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벌그룹 총수는 흔히 ‘제왕’에 비유된다. 돈, 권력, 명예, 혹은 그 이상의 어떤 카리스마. 내놓고 싶지 않은 것이 인지상정인 그 자리를 구명예회장은 스스로 차고 나왔다. 이것이 우리가 그를 만나야 하는 이유다.
연암(蓮庵)은 구인회 LG그룹 창업회장의 호다. 그 아들이 구자경(具滋暻·77) 명예회장. 구명예회장의 소년 시절 꿈은 ‘젊어서는 교사로 나라 이끌 동량을 기르고 은퇴 후에는 농장에서 백성 먹일 양식을 기르는 것’이었다. 원대로 교사가 된 스물한 살 청년은, 그러나 5년 뒤 제자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게 된다. 확장일로에 있던 선친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다시 45년. 꽃과 풀과 나무를 사랑하던 소년은 어느덧 71세의 노인이 됐다. 교사의 꿈은 완성치 못했지만 남은 또 한 가지 꿈만큼은 꼭 이루고 싶었다. 95년, 구회장은 대한민국 굴지의 재벌 총수 자리를 미련 없이 차고 나왔다. 그리고 자리잡은 곳이 74년 자신의 손으로 설립한 연암축산원예대학. 그 곁에 버섯재배전문 농장인 ‘수향농산’을 차려놓고 ‘생산하는 자’의 꿈을 이어가고 있다.
먼 길을 달려 구회장을 찾은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지난 3월21일,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이 별세했다. 정회장은 세상을 뜨기 몇 개월 전까지도 직접 그룹 중대사를 챙겼다. 그에게는 사실상 ‘은퇴’란 것이 없었다. “죽는 날까지 일하겠다”는 것은 그의 평소 지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회장의 말년은 순탄치 않았다. 많은 이들은 그 이유를 사후(死後) 준비에 소홀했던 탓으로 돌렸다. ‘왕자의 난’으로 대표되는 현대그룹의 환란도, 미리 후계 구도를 정리하지 못하고 옛 경영방식을 그대로 고집한 ‘왕회장’의 ‘욕심’ 때문이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그래서일까 정회장의 별세와 관련한 언론 보도에는 구자경 명예회장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왔다. 정회장과는 전혀 다른 말년을 선택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4대 재벌 그룹 총수는 흔히 ‘제왕’에 비유된다. 돈, 권력, 명예, 혹은 그 이상의 어떤 카리스마. 가진 것 많고 오르기 어려운 자리인 만큼 내놓고 싶지 않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구회장은 그 일을 했다. 말로만이 아니라 진짜 ‘명예’ 회장이 됐다. 그는 어떤 이유로 자진해 총수 자리를 내놓은 것일까. 어떤 마음가짐으로 은퇴 후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가. 그 후 이어진 굵직굵직한 사건들, 외환 위기, LG반도체 빅딜로 대표되는 혹독한 구조조정, 통신산업중심 그룹으로의 변신 모색, IMT2000 사업자 선정 탈락, 주요 계열사의 주가 폭락…. 평생을 바쳐 일군 그룹의 부침을 바라보는 소회는 어떠했을까.
소박하고 털털한 시골 할아버지
인터뷰 약속 시간은 오후 3시. 20분 남짓 남은 시간 동안 교정을 둘러봤다. 꽃나무 한 그루 허투루 심어놓지 않은, 단아하고 고즈넉하기까지 한 풍경. 학교라기보다 잘 가꾸어진 정원 같다. 인근 주민들의 주말 나들이 장소로 제격일 듯했다.
대학 정문 앞 일차선 도로를 살짝 넘어서면 바로 버섯농장이다. 농장 입구 왼편에 구회장이 기거하는 붉은 벽돌집이 있다. 그 맞은편으로 제법 큰 규모의 가설건물 몇 동이 늘어서 있다. 그중 맨 앞동이 농장 사무실. 건설현장사무소처럼 투박한 모양새다. 그 안, 소파 몇 개가 드문드문 놓인 방에 앉아 있자니 문이 벌컥 열리며 구회장이 들어선다.
