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 구조조정은 이제부터
- 환갑인 내년부터 ‘외출’ 시도할 것
- 2005년까지 세계 1위 제품 30개 만들터
- 정치와는 不可近 不可遠
- 대북사업, 외국인투자 의식해야
- 한달 독서량 20권, 요즘은 ‘他力’ 읽는 중
- 이건희 삼성 회장은 ‘신동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신경영과 구조조정의 현주소, 삼성의 미래상, 아들 이재용 상무의 경영자질, 자신의 사생활 등에 대해 진솔하게 답변을 이어갔다.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이뤄졌다. <편집실>
“아주 좋아요. 아프기 전보다 오히려 몸이 더 좋아진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신경 써주신 덕분입니다. 그렇게 한번 앓고 나니까 새삼 건강이 참 중요한 거로구나 싶더군요. 그 동안 할 일은 잔뜩 쌓여 있고 의욕도 넘쳐서 식음을 전폐하고 밤 새워 고민한 적도 많았는데, 이젠 운동도 하면서 건강을 좀 돌보는 편입니다.
‘운동’이라고 해야 뭐 특별한 것은 아니고 가볍게 산책을 하는 정도죠. 저녁을 먹고 7∼8시쯤 호텔 신라 뒤쪽에서 남산으로 이어진 산길을 따라 쭉 걷는데, 의외로 호젓하고 경치도 참 좋습니다. 주로 집사람하고 같이 다니는데 더러는 딸아이나 며느리와 함께 가기도 해요. 8km 가량 되는 길을 한두 시간쯤 걸으면서 집사람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다 보면 몸도 마음도 가뿐해지는 것 같아 아주 좋습니다.”
-원래 ‘야행성’이신데다, ‘신경영 선언’을 전후해서는 위기감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요즘은 하루에 몇 시간이나 주무십니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몇 시에 자는지, 몇 시간이나 자는지 나도 잘 몰랐습니다. 신경영을 고민할 때는 초밥 몇 개만 먹으면서 이틀 밤을 꼬박 새운 적도 있고, 그러다 지치면 하루종일 잠만 잔 적도 있어요. 지금은 규칙적으로 생활하려고 애쓰는 편입니다. 가능한 한 자정 전후에는 잠자리에 들어서 아침 6시쯤 일어납니다. 이렇게 하니까 몸도 좋아지는 것 같고, ‘제발 건강 좀 챙겨라’는 집사람의 잔소리도 덜 듣게 돼서 좋아요.”
생살 도려내는 아픔
-외환위기 이후 많은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대기업도 예외가 아니어서 대우에 이어 현대까지 위기를 맞았는데, 그와 대조적으로 삼성은 큰 흔들림 없이 거친 파고를 극복하고 ‘독주체제’로 들어선 느낌입니다. 그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다고 보십니까?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겠습니다만, 삼성은 6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크고 작은 위기를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그 때마다 삼성은 개인보다 회사를 먼저 생각하는 공동체정신을 발휘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했습니다. 대나무가 마디를 만들어 가면서 계속 자라고 더 튼튼해지듯 삼성도 위기를 극복하면서 체질이 더 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체질을 키워놓았기에 외환위기라는 사상 초유의 위기에도 임직원 모두가 ‘삼성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 희생했고, 그 덕분에 어려움을 이겨내고 구조조정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구조조정 과정에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또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경영자는 기업을 자기 몸처럼 여깁니다. 때문에 구조조정은 경영자에게 마치 생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안겨줍니다. 공들여 키운 사업을 줄이거나 버려야 했던 당시 심정은 매우 고통스러웠고, 특히 마지막 수단으로 인력감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때는 뼈를 깎는 아픔,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경영자들이 먼저 상여금을 반납하고 복지혜택을 줄이는 등 솔선수범하면서 구조조정을 이끌었고, 임직원이 개인보다 회사를 먼저 생각하면서 회사 살리기에 나섰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큰 무리 없이 구조조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삼성은 적자사업과 한계사업을 정리하며 수익성 위주의 구조조정에 주력했습니다. 그러나 당장은 큰 수익을 못 내더라도 먼 앞날을 내다보고 투자를 계속해야 할 업종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선 갈등이 크셨을 텐데요.
“눈앞의 수익에만 급급해 무조건 줄이기만 하는 것은 기업인의 본분이 아니라고 봐요. 나라 살림살이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인데, 자꾸 줄이기만 하면 전체적으로 오그라져서 성장잠재력이 떨어집니다. 저희는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수익성’, ‘부가가치’, ‘미래 성장’의 세 가지를 염두에 뒀습니다. 10년 후, 30년 후에 삼성이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지를 연구해 가면서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 덜 급한 것들은 줄이고 그렇게 해서 얻은 힘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제가 사재(私財)를 들여 직접 투자했고 오늘날 삼성반도체의 기반이 됐던 부천공장마저 팔고 거기에서 나온 돈으로 시스템LSI 등 비메모리 분야에 투자했던 것도 그런 생각에서였습니다.”
