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과 노동현장에 연설하러 다녔지만, 사회주의자라고?
- 이인제 노동장관 시절, 해고자 복직에서 제외돼 부친 음독자살
- 나를 구속한 최병렬 노동장관과의 악연
- 민노총 노조 생기면 기업주는 공장문 닫을 준비해
- 해직기간 10년 동안 한 끼 먹고 사는 법 배워
배위원장이 1988년 민노총의 전신인 서울지역 노동조합협의회(서노협)를 결성해 의장을 맡았을 때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현재 민노총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다. 수감중인 단병오 위원장은 그의 밑에서 부위원장을 했다.
배위원장은 민노총이 총파업을 예고해놓았던 4월1일 서울시 6개 투자기관 노조대표 자격으로 월드컵 기간 무분규 선언을 발표했다. 이러한 온건 노선은 노동운동 동지들이 벌이는 절박한 투쟁의 김을 빼는 행위로 비난받을 소지가 다분했다. 그는 발전노조 파업현장에 서울지하철공사 노조의 깃발을 들고 합류하는 것은 발전노조원들에게 어떤 위안이 될지는 몰라도, 빠져나오기 어려운 깊은 구렁으로 그들을 몰아넣는 짓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강성 노동운동의 흐름을 주도하는 쪽에서는 배위원장의 노선에 대해 격론을 벌인 끝에 ‘노사협조주의자’라는 호칭을 붙였다. ‘어용’이나 ‘사쿠라’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은 것이 그나마 민주 노동운동 선배에 대한 대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정부 들어 민노총과 전교조가 합법화됐고 노사정위원회가 생겼지만 발전노조의 장기 파업에서 보듯이 한국의 노동운동은 불법파업, 구속, 해직의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1988년 서울지하철 최초의 파업을 이끌며 강하게 싸우던 투사는 왜 합리적인 노동운동가로 변신해 노사 상생을 부르짖는가? 한국 노동운동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배위원장은 한국 노동운동이 당면한 과제에 대해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고민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서울지하철공사 노조 사무실은 지하철 2호선 용답역 군자차량사업소 구내에 있다. 그는 노사가 합의한 ‘임금 및 단체협약(임단협)’ 안이 조합원 투표에서 부결되자 노조위원장을 사퇴하고 다시 치른 선거에서 조합원들 과반수의 신임을 받았다. 노동현장에 그의 합리적인 노사관을 지지하는 조합원이 다수임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4월1일 서울지하철공사 등 서울시가 투자한 6개 기관노조가 월드컵 기간에 무분규를 결의했습니다. 시민들은 배위원장의 합리적인 결정을 반겼지만 파업을 앞둔 민노총 쪽에서는 불만이 컸을 텐데요.
“국가 대사가 생길 때마다 마치 노동계가 그 시점을 이용해 어떤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는 시선이 사회 일각에 존재했습니다. 서울시 6개 투자기관은 강남병원, 주차장과 공원을 관리하는 시설관리공단, 농수산물공사, 도시철도와 지하철, 도시개발공사입니다. 중앙정부의 노사정 모델을 본따 서울시와 6개 투자기관 노조 대표가 참석하는 서울모델이라는 협의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이날 서울모델에서 공익기관들이 단순히 파업을 안하겠다는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월드컵 경기를 보러 온 손님들에게 더 나은 서비스 방안을 찾아보자는 논의를 했습니다. 내가 회의 결과를 기자실에 들러 발표했더니 발전노조가 파업중이라 무분규만 크게 부각돼 보도됐습니다. 하여튼 신선하게 봐줘 고맙습니다.”
―서울지하철 노조위원장 선거를 보도하는 신문 기사들은 배위원장을 온건파로 분류하더군요. 노조위원장 결선 투표에서 소위 강성 후보를 누르고 52.6% 지지를 얻은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권위주의 시대에 다른 대응수단이 없을 때 파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던 방식이 노동운동의 관행으로 굳어졌습니다. 지금은 작업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학력이 높아요. 서울지하철공사만 하더라도 거의 대졸자입니다. 노사현안을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하려는 분위기가 현장에 넓게 퍼져 있습니다. 내가 그런 정서에 맞추어 대화 협력의 대안을 제시한 거죠. 노동자들이 임단협을 부결시키기는 했지만 나를 다시 선택한 것을 보면 파업 작업거부 같은 강경 투쟁수단이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을 표시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임단협을 부결시켜 노조위원장을 사퇴하게 해놓고 다시 그 위원장을 뽑아주는 노조원들의 태도는 일견 모순돼 보입니다.
“다른 노동조합에서는 임단협이 불신임을 당하려면 3분의 2 이상 반대표가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과반수면 부결돼 노동부로부터 시정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임단협이 부결되고 나서 내가 사퇴하니까 조합원들은 ‘위원장이 물러날 줄은 몰랐다’ ‘노사 단체협약서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표현이지 위원장을 바꾸자는 의미는 아니다’고 공공연하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위원장 선거에 나서 지지를 받은 거지요.”
선진국에서 신세대 직장인들은 노동운동에 관심이 적다. 근로자로서의 공동의 권익을 실현하는 단체교섭 형태의 투쟁보다는 개인의 발전과 성과급에 오히려 관심을 보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노동운동이 쇠퇴하는 흐름 속에서 한국의 조직 노동운동은 어떤 변화를 겪고 있을까.
“1987년에 21%까지 높아졌던 노조 조직률이 미국보다 낮은 11%대로 떨어졌습니다. 전체적으로 노동조합 조직이 늘어나지 않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노동조합이 그만큼 노동자들에게 절실한 인식을 심어주는 데 실패한 측면이 있고 정부 정책이나 생활의 변화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겠지요.”
그는 여기서 감원을 최고의 구조조정 수단으로 아는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감원 대신에 새로운 일자리 창출에 성공한 사례로 소방서를 들었다.
“소방서는 화재 진압예방을 위해 생긴 조직체입니다. 그런데 과학기술이 발전해 방화기능을 갖춘 건축자재가 나오고 불 끄는 장비가 혁신적으로 개량됐습니다. 그래서 1만명 소방수 가운데 6000명을 줄여도 화재를 진압할 수 있게 됐어요. 화재의 예방과 진압이라는 기존 사업만을 꾸리다보면 심각한 구조조정에 직면했을 거예요. 그런데 화재에다가 구급 구조 구난을 추가해 119구조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래서 직원이 1만명에서 4만3000명으로 늘었습니다. 아파트 열쇠를 잃어버려도 119를 누를 정도로 119가 생활에 와닿는 데 성공했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사업구조의 전환이 슬기롭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는 새로운 노사문화를 정립하기 위해 부단히 실증적 사례를 연구한다. 소방서 사례도 그가 직접 조사한 것이고 이번 발전사노조 파업 때는 영광원전에 직접 전화를 걸어 발전산업의 변화에 대해 취재를 했다.
