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항공력을 강화하자 대만도 대응에 나섰다. 당시는 미중 관계가 매우 좋았던 때라 대만은 미국제 무기를 도입할 수 없었다. 대안으로 프랑스를 두드려 닷소로부터 공대공·공대지 능력을 보유한 미라지 2000-5를 도입한다는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닷소는 공대지 공격 능력이 없는 미라지-2000을 인도했다.
대만은 강력히 항의했고 계약을 위반한 닷소는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려면 상륙전을 벌여야 하고, 상륙 세력을 막기 위해서는 공대지(공대함) 전투기가 있어야 한다. 공대지 전투기 확보가 시급한 대만은 3년간 미국의 록히드마틴을 두드려 야간 저고도 항법과 야간에 적외선으로 표적을 찾아내는‘랜턴(LANTIRN·Low Altitude Navigation and Targeting Infrared for Night)’을 탑재한 F-16을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대만이 항공력을 강화해가자 중국은 닷소에 불만을 표시했다. 중국은 프랑스로부터 항공 전자장비와 물방울형 캐노피 등 많은 부품을 수입하고 있었다. 중국은 프랑스가 대만에 공대공 능력을 갖춘 미라지-2000을 공급한 것을 핑계로 프랑스와 맺은 모든 계약 중단을 선언하고, 주중 프랑스영사관을 폐쇄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대만보다는 중국이 훨씬 큰 시장이기에 미라지-2000 완제품을 중국에 넘기고 정밀분석을 해도 좋다는 데 동의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은 항공기 개발에 탄력을 받게 되었다. 중국의 항공산업은 비약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봄은 길지 않았다. 1989년 톈안먼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프랑스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중국의 인권탄압과 비민주적인 행동을 비난하며 중국에 대한 군사 프로젝트 지원을 끊었다. 중국은 다시 자력으로 항공산업을 해야 하는 처지에 몰린 것이다. 톈안먼 사태가 일어나기 전 중국은 소련과 군사적 대결을 지양하고 군사기술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 협의에서 소련은 미그-29를 팔려고 했으나, 중국은 수호이-27이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수호이-27SK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톈안먼 사태와 함께 이 일이 미국을 자극해 잘 나가던 미중 관계는 삐걱거리게 됐다.
최초의 독자 설계 전투기 J-10
1991년 동유럽 공산국가에 이어 소련이 무너지자 미국은 중국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를 선언했다. 소련이 무너진 후 러시아와 CIS 국가들이 독립하고 러시아가 소련의 지위를 이었다. 이 시기 러시아의 경제는 최악이었다. 중국은 수호이-27SK의 도입을 서둘렀다. 이것이 재정난에 빠진 러시아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1992년부터 러시아는 단좌형인 수호이-27SK 20대와 복좌형인 수호이-27UBK 6대를 중국에 인도했다. 러시아는 경제위기가 심해지자 생산라인의 수출도 허락했다. 완제기 70여 대를 비롯해 항공기 생산라인 설비, 100여 기의 조립 키트를 중국에 수출한 것.
청두항공공사는 러시아의 미코얀(Mikoyan) 사도 노크했다. 미코얀 사는 미그-29 판매 실패 이후 닥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공기 설계 기술 전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청두는 미코얀 사를 접촉해 기술을 전수받았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추진한 자유화는 공기업의 사유화로 이어졌다. 그로 인해 많은 과학자와 기술자가 직장을 잃었다. 이들을 미국과 영국 등이 먼저 챙겨가고 중국이 다음으로 확보했다. 러시아의 기술인력 유출은 푸틴 대통령이 취임해 첨단 군사 기술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막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980년대 중국의 가장 큰 적은 소련이었다. 소련은 수호이-27과 미그-29 등 막강한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중국은 구식 전투기가 아무리 많아도 최신식 전투기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다목적 전투기 J-10의 개발을 결정했다. 이때 세계 항공업계는 플라이 바이 와이어(Fly-By-Wire·FBW)라는 새로운 기술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 기술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 시기 이스라엘의 IAI 사가 라비(Lavi)라는 전투기를 개발했다. 그러자 미국이 압력을 넣어 생산을 못하게 했다. 중국은 라비 개발에 참여한 이스라엘 기술자들을 불러들여 J-10 개발에 참여시켰다. 이런 이유로 J-10 원형은 라비와 비슷한 외형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개발이 거듭되면서 미라지-2000을 닮은 쪽으로 변해갔다.
J-10은 카나드-델타익(翼) 구조를 한 다목적 중형 전투기로 개발됐는데, 중국이 카나드-델타익 기술을 독자 개발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 부분에서 가장 앞선 프랑스로부터 기술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설명했듯 중국은 델타익을 적용한 미라지-2000을 프랑스로부터 제공받아 정밀 분석해 J-10에 적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중국은 J-10을 본격 개발하려는 순간 톈안먼 사태로 서방 세계로부터 고립돼 엔진 기술을 도입할 수 없었다. J-10 개발은 소련이 무너진 후 러시아로부터 AL-31F 엔진을 받을 때까지 답보 상태로 있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J-10은 1998년 처녀비행에 성공하고 2004년부터 J-6를 대체해 실전 배치되었다. 현재 중국은 J-10 전투기 210대를 운용 중이다. J-10의 해외 수출도 진행하고 있는데, 파키스탄 공군에 36대를 납품할 예정이다. J-10은 우리나라가 운용하는 KF-16보다는 성능이 떨어진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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