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무슬림들의 일반적인 의식구조는 전통적인 유목사회의 유습(遺習)과 이슬람교의 종교적 규범, 그리고 현대화라는 복합적인 요인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요인들은 서로 융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충돌하기도해 일종의 아노미(anomie, 사회도덕적 무질서)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슬람은 그 특유의 성법(聖法, 샤리아)을 통해 여러 사회문화적 요인들을 조화시켜 나가려고 시도한다. 따라서 이슬람에 바탕한 전통의식이 아직 그 어느 문명권보다도 끈끈하다 말할 수 있다.
무슬림들의 의식구조에서 근본은 유일신 알라에 대한 믿음과 복종이다. 이러한 근본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들의 삶에 대한 태도, 즉 인생관이 수립된다. 무슬림들의 인생관은 한마디로 성선설(性善說)에서 오는 적극적인 인생관이다. 인간에게는 애당초 원죄가 있다고 보는 기독교는 성악설(性惡說)일 수밖에 없고, 불교는 인간의 속성을 두카, 즉 고행으로 보기 때문에 고행설(苦行說)을 주장한다.
이에 비해 이슬람은 알라의 창조에 의해 착한 속성을 가지고 출현한 인간이기에 삶을 낙천적으로, 적극적으로 영위하라고 격려한다. 교조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는 “인간은 순수 결백하게 태어난다” “오래 살고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최상의 인간이다”라고 삶을 찬미하고, 오래 살아야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으니 “죽음을 원하지 말라. 범죄자도 죽음을 원하지 말라”고 무모한 죽음을 경고한다.
이렇게 현세에서의 생을 오래 즐길 것을 권장하며 죄나 과오를 자진 회개하고, 알라의 용서를 빌며 헛되이 죽지 말라는 것이 이슬람 인생관의 요체다. 그런데 오늘 이슬람세계, 특히 팔레스타인에서는 가끔 ‘자살테러’가 발생한다. 이에 대해 이슬람 법학자들 사이에도 이견이 분분하다. 문제는 명분이다. 이러한 자살행위에 지하드(聖戰)란 명분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알라가 마련해준 땅에서 쫓겨났으니, 그 땅을 되찾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은 무모한 죽음이 아니라 성스러운 죽음이라는 변이다.
다음으로 무슬림들은 중용의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이슬람교의 중용사상과 중도관(中道觀)의 영향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러한 의식구조는 우선 유연하고 중용적인 정명관(定命觀)에서 나타나고 있다. 행한 것만큼 얻는다는 인과율(因果律)에 따른 정명관으로서 자유의지와 정명을 조화시킨 융통성 있는 정명관이다.
이러한 면에서는 인과응보를 법으로 삼는 불교나 자유의지(人爲)와 정명을 동시에 믿는 유교와는 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에 비하면 기독교는 구제예정설로 더욱 숙명적이고, 도가(道家)는 철저히 숙명론이며, 묵가(墨家)는 비명설(非命說)로 숙명을 거부한다.
무슬림들의 중용적인 의식구조는 관용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관용성은 그들의 종교의무 수행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매해 한 달씩 근행하는 금식월(라마단)에 병이 있으면 금식하지 않아도 무방하고,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면 종교적으로 금기시하는 돼지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것 등이다.
여행경비와 건강이 허락 안되면 5대 종교의무의 하나인 성지순례를 그만두어도 배교(背敎) 행위는 아니다. 이러한 관용성은 인간은 원래 착한 존재이기 때문에 실수나 범죄, 불의 같은 것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회개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으며, 종교는 결코 고행이 아니라는 성선설과 종교적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