“지하철은 전통적으로 사람을 이동시켜주는 수송수단입니다. 요즘에 동사무소가 어디 있는지는 잘 몰라도 지하철역 위치는 잘 알아요. 지하철역에서 주민등록 등초본도 떼고 은행일도 보게 하면 지하철에서 시대의 변화에 맞는 고용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유럽이나 미국 기업들은 인건비 절감에만 신경을 써 새로운 영역의 창출이 더디잖아요? 고용의 유연성을 갖춘 나라의 경제에 활력이 있다고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계를 드러낼 것입니다.
꿈 같은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남북분단 상황도 잘만 활용하면 엄청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무장지대 관광을 시킨다든다 남북한을 연계하는 관광코스를 개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선진국 따라잡기를 계속하다보면 그들을 능가할 수 없을 뿐더러 근로자들이 끊임없는 고용불안에 시달리게 됩니다.
노동조합과 정부와 기업이 새롭게 인식해야 합니다. 세계화가 진전될수록 자주화해야 합니다. 정보화가 진전될수록 평등화가 중요해지듯이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깊이 고뇌해 정말 새로운 대안들이 나와야 합니다.”
―11% 조직 노동자의 막강한 힘에 의해 89% 비조직 노조원들이 희생된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배위원장이 좀전에 대기업 근로자들이 중소협력기업 근로자들을 착취한다는 말을 쓰기도 했는데 용기 있는 발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채용하면 해고가 어렵고 고임금을 줘야 하기 때문에 기업주들이 계약직, 외국인 근로자, 아웃소싱, 파견근로자 등을 선호하게 됩니다. 회사 직원들이 하던 일을 용역업체에 넘겨버리는 경영이 유행이 되고 있습니다.
“내 친구 중에 기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회사에 노동조합이 결성되면 한국노총으로 가는지, 민노총으로 가는지를 보다가 민노총에 가입하면 기업 문 닫을 준비를 한다더군요. 그만큼 민노총 노조를 데리고서는 기업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기업인들 사이에 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사회보장이 제대로 돼있지 않아 자녀 학자금 퇴직금 가족수당 등 공동체가 책임져야 할 비용을 기업이 부담합니다. 거기에다가 노동자들은 적게 준다고 아우성이고…. 그런 점에서 기업인들은 정말 보따리 싸들고 다른 나라로 공장을 옮기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을 거예요.”
민노총 노조가 생기면 기업주들이 공장문 닫을 준비한다는 말은 옛날 동지였던 민노총 사람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을 수 있는 발언이다. “방금 한 말을 그대로 써도 되겠냐”고 거듭 확인하자 그는 “그대로 쓰라”고 대답했다. 혹시 말썽이 날 경우에 대비해 함께 녹음하자고 제의했는데도 “그럴 필요 없다”고 받았다.
“복지망국론도 있습니다만 과다한 복지가 사회를 정체시키기도 합니다. 서구의 사회복지는 약간 실패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서구 노동운동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표를 얻어 정권을 잡자면 포퓰리즘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복지를 확대했습니다. 근로자들은 휴가를 얼마나 많이 얻을 거냐, 일을 덜 하고 안락을 어떻게 찾을 거냐, 이런 전략을 계속적으로 썼습니다. 소위 일 속에서 보람과 기쁨을 느끼는 자아실현 기재로서의 노동이 아닙니다.
오스발트 슈펭글러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서구는 이미 몰락해가고 있고 가치를 동양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 나오잖습니까? 동양과 서양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의미겠지요. 서구의 합리주는 대립주의입니다. 인간과 자연을 나누고 계급을 분리합니다. 미적분을 통해 원의 넓이를 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원의 넓이를 삼각형이나 직사각형으로 나누어 쟀으니 정확하게 맞는 것은 아니지요. 원을 아무리 작게 나눈다고 하더라도 삼각형이나 직사각형의 합이 원은 아닙니다. 근사치일 뿐이죠. 이걸 합쳐놓은 게 서구의 기초철학이고 그 철학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지금 노동운동도 거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노조위원장의 입에서 슈펭글러의 철학과 미적분의 개념이 나온다. 단순한 노사관계 이론을 넘어 서구의 노동운동이 생성한 철학적 기반까지 언급하고 있었다. 어디서 이렇게 심도 있는 공부를 했을까. 실례를 무릅쓰고 배위원장의 가방끈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고등학교는 서너 군데를 전전했고 대학은 전북대 자원공학과를 다니다 그만두었습니다.” 대학 중퇴가 그의 최종 학력이다. 그의 지식은 노동현장에서 부단히 토론하고 독서하고 고민한 산물이다.
그는 농토 한 뙈기 없는 집안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지질히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날품팔이를 하거나 일감이 떨어지면 시장에서 생선 노점상을 했다. 동생이 아버지 장사하는 옆에서 놀다가 트럭에 치어죽었다.
배위원장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다.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장학생으로 김제 만경중학교에 들어갔다. 중학교에서 줄곧 1등을 했고 전국 학력평가에서 9위를 해 지방신문에 기사가 나왔다. 경기고등학교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서울에 사는 작은아버지들이 원서를 보내주지 않았다.
“조카가 서울에 올라오는 것이 부담스러웠겠지요. 내가 원서를 사러 서울에 올라가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해 경기고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전라북도의 최고 명문인 전주고등학교에 합격했지만 돈이 없어 장학금을 주는 해성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이곳 저곳 방황하다가 태인고등학교에서 졸업장을 받았다.
전북대 공대 자원공학과에 장학생으로 들어갔으나 곧 때려치우고 서울대 법대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 그 무렵 둘째 동생이 6만6000V 고압선 공사를 하다가 죽었다. 벽제 화장터에서 동생을 태워 뿌리고 군에 입대했다. 제대후 서울시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잠깐 공무원 생활을 했다.
“나는 국적 있는 노동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고체계가 뺏기고 뺏어오는 계급주의적 대립주의 시각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와 동반자의 시각에 터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방용석 노동부장관이라든가 박인상 민주당 의원처럼 노동운동을 하다 정관계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노동계에서 국회와 정부에 많이 들어가면 노동계의 힘이 커질테니 긍정적으로 봐야 할까요. 노동운동하다 유명해졌으니 혹시 정계로 진출해보라는 권유를 받지는 않았습니까.