진녹색 면 셔츠에 검은 모직바지, 갈색 중절모와 털 안감 댄 가죽조끼로 ‘중무장’한 차림새였다. 미국 서부 어딘가의 대농장주를 보는 느낌. 당당한 체구가 여든 가까운 나이를 무색케 했다. 악수하느라 잡은 손 또한 크고 단단했다. 뚝 떨어진 기온 탓일까. 봄 고뿔에 걸려 몸이 편치 않다면서도 입가엔 소탈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건물 안쪽, 역시 ‘편리’를 염두에 둔 듯 소박하게 꾸며진 개인사무실에서 구회장과 마주 앉았다. 준비해 간 버섯 관련 책자 한 권을 선물인 양 내밀었더니 꽤 오랜 시간 꼼꼼히 넘겨본다.
“음―, 세상에 참 별별 버섯이 다 있구먼. 이 버섯이라는 것이 파고들수록 끝이 없어.”
주로 ‘먹는 버섯’에 관심을 기울여온 탓일까. 책에 소개된 버섯 중에는 구회장도 미처 접하지 못한 것들이 제법 됐나 보다. 책을 들여다보는 눈길이 어린 학생의 그것처럼 진지하기만 했다.
매실차 한 잔씩 앞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가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어린 기자 앞인 만큼 말을 놓을 법도 하건만 잊지 않고 꼭 존대를 했다.
이어지는 문답은 미리 받아놓은 서면(書面) 인터뷰 자료와 1시간 가량 이어진 대화를 종합한 것이다. 민감한 발언도 없지 않았으나 이는 세월이 좀더 흐른 후 공개하기로 한다.
―무척 건강해 보이십니다. 그래도 봄 감기는 피하기 힘드셨나 봅니다.
“그래요. 달리 아픈 데는 없는데 매년 꼭 한 번씩 감기를 심하게 앓아요. 재작년 12월24일에도 감기가 너무 심해 입원까지 했죠. 의사가 ‘담배 안 끊으면 치료 못한다’고 엄포를 놓기에 하루 두 갑씩 피우던 걸 그날로 딱 끊어버렸어요. 그런데도 영 낫지 않아 제 스스로 실험용 쥐가 되기로 했죠. LG화학에서 실험 중인 신약이 있었는데 그걸 가져다 먹었어요. 열흘을 먹으니 차도가 있고 다시 열흘을 더 먹으니 완전히 낫더군요.”
―일과를 소개해 주십시오. 매일 혹은 매주 빠뜨리지 않고 하시는 일이 있다면 어떤 것들입니까.
“회장에서 은퇴한 지도 벌써 6년이 지나 7년째 접어듭니다. 처음에는 현직에서 물러나면 한가로이 쉬며 농장 일에 전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내다 보니 그렇지만도 않아요. 나름대로 챙겨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아서 꽤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선 매주 월요일에는 여의도 LG트윈타워에 출근해 LG복지재단과 LG연암문화재단, 그리고 LG연암학원 일을 봅니다. 은퇴하면서 모든 현직에서 물러났지만 선친께서 기업이윤의 사회환원 차원에서 설립하신 문화재단과 연암학원, 그리고 제가 설립한 복지재단 일은 한층 강화해야겠다는 생각에 재단이사장직을 맡아 나름대로 일하고 있습니다.
일주일 중 일요일과 월요일을 빼고는 성환 농장에 머무르며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7시쯤 일어나 주변을 산책하고 8시 경 아침식사를 하고 오전에는 버섯농장 일을 봅니다. 오후에는 손님을 맞거나 오전에 못다한 일을 처리한 후 7시쯤 저녁 먹고 9시 뉴스를 본 뒤 10시경 잠자리에 들지요.
날씨가 허락하면 일주일에 두 번은 골프를 치며 건강관리를 합니다. 한 달에 한번은 옛날 임원들과, 또 한 번은 단오회(그룹 회장간 친목모임) 멤버들과 함께 돕니다. 또 7년째 능성 구씨 대종회장을 맡고 있어 그 일에도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편입니다.”
