지 않을까?

    효율적 시스템 중요하지만…관건은 ‘사람’ 

    경기 용인에 있는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내부.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홈페이지

    경기 용인에 있는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내부.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홈페이지

    이 대목에서 드는 의문은 이 회장은 어떻게 반도체 사업과 안내견 사업이라는 완전히 결이 다른 사업을 싱공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한국 사회 전체에 ‘기술 기업이란 무엇인가’ ‘성과 중심의 업무란 어떤 것인지’를 내면화하며 직원들의 의식과 일의 문법을 바꿔놓았다. 그런 점에서 일종의 문화산업적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산업의 속성을 굳이 온도로 표현한다면, 반도체 사업은 차가운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기술격차가 생존을 결정하고, 속도와 수율, 원가 경쟁에서 한순간의 망설임도 허용되지 않는 극한의 경쟁 산업이다. 

    반면 안내견 사업은 효율이나 수익성 논리가 통하는 세계가 아니다. 생명을 다루고 길러내고 훈련하는 일이며 시각장애인이라는 인간의 삶과 연결하는 일이기 때문에 존중과 사랑이 없으면 안되는 따뜻한 세계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해야 하는 사업이다. 실제로 이 회장은 생전에 ‘안내견 사업’ 업의 본질에 대해 말하면서 전자산업과 안내견 사업을 이렇게 비교한 적이 있다. 우선 전자산업에 대한 언급이다.

    오늘날 우리 생활을 윤택하게 한 물질 문명의 발달은 소수 천재들에게 빚진 바 크다. 그런 맥락에서 하나의 기업을 세계적 기업으로 키우려면 우수한 인적 자원이 상당히 중요하다. 선친 때부터 삼성은 인재 제일주의를 표방해 왔다. 

    사업을 하자면 설비, 자금 등등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이 있지만, 그래도 사람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것이 선친의 가르침이었다. 선친은 돈이 많은 회사보다 뛰어난 사람을 갖고 있는 기업을 높이 평가하셨다. 그런 선친 덕분에 삼성이라는 조직체를 채우고 있는 수많은 임직원 하나하나가 어디에 내세워도 빠지지 않을 우수한 인력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사람을 갖고 있어도, 그들의 잠재능력을 개발하고 활용할 수 있는 제반 여건이 조성되지 않는다면 생산성을 올릴 수 없다. 삼성전자는 몇 년 전까지 여러 회사의 서로 다른 기종의 컴퓨터들이 뒤섞여 있는 일종의 컴퓨터 만물상이었다. 회사가 달라 운영체계가 다르고, 같은 회사 제품이라 해도 앞 세대와 뒷 세대의 기종이 혼재하니 효율적인 네트워크 구성이 되지 않았다. 

    사람들의 생각만 뛰어나면 그깟 컴퓨터 활용 체계쯤이야 큰 문제일까 하겠지만, 한두 사람이 모인 것도 아니고 무수한 사람이 모여 일하는 곳에서는 상호 연결 시스템이 예상외로 큰 힘을 발휘한다. 각 부서 간에 단순한 연락이 잘 이뤄지지 않아 큰 손실을 볼 때도 있는 것이다. 

    세계의 전자산업을 주도해야 할 삼성전자의 전자 시스템이 이렇게 비효율적이었던 것은, 물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발전해 가는 컴퓨터 업계 자체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처음부터 일관된 체계를 세우지 못한 탓이었다. 

    10년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당장 필요한 것만 대충 채워가다 보니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고치느라 엄청난 비용을 쏟아부어야 했다. 이런 효율적 시스템 구축은 인재들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게 하는 일종의 하드웨어인 셈이다.

    이어 안내견 사업도 사업이니만큼 시스템과 공간을 통합하는 ‘효율’이 중요하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애견 사업을 시작하면서 용인에 견사를 짓기로 한 것은, 물론 용인이 맞춤한 부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에버랜드 내의 동물원 때문이었다. 개를 키우기 위해서는 동물원의 도움이 여러 가지로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수의사만 하더라도 별도의 수의사를 쓰는 것보다는, 다년간 에버랜드의 동물을 돌보면서 숙달된 수의사의 도움을 받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그런데 개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생각해 봤더니, 삼성의 다른 관계사도 개와 관련된 부분이 있었다. 요즘에야 경비 회사들이 첨단 장치를 이용하지만,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각 사업장 경비는 경비견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삼성의 각 사업장에 경비견을 공급하는 일을, 당시에는 현재의 에스원인 한국안전시스템이 담당하고 있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것은 인력 낭비였다. 그래서 애완 견사 옆에 경비 견사를 짓고 업무를 하나로 통합시켰다. 얼마 후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맹인 안내견도 키우기 시작했는데, 이 업무는 삼성화재에서 담당하고 있지만 견사는 용인에 함께 있다.