“방용석 장관 같은 분은 오랫동안 피나는 고생을 한 사람입니다. 노동운동 분야에서 고민과 실천을 해본 사람이 장관으로 가는 것이 책만 읽은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운동을 하다가 개인의 출세로 자리매김하는 건 올바른 경로라고 보지 않습니다. 해직 기간에 나도 모당 총재로부터 당선될 자리의 공천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죠. 나는 반드시 지하철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거절했지요. 나는 노동운동이 참 즐겁고 사명의식이 있습니다. 정치는 너무 복잡해 내 역량이 미치지 못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분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민주노동당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주노동당은 노동자의 권익을 정치적으로 실현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계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게 정당이니 노동자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 있어야 합니다. 정당은 권력의 장악을 목표로 합니다. 그런데 지금 민주노동당은 권력장악을 목표로 할 수준에 와 있지 않고 운동의 범주 속에 있습니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배위원장이 노동운동을 하다 처음으로 구속됐을 때 변론을 맡은 인연이 있다. 배위원장은 노변호사의 변론에 힘입어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법정에서 만난 변호사와 피고인은 1980, 90년대 노동현장에 연사로 함께 돌아다니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연설을 했다. 노무현씨는 이때 근로자들 앞에서 했던 말들이 빌미가 돼 같은 당 이인제 후보와 한나라당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노무현씨가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을 외칠 당시에도 배위원장은 현장에 있었다.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은 어떤 분위기에서 무슨 의미로 한 것일까. 배씨의 증언과 해석을 들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노무현 이인제씨 두 분은 노동운동 현장에서 자주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노무현씨가 연설한 내용에 대해서는 아마 내가 가장 정확히 알 겁니다. 울산에 가서도 여러번 같이 연사로 나섰습니다. 당시 노무현씨뿐만 아니라 노동운동현장에서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이라는 말을 너도나도 했습니다. 그것이 사회주의를 지칭하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노동자들이 질곡에 갇혀 있던 권위주의 시대에 노동자도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실현해나가자는 취지였지요. 노동자들이여 기운 내라는 뜻이었습니다.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자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그렇게 알아들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나도 두 후보의 토론을 봤지만 그런 것을 가지고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발전노조가 민영화에 반대하는 파업을 한 달 넘게 벌이다가 항복에 가까운 합의를 하고 마무리지었다. 민영화 철회를 요구하기 위해 파업을 시작했다가 ‘민영화는 노사 교섭대상이 아니다’고 합의했고 당국에 형사처벌과 해고를 적정선에서 해달라고 건의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불법파업을 안했더라면 해고나 형사처벌이 따르지 않았을 테니 희생자만 내고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민노총과 한국노총이 총파업으로 거들고 나선 발전노조의 파업이 왜 실패했다고 봅니까.
“이번에 파업을 한 것은 화력이지만 원자력 수력 조력 풍력 자연력 발전 분야는 앞으로 무궁무진하게 수요가 많습니다. 발전 분야는 고용 불안이 심각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없어서 전전긍긍할 겁니다. 문제가 된 것은 화력발전입니다. 공교롭게도 화력발전은 벙커C유와 석탄 등 화석연료를 때기 때문에 사양산업입니다. 발전사 노동조합들이 이런 부분에 대한 공부와 고민이 적었습니다.
발전노조원들이 가족까지 동원해 엄청난 고생을 했지만 수단과 방법이 근본적으로 잘못돼 실패한 것이죠. 어쨌든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나마 대화로 풀고 복귀한 것은 다행입니다. 더 지속해봐야 결과는 마찬가지였으리라고 봐요. 앞으로 동일반복적인 실패는 지양돼야 합니다.”
주 5일 근무제는 근로자들의 삶의 질과 관련해 획기적인 진전을 가져올 수 있는 선진적인 제도다. 대개 국민소득 1만달러 수준에 이른 나라들이 주5일 근무제를 도입했다.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훨씬 떨어지는 중국도 주5일제 근무를 시행한다.
민노총과 한국노총은 휴일과 임금의 감축 없는 주5일 근무제를 주장해 논의가 답보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노동계는 주5일 근무제를 시행하되 지금까지 적용되던 휴일을 일절 줄일 수 없다는 것이고, 기업계는 그렇게 되면 한국이 세계에서 휴일이 가장 많은 나라가 된다며 반대한다.
최근에는 금융노련이 연월차 수당 등 일부 임금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노사정위가 제시한 방안을 수용할 방침을 천명해 한국노총과 민노총을 압박하고 있다.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근로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주5일 근무제는 노동계에서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근로자들의 삶의 질과 관련된 획기적인 제도의 변화인데 이런 걸 왜 빨리 수용하지 않는지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요.
“나도 그 점에서는 황위원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요. 공공부문 노조에서 민노총과 한국노총, 노사정 위원회에 빨리 시행하라고 제안했어요. 왜 조건을 자꾸 붙입니까? 시행하다가 문제점이 있다면 차차 보완해 나가면 됩니다.
‘소유의 종말’을 쓴 제레미 리프킨에 따르면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해 2%만 노동을 해도 100%가 먹고 살아 98%가 실업자의 처지에 놓이는 사회가 옵니다. 이러한 사회를 앞두고 주5일 근무제는 일자리를 나누는 효과가 있습니다. 노동운동가들 중에는 투쟁만 할 줄 알고 철학적 사고가 부족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민노총이 주장하는 대로 한푼의 임금 저하 없이, 그리고 전산업에서 일시에 시행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일단 주장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되면 대혼란이 일어납니다.
공기업 부문도 무작정 임금인상 투쟁을 계속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에 비해 이 사회의 경제력 배분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한 특혜를 받고 있어요. 지하철공사 한국통신 한국전력 다 그렇습니다. 비정규직들과 어떻게 함께 살 것이냐를 고민하며 일자리를 나누어야죠.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으면서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노동계의 양보가 있어야 합니다.”
―단위 사업장의 노사 분규를 지원하기 위해서 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아무런 관련이 없는 다른 산업분야의 노조를 동원해 총파업을 벌여 사회기능을 마비시키는 일이 잦습니다. 이번 발전노조 파업에도 전교조 참가문제로 논란이 많았습니다. 단위 사업장의 분규에 총파업을 무기로 정부를 압박하고 국민생활의 불편을 초래하는 노동운동에 대해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많아요.
“외국에서도 세금이나 노동시간 문제처럼 공통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업종에 관계 없이 연대해서 반대하기도 합니다. 구조조정에 관해서는 동질성을 부여하기에는 너무 범위가 커요. 우리나라에서는 민주화에 이르는 여정이 짧았던 탓에 노동운동이 모든 걸 다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노동조합 만능론에 빠져 있습니다. 노동조합이 정치 경제도 다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노동 현안이 터질 때마다 툭하면 대통령 퇴진하라고 외칩니다. 국민이 임기를 부여해 뽑아준 대통령은 내우외환의 죄가 있으면 그 절차에 의해 탄핵할 수 있겠지만 합법적 틀을 무시하고 한방에 엎어버리려고 합니다.