―농장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이곳에서 버섯 종균개발을 시작한 것이 95년이니까 벌써 7년이 다 되어갑니다. 버섯이라는 것이 환경변화에 아주 민감해요. 특히 기온에 예민해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버섯재배는 무균상태의 반도체 공장을 연상케 합니다. 매일같이 곰팡이와 세균소독을 하고 신선한 공기를 넣어줘야 하지요. 한마디로 여간한 정성이 없으면 안 됩니다.
버섯은 고단백 무공해 자연식품인데 IMF 이후 소비가 줄어 많은 버섯 재배농가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소비촉진 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것 같습니다.”
버섯농장을 반도체공장에 비유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구회장은 LG반도체에 대단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LG가 초우량전자사업체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그 핵심에 반도체 공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IMF 이후 몰아닥친 재벌그룹 구조조정 과정에 LG반도체는 현대전자로 합병이 되고 말았다. 구회장으로서는 몹시 가슴아픈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문인지 구회장은 인터뷰 중 수차례 LG반도체에 대한 아쉬움과 그로 인한 불편한 심기의 일단을 내비쳤다.
버섯농사, 이래서 좋다
―농장에선 주로 어떤 버섯을 키우시는지요. 또 농장 일에는 어느 정도 간여하고 계십니까.
“처음에는 팽이버섯으로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만가닥버섯, 새송이버섯 등으로 종류를 늘렸어요.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건 새 품종 개발입니다. 제가 직접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기도 하고, 연암대학 교수들과 식사를 같이 하면서 밤늦도록 품종 개발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 중에는 저를 ‘개발실장’이라고 부르는 이도 있지요.”
―제2의 삶을 ‘버섯 연구’로 결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버섯에 특별한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 어려서부터 갖고 있던 농작물 재배에 대한 관심, 난·장미 재배에 기울였던 흥미가 자연스레 버섯으로 옮겨간 것이지요. 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농사와 새로운 작물 재배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은사 중에 옥태선 선생님이란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학교 마당에 온갖 화초와 나무를 가꾸는 것을 보며 많은 영향을 받았지요. 그분의 영향으로 성장한 뒤 제 취미가 난·장미·버섯 등 식물 재배 쪽으로 굳어진 것 같습니다. 새롭게 싹이 돋아 자라는 식물을 보면 기업활동이나 인간관계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저절로 없어져요.
버섯을 키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연암대학 생물배양과에서 버섯의 조직 배양에 관심을 갖고 연구중인데, 국내에 버섯 농장은 여럿 되지만 종균을 배양하는 곳은 없다는 말을 들은 때문이었어요. 그 일은 제가 한 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처음에는 버섯종균 개발을 통해 우리나라 버섯산업 발전에 작은 기여를 해보자는 것이었는데 버섯이라는 것이 개발하면 할수록 새로운 세계가 끝도 없이 펼쳐지는 바람에 그만 푹 빠져버리고 만 겁니다.”
―버섯 키우기의 어떤 면이 마음에 드십니까. 직원이나 이웃들과는 스스럼없이 지내시는지요.
“버섯 키우기는 상당한 정성이 필요합니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농사란 정성을 다하면 그 노력에 합당한 결과를 얻게 마련이지요. 버섯이 특히 그렇습니다. 세상 일이란 게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최선을 다하면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거듭 확인시켜 주는 점이 참 좋습니다.
직원들과의 사귐을 두고 말하자면, 제가 원래 격식 차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회장으로 있을 때도 혼자 공장을 방문하거나 연구소를 찾는 일이 적지 않았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농장의 조장, 반장들과 정기적으로 모여 회식도 하고 토론도 벌입니다.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편이지요.”