    그런데 안내견 사업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효율을 넘어선 더 큰 것이 있었다. 다시 그의 말이다.

    결국 문제는 사람이었다. 개 사육의 특수성 때문에 사람을 고르는 일은 더욱 힘들었다. 개를 키우는 데는 특히 사람이 관건이었다. 내가 개를 키워봐서 알지만, 특히 영리하고 혈통이 좋은 개들은 다루는 사람이 무성의하거나 부정직하면 개 자체를 망쳐버릴 수도 있다. 사실 개를 키우는 데 대단한 학력이나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건 아니다. 

    개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이 아무리 풍부해도 개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키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경험의 유무를 떠나 삼성 내 직원이나 외부에서 자원하는 사람들을 우선 선발토록 하였다. 개에 관한 지식이나 학력 대신 그들의 순수한 마음,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선택의 우선 기준이었다. 역시 그들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개를 분양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다

    삼성의 시각장애인 안내견들은 처음에는 사내 게시판을 통해 삼성 직원들에게만 분양됐다. 원한다고 해서 다 받았던 것은 아니고 강아지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인지 몇 가지 까다로운 절차를 거쳤다. 일단 용인 견사를 방문하는 게 필수였다. 개들을 직접 보고 품종이나 크기, 암수를 결정하라는 배려지만, 사실 여기에는 더 중요한 뜻이 숨어 있었다고 한다. 사육사들의 말이다. 

    “처음에는 나도 한번 키워볼까 하는 호기심으로 그냥 신청해 본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용인에 와서 강아지들을 직접 봐야 한다고 하면 대개 포기하고 말아요. 강아지 한 마리 얻겠다고 바쁜 시간을 쪼개 용인까지 가는 게 귀찮고 부담스러운 거죠. 하지만 견사까지 오는 사람이라면 ‘길러보겠다’는 마음이 강한 거죠. 그 정도 정성은 있어야 견사에서 어렵게 기른 개를 맡겨도 안심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회장님 생각이었죠.

    안내견에서 은퇴하고 일반 가정에 분양돼 반려견으로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은퇴견이 입양 가족들과 환하게 웃고 있다. 동아DB

    안내견에서 은퇴하고 일반 가정에 분양돼 반려견으로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은퇴견이 입양 가족들과 환하게 웃고 있다. 동아DB

    분양 대상자가 결정되면 사육과 관련된 책, 비디오테이프, 도구 일습(一襲)을 다 보내줬습니다. 회장님은 ‘우리는 강아지를 나눠주는 게 아니라 강아지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나눠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개를 잘 키울 수 있는지 그 방법까지도 일러주는 게 당연하다’고 하셨지요. 사실 개를 사랑하지만 그 방법을 모르면, 개도 사람도 고생이고 가까워지는데 시간도 더 걸릴 것 아니겠어요.

    안내견을 분양하고 난 뒤에도 사후관리를 꼼꼼하게 하는 프로그램은 그렇게 만들어진 겁니다. 분양 2주가 지나면 담당 직원이 분양 가정을 직접 방문해 훈련법을 제대로 적용하고 있는지, 다른 문제는 없는지, 계속해서 기를 마음이 있는지를 최종적으로 확인합니다. 그것으로 분양이 마무리되지요. 그 후로도 모니터를 계속합니다. 저희 직원들이 1년에 네 번 정도 분양 가족과 연락을 취해서 문제는 없는지, 문제가 있다면 해결해 줍니다. 그분들이 먼저 도움을 요청할 경우에는 언제든 어떤 문제든 최선을 다해 돕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싱글 직원이 분양을 받았는데 결혼해서 개를 키울 수 없는 형편이 되면, 언제든지 반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기도 했습니다. 일을 만든 쪽이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지요.”

    삼성 직원 중에는 안내견을 분양받으면서 인생 궤도까지 바꾼 경우도 있다고 한다. 

    “삼성물산에서 일하던 직원이었는데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엘리트 사원이었습니다. 어느 날 ‘맹인(그때는 시각장애인을 이렇게 표현했다) 안내견 조련사를 모집한다’는 사내 전자게시판을 보고 지원했습니다. 