노조 지도부가 자기 소신을 펼치기 어려우니 돛단배처럼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흘러가는 거지요. 조합원의 권익 실현과 같은 단위 사업장과의 문제는 그들의 교섭 채널에 맡기면 됩니다. 법 개정이 필요하면 정당을 통해 요구해 나가야지요. 노동운동이 좀더 과학적으로 세분화돼서 전개될 필요가 있습니다.”
배위원장은 서울지하철 24시간 운행체제를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노조원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시민 입장에서는 호응하는 사람들이 많다. 서민들이 일을 하다가 혹은 술 한잔 마시다가 지하철이 끊기면 택시비가 꽤 부담이 된다. 지하철이 심야 시간대에도 운행된다면 서민생활에 적지 않은 편리함을 줄 것이다.
―지하철 노조원들은 근로조건을 악화시킬 우려 때문에 24시간 운행에 반대한다고 들었습니다만….
“나는 정치 경제하는 사람이 아니고 노동운동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조합원들의 일자리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냐가 제일 큰 고민거리지요. 일자리가 없으면 노동자들이 쫓겨나니까요. 지하철이 24시간 운행되면 일자리가 늘어나게 됩니다.
경제에서는 사람이 움직이는 속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돈도 회전율이 높아야 부가가치가 창출되지요. 속도는 교통에 의해서 뒷받침되거든요. 대중교통체제에 인간의 삶이 맞춰져 있어요. 옛날 농경사회는 저녁 때 해가 지면 집에 들어가 잤습니다. 그런데 전기가 발명되니까 닭도 저녁에 알을 부화해 생산력이 높아졌습니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쳐 정보화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정보화사회에서는 인터넷을 통해 미국 유럽과 상거래가 동시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여기가 낮이면 저쪽이 밤입니다. 우리는 수출을 해서 먹고 살 수밖에 없는 나라여서 저쪽이 낮일 때 밤에 여기서 작업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상거래가 원활해지는 겁니다. 이 시스템을 받쳐줄 수 있는 대중교통이 저녁이면 끝납니다.
지하철이 자정에 끊기는 것은 경제 통행금지라고 생각합니다. 이걸 풀어줘야 경제가 활성화합니다. 출퇴근 시간이 명시돼 있으니까 근로자들이 자기 일만 하고 가버립니다. 술 취한 사람들이나 몇 명 실어나르는 비효율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지하철 24시간 운행에 대해 경제연구소에서 인풋(Input)은 10조원이지만 아웃풋(Output)의 경제유발 효과는 20조원이라는 연구결과도 내놓았습니다. 24시간 지하철이 운행되면 도시산업에 일대 혁명이 오리라고 봐요. 출퇴근 시간이 바뀌고 경제활동 인구가 늘어납니다. 교통변화에 의해 산업대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고 24시간 열차운행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나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까 2.8%만 찬성하고 나머지 97%는 반대예요. 시민의 입장에서는 지하철이 24시간 끊이지 않고 다니면 좋지요. 조합원들 사이에서 ‘24시간 운행은 사용자가 할 얘기지 노동조합 대표가 할 얘기가 아니라는 비난이 나옵니다. 24시간 지하철을 운행하면 노조원이 24시간 계속 일을 해야 한다고 그릇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근로자들의 권익을 지키고 고용을 더 안정시키기 위해서 24시간 운행을 하자고 말하는 건데요.”
―지하철이 24시간 운행하면 심야시간대에 하던 선로보수는 언제 합니까.
“모든 선로가 두 개이기 때문에 중간에 X선이 있어 교행 대피하게 돼있습니다. X 교행선이 두 개 역당 하나 있기도 하고, 한 개 역당 두 개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야에는 한 선에서 보수하고 다른 한 선으로 운행하면 됩니다.
손님이 적으면 한 시간에 한 대씩 운행하다가 승객이 늘어나면 30분에 한 대씩 운행하고, 그 다음에 15분으로 줄이면 됩니다. 다른 나라의 선례만 찾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자신감이 없다보니 선진국 베끼기 패러다임에 젖어 있다고 할까요. 다른 나라가 안하는 걸 먼저 해야죠. 그래야 신기술이지요. 사고의 일대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서울시에서 중앙정부의 노사정 모델을 본 따 서울모델을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고건 시장에 대한 불만은 없습니까.
“지방자치 시대가 되면서 지방자치단체 수준에서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의모델을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채워야 할 부분이 많지만 일단 시도는 좋았다고 봅니다.
민주노총이 발전사 노사분규를 지원하는 총파업을 하루 앞두고 서울지하철 노조가 무쟁의 선언을 해버리니까 초쳤다고 생각하고 저를 밉게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무분규 선언을 했습니다. 지하철이 깃발들고 나가주면 전력에 보탬은 되겠지요. 그러나 이건 죽는 게임입니다. 죽음의 구렁텅이를 뻔히 알면서 거기다가 깃발 하나 더 보태주는 것은 그들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죽여버리는 겁니다.”
―공기업 민영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는 기본적으로 부패 부정 비능률이 척결되기 위해서는 공기업이 사유화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해야 책임도 생기고 정열을 쏟습니다. 남의 것이라고 하면 주인의식이 없어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민영화가 아니라 사유화가 자본주의 논리에 맞습니다.”
―발전노조가 파업을 하는 바람에 3분의 1이 안되는 인력으로 화력발전소를 가동했습니다. 정부에서는 발전소에 그만큼 과다인력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데요.
“한 달 넘게 파업해도 돌아가니까 발전소 근로자들은 자기들의 가치가 떨어졌다 생각하고 실망감이 굉장히 클 겁니다. 나는 뭐냐? 자기들이 없으면 안될 줄 알았는데…. 많은 노동자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죠. 지하철이 파업하면 시민들이 고통당할 것이니 요구를 들어줄 거다. 저는 절대 그런 때는 오지 않는다고 봐요.
미국에서 항공 관제사들이 파업을 하니까 레이건 대통령이 1만5000명을 다 잘랐습니다. 이틀 만에 70% 복귀율을 기록하면서 군병력을 투입해 해결했습니다. 복직이 안되다가 클린턴 대통령 때 600명만 구제됐어요. 그뒤 미국 노동조합들은 파업을 선택할 때 고민을 많이 했지요. 이번에 발전사 노조 파업은 노동계에 적지 않은 고민을 던져줬습니다.”