구회장의 일상은 실제로 소탈하고 검소해 보였다. 인터뷰 후 구회장은 빗줄기를 뚫고 직접 차를 몰아 농장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었다. 버섯 종균 배양 시설을 안내할 때는 전문적인 지식을 거침없이 풀어내 듣는 이를 놀라게 했다. 종종 농장 직원들과 마주쳤는데 서로 간단한 목례만 주고받거나 아예 뒤돌아봄 없이 자기 일에 몰두하는 것이 오히려 편안하고 부담 없어 보였다. 건물 안팎으로 움직이면서는 행여 잃어버릴까 우산을 꼭꼭 챙겨 들었고, 안내가 끝난 후에도 원래 놓여 있던 자리까지 찾아 들어가 잘 꽂아두고는 마치 확인이라도 하듯 손잡이를 두어 번 톡톡 두드렸다.
―난과 분재에서도 일가를 이루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난은 10대 때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옛날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18세 땐가, 난 화분을 응시하고 있는 사진이 있더군요. 그러고 보면 난에 대해 취미를 가진 지도 벌써 60년이 넘은 셈입니다.
분재는 60년대 중반에 취미로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친구와 우연히 분재집에 가서 소나무 분재를 보고 반했는데 이후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집을 들락거리며 기술적인 것을 묻고 배워 대가는 아니어도 취미라고 말할 정도는 되었지요. 분재의 묘미는 어린 나무를 손질해 늙은이처럼 보이게 하는 것인데 매우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걸려서 회장이 되고 나서는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 난과 분재 대부분을 이곳 성환에 가져다 놓았는데, 그만 두 번이나 난을 도둑 맞고 말았어요. 아주 귀하고 좋은 것만 골라 가져 갔더군요. 얼마나 속이 쓰리고 아프던지, 다시는 그런 일을 겪기 싫어 요즘은 많이 철수시켜버린 상태입니다.”
―요즘 회장님 삶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무엇인지요.
“희수가 되도록 바쁘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즐거움입니다. 한참 바쁘게 일하다 갑자기 여유가 생기면 늙기 쉽습니다. 그런 점에서 최선을 다해 일할 수 있고, 그 결과에 따라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할 수도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기쁜 것은 저의 내자와 60년을 하루같이 해로한 점입니다. 열일곱 되던 해 경상도 시골 엄격한 유교 집안의 4대 종부로 시집와, 어른들 모시고 6남매를 키우는 등 큰 살림을 도맡아 하면서 일생을 헌신한 내자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내자는 이제 내 눈빛만 봐도 독심(讀心)할 경지에 이르렀어요. 4월25일 아이들이, 내자와 함께 하는 희수연을 준비해 주겠다 해서 참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 참입니다. 또 내년이면 회혼(回婚)인데 어찌 고맙고 즐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한 가지 즐거움을 말한다면 손자들 커가는 것을 보는 재미입니다. 매년 5월 어린이날이면 우리집 손자들이 모두 성환으로 찾아옵니다. 여기서 한바탕 잔치가 벌어지지요. 제가 일일이 보물찾기 보따리를 만들어 숨겨 놓으면 그 녀석들이 한참을 헤매 찾아요. 올해 어린이날에도 성환에 모이고 또 LG아트센터에 가서 공연도 함께 보기로 약속했습니다.”
―빠짐없이 챙겨 보시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정기간행물이 있습니까.
“신문은 꼬박꼬박 봅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산책을 하고 아침식사를 한 후 사무실에 나와 한 시간 정도 보지요. 아무리 은퇴를 했다 하더라도 세상 돌아가는 것쯤은 알고 지내야 하니까요. 텔레비전은 운동경기 빼고는 특별히 보는 것이 없지만 9시 뉴스만큼은 챙겨 보는 편입니다. 물론 가끔씩은 쇼프로그램 같은 것도 보지요.”
그러면서 구회장은 “그나저나 어제 김영삼 전 대통령하고 박근혜 의원이 만났다는데 왜 무슨 말을 나눴는지 안 나오느냐”며 관심을 보였다.
구회장은 “이기자, 혹 박근혜 의원 만나면 박정희대통령 기념관 만드느라 너무 애쓰지 말라는 얘기를 좀 전해달라”고 했다. 가만있어도 박 전대통령을 존경하는 기업인들이 알아서 나설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어 구회장은 ‘작은 공장 하나만 지어도 직접 찾아와 기공식을 빛내주고, 적은 액수의 수출 실적만 올려도 트로피를 수여하며 격려해주던’ 박 전대통령 관련 일화들을 추억했다. 박 전대통령과 재벌 그룹 총수들 간의 ‘끈끈한 관계’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었다.
