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호

6분 만에 해트트릭 차범근의 감동

라디오로 듣던 메르데카컵의 명승부

  • 송기룡 < 대한축구협회 홍보차장 > skr0814@hitel.net

    입력2004-09-06 14: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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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축구협회 송기룡 차장은 한마디로 축구 마니아다. 그가 독문학과에 입학한 배경에는 독일 분데스리가에 대한 열정이 숨어 있다. 그는 비록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꿈을 일찌감치 접었지만, 늦은 나이에 대한축구협회에 입사해 다른 차원의 축구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이 글은 송차장이 하이텔 축구동호회에 기고했던 글을 다시 편집한 것이다.
    ”한국 파고듭니다. 박이천 선수 한 사람 제치고 정병탁 선수에게 패스, 정병탁 센터링, 이회택 잡았다. 슈우웃 고올인, 골인됐습니다. 한국 고올인.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한국이 골을 넣었습니다.”

    1970년대 초 그러니까 내가 국민학교 1∼2학년 무렵이다. 나는 아버지가 재직중인 경북 김천의 고등학교 사택에서 살았다. 그때만 해도 시골 사람들에게 가장 재미있는 오락기구이자 빠른 정보매체는 단연 라디오였다. 텔레비전은 시내에 나가야 어쩌다 몇 집에 있을까 말까할 정도로 귀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가족들은 라디오에서 하는 ‘백만인의 퀴즈’ 같은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밤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신문을 읽으면서, 누나와 형은 공부를 하면서, 그리고 나는 만화책을 보면서 라디오를 들었다.

    밤 9시가 되면 누나와 형은 건넌방으로 가서 계속 공부했고,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누워 불을 끄고 라디오를 들었는데, 언젠가 한번은 라디오에서 메르데카컵 축구 결승전을 중계했기 때문에 그냥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아버지도 중계방송이 있는 날이면 끝까지 다 듣고 잠을 청하셨다. 하지만 나는 중계방송을 제대로 들은 적이 한번도 없다. 언제나 전반전이 끝날쯤 잠들고 마는 것이다.

    머리맡에 놓인 일제 내쇼날 대형 라디오에서 아리랑 음악이 흘러나온다. 외국경기를 중계할 때는 꼭 나오는 음악이다. 잠시후 강창선 아나운서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이역만리 말레이시아의 수도 콸라룸푸르입니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이미 예고해 드린 바와 같이 잠시후 이곳 콸라룸푸르 국립경기장에서는 제 10회 메르데카컵 축구대회 결승전 우리 한국 대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대 우리 한국의 경기가 벌어지겠습니다.”



    아나운서의 멘트는 언제나 똑같았지만 모든 사람들의 흥분을 자아냈다. 말레이시아의 수도 콸라룸푸르와 태국의 수도 방콕은 워낙 자주 나오는 바람에 나도 자연스럽게 외우게 되었는데, 오랫동안 내 귀에는 ‘말레이서도 칼라룸푸’ ‘태국에서도 방콕’이라고 들렸다.

    축구는 TV로 봐도 흥분되지만 라디오도 그에 못지않다.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더 긴장되고, 온갖 상상을 해가며 들을 수 있기에 색다른 맛이 있다. 라디오 중계를 들을 때 주의할 점은 절대로 잡담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내가 어린 마음에 아버지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면, 아버지는 “조용히 해라 임마, 안 들리잖아”라며 꾸중하셨다. 그래서 골 넣고 난 뒤가 아니면,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한국이 결정적인 찬스를 놓치면 항상 혀를 차며 “어휴 짜슥, 그 좋은 찬스에 못 넣어?”라면서 마치 현장에서 경기를 본 사람처럼 말씀하셨다. 그러면 나는 “누구야? 누가 못 넣었어?”라고 묻다가 또 야단을 듣는 것이다.

    옆에서 주무시던 어머니는 “고마(그만) 자라. 내일 뉴스 들으면 되지 마로(뭐하러) 안자고 그카노?” 하셨지만 나는 끝까지 듣고 싶었다. 당시 한국대표팀엔 골키퍼에 이세연, 수비에 김호 김정남이 있었고, 박이천 정병탁 이회택 정강지 정규풍 등이 공격수로 활약했다. 반면 말레이시아엔 골키퍼 아르무감, 수비수 소친온 찬드란 등이 있었다.