‘신경영’ 평가 일러
-삼성의 구조조정이 이제는 웬만큼 완숙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데도 구조조정본부는 삼성의 사령탑 기능을 계속하게 됩니까? 구조본은 막강한 파워를 지녔던 옛 삼성 비서실을 연상케 합니다.
“과거에는 구조조정본부가 그룹경영의 구심점으로서 계열사들의 경영을 리드해온 측면이 없지 않지만, 지금은 각사별로 책임지고 경영하는 체제가 자리잡혔습니다. 다만 계열사 스스로 추진하기 어려운 구조조정을 독려하고 각사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공항의 관제탑 기능을 하는 구조조정본부가 당분간 필요하다고 봅니다.
밖에서는 삼성의 구조조정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고 칭찬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급박하게 돌아가는 디지털 혁명기의 변화를 보면 진정한 구조조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지난 몇 년간 양적으로 추진해 온 구조조정을 이제는 질적인 구조조정으로 전환해야 하고, 또한 구조조정 자체가 일상적인 경영활동으로 자리잡도록 해야 합니다.”
-삼성이 비교적 수월하게 구조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외환위기를 맞기 전에 일찌감치 계열분리를 단행, 가족 지분을 정리함으로써 몸을 가볍게 만들어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삼성은 다른 대기업과 달리 계열분리 과정에 잡음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제일제당이 떨어져 나갈 때 상당한 마찰이 있었는데 지금은 오해가 다 풀렸습니까?
“제일제당은 삼성그룹의 모태기업이고 핏줄로 따지자면 저와 숙질간입니다(이재현 제일제당 부회장이 이회장의 장조카). 당시 회사를 분리하면서 집안의 어른으로서 조카를 도와주려고 신경을 쓴 것이 주변의 몇몇 사람들 때문에 오해를 빚었던 것인데, 그런 오해는 오래 갈 수가 없죠.”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보자”며 신경영 바람을 일으키신 지도 벌써 8년이 지났습니다. ‘삼성은 2류다’, ‘삼성전자 같은 비효율·낭비 집단은 없다’는 절박한 위기의식과 반성에서 비롯된 신경영이 그간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고 보십니까?
“이제 겨우 8년입니다. 지난 몇십 년 동안 굳어진 관행과 관습을 바꾸기에는 부족한 기간이에요. 새집 짓기보다 헌집 고치기가 더 어렵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적어도 10년은 지나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나름대로 의미는 있었습니다. 임직원들의 마인드가 양보다는 질을 중시하는 쪽으로 많이 바뀌었어요. 양과 질을 동시에 생각해서 그것이 경영에 반영되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으로 봐야겠죠. IMF체제라는 어려운 기간에도 삼성은 계속 좋은 성과를 냈는데, 이는 정부와 국민이 도와주고 우리 임직원들이 헌신적으로 노력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반도체를 비롯해서 몇몇 주력제품의 세계 경기가 좋았던 것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다 우리가 잘해서 그런 것으로 착각하고 경쟁력이 생겼다며 자만할까 봐 걱정됩니다. 지금의 불안한 세계경제 여건을 보면 한시도 긴장을 풀 수가 없는 상황이거든요.”
-당시 회장께서는 “남의 뒷다리 잡는 것은 절대 용서 못한다”고 호통을 치셨을 만큼 삼성에 상호불신과 개인·집단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다고 보셨는데, 다른 곳도 아닌 ‘관리의 삼성’에서 그런 현상이 그처럼 심했습니까? 요즘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의약분업사태를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의 집단 이기주의가 이 지경까지 와 있나 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삼성에선 상당 부분 희석된 것 같지만 아직도 곳곳에 이기주의가 남아 있는 게 현실입니다.
예컨대 회사 전체의 이익보다 사업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거나, 해외에 진출할 때 회사들끼리 사전에 상의하고 협력하면 서로 도움이 될 텐데 불필요하게 경쟁하다 보니 시너지가 약해져요. 이기주의나 남의 뒷다리 잡는 행동은 자신은 물론, 조직과 사회까지 멍들게 합니다.
이런 것들은 한 개인이나 집단이 노력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사회 전체가 같이 움직여야 합니다. 인간미를 되찾고 도덕성을 정립하는 사회운동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신경영 당시 업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신선한 충격을 줬던 ‘7-4제’가 불과 몇 년만에 퇴색, 출근시간만 두 시간 앞당겨지고 퇴근시간은 그대로 환원됐다는 불만이 있습니다. 비판적인 이들은 이를 신경영의 실체로 보기도 하던데요.
