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난 지 4개월이 지났지만, 희생자들을 위해 모인 성금은 여전히 대구시 통장에서 잠을 자고 있다. 6월29일 열린 희생자 합동 영결식
그런데 좋은 뜻으로 모아진 국민성금이 이런저런 잡음을 내고 있다. 수재의연금 1448억원 중 1300억원이 수재민 구호에 쓰였는데, 이중 65억원은 국고 대신 사용돼 수재민이 아니라 국가의 부담을 덜어줬다. 그런가 하면 대구지하철 화재 피해자들에게 전달돼야 할 669억원은 아직도 대구시의 통장계좌에서 잠을 자고 있으며, 천안으로 보내진 성금 중 4억5000만원은 그 사용처를 둘러싼 시비가 법정으로 비화될 조짐이다.
국민성금, 누구를 위한 ‘증여’인가
“세상 떠난 아이들을 봐서 낸 성금이지, 교육청 재원 마련하라고 낸 성금이겠습니까? 보상금을 더 달라는 게 아니라, 국민들이 성금을 낸 취지에 맞게 써달라는 겁니다. 아이들이 참사를 당했으니 성실하게 책임지는 선례를 남겨야지요. 지금 돌아가는 사정은 천안교육청과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아요.”
천안초등학교 화재사건 유가족의 주장이다. 지금 천안에선 성금유용 공방이 한창이다. 국민성금 중 4억5000만원이, 원래 천안교육청이 지급해야 할 유가족 보상금의 재원으로 쓰였기 때문. 교육청은 지난 5월30일 9명의 유가족에게 1인당 2억원의 보상금을 지급하면서 1억5000만원은 교육청 예산으로, 나머지 5000만원은 성금 모금액으로 충당했다.
유가족들은 “교육청이 위로금 명목으로 성금 모금활동을 벌여놓고는 성금을 보상금 재원으로 사용했다”며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교육청은 “보상금에는 배상금, 위자료, 위로금 등이 다 포함됐다”며 “유가족들이 ‘2억원 이외에는 일절 요구하지 않겠다’던 사전 합의를 어겼다”고 대응하고 있다.
9명이 목숨을 잃고 15명이 크게 다친 축구부 숙소 화재 후, 책임기관인 천안교육청과 유가족들은 ‘1인당 보상금 2억원을 지급한다’고 일괄 합의했다. 그리고 나서 천안교육청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충청남도지회(이하 충남지회)와 공동으로 50여 일에 걸쳐 성금 모금운동에 나섰다.
충남지회에 접수된 성금은 모두 8억4000만원. 이 가운데 방송국, 지역신문사, ARS 전화 등을 통해 들어온 성금은 1억원 정도에 불과했고, 나머지 7억4000만원은 교육청을 통해 접수됐다. 때문에 천안교육청은 “이 정도나마 성금이 모인 것인 우리가 집안 식구 같은 교직원과 학생들에게 모금운동을 적극적으로 알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한 교육청 관계자는 “성금을 보상금 재원으로 쓰지 않으면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세금이나 성금이나 국민이 내는 것인데, 이걸 분리하면 이중 지출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박했다.
허술한 성금 관리 시스템
성금 사용처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김인회 변호사는 “유족들의 주장이 상당 부분 일리 있다”고 말한다.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낸 성금은 교육청이 아니라 유족들에 대한 ‘증여’의 성격이 강하므로 교육청에 지급 책임이 있는 보상금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 그러나 김변호사는 “다만 법정에서 모금을 주도한 교육청의 노력을 고려해줄 수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천안교육청 관계자는 “거둬들인 성금을 보상금 지급과 관련해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명시된 법안을 찾을 수 없었다”며 “차라리 이번 기회에 법정까지 가서 성금 사용에 대한 명쾌한 판결이 나왔으면 좋겠다”며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이러한 잡음이 발생한 근본 원인은 허술한 ‘성금 관리 시스템’에 있다. 각종 재해·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자발적으로 성금이 걷히지만, 이 성금을 어떻게 사용하고 배분할 것이냐에 관한 구체적 시스템이 마련돼 있지 않은 것.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김승권 사회정책연구실장은 “성금을 유족이나 부상자에게 얼마만큼 지급할 것인가, 추모사업으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등에 관해 제도적으로 마련된 바가 없다”며 “때문에 늘 이해당사자끼리 성금을 둘러싸고 ‘힘 겨루기’를 벌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1999년 씨랜드 화재 참사 때 성금 배분 규정 등을 정해뒀더라면 천안 축구부 화재참사 때 준용(準用)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