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考試 권하는 사회

考試 권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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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신선한 도전의식으로, 다음에는 연륜에 이른 자신감으로 덤벼들다가, 나중에는 그것이 집념으로, 그 다음에는 어쩔 수 없는 집착으로 계속 매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남들은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안 해본 사람은 우리 심정 모릅니다. 뭔가 될 듯하면서도 안 되는 게 사법시험입니다. 이렇게 몇 년을 공부하다 보면 서른을 넘기고, 이제는 원서를 받아줄 직장도 없을뿐더러 그 동안 투자한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법전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그의 말을 듣다 보니 ‘고시병(考試病)’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P씨는 고시병이라는 말에 화를 벌컥 낸다.

“고시병이라고 손가락질하기 전에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십시오. 어려서부터 너는 커서 판·검사가 되야 한다며 머리를 쓰다듬고, 10년을 매달렸어도 일단 합격만 하면 그 동안 쏟아부었던 시간적·금전적 대가를 어렵지 않게 되찾을 수 있는 사회풍토가 바뀌지 않는 한 유능한 인재들이 고시에 몰리는 것은 절대 막을 수 없습니다.”



2000년 12월 현재 대한변호사협회에 등록된 변호사 수는 4232명. 인구 1만 명당 1명도 안 되는 꼴이다. 그리고 이들의 한 해 평균 수임건수는 50여 건으로, 현재 수임료가 1건당 300만원∼500만원이므로 변호사 1인이 한 해 벌어들이는 수익은 1억∼2억 원에 이른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의 언론 보도는 다른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법연수원 30기 연수생 679명 중 40∼90명이 갈 곳을 구하지 못해 사법연수원이 각 기업에 채용의뢰서를 보냈다거나, 많은 사법연수원생들이 수입이 불투명한 변호사보다는 판·검사 임용을 선호하면서 연수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다시 고시촌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보도다. 하지만 신림동의 고시생들은 이런 보도들을 부정한다.

“일시적인 현상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것 뿐입니다. 사시 합격자가 실업자가 되었다는 말 들었습니까? 대기업으로 가거나, 경찰간부로 들어가거나, 행정직으로 옮기거나, 갈 곳은 많습니다. 어찌됐든 평생 일자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독서실 총무를 하며 고시 공부를 하는 최모씨의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사시에 합격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사례로 들어가며 로펌(법률회사) 초임이 어떻게 되는지, 몇 년 정도면 고시에 투자한 비용을 회수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일반적으로 ‘마흔살 이전에만 합격하면 된다’는 게 고시촌의 정설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밀어붙이는 겁니다. 10년 공부, 3~4년이면 되찾을 수 있다는 거죠.”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면 고시공부가 도박같이 느껴진다.

판·검사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엄 있는 직업

그러나 고시생들이 사시에 느끼는 매력은 이런 금전적인 이익만이 아니다. 유교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중국, 일본, 우리나라 같은 동아시아 나라들에서 죄를 벌하고 분쟁을 조정하는 판검사는 가장 위엄 있는 직업 중 하나다. 검찰의 수사지휘권이 강력한 우리나라는 특히 그렇다. 또한 일반 공무원들이 일생을 통해 한 단계씩 밟아 올라가는 사무관, 부이사관의 지위를 한번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은 권력에 대한 매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16대 국회의원 273명 중 사시 출신이 39명, 행시 출신 12명이라는 사실도 고시 합격이 명예와 권력의 길로 나아가는 날개 구실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수치 중 하나다.

96년부터 정부는 한 해 300명 정도이던 사법시험 합격자 수를 매년 100명씩 늘려갔다. 전문법조인력 부족현상을 타개하고 기형적인 사시 열풍도 가라앉히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정부의 이런 대책은 고시 열풍을 더욱 부추기는 꼴이 됐다. 먼저, 법대 출신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사법시험에 너도 나도 달려드는 현상을 낳았다. 예전부터 법대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화제가 된 적은 많았지만 사시 합격자 중 비(非)법대생의 비율은 점점 커지는 추세다. 사법연수원 30기 중 21.6%, 31기의 22.2%는 비법학 전공자들이다.

이들의 직업도 다양하다. 정부기관 사무관, 은행원, 약사, 광고회사 직원, 전직 의사도 있다. 2000년 5월 서울대가 발표한 99학년도 졸업생 취업현황을 보면 서울대 졸업자 중 30%가 미취업자였으며, 이중 3분의 1은 고시를 준비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여기에는 사회대, 인문대뿐만 아니라 공대, 생활과학대 학생들도 있다.

뜻이 있어 법조인이 되겠다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이는 대학교육의 파행으로 직결되고 있다. 전공과목은 필수과목만 듣고 선택과목은 대부분 법대 과목을 청강하는 대학생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특히 교육개혁 차원에서 각 대학이 학생들의 전공필수 학점을 크게 줄이고 복수전공제를 폭넓게 실시하면서 법대 수업은 학점관리와 고시공부를 함께 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인기과목이 되었다. 고려대 학생생활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신입생 중 34.3%가 고시를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 대학의 고시생들에 대한 지원도 고시열풍을 부추기는 원인 중 하나다. 대학마다 고시특강을 설치하고 고시 준비 학생에 대한 장학금 지원, 최종합격자에 대한 등록금 면제는 물론이고, 아예 고시생 전용 기숙사를 설치한 대학, ‘국가고시준비위원회’를 꾸린 대학도 있다. 기초학문의 붕괴를 우려하면서, 한편으로는 한 명이라도 더 고시합격자를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지방 C대의 한 교수는 “고시합격자를 몇 명 배출했느냐가 그 학교의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 중 하나가 되다 보니 다른 학교에서 실시하는 정책을 우리만 명분을 내세우며 뒷짐지고 바라볼 수 없다”며 현실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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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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