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 인구의 200배였던 명나라, 분열로 패망
구습 뛰어넘은 통찰로 분열 종식한 칭기즈칸
‘국난 극복’ 비전 제시해 내분 종식한 베트남 쩐(陳) 왕조
국정 장악 위해 반대파 껴안았던 링컨
반대편도 지지할 새 비전 제시로 단합 이뤄야

3월 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긴급 의원총회에 참석한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와 배현진 의원. 뉴스1
민주당도 당내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과 정청래 대표를 중심으로 한 갈등이 예상보다 심각하다고 한다. 다만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임기 초 대통령의 인사권은 서슬이 퍼렇다. 이재명 대통령은 다수의 팬덤뿐 아니라 오랜 정치 경력으로 당내 세력도 막강하다. 더구나 진보좌파 진영은 과거 대학가 운동권의 ‘민주집중제’에서 유래하는 강력한 규율과 복종의 전통이 있다.
그래서 국민의힘 지지자들은 오는 지방선거가 김무성 전 대표의 옥새 파동을 겪었던 2016년 총선이나 윤-한 갈등 속에 치러진 2024년 4월 총선의 재연이 될 수 있다고 탄식한다. 선거든 전쟁이든 분열된 세력이 승리한 경우는 역사에 없었다.
만주족 인구의 200배였던 명나라, 분열로 패망
가장 극적인 예가 명나라의 멸망이다. 당시 한족의 인구는 최다 2억 명, 만주족은 100만 명이었다. 전 세계 은이 명나라로 모였고, 명나라가 인삼 무역을 끊으면 만주족은 굶을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 병력은 서류상 200만 명이었는데, 청나라는 10만 명밖에 안 됐다. 국력의 차이가 비교도 하기 힘들었다.그런데도 명나라는 자멸했다. 당파싸움 속에 명장 원숭환이 숭정제(제16대이자 마지막 황제)에게 처형되고, 숭정제는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이 몰려오자 자결하고, 산해관(중원과 만주를 잇던 핵심 군사 요새)을 지키던 장수 오삼계는 이자성이 자신의 첩을 범하자 청에 투항했다.
북경을 빼앗긴 뒤에도 명나라는 살아남을 기회가 있었다. 일부 황족과 관리들이 남경으로 달아나 홍광제(남명의 1대 황제)를 새 천자로 옹립했다. 강남의 기름진 토지와 상업은 왕조를 지탱하기에 충분했다. 남송도 거기서 150년간 여진과 몽골의 공세를 버텨냈다.
그러나 방탕한 홍광제는 국정을 장악하지 못했고, 신하들은 편을 갈라 싸웠다. 병권을 쥐고 있던 좌량옥이 간신 마사영을 처단하겠다고 남경성을 공격하자, 남명 조정은 양자강을 지키던 병력을 차출했다. 국경에 설치한 강북사진(江北四鎭)의 네 장수도 임지를 영지로 여기며 서로 영토를 노리고 내전을 벌였다. 결국 양주에서 홀로 분전하던 마지막 충신 사가법이 전사하자 남명 정권도 무너지고 말았다. 그들 모두에게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지만 분열의 대가는 패망이었다.
구습 뛰어넘은 통찰로 분열 종식한 칭기즈칸
그러면 분열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끝없는 분쟁과 살육의 땅에서 태어나 수십 개 부족을 하나로 묶고 역사상 최대 제국을 세운 칭기즈칸의 이야기를 많이 한다.칭기즈칸은 몽골의 관습에 순응해 살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삶의 출발이 너무 열악했다. 부족장이던 아버지가 독살당한 뒤 그의 가족은 친척들에게 버림받았다. 어머니가 풀뿌리를 캐는 동안 형제들은 들판의 쥐를 사냥했다. 그가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 휘하 병력은 친형제 네 명이 전부였다. 그는 함께 싸우겠다는 자들의 귀천을 따질 수 없었고, 전리품의 독점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칭기즈칸은 수시로 동맹을 바꿨다. 금나라의 지원으로 당시 최강이었던 타타르족을 공격해 승리했고, 의형제 자무카와 대립하자 옹칸과 힘을 합해 격파했다. 아버지처럼 믿었던 옹칸에게 배신당해 쫓길 때 그의 곁을 지킨 19명의 전사가 무려 아홉 부족 출신이었다. 그들은 발주나 호수의 흙탕물을 마시며 생사를 같이하자고 맹세했다. 전통적 부족 관념을 벗어난 새로운 정치체제가 출현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때 칭기즈칸이 옹칸에게 보낸 구술 편지가 사서에 남아 있다.
‘나는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며 섬겼는데, 어찌 아버지가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으려 하십니까? 감언이설로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자들이 있습니다. 아침에 하는 말과 저녁에 하는 말이 다른 자들의 말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우리가 수레의 두 바퀴처럼 서로 도울 때 한쪽이 빠지면 수레가 가지 못하듯 우리도 그러합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옹칸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동시에 사방으로 전령을 보내 병력을 소집했다. 적을 방심케 하고 허를 찌르려 한 것이다. 수많은 전사가 그에게 모여들었다. 아직은 칭기즈칸 세력이 불리하지만 그에게서 새로운 기회와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 번의 공격으로 옹칸을 무너뜨리고 케레이트 부족을 흡수했다.

