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년 2월 한국기업후원으로 정비된 충칭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중국의 여러 임정청사 중 가장 크고 보존이 잘 된곳이지만 이곳을 찾는 한국 관광객은 많지 않다.
굳이 나눈다 해도 김구 선생을 실패한 정치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우리 민족의 주권이 일본에 넘어갔을 때 임시정부를 통해 그 정통성을 이었고, 그러한 노력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카이로회담에서 일본 패망 후 한국 독립이 언급되게 했다. 그것만으로도 한민족이 그에게 진 빚은 가늠하기 어렵다.
해방 후 한국에 돌아와 남북을 오가며 화해를 시도하던 선생이 안두희가 쏜 총탄에 쓰러진 건 1949년 6월26일. 그로부터 1년 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김구 선생이 실패했다면 이 나라의 운명도 실패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거대한 땅인 중국대륙. 기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도 그 길을 지날 때면 가슴 뭉클한 길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었던 험난한 이주의 길들이다. 임시정부는 일본이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한 이후 상하이에서 이사를 시작해 자싱, 항저우, 난징, 우한, 창사, 광저우, 류저우, 구이양, 쭌이, 치장을 거쳐서 중국 내륙도시 충칭에 안착한다.
중국의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이들 중 몇 곳의 임시정부 유적지는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필자는 그 길을 돌아봤다. 과거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편리한 갖가지 교통편이 있고, 일제의 추격도 없다. 그러나 임정의 유물들이 하나 둘 사라져가는 것을 지켜보기란 괴로운 일이었다.
최초 임정 자리에 쇼핑몰 들어서
동양 최대 높이의 둥팡밍주 방송탑과 진마오 빌딩이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상하이 푸둥(浦東)지구. 황푸강의 동쪽에 있어 푸둥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급속히 성장하는 중국이 가장 먼저 얼굴을 드러내고자 하는 도시다. 서양색채 짙은 고건축이 즐비한 금융중심지 와이탄(外灘)을 포함한 푸시(浦西)도 독특한 멋을 풍긴다. 푸시는 작은 어촌에 불과하던 상하이를 중국 최대 상업도시로 만든 핵심이 되는 곳이다.
3·1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던 1919년 4월. 김구 선생을 비롯한 15명은 랴오둥 반도 안동현에서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4일 만에 푸둥항구에 도착한다. 단절될 수도 있었던 일제 치하 36년 역사를 이어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본격적인 행보가 시작된 것이다.
김구 선생이 처음 푸둥항구에 도착해 ‘치마도 입지 않은 여자들이 삼판선의 노를 저으면서 선객들을 나른다고 묘사했을 만큼 초라했던 이곳은 이제 거대한 크레인들이 화물을 옮기고, 수많은 중국 관광객들이 자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려고 모여든다. 백범 일행의 상하이 생활은 공승서(公昇西)리(里) 15호에서 첫 밤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실 임시정부의 첫 역사는 이보다 며칠 앞서는데 1919년 3월17일 여운형(呂運亨), 현순(玄楯), 선우혁(鮮于赫) 등이 상하이에 임시사무소를 설립해 임시정부 설립을 담당하면서부터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이 장소가 바오창(寶昌)로(路)라고 기록되어 있다.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임시정부 사무소와 첫 탄생지는 바오창로가 확실하다. 하지만 지금 상하이에 바오창로는 없다. 이 길은 샤페이(霞飛)로로 바뀌었다가 후에 화이하이중(淮海中)로로 바뀌었다. 다행히 321번지나 329번지로 기록된 주소는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땅 위는 완전히 바뀌어 임시정부 첫 사무소가 있던 자리에는 초대형 쇼핑몰인 홍콩쇼핑몰이 들어섰다. 어릴 적부터 그곳에 살았다는 백화점 직원이 1970년대 사진을 통해 임시정부 사무실의 위치가 홍콩쇼핑몰 자리라는 것을 확인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