“7-4제는 출퇴근 시간을 앞당겨 일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고, 남은 시간에 자신을 재충전하고 여가도 즐기자는 뜻에서 시도됐지만, 그 배경에는 시스템을 바꿔 고정관념을 깨고 발상을 180° 전환해보자는 의미가 있었어요. 지금은 사업 특성에 따라 7-4제, 8-5제 등으로 탄력있게 운영하고 있는데, 7-4제의 그러한 근본정신은 살아 있습니다. 몇 시에 출근해 몇 시에 퇴근하느냐는 물리적인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왜 7-4제를 했느냐는 정신이 중요한 것이죠.
앞으로 더욱 집중력을 키우고 개인 경쟁력과 시스템 경쟁력을 높이면 굳이 하루 8시간까지 일할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성과만 제대로 나온다면 일하는 시간을 더 줄이고, 그래서 남은 시간을 공부하거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쓰면 되는 것이죠.”
-최근 전자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앞으로는 대규모 투자보다는 투자의 효율화에 역점을 두라”고 강조하셨는데, 그것은 어떤 뜻에서였습니까? 삼성의 ‘간판’인 반도체산업은 투자가 수익으로 직결되는 업종인데요.
“그것도 양보다는 질로 가자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는 투자라고 하면 공장 짓고 설비 들여놓는 시설투자, 즉 하드적인 것만 생각했는데, 앞으로는 같은 돈을 쓰더라도 전략적으로 고려해 R&D나 마케팅 같은 소프트한 쪽에 써보자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반도체 라인 하나를 깔려면 20억∼25억 달러를 투자해야 하지만, 그 돈의 3분의 1 정도를 반도체의 회로 선폭(線幅)을 줄이는 연구에 투자하면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어 라인 하나를 까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어요.”
2005년 세계 1등 제품 30개 목표
-반도체산업이 삼성과 한국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기술개발 속도가 워낙 빠르고 그에 따른 가격등락도 심해 불안감을 떨칠 수 없게 합니다. 반도체산업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또한 삼성전자가 메모리분야에 이어 비메모리 분야에서도 세계시장을 석권할 수 있다고 자신하십니까?
“현재의 반도체는 두세 살짜리 아기의 지능과 비슷한 수준인데, 10년 후엔 초등학교 3∼4학년의 지능 수준인 64기가 반도체 개발이 가능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웬만한 심부름이나 궂은 일을 하는 3D산업은 로봇이 대신하게 됩니다. 로봇이 가정의 필수품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어요. 또한 디지털, 네트워크 사회가 진전될수록 새로운 디지털 기기와 다양한 소프트웨어가 쏟아지고, 복합칩, 바이오칩(bio-chip) 등의 차세대 반도체가 개발되면서 새로운 수요를 계속 창출할 것입니다.
전문기관들도 반도체산업이 2005년까지 매년 15% 이상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더군요. 앞으로 수급상황에 따라 다소 기복은 있겠지만 반도체는 우리나라가 경쟁우위에 있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사업이기 때문에 전망은 여전히 좋다고 봅니다.
비메모리 분야에서도 자신있느냐고 물으셨는데, 어느 분야에서든 한번 세계 1위에 오르면 다른 분야에서도 1등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희는 현재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인 시스템LSI에 집중 투자하고 있는데 그중 몇몇 제품에서는 머지않아 세계 1등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관건은 역시 사람과 기술입니다. 몇 년 전부터 해외 전문인력을 계속 뽑아왔고 저희 내부에서도 인력을 육성하고 있지만 아직은 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반도체 1, 3위 업체인 NEC와 히타치가 반도체사업 부문을 합병하고, LG전자와 필립스가 브라운관 부문 합작회사를 설립하는 등 경쟁업체간 ‘적과의 동침’이 다반사가 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로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을 텐데요.
“디지털 세계에서는 장벽들이 계속 무너져갈 것입니다. 지금도 기술의 벽, 기업 간의 벽은 물론, 산업간의 벽까지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독불장군은 살아남기가 어렵죠. 누군가와 손을 잡아야 합니다. 더구나 기술표준시대가 되면 서로 장점을 공유하고 약점을 보완해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어느 하나라도 확실한 1등 기술, 1등 제품을 갖고 있어야 해요. 그래야 제휴도 하고 협력도 되는 것이지, 그런 걸 못 갖고 있으면 같이 손잡고 일해보자는 기업이 있을 리 없죠. 삼성은 지금 R&D, 생산, 마케팅 등에서 인텔과 같은 세계적인 기업들과 협력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제휴와 협력을 더욱 확대해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해 나갈 계획입니다.”
