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화폐신권.
이런 이유로 기자는 화폐개혁이라는 용어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생뚱한 용어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언론에 보도됐던 관례대로 이 글에서는 그냥 화폐개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고 한다.
이번 화폐개혁은 1992년의 화폐개혁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1992년 7월 북한 당국은 한 가정당 북한 돈 300원만 새 화폐로 바꾸어주고 나머지는 저금하라는 지침을 갑작스럽게 하달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화폐개혁이었다.
도청 소재지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새 화폐가 살포됐다. 이 화폐는 북한에서 찍은 것도 아니었다. 동유럽에서 몇 달 전에 찍어 몰래 북한에 들여온 것이었다. 나중에 이 화폐가 체코에서 인쇄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화폐를 싣고 평양에 도착한 비밀열차는 다시 각 도 소재지로 엄격한 보안조치 속에 흩어졌다. 화폐가 외국에서 들어온 순간부터 화폐개혁이 선포될 때까지 보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이 기간 화폐 수송에 참가한 사람들은 보안 유지라는 명목으로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수감 생활 같은 통제 하에 움직여야 했다.
북한 당국이 300원만 교환해주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반발은 없었다. 당시 노동자 월급이 평균 100원 정도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는 석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때는 북한 화폐가 어느 정도 가치가 있을 때였다. 직장에 출근하면 배급을 받았다. 물론 1980년대 말에 북한 북부 일부 지역에서 몇 달씩 배급이 중단된 일도 있었지만 북한 전체로 볼 때는 사람들은 배급소에서 쌀을 1㎏에 8전씩 공급받을 수 있었다. 8전은 국가에서 특별히 할인해서 공급한 가격이고 장마당에 나가면 3~4원 했다. 명절이면 술이나 육류 등도 공급됐는데, 돼지고기 1㎏이 7원 정도였다.
실업자가 없는 북한의 특성상 직장에서 계속 월급과 배급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화폐개혁이 생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북한은 가정당 300원이 넘는 돈은 은행에 저금하도록 했다. 그래서 주민 반발도 크지 않았다. 문제는 나중에 은행에 저금한 돈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국가에 속았음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몇 해 뒤였다.
또 당시에는 장마당이 활성화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엄청난 액수의 북한 화폐를 깔고 앉아 있던 계층은 화교나 북송 재일교포 등 일부에 한정됐다. 숫자로 볼 때 매우 미미했다.
각 가정당 300원씩만 나눠준 화폐개혁은 평등하게 산다는 사회주의식 개념에 충실한 것이었다. 골고루 똑같은 돈을 갖고 시작하게 됐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러저런 이유로 당시 화폐개혁은 큰 반발 없이 조용히 지나갔고 화폐개혁이 북한 경제에 미친 충격도 미미했다.
그런 달콤한 기억이 있어서인가. 북한은 이번 화폐개혁에도 1992년과 마찬가지로 평등주의적 방식을 도입했다. 가정마다 옛 화폐 10만원을 새 화폐 1000원으로 바꾸어준 것이다. 100대 1로 화폐액면절하, 즉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 시킨 것이다. 돈이 많던 집도 없던 집도 국가에서 똑같이 10만원씩을 받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