그는 서울 관악구 신림2동 서울대 근처에 살고 있다. 연립주택에 4000만원 전세를 들어 산다. 나이 50을 넘겨 집장만도 못했으니 훌륭한 가장은 못된다는 지적에 아내로부터도 ‘남편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핀잔을 듣는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배위원장은 집에서 부인과 노동문제를 주제로 가끔 열띤 토론을 벌인다고 한다. 부인은 ‘서초 일하는 여성의 집’에서 고용 상담을 하고 있다. 그의 아내는 지하철노조 수련회에 참석하면 남편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활동해 차기 위원장감이라는 놀림을 받는다.
“아내는 해직기간 10년 동안 한끼 먹고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니까 생활이 말이 아니었죠. 물질적인 불만은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이해해줍니다. 한끼 먹고 사는 방법을 배웠으니까 걱정 말고 정말로 소신 있게 한번 해보라고 말합니다.”
―자동차는 있습니까.
“아내가 엑센트를 굴립니다.”
―자식 농사는 성공했습니까.
“1남 2녀예요. 큰애는 카센터 차려서 먹고 살고, 둘째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합니다. 막내는 연세대 법대 3학년 재학중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자 서울지하철 노조의 한 간부가 “제발 배위원장이 온건파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온건파는 무슨 온건파예요? 투사 중의 투사입니다.”
배위원장은 그러나 ‘온건파’니 ‘노사협조주의자’라는 표현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노동운동 14년 동안 현장에서 부대끼고 고민하면서 확립한 철학에 대해 누가 뭐라고 부르든 개의치 않겠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태도였다.
―대규모 사업장에서 파업 찬반 투표를 하면 대개 찬성표가 압도적으로 나옵니다. 회사에 압박을 가하려는 전략적 의도가 담겨 있겠지만 압도적인 찬성률의 압력에 떠밀려 다른 해결방안을 찾지 못하고 파업에 이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습니다. 노조 지도부는 조합원들이 선출하기 때문에 조합원의 여론과 유리돼 존재할 수 없습니다. 파업이 결정되면 지도부가 앞장서야 하겠지만 파업을 결정하기 전에 예상되는 어려움과 문제점을 조합원들에게 충분히 설명해줘야 합니다.”
배씨는 1983년 8월 서울지하철공사에 입사했다. 그의 꿈은 서울법대에 들어가 법관이 되는 것이었지만 공부를 받쳐줄 돈이 없었다. 서울지하철은 하루 근무하고 하루 쉬는 직장이었다. 쉬는 날 대입 공부를 하자는 생각으로 입사했지만 실제로 들어와보니 하루 근무하고 하루 쉰다는 근로조건이야말로 최악이었다. 몇 번 그만둘까 망설였지만 달리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지하철공사에 들어오기 전 6개월 가량 서울시 9급 공무원으로 잠깐 일한 적도 있다.
―직장 다니며 월급 받아 평범한 행복을 추구하는 대신에 가시밭길 노동운동에 들어선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하철이 서울시 직영으로 운영되다가 1984년 서울지하철공사라는 새로운 기구가 탄생했습니다. 당시에 지하철 공사 사장은 예비역 소장, 이사는 예비역 준장이었습니다. 전체 과장급 이상 간부의 70% 가량이 영관급 이상 군출신으로 채워져 있어 군대문화가 일거수 일투족을 통제했습니다. 근로자의 권리를 얘기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지요.
지하철역에서 돈을 다루는 직원들은 출근하면 사물함에 돈을 영치해놓고 자기 돈으로 50원짜리 커피 한잔 뽑아먹으려고 해도 기록하고 돈을 꺼내야 했습니다. 무고한 직원에게 돈을 ‘삥땅 친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아침에 군대식으로 연병장에 차렷자세를 시켜놓고 움직이면 ‘이 새끼’ ‘저 새끼’ 하고 욕을 했습니다. 실제로 직원을 엎드려 뻗쳐놓고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이게 제대로 된 직장입니까?”
이렇게 지하철공사 직원들의 불만이 쌓여가던중 1987년 6·29가 터지고 공기업도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게 됐다. 법과 제도는 만들어졌지만 공기업은 아직도 노동조합과 거리가 먼 직장이었다.
“산업현장에서 노조결성 운동이 유행처럼 번지자 어느날 조회에서 예비역 소장 출신 사장이 담배 꽁초를 짓밟는 모습을 보이면서 ‘노조를 만드는 사람은 이렇게 하겠다’고 겁을 주더군요. 아무리 돈이 궁하더라도 이런 직장에 계속 다닐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려고 궁리했습니다. 그런데 오기가 발동하더군요. 죽을 바에는 노조라도 한번 만들어보고 죽자는 결심으로 1987년 휴가를 내어 숨어서 노조를 결성했습니다.
비밀리에 연락해 서울역에서 만나 노조결성 집회를 열기로 했는데 나오기로 약속한 200명 중에 18명만 나왔습니다. 당시 법령에 의해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면 30명 이상이 돼야 합니다. 서울역에서 18명이 긴급회의를 했습니다. 어차피 들통나 잘리게 될테니 잘리더라도 노조를 결성하고 잘리자고 결의를 다졌습니다. 18명이 직장으로 돌아가 가까운 사람 한 명씩 데리고 나와 36명을 채우기로 했습니다. 반신반의했는데 58명이 왔더라고요. 바로 결성식을 갖고 노동부에 설립신고를 마치고 노조 설립을 알리는 유인물을 찍었습니다.
당시에는 1사 1노조밖에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회사에서 먼저 어용노조를 만들어 설립신고서를 내면 우리는 완전히 불법노조가 될 판이었습니다. 울산 쪽에서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까 회사에서도 어용노조 결성 준비를 했는데 우리가 한 걸음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이후에 회사 측에서 만나자는 걸 안 만나주며 현장을 돌았더니 한달 만에 노조 가입 대상자 중 99%가 가입했습니다.
내가 초대위원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93개 노조가 합쳐 한국노총과 별도의 서울지역 노동조합협의회(서노협)를 결성했고, 서노협과 마산창원지역 노동조합협의회(마창노련) 등 지역노협의 연합체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를 만들었습니다. 민주노총의 전신입니다.”
―한국노총이 있는데 전노협을 만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노동계에서는 한국노총이 우리 입장을 진실하게 대변해주리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배위원장은 1988년 6월 최초로 지하철 파업을 주도하고 나서 두 달 뒤 영어의 몸이 됐다. 공안당국은 서노협을 결성한 민주노동운동의 핵심에 배위원장이 있다고 판단했다. 나중에 사장실 점거농성에서 찾아낸 관계기관 대책회의 문서에는 배위원장을 구속하고 어떤 사람을 노조위원장 후보로 출마시켜 당선시킬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담겨 있었다.