-삼성 제품 가운데 현재 세계시장 점유율 1위에 올라 있는 제품이 메모리 반도체, TFT-LCD 등 13가지라고 들었습니다. 이들 외에 조만간 세계 1위로 올라설 가능성이 높은 제품은 어떤 것들입니까?
“머지않아 차세대 디스플레이, 2차 전지 등이 1등 제품이 될 가능성이 높은데, 2005년까지는 세계 1위 제품을 30개 이상으로 늘릴 계획입니다. 우리나라 전체로 보면 현재 55개 품목이 세계 1위에 올라 있는데, 5년 안에 적어도 100개 이상으로 끌어올려야 비로소 일류 국가의 기반을 갖췄다고 볼 수 있어요.
이를 위해서는 각 기업들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산업별로 협회 같은 것을 만들어서 공동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기초분야 기술은 정부가 개발을 지원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기업들이 기초기술을 개발하려고 애는 쓰고 있지만 워낙 시간이 많이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선진기업들과 경쟁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거든요.”
-요즘 회장께선 “10년 후에 삼성은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라는 화두를 자주 던지신다고 들었습니다. 10년 후의 삼성은 어떤 모습으로 변할 것이며 어떤 사업에 주력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이는 결국 ‘한국은 10년 후에 뭘로 먹고 살 것인가’ 하는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만….
“현재의 산업, 시장환경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어 앞을 내다보기가 쉽지 않지만, 10년 후엔 세계시장에서 1, 2등에 들지 못하는 회사나 사업은 문을 닫게 될 것이고, 새로운 기술과 환경에 따라 새로 생겨나는 회사나 사업도 있을 것입니다.
10년 후 삼성은 사업구조나 경영구조에서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욕심이 좀 지나치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삼성은 전자, 금융, 서비스사업을 중심으로 세계적 수준의 디지털 기술과 핵심역량을 갖춘 첨단기업으로 성장하고, 부채가 거의 없는 탄탄한 재무구조를 보유한 일류 기업으로 변모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맺은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해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기업 이미지를 갖출 것입니다.”
기업의 ‘보이지 않는 책임’
-삼성은 상품을 만들고 장사를 잘해서 이윤을 내야 하는 민간기업입니다. 그렇지만 한국경제의 견인차라는 위상 때문에 더러는 공공적 기능까지 떠맡아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양자가 잘 조화를 이룬다면 바람직하겠지만, 충돌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평소 그런 점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십니까?
“작년에 삼성그룹 전체가 사회공헌에 쓴 금액을 합쳐보니 1700억 원 가까이 되더군요. 매출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GE, IBM 등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기업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입니다. 기업에게 이윤창출이 먼저냐, 사회공헌이 먼저냐 하는 것은 불필요한 논쟁이라고 봅니다. 기업이 이익을 내지 못해 생존을 위협받는다면 기업을 경영하는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돈만 벌겠다고 나선다면 기업의 의미는 사라집니다.
기업은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고객에게 제공하고 그 대가로 이익을 내서 영속성을 유지합니다. 그 과정에서 국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종업원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이익의 일부를 세금으로 내는 것이죠. 그래 놓고 남는 것은 재투자해서 성장해 나가는 겁니다. 이것이 기업의 본질이고 이를 충실히 수행할 때 기업은 본래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 요구에 관심을 갖고 사회와 더불어 발전하는 것이 기업의 또 다른 책임입니다. 저는 이것을 기업의 ‘보이지 않는 책임’이라고 여기고, 기업 본연의 책임은 물론, 보이지 않는 책임까지 다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는 ‘강소국(强小國)’을 지향해야 한다”고 하셔서 ‘강소국’이란 말이 유행했습니다. 강소국과 삼성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나라는 인구가 5000만이 채 안 되고 면적도 남북한 다 합쳐봐야 300억 평 정도에 불과합니다. 양적인 면에서 미국이나 독일, 일본과 같은 강대국들과 경쟁하긴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규모는 작지만 선진국 소리를 듣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네덜란드, 핀란드, 스웨덴, 스위스 같은 나라들인데, 이 나라들은 소국이지만 국민소득도 높고 기업경쟁력도 세계 일류입니다.
이런 나라들의 공통점은 사회 전체가 ‘세계 일류 기업을 만들어 보자’는 의욕을 갖고 기업활동을 음양으로 지원해준다는 것입니다. 핀란드는 노키아를, 스웨덴은 에릭슨을 정부와 국민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고, 그렇게 되면서 나라까지 일류국이 됐어요.