    전반전 중반 한국이 한 골을 넣자 시끄럽던 말레이시아 관중이 조용해졌다. 한국이 주도권을 잡고 밀어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관중이 응원을 멈추자 라디오의 잡음도 잦아졌다.

    그런데 잠시후 라디오 중계 때마다 생기는 징크스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5분 정도 중계를 하다가 “여기는 말레이시아 국립경기장입니다” 하면서 잠시 중계를 끊는 게 그때의 관례였다. 아무래도 방송장비가 워낙 낙후된 시절이라 중간점검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계방송이 끊기면 여자 아나운서가 나와 “여러분은 지금 한국과 말레이시아의 축구중계를 듣고 계십니다.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 정신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잘살기 위한…” 이런 식의 판에 박은 홍보방송이 1분쯤 이어진다.

    문제는 그 시간만 되면 한국이 골을 먹는 것이다. 중계가 다시 시작되기 무섭게 운동장이 시끄러워지곤 했는데, 그것은 바로 말레이시아 관중들의 함성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상대팀이 공격할 때보다 중계가 끊어지는 순간을 가장 두려워했다.

    후반전 휘슬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눈꺼풀은 무거워졌다. 졸음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애를 써보지만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누나가 옆방에서 책 읽는 소리가 아련히 들릴 무렵이면 나는 어김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아버지께 “어떻게 됐어요?”하고 물어보면, 아버지는 웬만해선 가르쳐주지 않았다. 내가 계속 달려들어 물어보자 웃으면서 “1대2로 졌다”고 하는 것이다.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라디오 뉴스도 놓쳤고, 신문도 하루가 지나야만 결과를 보도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하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물어보지만 조무래기들은 딱지나 구슬 모으는 데 정신이 팔려 축구는 안중에도 없었다.

    학교 사택 옆에는 지방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가 있었는데, 그곳에 나를 귀여워하는 고등학생 형이 살았다. 나와 축구를 같이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해주는 분이었다. 나는 그 형한테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 형도 나를 놀리느라 가르쳐주지 않았다. 대신 맛있는 것을 가져오면 알려준다는 ‘미끼’를 내밀었다. 나는 그 말만 믿고 부엌을 뒤져 사과를 가져가서 반쪽씩 나눠먹었다.

    그런데 그 형은 한국이 1대3으로 졌다고 말했다. 난 황당했다. 도대체 누굴 믿어야 하나? 아무래도 그 형의 말이 맞을 것 같았다. 사과까지 갖다바치고 얻은 대답이니까.

    다음날(경기 이틀 뒤) 조간신문에 드디어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국이 2대1로 이겼다는 게 아닌가. 나는 기분이 좋다고 만세를 부를 수도 없고, 속은 것이 억울해 울 수도 없었다. 다짜고짜 아버지에게 따졌더니 아버지 하는 말씀 “누가 먼저 자래?” 이번엔 고등학생 형에게 따졌더니 “사과가 맛이 없어서 그랬어” 이러는 거다. 지금도 그때 살던 초가집 사택과 잡음이 많던 내쇼날 라디오가 생각난다. 나에게 장난치던 고등학생 형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문명의 이기(利器)는 시골마을까지 들어왔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던 1973년, 우리 학교에도 TV라는 최첨단 제품이 등장했다. 나는 20세기에 인간이 발명한 물건 중 TV만큼 생활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서 세계를 하나로 연결시킨 것은 전적으로 TV 덕분이다.

    옆집에 교사 부부가 새로 이사왔는데 별로 넉넉한 살림이 아닌데도 텔레비전이 있었다. 그것이 우리 동네에서 유일한 텔레비전이었다. 나는 우리 집이 먼저 TV를 사지 않은 것이 섭섭했지만,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웃으면 복이와요’ 같은 코미디를 실컷 볼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기뻤다.

    방송국 관계자들에게 한바탕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떤 선생님의 말씀대로, 지방에서 난다 긴다 하는 명문 고등학교는 전부 야구부를 운영하고, 그 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신문과 방송을 장악한 상황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야구를 편드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니 야구 잘하는 학교치고 명문 아닌 곳도 드물다. 인문계에서는 경북고 부산고 광주일고 대전고 마산고 인천고 등이 있고, 상고 중에는 군산상고 마산상고 광주상고 부산상고 대구상고 선린상고….

