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대선에 이르기까지 미국에서 이념 경쟁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의 몇 가지 패턴을 읽을 수 있다. 첫째, 지배 이념의 급진적인 교체는 기존 이념의 대실패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1920∼30년대 자유방임주의적 정책에 대한 반작용으로 뉴딜 진보주의가 등장했으며, 50여 년이나 계속된 뉴딜 진보주의 지배와 그 실패에 대한 반작용으로 레이건의 신자유주의가 나타났다. 클린턴이 말했듯이 진보주의가 시장의 무절제에서 시장을 구하려는 시도였다면, 신자유주의는 정부의 무절제에서 정부를 구하려는 시도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존 지배이념이 크게 실패하면 그와 상반된 이념으로 대체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둘째, 집권당의 이념이 아직 지배적인 위치를 유지할 때, 야당은 여당의 이념을 일부 수용하는 중도노선을 채택해야 선거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민주당의 뉴딜 진보주의가 지배 이념이었을 때 공화당의 아이젠하워와 닉슨은 중도 전략으로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레이건의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부시 정부를 무너뜨린 클린턴의 ‘제3의 길’도 전형적인 중도 전략이었다.
반면에 야당이 집권당의 지배적 이념에 정반대되는 이념으로 성공한 사례는 찾아 보기 힘들다. 1964년 보수노선으로 당시 지배 이념인 진보주의에 대응했던 골드워터가 참패했고, 1984년과 88년 전통적인 뉴딜 이념으로 당시 지배 이념인 레이건의 신자유주의에 도전했던 먼데일과 마이클 듀카키스도 패배했다.
셋째, 특정 이념과 이를 처음 표방하는 정당의 성쇠는 시기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레이건의 신자유주의는 공화당이 1992년 선거에 패배한 이후에도 미국과 세계의 정치·경제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민주당이 작은 정부, 규제완화, 조세감면 등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지지하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혁명적인 이념체계로 집권한 정당이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정책과 경제 성과의 불확실한 관계에 있다. 경제 성과는 경제정책 이외에 많은 변수에 의해 결정되지만, 유권자들은 이에 관계없이 경제실패의 책임을 집권당에 추궁하게 된다. 이에 따라 그 정당의 정책 노선은 지지를 잃고, 그 공백을 야당의 정책노선이 메우게 되는 것이다. 집권당이 초기의 성공 이후 자만과 안이함에 빠져 국정에 소홀해지고, 유권자들이 장기 집권을 의도적으로 견제하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 된다.
넷째, 미국 정당의 이념은 20세기를 거치면서 변증법에서 말하는 정·반·합의 전개과정과 흡사한 수렴과정을 겪어왔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이념대결을 비교해보면, 고어 후보의 제3의 길과 부시 후보의 ‘온정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 nservatism)’는 거의 동일한 노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은 이념의 수렴화 현상은 21세기에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제3의 길’에 대한 부시의 대응
2000년 대선에서 고어가 내세운 제3의 길에 대응한 공화당의 딜레마는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 클린턴·고어의 ‘제3의 길’ 자체에 대한 이념적 대응 문제였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성공적인 집권당의 이념에 이기는 방법은 그 이념에 한층 가까운 중도 이념을 선택하는 것이다. 부시 후보도 이를 인식하고 초기부터 온정적 보수주의라는 중도노선을 표방했다.
경제 분야에서 민주당이 이미 기존 공화당 노선을 대폭 수용했기 때문에 부시는 두 당의 견해 차이가 상대적으로 컸던 사회와 복지 분야에서 민주당에 가까운 노선을 선택해야 했다. 즉 여성과 소수 인종의 공화당 지지도를 떨어뜨렸던 낙태금지, 차별수정계획(affirmative action) 반대를 완화하여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또한 부시는 사회보장, 교육, 빈곤 문제에서도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 공화당도 이런 정책해결에 관심이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둘째, 부시는 공화당의 전통적인 표밭이던 남부와 서부를 굳게 지키고 중부와 동부의 중립지역을 공략해야 했으나, 단일주로서는 가장 큰 선거인단을 선출하는 캘리포니아가 이 전략의 걸림돌이 됐다. 전통적으로 보수 성향이 강했던 캘리포니아는 1970, 80년대 라틴계 인구의 급증으로 민주당 우호지역으로 돌아섰으나 캘리포니아는 처음부터 포기하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주였다.
셋째, 민주당 정부의 약점인 도덕성 상실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문제였다. 미국 국민이 클린턴 스캔들에 실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불만이 고어에게 옮겨질지 확실치 않았고, 과거 음주 운전과 여성편력 경력이 있었던 부시 자신도 선거에서 도덕성을 마냥 강조할 수는 없었다.
넷째, 텍사스 주지사 외에는 공직 경험이 없는 부시가 자신의 경력을 어떻게 방어해야 하는지에 대한 딜레마였다. 워싱턴의 기존 정치권에 대한 일반의 반감이 팽배한 분위기에서 공직 경험 부족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막상 TV토론 등 본격적인 선거운동과 정책 토론이 시작되면 부시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부시의 전략은 자신의 지지세력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부동표 공략에 나서는 중도노선 선택이었다. 미국의 유권자 중 공화당 지지세력은 기업가 그룹·보수 종교계 (Religious Right)·백인 남성 등이고, 민주당 우호세력은 노조·소수인종·환경단체 등이다. 한편 전통적인 부동층으로는 중산층 여성·천주교인·노년층·라틴계 유권자들인데, 1996년 대선 당시 클린턴 후보는 이들 부동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1996년 대선에서 클린턴 후보는 중산층 여성그룹에서 16%, 천주교인에서 11%, 고령층에서 5%, 라틴계에서 48% 차이로 공화당의 돌 후보를 따돌렸다.
부동층을 공략하기 위해 부시 진영은 우선 ‘담론의 정중함(civility of discourse)’과 개인의 책임성을 강조하면서 클린턴과 고어 정부의 도덕적 약점을 조용하게 공략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또 클린턴 정부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군부, 고소득층 등을 겨냥해 국방개혁, 조세감면을 제시하고 무엇보다 대통령직의 권위와 신뢰회복을 약속했다.
부시 진영은 또한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영역이었던 복지·교육 분야에서 새로운 정책을 제시함으로써 그 동안 민주당을 지지했던 부동층의 지원을 호소했다. 연금제도의 개혁, 은퇴한 노령 시민을 위한 처방약 제공, 그리고 교육개혁 등이 민주당 성향의 부동층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선거 기간 중 부시 후보는 깅리치 전 하원의장으로 대표되는 공화당 내 보수 진영의 목소리를 배제하고 자신을 온정적인 보수주의자 또는 통합을 이끌어내는 사람(uniter)이라고 홍보했다. 하지만 여성 후보와 소수 인종의 표를 인식하여 낙태, 동성연애, 차별수정계획 등의 문제에 대해 모호한 주장으로 일관했다.
부시 후보는 서민적이고 호인적인 자신의 이미지를 십분 발휘, 자신을 ‘행동하는 개혁가’라고 칭하고 ‘진실한 국민을 위한 진실한 계획(real plans for real people)’을 제시한다는 선거 테마를 개발했다. 이 전략은 물론 과장되고 엘리트 의식이 강한 고어와 차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부시 진영은 공화당 보수파의 지나치게 강경한 언어와 행동이 국민의 지지를 잃게 한 근본 원인이라고 판단, 화해적이고 통합적인 선거운동에 역점을 두었다. 그 예로 상대의 약점을 부각시키는 부정적 광고는 당에게 맡기고, 부시 후보의 광고는 모두 긍정적인 메시지만을 담았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