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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실종·고액배팅·무질서로 얼룩진 ‘한국의 엘도라도’

매너실종·고액배팅·무질서로 얼룩진 ‘한국의 엘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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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 카지노에 들어설 때 오늘은 얼마를 따면 일어설 것인가를 미리 정해 놓고 들어가라! 가령 100만원을 들고 가서 “30만원만 따면 일어서야지”라고 작정했다면 그렇게 됐을 때 단호하게 유혹을 떨치고 일어서야 한다.
어린 시절 소풍 가기 전날 밤, 소풍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행여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어머니가 정성껏 싸준 소풍가방을 다시 확인하곤 했던 기억들… 소풍은 그야말로 명절만큼 신나는 축제였다. 게다가 그날 어머니가 챙겨주는 용돈은 어느 때보다 두둑했고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출발하는 순간은 흥분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행복한 소풍날에 야바위꾼에 걸려 두둑한 용돈을 모두 날려버린 가슴아픈 기억이 있다. 구슬이 어느 컵에 들어 있는지 맞히면 상금을 주는 게임이었는데, 오랜만에 받은 소중한 돈을 몽땅 야바위꾼에게 갖다 바치고 졸지에 빈털터리가 되어 터덜터덜 걸어가면서 느꼈던 실망, 좌절, 고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만 해도 그런 좌절과 분노가 청년이 되어 유학생활을 할 때까지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타고난 게임에의 승부욕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고 갬블(도박)의 유혹은 청년이 된 후에도 이어졌다. 소설보다도 드라마틱하고 치열한 전쟁과도 같은 격전, 갬블에 웃고 갬블에 울었다.

피를 말리는 나날이 내 청·장년기를 지배했던 것이다. 그렇게 갬블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어느 날, 이 불치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구급약과도 같은 카지노 확률과 통계, 카드 카운팅을 만날 수 있었다. 그 후부터 모든 상황이 거짓말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한국의 강단에 서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을 시기에 나는 어떤 학위로도 불가능한 카지노 게임을 체계화할 수 있었다. 이것은 물론 수많은 실전 경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확률, 통계, 카드 카운팅 등을 알기 위해 기나긴 밤을 컴퓨터와 카드에 매달렸던 것도 오로지 갬블을 향한 뜨거운 정열과 도박이 주는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빠찡꼬에 끌린 어린 시절

나는 경상남도 진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해군사관학교를 나온 군인이었다. 군인 가족이면 누구나 겪는 고충이 따르던 시절이었다. 연필 따먹기로 시작된 나의 도박근성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30년 전 일이지만 당시 학교 근처에 있던 진해 ‘수병의 집’ 후문은 따로 약속을 하지 않아도 도박근성이 있는 꼬마들의 모임장소였고 연필 굴리기로 시작된 도박으로 해가 저무는 줄 몰랐다. 필자는 당시에도 게임승률이 좋은 편이어서 연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진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서울로 올라와 중학교를 다녔다. 하루는 어머니가 전기장판을 사오라고 1만5000원을 주셨는데 동대문시장으로 가다가 빠찡꼬를 보고 들어가 게임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하다 보니 돈이 2만5000원으로 불어났다. 더 딸 줄 알고 계속하다 돈을 잃게 되었다. 1만원, 5000원, 자본 고갈…. 어머니에게 혼날 생각을 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고 돈을 모두 잃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다.

호주 유학을 떠난 것은 군 제대 후인 82년. 마음잡고 공부를 하겠다고 한국을 떠나기 전 몇 번이나 다짐했다. 20년 전에는 집에 여유가 있어 생활비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주에선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다. 호주는 낮에는 경마, 밤에는 개 경주, 동네마다 슬롯머신을 할 수 있는 클럽이 즐비했고, 카지노가 합법이어서 화려한 카지노장이 사람들을 유혹했다. 필자의 인내심은 한계에 이르고 보내주는 돈으로 도박에 빠져들다 보니 점점 돈이 모자랐다.

당시 한국은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주요 지표로 삼았다. 팩스가 보편화되기 전 한국의 수출업체에 “저는 호주에 있는 구매 담당자인데 귀사가 샘플을 보내주면 구매를 결정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500여 통 보냈다. 많은 업체가 샘플을 보내왔고 그 물건을 구매담당자에게 보여주고 잘 팔리는 물건을 수입하여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때 내 도박근성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무모한 도박에서 확률 게임으로

그러나 도박에 빠져들수록 돈을 잃게 되고, 게임은 하고 싶은데 돈이 없으면 할 수 없이 물건을 처분해야만 했다. 그때가 20대 후반이었다. 회사의 성장과 함께 갬블에 대한 투자는 정비례해 갬블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라도 고액 배팅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골프채 수입 사업을 하던 어느 날인가 많은 돈을 잃고 나에게 시련을 안겨준 갬블에 대해 제대로 분석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밤낮 없이 카드를 붙들고 연구하기 시작했고, 옛날에 알고 지내던 게임전문가의 조언을 참고하여 거의 1년 동안 게임연구에 몰두했다.

어느 정도 게임분석이 끝나자 그 동안 내가 즐긴 것은 게임이 아니라 카지노에 대한 헌금이었음을 알았다. 달걀로 바위치기만큼 무모한 짓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내 자신이 초라하고 어리석게 느껴졌는지…. 많은 지인들이 강단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사회에 기여하고 있을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확률, 통계, 카드 카운팅 등 엉뚱한 계산을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위로하면서 마치 게임을 할 때처럼 며칠 밤을 새우며 게임분석에 매달렸다. 그 결과 오늘날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독자들이 그런 얘기를 전화나 메일로 들려줄 때 당시에 받은 고통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비록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방황이 서서히 끝날 무렵 이제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사업이 무엇보다 중요한 화두로 등장했다. 새로운 사업을 찾던 중 건축에 손을 댔고 회사 경영에 성공하면서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갬블의 유혹에는 약해 가끔씩 게임을 즐겼다. 그렇지만 옛날처럼 무식하게 게임을 하지는 않고 높은 승률을 올리면서 게임을 하고 있다. 진정한 게이머로 태어난 내 자신을 느낀다. 필자는 지금도 아내의 허락을 받고 게임을 즐긴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또한 이때 아내에게 일정액의 세금을 내고 카지노로 향하고 카지노에서 돌아왔을 때 일정액의 이익금을 준다. 나는 어려웠던 시기를 항상 가슴속에 새겨 무리하게 게임을 하지 않는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게임이 아니라 게임도 즐기고 노력의 대가도 얻는 진정한 게이머의 자존심을 지켜가고 있다.

‘도박사보다 무서운 갬블러’.

도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도박사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 실제로 카지노 관계자들에게 갬블러는 도박사보다 더 큰 두려움을 주는 존재다. 이들은 떼지어 다니며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브랜드로 몸치장을 하고 재력을 과시한다. 카지노를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은 한눈에 이들을 알아본다. 이들은 게릴라식 전법으로 게임을 벌여가며 카지노를 온통 공포로 몰아넣는다.

갬블러들은 보통 5∼6명이 한팀을 이루어 바카라 게임에만 열중한다. 이들 중에는 백전노장인 팀 리더가 있다. 팀 리더는 가장 큰 판에서 가장 낮은 배팅을 하며 딜러와 심리전을 벌인다. 그러면서 판의 흐름을 유심히 관찰한다. 그렇게 계속 미끼만 던지다가 딜러가 미끼에 걸려들었다고 판단되면 팀 동료 전원이 일제히 최대, 최고 규모로 배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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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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