서울지하철 노동조합은 별도법인으로 주택조합을 결성했다. 당국은 그를 주택조합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그는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무리하게 엮은 형사소추에 대한 사필귀정이었다.
―1988년 지하철 최초의 파업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될 만큼 근로자들의 사정이 절박했습니까. 그때는 지금처럼 대화를 통한 해결수단을 찾아보지 않았습니까.
“노동조합이 결성되니 조합원들의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나왔습니다. 쏟아지는 요구를 제도적인 문제, 직장 민주화, 처우 개선 등으로 분류해 단체교섭 요구서로 만들어 회사에 제시했습니다. 군출신 사장은 노동조합을 상대한 경험이 없으니 노조를 하부조직처럼 다루려고 했습니다. 단결된 의지를 보여주는 수단으로 파업이라는 배수진을 치고 교섭을 했습니다. 그 결과 첫 교섭치고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결국 3시간의 파업을 벌여 합의를 받아냈습니다. 지금은 노조가 파업해도 열차가 다니지만 그때는 모든 열차가 동시에 완전히 섰습니다. 조합원들이 100% 참여하고 비조합원들도 자리를 비우니 회사가 속수무책이었어요. 지하철에서 열차가 완전히 선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마지막일 겁니다. 그 이후에는 파업을 해도 열차가 다녔습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마련한 직제 개편 노사합의안에 대해 찬반투표를 했더니 조합원 99.99%가 참여해 88.5%의 찬성을 얻었어요. 감동이었습니다.”
배위원장은 관계기관 대책회의의 기획에 따라 횡령 혐의로 구속 기소돼 무죄를 받았지만 10년 동안 직장에 복귀할 수 없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배씨는 해고 근로자 복직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였다.
1993년 9월에는 부친이 비명에 숨지는 비극이 발생했다. 그가 전국 해고자 원상회복 투쟁위원회(전해투)를 결성해 마포 민주당사에서 1년 반 동안 농성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전국에서 노동운동을 벌이다가 해고된 근로자는 5800명에 이르렀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이인제씨가 노동부장관을 맡으면서 해고 근로자 복직에 관한 언질이 나왔다. 배일도씨가 앞장선 복직운동이 열매를 거두어 3000여 명이 복직됐지만 그의 이름은 지하철공사 복직자 명단에서 빠졌다. 칠순의 아버지가 고향집에서 아들이 복직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음독을 했다.
“이인제 장관이 노력을 많이 해 당시 분위기로 보아 나는 당연히 복직될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뉴스를 듣고 절망하신 모양이에요. 내가 장남입니다. 집에 가서 아버지 수첩을 보니까 빚은 안 지시고 돈 3000원을 남기고 가셨더군요. 아버지가 사시던 시골집도 남의 집이었습니다.”
―10년 해직기간에는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지냈습니까.
“6공 때는 전노협에서 노동운동을 했습니다. 전노협 대공장 특별대책위원장으로 전국에 산재한 대기업들을 민주화 시키기 위해 돌아다녔습니다. 내가 대기업 노동조합 연대회의라는 것을 만들자 당시 최병렬 노동부장관이 연대회의를 쳤습니다. 대기업 노동조합 연대회의가 수락산에서 회의하고 있는데 공권력이 투입됐습니다. 나는 간신히 빠져나와 6개월 가량 도망다니다가 1991년 8월 고향에서 붙잡혔습니다. 지금은 법조문에서 사라졌지만 제3자 개입, 업무방해 등 혐의가 적용돼 구속됐지요.”
―해고 도피 수감 생활하면서 가족들의 생계는 어떻게 꾸려나갔습니까.
“서울지하철 노동조합에서 도와줬어요. 초대위원장을 지냈고, 지하철 노조원들의 권익을 대변하다가 해고됐으니 돌봐준 거죠. 지하철 노조원들은 조합비로 기본급의 2%를 내는데 그중 1%가 파업 희생자 보상기금이에요. 그것으로는 모자라 한때 우유배달도 했습니다. 반품이 많아 자동차 기름값도 안나와 그만두었어요.”
배씨는 그후 권인숙씨가 부천경찰서 성고문 배상금으로 서울 구로동에 노동인권회관을 세우자 이사로 일했다. 노동인권회관 소장이 김문수(한나라당 국회의원)씨였다. 복직되기 직전에는 1년 반 동안 장기표씨가 하던 신문명정책연구원에서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그가 지금과 같은 상생의 노사관을 다듬은 것은 바로 신문명정책연구원에서다.
―노동운동하느라 주말에 자녀들 데리고 어린이대공원에 놀러가 사진 찍고 자장면 먹는 행복은 즐길 겨를이 없었겠군요.
“행복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영화를 보면 사랑하는 연인들이 잔디밭 위에서 도망가다 쫓고 그러다 쓰러지고…. 그런 것이 행복인가요? 애들하고 경치 좋은 데 가서 김밥 도시락 먹는 게 행복일까요? 예수도 한 여자와 단란하게 살면서 낮에 밭에서 일하고 같이 밥 먹고 웃고 애 낳고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뻔히 고난의 길인 줄 알지만 한번 시작하니까 발을 못 빼겠더라고요. 1987년 노동조합을 결성할 때 조합원들의 뜨거운 마음을 확인한 사람으로서 그들을 외면하고 나 혼자만의 행복을 찾는 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일단 발을 들여놓고 나니 점점 깊이 들어가게 됐습니다. 서노협을 만들고 전노협에 참여하고…. 혹자는 무쟁의 선언을 하니까 ‘저 사람 맛이 갔다’고 비난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노동운동은 근로자들의 행복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외부조건의 변화가 생겨 옛날의 투쟁방식으로는 도저히 안됩니다.”
―노동운동이 폭발적으로 분출했던 1980년대, 1990년대 그리고 21세기의 노동운동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시대가 바뀌면 집회문화도 바뀌어야 하는데 판에 박은 듯 똑같아요. 깃발 세우고 붉은 머리띠 매고…. 1980년대는 권위주의 시대였지만 지금은 문민정부를 거쳐 국민의정부에 이르렀습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와 달리 상생 자율의 노동운동으로 가야 합니다.”
―사용자와 협력하고 대화하자는 이야기를 자주 하다보면 ‘어용’ 시비에 휘말리는 일은 없습니까.
“저에게 어용이라는 딱지를 붙이기는 어렵지요. 내가 민노총의 깃발을 세웠고 내가 걸어온 노선이 민노총의 정통 노선이었습니다. 민주노동운동을 하다가 두 차례 투옥됐습니다. 민노총에서도 나를 어떻게 규정할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일방적으로 어용이라고 매도하기 어려우니 ‘노사협조주의자’라고 부릅니다.