싱가포르·필리핀 국빈 방문 일정을 마친 이재명 대통령이 3월 4일 경기 성남 서울공항에 도착해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뉴스1
칭기즈칸은 1206년 칙령을 내려 몽골인을 납치하거나 노예로 삼는 행위를 금지하고, 시베리아 부족과 위구르족까지 친족관계를 확대했다. 그러한 포용력이 몽골의 작은 부족을 대제국으로 성장시키는 토대가 됐다.
13세기 베트남의 무력 통합과 놀라운 정치력
몽골이 전 세계로 세력을 뻗어나갈 무렵, 13세기 베트남 왕조는 리(李) 씨에서 쩐(陳) 씨로 교체됐다. 쩐 씨는 본래 해적 집단이었는데, 내란을 피해 온 태자를 모시고 중앙에 진출한 뒤 여러 귀족 가문을 밀어내고 권력을 잡았다. 리 왕조의 마지막 여왕인 찌에우타잉과 쩐카잉(쩐 왕조 태종)의 결혼으로 리 왕조가 멸망하고 쩐 왕조가 들어선다.그 한가운데 쩐카잉의 사촌 형인 쩐투도(陳守度)가 있었다. 쩐투도는 극단적 양면의 인물이었다. 그는 음모와 협박으로 왕조를 교체한 뒤 리 씨 왕족을 거의 모두 학살했다. 왕비가 아기를 낳지 못하자 쫓아냈고, 분노해 왕위를 버리고 달아난 왕을 군대를 끌고 쫓아가 다시 데려올 정도로 무도했다.
반면에 그는 유능한 정치가였다. 전권을 쥐었지만 왕위는 탐하지 않아 후대 권력자들에게 기준을 제시했다. 관리들에게 급여를 지급해 정부를 전문가 조직으로 만들었고, 법전 편찬으로 규율을 강화했다. 황무지를 개간하고, 도량형을 통일하고, 수공업 발전에 힘썼다.
몽골의 위협을 감지한 쩐투도는 가혹할 만큼 자원을 징발해 전쟁에 대비했다. 모든 성인 남자를 정규군·예비군·사병·민병 등 거미줄 같은 조직 어딘가에 소속시켜 훈련했다. 대몽항쟁 때 패전을 거듭해도 끝없이 충원되던 병력 자원의 비밀이 거기 있었다.
개전 직전 쩐투도는 25세의 쩐꾸옥뚜언(陳國峻)을 전선 사령관으로 깜짝 발탁했다. 쩐 씨 가문 개창자의 종증손으로 잠재적 최대 정적이었다. 쩐투도는 수많은 유혈과 가혹한 세금으로 원한을 샀다. 백성들은 진정한 왕위 계승자인 쩐꾸옥뚜언이 언젠가 쩐투도를 타도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라 꿈꿨다. 그런 인물이 선두에 서는 것보다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
사실 쩐 씨 왕조는 거의 모든 요직을 왕족으로 채우는 ‘종실 독점 지배체제’였다. 왕조 교체 이후 오랜 내분은 종식됐지만, 지배층의 불만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쩐 왕조는 뛰어난 인재들을 대거 쩐 씨로 개명해 왕족에 편입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몽골과의 싸움에서도 그런 왕족들의 활약이 컸다.
몽골은 1차 침략이 실패한 지 26년 뒤 2차 침략에 나섰다. 그사이 남송을 정복해 침략의 규모가 훨씬 더 커졌다. 민심이 흔들리자 베트남 쩐캄(쩐 왕조 3대 황제)은 전국의 덕망 있는 촌로들을 모아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난생처음 대궐에 들어와 임금의 얼굴을 본 노인들은 죽더라도 함께 싸우겠다고 외쳤다. 이 결의를 통해 쩐캄은 대몽 항전이 백성 모두의 전쟁임을 각인시켰다. 750년 전 이러한 정치적 이벤트를 구상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쩐캄은 또 당시 실권자였던 쩐꽝카이(陳光啓) 대신 전쟁 영웅 쩐꾸옥뚜언을 다시 불러 군통수권을 맡겼다. 쩐꾸옥뚜언은 사이가 나빴던 쩐꽝카이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협력은 가장 어려웠던 몽골의 2차 침략을 막아내는 큰 힘이 됐다.
13세기 몽골과 이에 맞선 베트남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 반대 세력을 제압하고 오랜 내분을 종식했다. 그 통합을 유지하기 위해 ‘실력에 의한 보상’ 또는 ‘국난 극복’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모든 구성원을 설득하고 동참시켰다. 근대 이후에도 이 분열 극복의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할 것이다.

