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연 변호사는 고영구 국정원장(오른쪽에서 두 번째)의 임명이 헌법 위반이라 주장한다.
방청객과 판사의 재치 문답을 소개하자는 게 아니다. 이 사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영국의 법치주의 현실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학자의, 평화를 위한 핵무기 반대라는 정당한 목적을 가진 행동이라도 법이 허용하지 않는 불법적 수단에 의한 것이라면 법 위반에 대한 책임을 물어 법치주의를 확립하겠다는 영국 법치주의의 전통을 읽을 수 있다.
실종된 절차적 정의
최근 우리 사회는 헌법의 핵심 가치인 법치주의의 기본이 흔들리고 있다. 모든 국정현안과 사회문제가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에 따라 합리적으로 논의되고 해결돼야 하는데도 목적만을 앞세운 힘의 논리와 검증되지 않은 여론을 앞세운 인기영합적 해결책으로 인해 법치주의의 생명인 절차적 정의가 실종되고 있음을 본다.
두산중공업 파업과 철도청의 4월 노사분규는 법리와 원칙에 입각한 대응을 정부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무노동 무임금 원칙과 공기업 민영화란 정책적 기조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불법집단행동에 대한 법 적용의 엄격성과 형평성을 크게 후퇴시켰다. 국가경제에 엄청난 피해를 끼친 화물연대의 집단파업 때도 차주들의 집단행동에 정부가 일방적으로 굴복함으로써 밀어붙이면 된다는 또 하나의 선례를 남겼다. 화물연대 파업 이후 우리 사회에 힘의 논리가 팽배하면서 파업과 시위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으며 사회가 급속히 분열과 갈등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 와중에 권기홍 노동부 장관은 “불법행동이라도 정당한 주장은 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중앙일보 2003년 5월29일자) 목적이 정당하다면 수단이나 절차의 불법쯤은 괜찮다는 의미로 들리는 듯한 발언을 했다. 발언의 진의가 어디에 있었던지를 떠나 이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기본을 망각한 것으로서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권장관은, 주장은 주장대로 불법은 불법대로 대처하면 된다는 의미로 말했다지만, 이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발상이다. 권장관의 이러한 발언에 대해 대통령이나 총리가 질책을 했다거나 문제를 삼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인간 예지의 산물이라 할 민주주의는 절차 내지 수단의 존중이지 목적만을 제일로 삼는 건 아니다. 적법절차가 무시되는 조치라면 추구하는 목적과 관계없이 공권력의 남용이자 자의(恣意)일 수밖에 없다. 대통령 기타 어떠한 공권력도 법의 지배, 즉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와 방법에 따라 권한을 행사하고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것이 예측가능성과 법적 안정성을 통한 진정한 의미의 법치주의를 구현하는 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변호사 출신의 첫 법률가 대통령이다. 참신하고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인 만큼 그에게 법치주의의 실질적 구현, 헌법적 절차와 가치의 존중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집권 후 5개월도 안 된 시점에서 이미 실망을 넘어 우려의 수준으로 변했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국정원장 임명 강행은 헌법 78조 위반
노대통령이 고영구 국정원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 결과 국회가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는데도 임명을 강행한 것은 헌법 제78조에 위반된다고 생각한다.
헌법 제78조는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공무원을 임명한다’고 규정했다. 예컨대 국무총리, 대법원장, 대법관, 헌법재판소장, 헌법재판관처럼 헌법에 직접 그 임명자격과 절차가 규정돼 있는 경우엔 그에 따라야 한다. 또 법률에서 임명자격과 방법 등에 관해 별도로 정하고 있는 경우엔 그에 따라야 한다. 검사를 임명하려면 판사 또는 변호사 자격을 가진 자 중에서 임명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