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1992년) 12월10일 만난 한 무기상은 날이 갈수록 무기오퍼상 노릇이 힘들어진다며 말문을 열었다. 온갖 투서와 인신모략이 횡행하고 걸핏하면 국회나 언론에서 흠집을 내기 일쑤여서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낀다는 이 오퍼상은 1985년부터 무기무역에 뛰어들어 8년째 활약하고 있었다.
2∼3년 전에는 오퍼실적 상위를 랭크할 만큼 무기무역으로 재미를 보기도 했던 이 오퍼상은 국회와 언론에 로비업체로 낙인이 찍히면서 탄탄대로에 제동이 걸렸다.
(중략) 이 무기상은 다시 심기일전, 최근 다른 무기를 군에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추가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터에 그 무기를 두고 또다시 말썽이 일기 시작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무기를 국방비를 축내가면서 도입한 것은 틀림없이 오퍼상의 로비 때문일 것’이라는 일부 군 주변관계자들의 반응 때문이었다.
특히 국방과학연구소 본부장 출신의 한 관계자가 그를 성토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본부장으로 있을 때 수뢰 루머를 퍼뜨려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던 사람으로 이 오퍼상을 지목한 그는 ‘결코 그 오퍼상에게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밝히면서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혹평했다. 또한 이 관계자는 그 오퍼상이 군관계자에게 접근, 일을 성사시켜주면 돈을 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가 막상 일이 성사되면 ‘나 몰라라’ 한 적도 있었다며 비난했다.
오퍼상에 대한 비난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이 오퍼상은 무기도입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군요직에 있는 사람들과 두터운 친분관계를 만들어놓고 정기적으로 ‘관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전작업을 마친 다음 군 요직과의 친분관계를 이용, 필요하지도 않은 무기를 도입해 사복을 채웠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오퍼상과 친분이 두터운 군인사로 최모 육본간부를 거명하기도 했다.
이같은 주장에 대해 확인을 요구하자 오퍼상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인 후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대단히 악의적’이라는 말로 포문을 열었다.
“그 사람은 아마 나와 경쟁관계에 있는 오퍼상이거나 그 주변인물일 것입니다. 내 회사를 없애면 자신들의 몫이 커지게 되니까 질투·시기하다 못해 음해하는 것이겠지요. 뇌물 운운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모략입니다.”
그는 이어 군 요직과의 친분관계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나는 원래 사람 사귀기를 좋아해서 이 분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고 사실 군 요직에 친한 분들이 많습니다. 무기중개 사업을 하려면 군 요직과의 친분관계는 필수요건 아니겠습니까.”
통신장비 수입하려 국산화 방해공작
기사에 나타나다시피 당시 김영완씨와 이상철 전 장관의 관계는 극히 적대적이었다. 그 이유는 군 무선통신장비를 둘러싸고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이다.
국방과학연구소 본부장이자 책임연구원이었던 이 전 장관은 군장비 국산화전략의 일환으로 국방부 차세대 FM무전기, 차세대 이동전술통신망 등을 개발중이었는 데 반해, 김씨는 이를 미국에서 수입하려고 시도했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과거의 악연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일까. 이 전 장관은 김씨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김영완씨는 1980년대 후반에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소개시켜준 사람이 누군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내가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개발중이던 군 통신장비를 수입하려고 갖가지 방해공작을 폈다. 하지만 내 개발은 성공했고, 그의 수입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것뿐이다. 김씨 때문에 내가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 전 장관은 앞서 인용한 한 월가지에서 본부장으로 있을 때 수뢰 루머를 퍼뜨려 자신을 곤경에 빠뜨렸던 사람으로 김씨를 지목했었다.
이 전 장관은 결국 완제품 개발에 성공해 김씨의 시도를 무산시켰지만 금품수뢰 등 군내 갖가지 소문과 잡음에 휘말려 1991년 5월 연구소를 그만두고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통신망연구소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 과정에 군부내 핵심실세들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던 김씨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에서 권 전 고문이 1990년 국정감사에서 김씨의 군내 배후인물로 지목한 C씨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C씨는 육사 11기로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김복동(金復東), 백운택(白雲澤) 등과 함께 하나회의 뿌리인 오성회를 결성했던 멤버 중 한 명이다. 그는 동기생들 중 가장 먼저 별을 단 군내 선두그룹에 속했던 인물이다.
C씨는 12·12 쿠데타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의 친분 때문에 전두환 집권 이후 핵심 실세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하나회 출신을 중심으로 한 C씨의 인맥은 노태우 정권 때까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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