사용자가 하는 이야기를 모두 반노동자적으로 보는 태도는 잘못입니다. 사용자가 ‘줄을 서자’ ‘평화를 사랑하자’ ‘월드컵을 잘 치르자’고 말하면 나쁜 것이고 노조가 그렇게 말하면 좋은 겁니까?
노조위원장으로 처음 무쟁의 선언을 했을 때는 욕을 배부르게 얻어먹었습니다. ‘완전히 가버렸구나’ ‘돈 받고 했구나’ ‘저건 정부의 앞잡이’라고 욕했습니다. 이번에 월드컵 기간 무파업을 선언했더니 욕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신뢰받지 못하는 풍토에서는 여러가지 의심이 생길 수 있지만 사리사욕 챙기지 않고 사명의식으로 근로자를 위해 행동하면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투쟁 중심의 강성 노동운동가에서 대화와 협력을 중시하는 합리적 노동운동가로의 변신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습니까. 싸움하다가 지쳐버린 것은 아닙니까.
“신문명정책연구원에서 사무총장으로 일하며 장기표 원장 그리고 많은 학자들과 토론하며 내가 추구해야 할 노동운동의 실체를 완성해 갔습니다. 지금은 산업문명에서 정보문명으로 전환하는 시기입니다. 삶의 총체적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문명이 바뀌고 있으니까 인간의 사고체계와 생산방식, 조직 운영원리, 인간의 가치관도 전면적인 수정이 불가피합니다.
현대자동차 4만명 근로자가 만드는 이윤보다 빌 게이츠의 소프트웨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찍은 영화 한 편이 훨씬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시대입니다. 노동의 방향이 양과 시간에서 질의 추구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동운동도 자율성 창의력이 확보되는 쪽으로 변화해야 하는데도 여전히 산업사회 방식에 머물러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사용자의 착취 지배 억압에 노동운동이 대립 저항 투쟁으로 맞서는 것이 사회정의였지만 오늘날 그렇게 해서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문명이 달라져 정서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중요한 질문이기 때문인지 답변이 다소 사변적으로 길게 이어졌다. 답변의 곳곳에 공부를 깊이 하고 고민한 흔적이 묻어났다.
“지난날에는 일국 경제체제였는데 이제는 다국 경제체제로 바뀌었잖습니까? 맥주만 하더라도 오비 크라운 둘이 누가 누가 잘하나 해서 땅 따먹기 하던 시대가 끝나버렸습니다. 버드와이저가 치고 들어오는 판이니 일국 경제체제에서 가졌던 사고로는 적응이 안됩니다. 노사가 사용자와 역할을 분담해 공동대응하는 상생의 체제로 만들어야 모두가 승리하는 윈윈(win-win)이 가능해집니다.
소위 신노사문화는 대등한 파트너십에 기초해서 공동목표를 설정해놓고 역할 분담하자는 것입니다. 파업만 없으면 된다는 것이 신노사문화가 아닙니다. 현재 자본도 고통을 겪고 있거든요. 국가 보호의 우산 속에서 특혜를 누리며 자본 축적이 용이했던 시절이 지나갔습니다.
자본이 쓰러지고 공장이 다른 나라로 이전해가면 산업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서 근로자도 자리를 잃습니다. 상생을 해야 하는 공동운명체로 바뀐 거죠. 내 몫을 너무 많이 챙기는 것이 결과적으로 내게 불이익이 될 수 있습니다. 내 것을 많이 챙길수록 그것 때문에 공동체가 붕괴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예로 대기업 근로자들이 사용자를 압박해 임금을 높이면 기업주는 수천개 협력업체의 단가를 낮춥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인건비가 낮아져요. 대기업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이 그보다 단결력이 약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결과로 바뀌어버립니다. 노동운동이 활성화하면서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 격차가 벌어졌습니다. 남녀간 학력간 임금격차, 사무직과 생산직의 임금격차는 줄어들었는데 기업 규모별로는 격차가 오히려 커졌어요. 노동운동의 방향 설정이 잘못 됐기 때문입니다.”
―노조위원장은 조합원들이 월급 많이 받도록 해주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부도 원칙을 지켜야 된다고 봐요. 무조건 머리 박고 나오면 타협하는 식이어서는 안됩니다. 경제원칙도 아랑곳없이 그냥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정책을 쓴다고 해서 대통령과 정부의 지지도가 높아지지는 않습니다. 근로자들이 시끄럽게 떠들면 그냥 들어주다 보니까 노동자들은 계속 그 방법을 써야 더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 고착화하는 거예요. 이렇게 쉽게 문제를 풀면 힘의 대결 문화가 끝없이 되풀이됩니다.”
―서울지하철 노조를 한국 최초의 정책노조로 탈바꿈시키겠다고 공약했던데 정책 노조의 개념이 뭡니까.
“노동운동의 목표가 뭡니까? 노동자가 행복하고 자유롭고 인간답게 사는 세상입니다. 그걸 이루는 수단으로 정책을 만들어 다각도로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내 몫을 많이 차지하려는 운동을 폐기처분하고 정책의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이루는 수단을 다양하게 연구 검토해 합리적으로 이루려고 시도하는 노동조합이 바로 정책 노조입니다.”
작년 2월에 서울지방법원이 서울지하철 노조의 불법 파업으로 인해 회사가 입은 손해 15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직전 노조위원장 때 이루어진 불법 파업 때문에 빚어진 일이지만 배위원장은 이 판결에 대해 노동3권을 제약하는 판결이라고 불만을 표시한 바 있다.
―법률 논리로 볼 때 불법 파업을 포함한 모든 불법 행위에는 손해배상 책임이 따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답변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악법도 법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제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돼야겠지요. 현행법으로 서울지하철공사는 필수 공익사업장으로 지정돼 파업 자체가 원천적으로 봉쇄돼 있습니다.
내가 위원장을 맡고 나서는 철저히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의 중재절차를 존중합니다. 중노위는 법률에 기초한 합법적인 기구입니다. 직전 위원장 때는 중노위를 친정부 친사용자로 보아 무시했지요. 불법 파업에 대한 책임은 당사자들이 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 파업을 하게 된 배경이 3800명을 정리해고하는 구조조정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구조조정은 협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대화의 채널이 끊겨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 파업이었습니다. 불법의 상당 부분이 사회안전망을 제대로 갖추어놓지 않고 구조조정을 강행한 정부에 있습니다. 정상이 참작되어야 하는 사유입니다.”
서울지하철 공사의 전체 직원수는 대략 1만명이다. 지하철은 크게 다섯 개의 시스템으로 구성돼 있다. 열차를 운전하는 승무, 승객 서비스를 맡는 역무, 차량을 고치고 정비하는 차량, 신호체계 레일 통신을 담당하는 기술 그리고 행정이다. 1만명 직원 가운데 노조 가입대상은 9400명. 오픈숍으로 노조의 가입과 탈퇴가 자유롭지만 노조 가입률이 98%에 이른다.