    일제 치하에서 일본 고교야구의 열풍이 고스란히 현해탄을 건너왔고, 일본 사람들은 이름 있는 학교에 정책적으로 야구부를 육성했다. 재미있는 건 야구와 축구의 엇갈린 역사다. 한국야구는 오랫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일본을 따라잡기 어려운 수준이었지만, 축구는 일본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드는 일이 허다했다. 그런 상황에서 명문학교에 축구부가 들어섰다면 어떻게 됐을까. 일본사람들은 한국인의 투지와 근성이 꽤나 거슬렸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우여곡절 때문에 한국축구의 발전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가지 다행스러웠던 건 그날 치러진 고교야구 결승전이 역사에 남을 명승부였다는 점이다. 광주일고의 4번타자 김윤환 선수가 3타석 연속 홈런을 쳐낸 것이다. 고등학교 선수는 물론이고 실업팀 선수들도 그때까지 그런 대기록을 달성한 선수가 없었다. 동대문야구장의 관중들은 난리가 났고 아나운서는 흥분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대기록을 달성한 김윤환 선수는 영웅이 돼서 스포츠 주간지 표지에 실리고 한동안 대단했는데 대학에 들어가서는 비실대더니 프로에 데뷔한 뒤 해태와 청보를 전전하다 이름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너무 일찍 기를 다 소모해 버린 탓일까. 한 시대를 풍미한 청춘스타의 쓸쓸한 퇴장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다.)

    홈런 세 방에 힘입어 광주일고는 완승을 거두었는데 전라도 사람들이야 억눌렸던 감정을 야구로 한껏 풀어버렸겠지만 경북고를 응원했던 나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함께 TV를 보던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심지어 “축구나 보여주지, 뭐 하러 아이들 장난 같은 고교야구를 보여주는 거야?” 하면서 화를 냈다. 그 무렵의 고교야구는 어쩔 수 없이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매개물이었으며, 뒷날 프로야구가 그 유물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여기서 여담 한 가지만 하고 넘어가자. 우리가 흔히 프로야구의 인기가 대단하다는 것에 놀라면서 상대적으로 프로축구의 왜소함에 실망한다. 그래서 옛날에는 축구가 최고였는데 이젠 야구가 최고인기 스포츠라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만다. 그런데 사실 축구가 최고 인기를 누렸다는 1970년대에도 고교야구의 인기는 축구에 버금갔다. 전국대회가 열리면 예선전부터 결승전까지 항상 동대문야구장이 꽉 찼으니까 요즘의 프로야구보다 인기가 높았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대중적 인기나 상업성 측면에서 봤을 때 1970년대 우리나라 대중 스포츠의 양대 축은 축구대표팀 경기와 고교야구라고 봐야 한다. 물론 전국민적 관심이란 측면에서 축구대표팀 경기가 앞섰지만, 그렇다고 교교야구를 압도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프로야구는 1970년대의 고교야구 인기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에 불과하다. 즉 그 지역의 고교야구 스타들이 그대로 유니폼만 프로로 바꿔입은 것이다. 1982년 프로야구가 시작됐을 때만 해도 고교야구 OB전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역사적인 한일전을 못 봐서 속이 상했는데 TV에서는 밤 10시부터 녹화로 보여준다는 광고가 나왔다. 나는 혹시나 볼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10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10시가 가까워지자 부모님은 이불을 펴고 주무실 준비를 하셨다.

    나는 “축구 보고 싶은데요” 하면서 슬슬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이어 떨어지는 아버지의 불호령, “잘 시간에 무슨 축구냐? 중계도 아니고 녹환데. 아까 뉴스시간에 1대0으로 이겼다고 하는 거 못 들었어?”

    아, 나는 그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교야구 때문에 열받은 아버지에게 더 이상 떼를 썼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친구 하나가 녹화중계를 너무 재미있게 봤다고 자랑했다. 나의 우상 허정무가 엄청나게 잘했다는데…. 이래저래 야구가 원수다 원수!

    1976년 9월에도 못 봐서 한이 된 경기가 있었다. 이번에도 박스컵이었다. 9월의 어느 토요일, 한국 대 말레이시아의 개막전이 열렸다. 난 등교할 때부터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수업시간 내내 축구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축구 좋아하는 친구들도 쉬는 시간만 되면 한국선수 중에 누가 첫 골을 넣을까를 예상하며 신나게 떠들어댔다. 당시 나를 비롯해 축구 좋아하는 친구들은 모두 ‘축구 금지령’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더 관심이 대단했는지 몰랐다.