―사업 일선에서 너무 빨리 물러선 것이 아닐까 후회한 적은 없으십니까.
“후회한 적 없습니다. 사실 저는 오래 전부터 나이 일흔이 되면 미련없이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인재들에게 그룹 경영을 맡기고 나만의 새 인생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해 왔습니다. 제 조부께서는 환갑 상을 받으시던 날 아침에 집문서와 곳간열쇠 등속을 선친에게 넘겨주시며 ‘이제부턴 네가 맡아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은 평균수명이 길어져 일흔이 그때가 아닐까 생각한 것입니다.
저는 은퇴를 결심하면서 ‘멋진 은퇴’보다는 ‘잘된 은퇴’가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마치 육상 계주에서 최선을 다해 달린 후에는 바통 터치를 해야 하는 것처럼, 회장 재임기간인 25년을 대과(大過) 없이 달려 왔으니 주자로서 최선을 다했다 할 만하지 않은가 자평했습니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바통 터치가 이루어졌을 때 ‘잘 됐다’는 표현이 어울리듯 경영승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물러난 후 그룹은 물론 이 나라에 참으로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저는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 짐을 지고 해결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이 이러니 후회할 일이 없지요.”
구회장은 “아산(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께서 그리 허망하게 가시는 걸 보니 사람 목숨이란 것이 참 덧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그래도 장수하신 셈이지요. 재벌 총수가 그만큼 살기 힘듭니다.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은데요. 그분은 늘 100세까지 살겠다고 다짐을 하셨어요. 하지만 몸만 산다고 사는 게 아니지요. 나이를 먹으면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아져요. 그분 주변의 이런저런 일들을 보며, 저게 정리되지 않았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거기 비춰보면 새삼 제가 일찍 물러난 것이 잘한 일이다 싶기도 하고요.”
― 그룹 일에는 얼마나 간여하십니까.
“제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며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습니다. 은퇴한 이상 현 회장을 비롯한 후진들의 영역을 확실하게 지켜주자는 것이었지요. 어려운 때일수록 그 결심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서울이 아닌 성환 농장에 주로 머무는 것도 그런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LG복지재단 오종희 부사장에게서 들은 일화.
“명예회장으로 물러나신 다음날이었습니다. 출근을 하셨는데 그때까지 회장님을 모셔왔던 회장실 사장이 아침 인사차 잠깐 들렀던가 봅니다. 사장으로서야 자리 바뀌었다고 매일 하던 인사를 거르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별 생각 없이 간 건데, 그만 명예회장님께 불호령을 들었던가 봐요. ‘회장이나 잘 모시지 왜 날 찾느냐’는 것이었죠.”
―단오회, 진주중학교 동창들과 자주 만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은퇴 후에도 빠지지 않고 나가는 모임이 두 개 있는데 바로 단오회와 진주중학교 동창회입니다. 단옷날 결성돼 단오회라 이름붙여진 모임은 선친께서 평소 가깝게 지내온 두산·경방 그룹 등의 회장들과 친목을 나누시던 자리입니다. 역사가 벌써 40년을 헤아리는데, 그 동안 돌아가신 분도 있고 현재 멤버들도 모두 70대가 되어 경영일선에서 대부분 은퇴했습니다. 현재는 저를 포함해 오랜 지기인 경방의 김각중 회장, 삼양사의 김상홍 회장이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편입니다.