    알고 보니 사연이 있었습니다. 대학 4학년 때 군 입대를 위해 신체검사를 받다가 각막에 심각한 질환이 있어서 인조 각막 이식수술을 받았는데 군복무는 면제됐지만 시력을 영영 잃어버릴까 불안과 두려움에 심적 고통이 너무 커서 퇴원 후에도 악몽에 시달렸다는 겁니다. 그러는 한켠으로 병원에서 시각장애인을 많이 만나볼 기획도 있었다고 해요. 

    어떻든 무사히 퇴원하고 시력도 정상으로 회복해 대기업에 입사까지 하게 된 거죠. 그러다 사내 게시판에서 ‘맹인 안내견 조련사’라는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장애인이 될 뻔했던 기억이 떠올라 많은 생각 끝에 신청하고 나중에 조련사로 인생의 궤도를 바꿉니다.   

    또 다른 경우도 있어요. 미국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직원이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샌터클래라 삼성물산에 근무하고 있어요. 자신의 멘토나 다름없던 상사로부터 어느 날 “삼성이 전액 학비를 지원해 준다는데 뉴질랜드에 가서 맹인 안내견 지도사 국제 공인 자격증을 따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인생 행로를 바꿨습니다.

    사실 직원 아버지는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지뢰를 밟아서 시각장애인이 됐는데 한국에서는 장애인으로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아예 이민을 갔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됐고요. 그 직원은 19년간 쌓은 커리어를 다 버리고 ‘안내견 조련사’ 자격증을 따서 가슴 아픈 기억만 남아 있던 한국으로 되돌아와 열심히 일했습니다.”  

    생전에 이건희 회장은 이런 사람들을 ‘고속도로가 아닌 오솔길을 택한 사람들’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성공이나 돈을 따지는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안내견학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보통 직장인들이 받는 스트레스 같은 것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그들의 일이 편한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산속에서 개와 더불어 사는 일이 편하기만 하겠는가. 다만 동물을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성공을 위해 남과 경쟁하면서 살 때의 숨막히는 스트레스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꼭대기에 오르는 숨 막히는 경쟁을 버린 대신 개와 마음의 친구가 되고, 그를 통해 시각장애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조촐하고 아름다운 삶을 선택했다. 

    그들은 남들 모두 승용차를 타고 앞다퉈 달려가는 고속도로를 버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그 길은 너무 좁고 나무에 가려 있어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일단 그 길로 접어들면 새가 울고 꽃이 피고,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구나 감탄하게 된다. 

    나도 고속도로를 달리는 사람이지만,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고속도로 때문이 아니고 이렇게 작고 잘 보이지도 않는, 그러나 무수한 오솔길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그 오솔길에서 서로를 보듬고 살아가는 그들이 하나같이 예쁘고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 

    10년 이상 지속된 애완견 분양 프로그램은 이제 어느 정도 그 틀을 잡아가고 있다. 분양받은 가족끼리 동호회나 소그룹을 결성해 정례 모임도 갖고 있다고 한다. 견사에서도 그런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매년 10월이면 견사 뒤의 넓은 잔디 마당에 동호회원들을 초청해, 각종 전시회를 열기도 하고 훈련 시범을 하기도 한다. 내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처럼 개가 사람들 사이의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 애견 사업을 시작하면서 내가 꿈꿨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개가 우리에게 베푸는 것이 이토록이나 많은 것이다.

    견사에 TV·냉장고? “강아지 입장에서 생각하라”

    이건희 회장은 용인 견사가 만들어졌을 때 ‘강아지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며 세심하게 지시했다고 한다. 사육사들 말이다.

    “견사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텔레비전, 냉장고까지 가져다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일반 가정같이 벽에 액자도 한쪽에는 소파도 놓으라고도 하셨어요. 처음에는 직원들조차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에서는 최적의 기질과 건강 상태를 지닌 종견과 모견 사이에서 1년에 50마리 정도 강아지가 태어난다. 삼성화재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에서는 최적의 기질과 건강 상태를 지닌 종견과 모견 사이에서 1년에 50마리 정도 강아지가 태어난다. 삼성화재

    그런데 회장님께서 ‘안내견들이 일반 가정에 분양됐을 때를 상상해서 배려한 것’이라고 하셔서 다들 놀랐지요. 냉장고나 텔레비전을 처음 본 강아지들이 당황해서 시끄럽게 짖어대거나 물어뜯을지 모르니 적응하기 쉽도록 가능하면 일반 가정과 똑같은 구조와 시설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가전제품에서 미세한 소음이 나오잖아요. 강아지들이 이런 소음에 익숙해지라고 전원을 켜놓고 작동해 줘야 한다고도 하셨습니다. 강아지들이 앞으로 진짜 주인과 함께 살게 될 집에 빨리 친숙해지도록 고려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말씀이셨죠.”