노키아의 수출액은 핀란드 전체 수출액의 20%를 차지하는데 삼성도 우리나라 총수출액의 18% 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삼성이 더 노력하고 분발해서 명실상부한 세계 일류 기업이 되고, 이러한 성장경험을 국내의 다른 기업들과 공유하고 때로는 자극을 주면서 경제계 전체가 힘을 합쳐 나가면 우리도 그런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어느 자리에선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제일 중요하다고 하는 지식, 기술의 두뇌 경쟁력이 형편없는데도 정부, 기업, 국민 모두 준비를 소홀히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디지털 시대로 진입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준비가 소홀하다는 것인지 설명해 주시죠.
“새로운 사업을 하려고 할 때마다 가장 아쉬운 게 사람입니다. 삼성이 사업만 생각하고 이익만 염두에 둔다면 기술수준이 높으면서도 임금이 싼 러시아, 인도 등지의 인력을 대거 데려다 쓰면 되지만, 이것은 국가의 장래를 위해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두뇌 잠식’을 초래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고민이 많습니다.
사실 국내에서 학교를 갓 졸업한 인력은 그대로 써먹을 수가 없습니다. 시대가 어떤 인재를 요구하는지에 따라 교육의 내용과 질이 달라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죠. 세상은 벌써 정보사회에 진입했는데도 우리의 교육시스템은 산업사회에나 맞는 아날로그 인력을 키워 내고 있어요. 21세기 디지털 시대에는 아날로그는 물론이고 디지털도 잘 알아야 합니다. 아날로그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도 디지털 지식을 모르면 지식 불구자가 됩니다. 삼성이 이 사람들을 다시 교육시키는 데 해마다 1000억 원 정도를 쏟아붓고 있어요.
우선 시급한 것이 영재교육입니다. 100년 전에는 10만 명, 20만 명이 왕과 귀족을 먹여 살렸지만, 지금은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 20만 명을 먹여 살리고 있어요. 천재가 소프트웨어 하나를 개발하면 1년에 몇십억 달러를 간단히 벌어들이고 수십만 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제2 위기설’이 끊이지 않을 만큼 우리 경제의 앞날에 대해 부정적인 전망이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 경제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미국 경제 전망이 썩 밝지가 않고 일본 경제도 장기 침체에서 벗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인지 우리 경제도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지금껏 우리 경제를 둘러싼 여건은 좋은 때보다 나쁜 때가 더 많았는데, 그런 가운데에서도 오늘날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나라 전체에 기업가정신이 넘치기 때문이라고 봐요.
우리는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특유의 저력과 끈기, 아이디어로 새로운 상품을 만들고 새 시장을 개척해 온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여건이 나쁘더라도 국민과 정부, 기업이 삼위일체가 되면 얼마든지 활로를 열어 갈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가 IMF체제를 슬기롭게 극복했다고 보십니까? 해외자본에 경제주권을 내줬다고 보는 이들도 있고, 우리 경제의 체질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적극적인 외자유치로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부실 금융기관 정리, 기업 구조조정으로 국가 대외 신인도를 높이는 등 비교적 슬기롭게 대처해 왔다고 봅니다. 하지만 사회 전반적인 시스템과 경제구조가 이를 지속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했기 때문에 최근의 어려움으로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글로벌 컴퍼니가 되려면 혼자 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제대로 활동하려면 해외 자본을 들여오는 것이 주가를 높이고 경쟁력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이와 관련, 국내 일각에선 기업의 국제 신인도를 높이기 위해 빨리 글로벌 스탠더드를 도입하고 해외자본 비중을 계속 높이라고 요구하는데,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게 누가 모여서 표준으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든 기업이든 저마다 체질이 다른데,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무작정 많이 쓰다 보면 오히려 몸을 해칠 수도 있는 겁니다. 해외 자본을 들여오는 것은 좋지만 경영권이 흔들릴 정도가 되면 그 기업은 물론 국민경제 전체에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국내 기업들이 남의 나라 자본으로 넘어가면 그게 곧 경제식민지가 되는 것 아니겠어요?”
행정은 서비스산업
-1995년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이른바 ‘베이징 발언’으로 파문이 일었는데, 지금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정부가 기업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불합리한 규제를 없애는 등 공정한 ‘심판’ 노릇을 다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5월10일 전경련 회의에서 “선진국일수록 규제가 없고 기업 하기도 좋다”고 하신 것은 한국에서 기업하기가 여전히 어렵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앞과 뒤에 있는 말을 다 자르고 전달하면 왕왕 참뜻이 왜곡되고 오해를 빚게 됩니다. 그때 베이징에서 했던 얘기는 21세기 초일류 국가가 되려면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이었어요. 지금이라도 진의가 제대로 전해졌으면 해요.