그래도 가장 재미있는 모임은 역시 흉허물없이 만나는 진주중학교 동창회입니다. 1년에 네 번 정도 만나는데 회비가 없어 참석할 수 없다는 동창이 있으면 음식값은 내가 낼 테니 꼭 와달라고 해 한번 모일 때마다 10~14명이 함께 합니다. 만나면 옛얘기로 꽃을 피우며 술도 한 잔씩 하지요. 해가 갈수록 참석하는 동창이 줄어드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아들 평가, 아직 이르다
―아드님인 구본무 회장의 경영능력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계십니까. 명예회장님과 가장 닮은 점이 있다면, 또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IMF 이후 LG가 추진한 구조조정 성과를 보면 비교적 양호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구조조정이 기업체질을 강화하고 실질적인 핵심업종을 중심으로 선택과 집중을 통해 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선친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회장직을 맡은 것과는 달리 현 회장은 회장 자리에 앉기까지 LG화학과 LG전자 같은 주력회사의 주요 부서를 두루 거치면서 20여 년간 다양한 실무경험을 쌓았습니다. 젊기 때문에 강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더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아직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기는 일러요. 또 평가는 제3자가 하는 것이고. 누구 잘한다 칭찬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도체 잃은 것을 동정해서 그렇겠지(웃음)….
하여튼 LG 임직원들은 반도체를 포기하는 현 회장의 결단력을 보면서 60년대 방송사업에서 철수하던 때의 선친을 떠올렸다는 얘길 얼핏 들었습니다. 대승적 차원에서 상황을 읽고 포기를 결심하는 것이 닮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얘기 말미에 구회장은 아버지로서의 애틋한 심경을 이렇게 피력했다.
“그룹 총수라는 게 참 고독한 자리예요. 해보지 않고는 모르지요. 도움 주는 이들이 많다고 하지만 큰 결단은 어디까지나 총수의 몫이거든요. 회장 자리에 앉자 얼마 후부터 외환위기니 정권교체니, 큰 변화가 좀 많았습니까. 그런 걸 생각하면 아비로서 아들한테 너무 큰 짐을 지운 것은 아닌가 문득 안쓰러워지기도 합니다.”
―요즘 LG에 대한 시장의 평가가 호의적이지만은 않습니다. 나름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보입니다만,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 또 어떤 부문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지난해 차세대 이동통신 사업자 획득에 실패하고 LG 계열사들의 주가가 과도하게 하락하는 등 악재가 있었지만 실제 경영실적은 상당히 좋았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올해 들어서는 전 임직원들이 심기일전하여 재도약하려는 의지가 역력한 만큼 향후에는 모든 것이 잘 되리라고 믿습니다. LG가 오랫동안 쌓아온 화학 분야와 전자 분야의 축적된 기술이나 인재, 경영상의 노하우 등을 활용하면서 미래의 성장, 유망사업 분야에서 적극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의 운명으로 재벌 1세대의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 그룹을 운영해오신 분으로서 재벌의 어제와 오늘, 내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21세기에 걸맞은 변화가 필요하다면 그 핵심은 무엇이겠습니까. 또 결코 변해서는 안 될 경영의 요체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한국의 대기업들은 지난 수십 년간 과감한 해외시장 개척, 근면하고 우수한 근로자들, 정부의 지원 등에 힘입어 많은 발전을 해왔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 경제가 이만큼 성장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대기업을 둘러싼 환경은 점차 악화됐습니다. 경쟁이 글로벌 차원으로 확대되면서 국내 대기업들의 입지도 흔들리기 시작한 거지요. 또한 지식정보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기존 대기업 체제로는 시장의 빠른 변화에 대응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우리 대기업들이 적절하게 대응치 못한 결과가 바로 IMF 구제금융 사태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기존 대기업 체제가 21세기에는 경쟁력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생명공학, 정보통신 등 대규모 자본과 핵심기술이 필요한 영역은 여전히 기존 대기업들이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향후 대기업들의 과제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장점에 유연성, 민첩성, 창의성 등 새로운 경쟁우위의 원천을 성공적으로 접목시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환경이 아무리 변하다 해도 경영의 기본원리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객 중시·주주 중시·수익성 중시 경영이야말로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경영의 요체입니다.”
―정보통신 분야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흔히 LG라면 ‘치약 장사’로 사업을 시작한 기업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보통신 분야만 해도 사업을 시작한 것이 벌써 40년이 넘었습니다. 과거 한국통신에 가장 많은 통신장비를 납품한 회사도 다름아닌 금성사였지요. 통신사업에 필요한 전자기기와 통신장비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생산한 회사가 바로 LG입니다.