    기록의 중요성도 강조했다고 한다.

    “사육사들에게 모두 카메라를 지급하셨어요. ‘사육에 대한 모든 것을 정보로 남겨야 한다, 모든 게 데이터다, 다 노하우로 남게 된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요. 그때만 해도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게 불편하고 익숙하지 않았을 때인데 실제로 시간이 지날수록 엄청난 데이터가 되고 교육자료가 돼 회장님의 선견지명을 다시 한번 실감했었습니다.

    직원들 사기를 올려주는 일에도 카메라 사진들을 활용하셨어요. ‘이번 기회에 사진 찍기를 취미로 삼아보라’며 매년 직원들 사진 콘테스트를 해서 상을 주셨습니다. 그 바쁜 분이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직접 오시기도 했어요. 무슨 대단한 상은 아니지만 당신이 이 정도의 관심이라도 보이는 것이 명예도 돈도 따르지 않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육사와 안내견 학교 직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도 하셨습니다.”

    휴대폰 카메라가 지금처럼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절 모든 사업 분야에서 녹음과 기록을 강조했던 이 회장이 강아지 사육 분야에서도 기록을 강조했던 것은 멸종 단계였던 진돗개 순종을 보존하고 세계견종협회에 원산지 등록(1982)을 이끌어낸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 그의 말이다.

    ‘산업 무기’로 변화 가능한 생물 자원, 우습게 보지 마라

    우리는 예전부터 개를 키워왔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공인된 자랑할 만한 토종견이 사실상 없다. 흔히 진돗개나 풍산개, 삽살개가 우수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입증할 객관적 자료는 없다. 그것은 기록을 남기지 않는 우리의 전통 탓도 있다.  

    애완견사 내 연구팀에서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관리한다. 개들의 혈통과 성장 과정, 성격 등의 기록을 저장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까지 개발해 관리하고 있다. 우수한 종견의 경우에는 전담 사육사가 있다. 치와와 ‘트레버’가 그렇다. 전담 사육사라니, 트레버는 사람도 못 받는 대우를 받고 있는 셈이다. 이 녀석은 영국 품평회에서 챔피언을 차지한 명망 있는 번식가(Breeder)의 작품인데, 정기적으로 정액을 채취해 냉동 보관까지 하고 있다. 이런 치밀하고 체계적인 기록과 관리는 명견을 생산하는 제일의 조건이다. 트레버는 이렇게 치밀하게 짜인 번식과 훈련 프로그램에 따라 만들어진 결과다.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안에는 훈련견·안내견·은퇴견이 관리 및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동물병원이 있다. 삼성화재

    삼성화재 안내견학교 안에는 훈련견·안내견·은퇴견이 관리 및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동물병원이 있다. 삼성화재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생물 자원의 보존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한다.

    애견 사업을 시작하면서 종모견(種牡犬: 씨를 받기 위해 기르는 수컷 개)을 수입하려고 했을 때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좋은 혈통의 종모견은 제법 비싸기도 했지만 문제는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개 먹는 나라에는 절대 팔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개를 사랑해 온 나로서는 억울했지만 그들의 장인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더 나은 품종의 개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정성을 기울여온 그들로서는, 개 한 마리 한 마리가 혼신을 기울인 작품이자 자식 같을 것이다. 우리는 몇 년 동안 우리가 정말로 개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줘야만 했다. 힘은 들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좋은 것은 되도록 빨리 배워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게 후발 주자의 올바른 태도다. 싹싹 빌다시피 해서 개만 들여오고 만다면, 그리고 필요해서 또 수입해야 한다면 들인 돈이 아깝지 않은가? 좋은 품종을 만드는 기술력을 우리 것으로 빨리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 기술력이 축적되면 언젠가는 우리 나름의 고유 혈통을 만들어 세계로 내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생물 자원을 우습게 여겨왔다. 단적인 예가 콩이다. 지금 미국이 생산해서 우리에게 팔고 있는 콩의 원산지는 우리나라였다. 우리가 갖고 있으면서도 몰랐던 가치를 미국은 재빨리 산업 무기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미국의 공략에 우리 콩 산업은 완전히 황폐화되고 말았다. 생물 종 하나가 이토록 중요한 산업의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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