제가 보기에 현 정부는 ‘경제 살리기’를 초미의 과제로 삼고 출범했고 지금도 나름대로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정치든 행정이든 정부가 하는 일의 대부분이 국민과 기업을 고객으로 하는 서비스산업이라는 생각을 좀더 해줬으면 합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선진국으로 접어드느냐, 아니면 이대로 주저앉아 2류, 3류 국가가 되느냐 하는 분수령에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국력의 의미가 예전에는 강한 군사력이었지만 이제는 강한 경제력으로 바뀌었잖습니까. 강병(强兵)에서 부국(富國)으로 패러다임이 전환된 것이죠. 부국이 되려면 세계 일류 기업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이런 기업은 규제가 없는 곳에서 육성됩니다.
가령 빠른 시일 내에 영종도든지, 서해안이든지 입지조건이 좋은 땅을 마련, 규제가 없고 세제, 금융, 행정이 기업활동을 최대한 지원해주는 ‘국제자유기업도시’를 만들어 국내외 기업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게 해야 일류 기업도 나오고, 우리나라가 21세기 경제강국으로 성장하는 데도 탄탄한 기반이 될 것으로 봅니다.”
-현 정부 초기에 사실상 정부 주도로 강행됐던 대기업간 빅딜과 부채비율의 일률적 축소 같은 조치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당시 기업인들의 불만이 컸던 것으로 아는데요.
“모든 일에는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기 때문에 그때의 일에 지금의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업들이 시장의 무서움을 절감하고 있으며 양적 경영의 폐해에 대해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기 때문에 시장원리에 따라 업계 자율에 맡겨도 될 것입니다.”
-삼성가(家)에는 정계로 진출한 사람이 없는데, 회장께서도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까? 관심이 없으시다면 그저 ‘정치 무관심’입니까, 아니면 ‘정치 혐오’입니까?
“정치는 결코 혐오의 대상이 아닙니다. 정치는 사회 각 분야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해 가면서 나라를 앞서 이끄는 부문인 만큼, 정치인은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지 혐오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삼성 집안에서 아무도 정계에 진출하지 않은 것은 정치와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하려는 가풍 탓도 있지만, 기업논리와 정치논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 같습니다.”
선친의 큰 가르침은 ‘경청(傾聽)’
-삼성은 이미 60년대부터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했는데, 우리의 기업 현실에서 가장 바람직한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기업인이라면 경영능력이 중요한 것이지, 오너냐 전문경영인이냐 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굳이 차이점을 들라면 대주주인 오너는 아무래도 자기의 전재산을 기업에 거는 만큼 전문경영인보다는 더 많은 고민을 하겠지요.
저는 지금까지 직접 경영 전면에 나서서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대주주로서, 또한 경영자의 한 사람으로서 미래의 전략과 방향 등 경영의 큰 줄기에 대해 가끔씩 상의하고 조언하는 데 그치고, 일상적인 경영활동은 전문성과 능력을 갖춘 각사 사장들이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자율적으로 하게 해왔는데,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노동조합 없는 삼성’은 앞으로도 변함없는 원칙입니까?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회사 발전에 조력하는 동반자 기능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노사분규를 보니 노조한테도 도움이 안 되고, 회사나 국가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삼성에 노조가 없다고 하지만 노조 이상의 기능을 하는 노사협의회가 있고 서로간에 믿음이 아주 깊습니다. 삼성이 구조조정을 무리없이 추진할 수 있었던 것도 평소에 이처럼 튼튼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노조와 회사가 갈등하고 대립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회사 발전을 위해 쓰면 그만큼 종업원의 복지도 좋아지고 개인이나 회사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선대 이병철 회장께선 경영 일선에 항상 이회장을 동반하고 다니며 ‘현장경영’을 습득케 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회장께선 여느 경영인처럼 현장을 자주 찾아 독려하시진 않는 것 같은데, 그 때문에 ‘현장감각’이 떨어질 우려는 없습니까?
“그 당시에는 선친이 시켜서가 아니라 저 스스로 현장을 찾아 다니면서 꼼꼼히 챙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어요. 대부분의 업무가 시스템적으로 움직이고 있고 상당한 권한이 현장에 위임되어 있습니다. 현장에 있는 사장들 이 잘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회장이 나설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다 바로 눈앞의 일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어서 그런 큰 흐름을 찾아내 제대로 방향을 잡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현장감각’은 일선 경영자에게 맡기고 저 자신은 ‘시대감각’을 익히는 데 신경 쓰고 있다고나 할까요?”
-경영수업 시절 선대 회장께서 특히 강조하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또한 회장께서는 아드님인 이재용 상무에게 어떤 점을 강조해 가르치십니까?
