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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름과 느림을 함께 생각하는 눈

빠름과 느림을 함께 생각하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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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의 경제, 속도의 경제

한국은 왜 이렇게 빠른 나라가 되었을까. 군대에서 ‘선착순’을 많이 하다보니 빨라졌다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고, 자원은 부족하고 인구는 많다보니 빨라야 그나마 먹고살 수 있기 때문이라는 속설도 있다. 수천 년 동안 외적의 침입이 빈번했던 까닭에 피난 보따리를 많이 싸봐서 빨라졌다는 설도 있고, 인종적으로 성미가 급하다는 말도 있다. 그중 가장 그럴듯한 것은 전쟁의 폐허 위에서 출발해 6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선진국들이 100~200년 걸린 산업화를 추월하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라는 설명이다. ‘속도의 경제’를 통한 성공체험이 ‘빨리빨리 문화’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빠르면 살고 느리면 죽는다.’ ‘강자와 약자로 구분되던 시대는 가고 빠른 자와 느린 자로 나뉘는 시대가 왔다.’ 한국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구호들이다. 정보화 사회, 디지털 사회가 가속화할수록 한국인들의 스피드 중독증상도 점점 심해진다. 정보사회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빠른 자(The Fast)와 느린 자(The Slow) 개념으로 보자면 한국은 완전히 빠른 자가 되었다. 제품개발 속도, 유행 속도, 가치관 변화 등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간다. 그러다 보니 한국은 완벽한 속도의 경제를 실현하는 유일한 나라다. 이상한 나라이면서 독특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키아누 리브스가 나오는 ‘스피드’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에는 속도를 줄이면 폭탄이 터지는 버스가 등장한다. 지능적인 테러범은 주인공에게 폭파장치를 해둔 버스를 계속 엄청난 속도로 달리면서 자신이 준 과제를 해결하라고 협박한다. 물론 주인공이 영웅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할리우드 영화지만, 기본적으로는 ‘엄청난 속도로 달리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메타포가 숨어 있다.

정보사회학자 앨빈 토플러는 이미 30년 전에 다음과 같이 예언한 바 있다. 정보화사회가 성숙하면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빠른 자와 느린 자로 나뉘며, 이것이 정보화 사회의 핵심 뉴 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 빠른 자는 생각도 빠르고 정보도 빠르고 의사결정도 빠르고 행동도 빠르다. 빠른 자가 느린 자를 지배하고, 빠른 자가 승리하고, 느린 자는 죽는다. 그래서 빌 게이츠가 쓴 책의 제목 ‘생각의 속도’도 상징적이다. ‘규모의 경제’ 대신 ‘속도의 경제’가 승패를 좌우한다고 할 때, 그 가장 적합한 모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한민국일 것이다.



스피드가 생활을 지배하면서 그 반작용과 부작용도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이 여가와 여유를 원하게 됐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느림의 문화’다. 느림의 문화는 웰빙의 핵심 가치이기도 하다. 웰빙이란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인 편안함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아무리 세상과 기계가 빨라진다고 해도 맥박의 속도나 혈류의 속도는 빨라지지 않는다. 이를 거스를 때 나타나는 부자연스러움을 해결해보자는 것이 바로 느림의 문화다.

슬로비와 스카이버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쓴 피에르 쌍소 교수는 프랑스 철학자다. 그는 이 책을 은퇴한 후에 썼다. 파리가 아닌 한적한 시골에 머무는 동안 전화기도 컴퓨터도 없이 노부부가 산책하고 사색하며 지냈다. 그는 대도시에서 새벽부터 광속에 가깝게 뛰는 사람들을 보면 자연이 우리에게 준 행복이 깨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피에르 쌍소 교수가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주장하고 있는 느림의 미학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한가로이 거닐기, 둘째 경청하기, 셋째 권태를 느끼기, 넷째 꿈꾸기, 다섯째 기다리기, 여섯째 마음의 고향 떠올리기, 일곱째 글쓰기, 여덟째 포도주 음미하기, 아홉째 모데라토 칸타빌레. 그는 삶의 여유와 깊이를 느끼기 위해서는 느림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느림은 게으름과 다르다. 게으름이 목적의식이나 의미부여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 시간을 때우는 일이라면 느림은 적극적인 삶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슬로비(Slobbie)족도 마찬가지다. ‘천천히 그러나 훌륭하게 일하는 사람(Slower But Better Working People)’을 뜻하는 이 단어는 도시에 거주하는 젊은 전문직 종사자를 뜻하는 ‘여피’(Yuppie·Young Urban Professional)보다 웰빙에 훨씬 근접한 개념이다. 여피족이라는 말에 물질적 풍요를 만끽하는 신흥 부유층의 의미가 강하다면, 슬로비족은 삶의 여유, 마음의 평화,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추구한다. 스카이버족(Skiver)도 비슷한 개념이다. 고소득 전문직이면서 자신만의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빠름이 좋으냐, 느림이 좋으냐 하는 문제는 통합적 접근과 상황적 접근으로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빠름과 느림에 대해 깊은 지식과 통찰력을 갖춰야 한다. 휴가를 가서는 여유롭게 즐기고, 일할 때에는 빨리 진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이에 따라서도 빠름과 느림이 있다. 젊었을 때는 빠르게 움직이는 게 좋고, 나이가 들면 되도록 업무 스피드와 양을 줄이고 화초도 가꾸면서 여유 있게 즐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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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기│서울과학종합대학원 총장·경영학 박사 yoonek18@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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