이러한 기술력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출발한 것이 CDMA 방식의 디지털 이동통신시스템입니다. 저는 회장 재임시절 여기에 깊은 관심을 갖고 CDMA 기술 상용화에 만전을 기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96년 1월, 마침내 LG가 세계 최초로 CDMA 상용서비스에 성공했지요. 앞으로도 산업발전은 정보통신 기술을 기반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구회장은 LG전자가 생산한 휴대폰 ‘카이’를 애용하고 있었다. 그냥 전화통화만 하는 게 아니라 메모리 기능을 활용한 전화번호 입력이며 기타 부가서비스도 자주 활용한다고 했다.
“1번은 집, 2번은 비서…. 이렇게 죽 저장해 놓으니까 꽤 편합디다.”
구명예회장에게 ‘정보통신에 대한 관심’ 운운한 것이야말로 우문(愚問)이었던 셈이다.
―정치와 경제의 관계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화두입니다. 이와 관련해 한국의 정치인, 기업인들에게 해주고픈 조언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정치와 경제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그 동안 기업의 성장에 정부정책이나 정치적 결정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왔습니다. 이 과정에 발생한 정경유착 등의 부작용은 한국경제 성장에서 어두운 단면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글로벌라이제이션이 급격히 진행되고 시장경쟁원리가 확산되면서 이제는 시장에서의 경쟁력이 기업 사활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경시하여 여전히 정부나 정치권의 지원을 바라는 기업이 있다면 결국 그 회사는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정치적 발전 없이는 경제도 발전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경제문제는 오직 경제논리에 입각해 풀어야만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성장기반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부나 정치권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환경을 개선하는 데 온 힘을 쏟아 주었으면 합니다. 기업인들 역시 자기책임의 원칙 아래서 경쟁력 제고에 힘써야 한다고 봅니다.”
―전문경영인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잘 모르시겠지만 LG는 공채 출신 사원을 전문경영인으로 발탁한 최초의 회사입니다. 그런만큼 전문경영인 제도의 도입이나 실효성에 관해서는 충분히 공감 하고 있다 하겠죠. 그러나 그룹 전체를 전문경영인이 끌고 가는 형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너와 컨센서스를 이뤄야지요.
전문경영인이 그룹을 이끈다면 먼 장래를 내다본 큰 투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을 겁니다. 제 임기만 무사히 마치면 되는데 왜 모험을 하려 들겠습니까. 그것이 오너 경영인이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끝으로 후배 경영인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재계에서는 제가 창업세대와 함께 사업에 참여했다고 흔히들 1.5세대라 부릅니다. 창업세대의 고생을 모르고 경영을 맡게 되면 ‘더 잘해 보겠다’는 강박관념을 갖기 쉽습니다. 저 또한 회장이 된 후 그러한 욕심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하지만 경영여건이 다른 곳에 한눈 팔 만큼 여유롭지 못했던데다 신규투자를 한다는 것이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습니다.
확장보다 수성에 중심이 실리고, 모험적이기보다 안정적인 투자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선대의 경험을 통해 경영의 어려움을 이해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열 번 재고 한 번 가위질하라’는 것이 긴 수련을 통해 터득한 요령이라면 요령이고 철학이라면 철학입니다.
요즘 젊은 경영자들을 보면 새 시대에 맞는 경영관으로 수련된 패기와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하지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며 선택을 서둘러서는 안 돼요. 그래서 이들에게 우선은 경영 내실화를 통한 질적 경쟁력 제고에 힘쓸 것과, 이를 통해 마련된 성장기반과 젊은 패기를 바탕으로 미래에 대비해 남보다 잘할 수 있는 분야에 경영자원을 집중해야 한다는 점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경영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힘들여 계단을 올랐다가 편히 내려가는 육교를 선택할 수도 있고, 쉽게 내려갔다가 힘들게 올라오는 지하도를 택할 수도 있습니다. 근거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하며, 땀흘려 올라갔다가 웃으며 내려오는 선택이 더 교훈적이라는 것도 유념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