“선친께선 제가 부회장이 되자마자 직접 붓으로 쓰신 ‘경청(傾聽)’이라는 글귀를 선물로 주시더군요. 그래서 그 후엔 회의할 때나 현장에 갈 때 가능하면 한마디도 말을 안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건희는 말을 못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합니다. 당시 제 짧은 생각에도 참으로 좋은 가르침인 것 같았어요. 그렇게 10년 가까이 말없이 지내는 동안 상대방의 처지를 헤아리고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재용이는 올해부터 현장에서 경영수업을 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특별히 해줄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껏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도록 자식을 키워왔기 때문에 스스로 잘 해내리라고 봅니다. 또한 주변에 훌륭한 스승이 많이 있으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1987년 삼성 회장에 취임한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제가 아버님 기준에 맞지 않고 자격이 없었다면 우리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회장이 됐을 겁니다”고 하셨습니다. 회장께서도 삼성의 미래를 맡길 사람을 선택하는 데 있어 ‘기준’을 갖고 계실 텐데, 이재용 상무는 그런 기준에 합당하다고 보십니까? 이상무의 경영능력과 자질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본인이 경영에 자질이 있는 것 같고, 훌륭한 분들을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필요한 것은 누구한테나 배우려고 합니다. 또한 어릴 적부터 선대 회장의 경영철학을 몸에 익혀 왔고,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의 유학 생활을 통해 국제적 경영감각을 갖춰왔기에 경영자 준비는 상당히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게이오(慶應)대학에서 ‘일본 제조업 산업공동화에 대한 고찰’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삼성의 사업구조가 컴퓨터 관련분야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해 하버드대에서 컴퓨터산업을 주 연구분야로 선택하는 등 국내 산업 및 삼성의 사업발전과 직결된 공부를 통해 경영자 소양을 쌓은 것은 대견한 일입니다. 이처럼 경영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높은 것 같지만, 아직은 경영현장에서 열심히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회장께서 선대 회장과 닮은점과 차이점은 어떤 것입니까? 선대 회장으로부터 가장 본받고 싶었던 자질은 무엇입니까?
“글쎄요, 부자지간에 안 닮을 수는 없겠죠. 기업을 하는 이유, 사람을 중히 여기는 부분은 비슷한 것 같은데, 선대 회장은 세상을 보는 시야가 참으로 넓으셨습니다. 그 점은 제가 지금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부분이지요.
자식을 부친에 견준다는 것은 어폐가 있지만, 굳이 다른 점을 든다면 선대 회장은 냉정하신 면이 있고 모든 것을 당신의 잣대로 엄격하게 재단하신 분이었는데, 저는 그런 부분에는 좀 둔감하다고 할까요. 어려서 혼자 지낸 시간이 많아서인지 손해 보는 줄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 넘어가기도 하고…아무튼 저는 정이 좀 많은 것 같아요.”
-선대 회장을 닮은 때문인지 칭찬하는 데 인색하시다고 들었습니다.
“칭찬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 칭찬해주면 좋은 소리 듣게 될 줄 뻔히 아는데…. 그렇지만 칭찬을 잘못하면 독이 됩니다. 저는 칭찬을 하든 질책을 하든 일 자체보다는 그 사람의 앞날을 생각해서 하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을 잘했다고 저한테 자랑하러 왔다가 꾸지람만 듣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칭찬하기는 쉬워도 쓴 소리 하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경영인으로서의 장점과 단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장점을 얘기하기가 쉽지 않은데, 스스로 부족한 것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나보다 뛰어난 점이 있으면 누구한테든 배우려고 하는 점이 장점일 수 있겠네요. 단점은 너무 많아서 얘기하기가 더 곤란합니다. 다만 저를 두고 ‘욕심이 많다’, ‘집념이 강하다’고 하는데, 아직 우리 사회의 인프라가 취약한 상태에서 선진 기업들을 따라잡으려고 월반(越班)을 하려다 보니 불가피한 일이었음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대북사업의 어려움
-최근 몇 년간 언론이나 대외 행사에 나오시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그럴 만한 까닭이 있습니까? 몇 년 전부터 “60세부터는 대외활동에 나서겠다”고 하셨는데, 만 60세가 되는 내년부터는 정말 그렇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 동안 구조조정에 매달리다 보니 다른 데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제가 내년이면 환갑인데, 동양에서는 환갑이 지나면 나이를 처음부터 다시 셉니다. 인생을 새로 시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죠. 새로운 ‘출발’은 우선 삼성을 명실상부한 일류 기업의 대열에 올려 놓는 데 전념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미력이나마 우리 사회의 발전에 보탬이 되는 일을 찾아 해보려고 합니다.”
-사실이 아닌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청와대가 삼성에게 대북사업을 종용했다는 설이 나돌면서 논란이 있었습니다. 기업의 대북사업은 어떤 원칙에 따라야 한다고 보십니까? 당장은 수익성이 없어도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고 투자를 계속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대북사업의 의미가 아무리 남다르다 해도 경제논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양론이 팽팽합니다. 삼성은 매우 신중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듯한데요.