미국 워싱턴DC 링컨기념관 안에 있는 링컨 대통령 조각상. 링컨기념관 홈페이지
국정 장악 위해 반대파 껴안았던 링컨
미국인들이 갈라져 싸운 남북전쟁 때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보여준 모습을 살펴보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2012년 영화 ‘링컨’은 전선으로 떠나는 젊은 병사들을 배웅하는 링컨 대통령의 착잡한 표정으로 시작한다. 전황은 북군의 우세로 기울고 있었고, 링컨이 원칙을 굽히면 더 이상의 희생도 막을 수 있었다.그러나 링컨은 전쟁이 끝나 남부 의원들이 돌아오기 전에 수정헌법 13조를 통과시키려 했다. 노예제를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려면 민주당 하원의원 중 무려 20명을 찬성이나 기권으로 돌려놓아야 했다. 공화당 내부도 나뉘었다. 당 원로인 제임스 블레어는 휴전 협상을 압박했고, 이를 받아들이면 급진파가 링컨 지지를 철회할 것이었다.
스필버그 영화 속에서는 윌리엄 헨리 수어드 국무장관이 나서 ‘더러운 손’이 됐다. 정치 브로커들을 동원해 민주당 의원들에게 공직을 제시하며 매수했다. 링컨은 블레어의 요구대로 남부연합 휴전협상단을 초청하고는 워싱턴에 못 들어오게 막고 의회에는 협상 사실을 애매하게 부인했다. 그 결과 수정헌법 13조가 가까스로 하원을 통과했다.
링컨을 성인으로 알고 있던 관객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링컨의 숨겨진 모습은 훨씬 더 많다.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취임도 하기 전에 남부 주들이 연방을 탈퇴했다. 임기 말의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은 “이를 막을 권한이 없다”며 수수방관했다. 링컨도 내전을 막으려 노력했지만 취임사에서 “연방의 자산은 반드시 지키겠다”고 원칙을 분명히 했다. 남부의 발포로 전쟁이 시작되자 링컨은 즉시 전시체제에 들어가고도 의회 소집을 3개월이나 미뤘다. 자칫 평화론자들이 전쟁 준비를 방해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링컨은 남부에 동조하는 수만 명을 영장 없이 구금하고, 대법원장이 석방 판결을 내리자 군대에 이를 무시하라고 지시했다. 영화에 나오는 수정헌법 13조도 유럽 국가들의 남부 지원 명분을 막고, 장차 흑인 유권자들의 표로 공화당 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물론 그런 부정적인 모습만 있는 건 아니었다. 링컨은 시골 출신의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라는 인식이 공화당 내에서도 강했다. 국정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정치계 중진의 도움이 절실했다. 링컨은 먼저 공화당 대선 경쟁자였던 수어드를 국무장관에 임명했다. 그는 링컨의 가장 충실한 조언자가 됐다. 그리고 링컨은 오랜 악연이 있던 민주당 에드윈 스탠턴을 전쟁장관 자리에 앉혔다. 내각에 적을 들인 격이라며 반대가 심했지만, 스탠턴은 군수 분야 부패를 척결하고 철도와 전신망을 유기적으로 통제해 북군의 병참을 혁신했다.
스필버그 영화 장면처럼 링컨은 종전 수개월 전 버지니아주 포트먼로에서 남부연합 협상단을 만났다. 링컨은 남부연합이 교전국이 아니라 반란군 자격이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 때문에 전선에서 더 많은 젊은이가 피를 흘렸지만 미국 연방의 지위는 굳건히 유지됐다.
반대편도 지지할 새 비전 제시로 단합 이뤄야
심리학에서는 갈등의 해결 유형을 경쟁형, 회피형, 수용형, 타협형, 협력형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심리학 교과서는 당연히 협력형 갈등 해결을 권한다. 모두가 만족하는 ‘제3의 대안’을 찾는 게 지속가능성 면에서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다.정치집단 안에서 이것이 얼마나 가능할까. 미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은 정치를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으로 정의했다. 그런데 모든 자원은 한정적이고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 가치 배분을 둘러싼 갈등을 협력만으로 해소하기는 쉽지 않다.
지금의 여야는 모두 내부 갈등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국민의힘은 갈등 해결의 기제가 보이지 않는다. 건국 이후 오랫동안 대한민국은 국가기관 자체가 보수우파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기구였다. 그 안에서 성장한 명망가들이 우파 정당에 모여 지도부를 구성해 왔다. 선거에서 패배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생각하는 민주당과 달리 국민의힘 지도부 인사들은 정당 밖에 자신이 이뤄놓은 성과가 많다. 당이 패배하면 그 세계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래서 함께 무너질지언정 당내 경쟁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다. 국민의힘이 수차례 압승할 수 있는 조건에서 참패를 거듭해 온 이유다. 등 뒤로 만주족 군대가 몰려오는데 자기들끼리 창칼을 부딪치던 명나라 군신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 분열을 극복하려면 국민의힘은 승패를 결정지을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 불복이 무의미해지도록 권한을 집중해 단합할 수밖에 없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그렇게 구성된 지도부는 반대편 지지자들도 동의하고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그렇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