회사 월급을 타면서 노조 일만 하는 전임자는 25명. 노조원들은 기본급에서 2%를 노조회비로 낸다. 이중 1%는 파업으로 인한 해고근로자 생계비 지원에 쓰인다. 한때는 해고자가 252명에 이르렀지만 지금은 대부분 복직되고 20명 가량이 해직자로 남아 있다. 서울지하철 노조의 1년 예산은 18억원.
―불법 파업을 해 해고되고, 다시 해고자를 복직시켜달라고 요구하는 불법 파업이 일어납니다. 이런 악순환을 단절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불법이 또 불법을 낳습니다. 임금인상 같은 본질은 어디로 가버리고 손해배상 징계 같은 문제를 처리하느라 노조가 다른 일을 못할 형편이에요. 나는 그 고리를 끊기 위해서 파업을 하지 않고 대화로 문제를 풀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까 해고자 수가 줄어들고 있죠. 이번에도 과거의 일을 청산하자고 건의해 7명 복직합의를 했어요. 나머지 13명도 잘될 겁니다.”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불법파업과 폭력행사를 해서 형사처벌 받고 해고된 사람들을 다시 복직시켜 달라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까? 그 사람들을 다시 복직 시켜주니까 불법 파업을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복직된다는 생각에서 쉽게 불법파업에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요.
“인간의 행위가 항상 완전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사면복권이 있는 것입니다. 교도소에서도 범죄자에 대한 응징보다는 교화를 위해 힘쓰지 않습니까? 개전의 정을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는 사회에 동참시키려는 노력이 따라줘야 합니다. 응징과 처벌만으로 공동체가 유지될 수는 없습니다.”
―얼마전에 택시를 탔더니 택시기사가 자기 회사 노조간부들이 운전도 하지 않고 월급을 받는다고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하더군요. 노동운동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가 부족한 사람의 말이지만 노동귀족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회사에서 노조 전임자들의 월급을 지급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을 갖고 있습니까.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조합원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일을 하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었죠. 상층부에는 노동귀족이라는 지적을 받을만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택시 기사의 지적에 타당한 일면이 있어요. 노동조합 전임자들은 노동자들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활동하므로 원칙적으로 사용자로부터 임금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전임자 임금을 조합에서 주는 것이 맞다고 보는군요. 거기에서 민노총과는 차이가 있어요.
“민노총도 기본적으로는 전임자 임금을 회사가 줘야 된다고 보지는 않지만 과도기적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아직 자생력이 없는 노조가 많습니다. 300명 규모의 노조가 있으면 전임자 한 사람을 둬야 하는데 저임금에서 1%를 떼 전임자를 쓸 수는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노동운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노동조합은 기본적으로 민주성 자주성이 있어야 합니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돼야 자주성을 표명할 수 있거든요. 회사의 돈을 받으면 종속성이 생깁니다. 서울지하철 노조처럼 큰 곳은 전임자 임금을 줄 여건이 돼요.
회사가 노동조합을 대등한 파트너십으로 볼 것인가? 어쩔 수 없이 상대하는 거추장스러운 기구인가? 노동자들이 일사분란하게 자율적으로 공동의 목표를 실현하는 파트너십이 된다면 회사 전체로서도 큰 이익이 됩니다.”
배위원장은 현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1998년 9월 10년의 해직생활을 청산하고 복직해 해고되기 직전에 근무했던 이화여대역으로 발령이 났다. 10년 공백 때문에 직급은 여전히 최하위로 1년 동안 매표 승객안내 등을 하다가 노조위원장에 당선됐다.
―민노총과 한국노총이 단위노조 확보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노사분규가 과격해진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한국노총과 민노총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솔직한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배위원장이 전국공기업노조 협의회라는 걸 만들어 제3노총을 추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제3노총은 기존의 한국노총이나 민노총과 어떻게 다릅니까.
“1987년 6·29 이후 노동계에서 7월부터 노조결성 운동이 벌어져 이러한 의지가 자연스럽게 모아져 민주노총이 탄생했습니다. 그때 새로운 조직을 건설할 거냐, 아니면 기존 조직을 민주화 시킬 거냐로 논의가 뜨거웠습니다. 기존 한국노총으로 들어가서는 우리가 원하는 조직으로 바꿀 수 없다는 의견이 우세했어요. 한국노총을 민주화시키기 위해서도 새로운 노총이 건설돼야 한다는 생각이 대세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결성되고 나니까 한국노총과 경쟁체제에 돌입했습니다. 누가 더 강하게 투쟁하느냐 하는 소위 선명성 경쟁의 늪에 빠져버렸어요.
다양화 분권화 지방화 자율성이 요구되는 정보화 시대에 획일적인 투쟁으로 노사관계를 고착하는 노동운동은 고쳐져야 합니다. 노사관계를 계급의 대립으로 보는 시각도 틀렸습니다. 지금 무슨 계급이 있습니까? 과거 이론에서 무산자는 애 낳을 수 있는 자유밖에 없는, 정말 가지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당장 일하지 않으면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근로자였습니다. 이때 성립된 노동운동 논리가 한국에서 지금 여과 없이 그대로 이전되어 있습니다.
서울지하철공사 같은 공기업은 사기업과 지위와 역할이 크게 다릅니다. 민노총이나 한국노총은 완전히 사기업 공기업이 다 모여있는 집합체거든요. 공기업 부문은 국민과의 이해관계,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신분상 지위가 사기업과 다릅니다. 다양화 시대에 걸맞게 공기업 부문을 모은 새로운 조직체가 당연히 나와야 합니다. 지금 양대 노총 외에 제3노총을 만들어 헤게모니 투쟁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기자들이 제3노총이라고 이름 붙여 기사를 쓰는 바람에 내가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제3노총은 배일도 한 사람이 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많은 분들의 동의가 있어야 조직체로 건설될 수 있습니다. 나는 제3노총이라는 이름이 싫습니다. 그저 새로운 노동운동의 흐름이라고 이해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에서는 해가 갈수록 노동조합 가입자수가 줄어들어 노조조직률이 선진국에서 가장 낮은 12%다. 미국노동총동맹(AFL-CIO)은 노조 조직률을 높이기 위해 전체 예산의 30%를 투입한다. 미국 기업들은 경영환경이 어려워지면 감원부터 하고 나서는데 강력한 GM 노조도 조합원 해고를 막지 못했다. 이렇게 고용의 유연성을 갖춘 미국 영국의 경제가 유럽보다 훨씬 잘나간다는 평가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