“국내의 많은 기업들이 해외에 나가 사업을 하는 마당에 같은 민족이 있는 북한에 가서 사업하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삼성은 대부분의 상장사가 외국인 지분율이 높은데, 이들 외국인 주주들이 현대사태가 불거지면서 수익성없는 대북사업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 적극 나서려고 해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성급하게 서두르는 것보다 우리 기업과 북한에 서로 득이 되어 ‘윈-윈’할 수 있는 사업을 중심으로 착실하게 해 나가야 한다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삼성은 비록 수익성은 떨어지지만 섬유·전자제품의 조립생산과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을 꾸준히 추진하고 있고, 전자공단 설립도 신중하게 검토중입니다.”
-이회장의 독서량이 엄청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 달에 대략 몇 권의 책을 읽으십니까? 주로 어떤 분야의 책을 즐겨 읽고, 최근에 가장 흥미롭게 읽으신 책은 무엇입니까?
“새로운 트렌드를 제시하거나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의 현상을 깊이있게 분석한 책들을 찾아서 보는데, 먼저 목차를 훑어보고 내용을 골라서 읽습니다. 이렇게 보는 책들까지 치면 꽤 많은 양이 될 테지만 실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책은 한 달에 20권쯤 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 관심있게 읽은 책은 일본의 이츠키 히로유키(五木寬之)라는 소설가가 쓴 ‘타력(他力)’이라는 책입니다. ‘타력’이란 본래 불교의 ‘타력본원(他力本願)’에서 유래한 것으로 자기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부처의 자비를 의미합니다. 사람은 자기, 즉 자력(自力)을 버려야 삶이 더 풍요로워지고, 자신을 사랑하면서 남을 위해 봉사할 때 보람이 있다는 것이지요. 제가 기업을 경영하면서 늘 생각하는 상생(相生)의 철학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합니다.”
-감명 깊게 읽은 책의 저자를 해외에 나가 직접 만나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만나본 저자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권력이동(Power Shift)’을 읽고 나서 앨빈 토플러 박사를 만났는데, 미래의 변화상을 예측한 시각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특히 저와 의견이 일치했던 부분은, 앞으로는 경영의 모든 활동에 지식이 반드시 포함될 것이라는 점이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정말 제대로 봤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을 만났는데 역시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분들답게 세상과 사물을 보는 안목이 남다르고 통찰력이 뛰어나더군요.”
나는 ‘신동아’ 단골독자
-고정적으로 보는 간행물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시사, 경제, 기술, 문화 등 여러 분야의 잡지를 보고 있는데, 국내 잡지가 15종 정도 되고 해외 잡지가 30종쯤 됩니다. 이걸 다 숙독하진 못하고, 먼저 목차를 살펴보고 나서 나머지는 쭉 넘기면서 훑어봅니다. 그중 특히 관심있게 보는 것으로는 일본의 ‘닛케이비즈니스’, ‘트리거(Trigger)’, 미국의 ‘포브스’지를 들 수 있고, 예술 분야에서는 ‘아시아의 예술(Art In Asia)’이라는 잡지를 봅니다. 물론 ‘신동아’도 빼놓지 않고 보고 있습니다.”
-소문난 영화광이신데, 요즘도 영화를 많이 보십니까?
“사실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제 맛이 나는데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래서 주로 집에서 VTR나 DVD로 보는데 집사람하고 함께 볼 때가 많습니다. 얼마 전에는 가족 모두 영화관에 가서 ‘글래디에이터’라는 영화를 봤는데, 역시 역사를 다룬 것은 고전미, 비장미가 있어서 여운이 오래 갑니다. 게다가 컴퓨터 그래픽을 잘 활용했더군요.”
-한때는 육류만 드시는 ‘황제 다이어트’를 하신다는 얘기가 있었고, 또 언젠가는 하루에 식사를 한 끼밖에 안 드신다고 했는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식사는 주로 누구와 하며 어떤 음식을 좋아하십니까?
“하루 세 끼 골고루 먹는 편입니다. 전에는 체중을 좀 줄여 보려고 음식 종류나 식사량을 조절하기도 했지만 역시 억지로 하는 것은 무리더군요. 젊었을 때는 양식을 좋아했는데 한때는 한자리에서 스테이크를 3인분까지 먹었어요. 나이 들고 나서 얼마 전까지는 생선초밥 정도로 간단히 했는데, 요즘은 김치찌개, 된장찌개 같은 한식을 자주 먹고 잘 먹습니다. 아침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족이 모여서 먹고 점심·저녁은 주로 다른 분들과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