    축구 금지령?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이끄는(?) 우리 반 대표팀은 방과후 운동장에서 다른 반과 축구시합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날은 가을운동회를 앞두고 여학생들이 매스게임을 연습하는 날이었다. 우리반 담임이신 처녀 선생님은 조회시간에 “오늘은 축구하지 말고 그냥 집에 가라. 매스게임 방해하면 안되니까. 알았지?” 하면서 특별히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축구에 미쳐버린 우리 반 아이들에게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리고 대전이 미리 예약(!)되어 있었기 때문에 취소는 불가능했다. 우리는 여학생들이 연습하는 쪽으로 공이 가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우리 반의 장기인 윙플레이가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중 실수로 그만 여학생들이 있는 쪽으로 공이 떼굴떼굴 굴러가고 말았다. 처음에 아이들은 주저주저하다가 한 녀석이 달려가니까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마구 몰려가서 공을 찼다. 당장에 매스게임 지도교사가 달려왔다. 우리는 그대로 붙잡혀서 매스게임 연습이 끝날 때까지 그 앞에서 손들고 벌을 서야만 했다. 물론 같은 반 여학생들은 고소하다면서 킥킥 웃어대고, 우리는 교무실로 끌려가 손바닥 열 대씩 맞고 나서야 훈방(?)되었다.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다음날 학교에 와보니 담임선생님이 조회시간에 호통을 치셨다 “어제 매스게임 연습할 때 축구한 사람 다 나와!” 어찌된 일인지 범죄사실(?)이 이미 담임 선생에게 다 알려진 것이었다. 우린 또 불려나가 회초리를 맞았다. 그리고는 무기한 축구 금지령이 떨어졌다. 우리의 아리따운 처녀 선생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송기룡! 너는 명색이 반장이란 녀석이 선생님이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도 애들을 이끌고 축구를 해! 너 내일까지 반성문 열 장 써와!”

    우와, 그 황당함. 나만 축구한 것도 아닌데, 반장이란 이유로 반성문을 쓰라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쓰고 말았다. 명색이 반성문이었지만 그건 축구 예찬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왜 축구를 하게 되었는지를 쓰다보니 축구가 왜 재미있는지를 밝혀야 했고, 그러다보니 어떤 축구선수의 플레이가 너무 멋있어 보여서 나도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는 내용을 적고, 마지막에 앞으로는 너무 자주(?) 하지 않겠다고 약간 뉘우치는 심정을 담았다. 다음날 그 반성문을 본 선생님은 기가 찼는지 그냥 웃고 말았다.

    그로부터 몇 년 뒤 고등학생이 되어 초등학교 반창회를 열었다. 담임선생님을 초대하기 위해 함께 축구하던 친구들이 그 처녀 선생님 집에 들렀는데, 선생님은 대뜸 나를 보자마자 “어이, 축구 소년! 요새도 방과후에 축구 하나?” 이렇게 말씀하셔서 한동안 웃었던 기억이 난다.

    다시 1976년 9월의 어느 토요일이다. 오전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축구중계를 보기 위해 집으로 달려와 경기시작 30분 전부터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잘 나오던 TV가 갑자기 툭 꺼지는 게 아닌가. 정전이다. 우리 집만 그런 줄 알았더니 다른 집도 마찬가지였다. 으윽, 우째 이런 일이. 처음엔 금방 다시 전기가 들어오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경기시작 시간이 지나도 안 들어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라디오를 켰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전반전 내내 이제나 저제나 전기가 들어올까 그 생각밖에 없었다.

    끝내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경기도 우습게 진행되고 있었다. 전반전에만 말레이시아에 세 골을 먹고 0대3으로 지고 있었다. 라디오 아나운서는 관중들이 전부 화가 나서 말레이시아를 응원하기 시작했다고 썰렁한 분위기를 전했다. 나는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어차피 경기도 못 보는데 실컷 깨져라 하는 오기가 뻗쳤던 것이다. 후반 들어 박상인이 한 골을 만회했으나 곧바로 말레이시아에게 또 추가 골을 먹어 1대4. 이제 남은 시간은 7분. 더 이상 희망은 없었다. 아나운서는 관중들이 서서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는 말까지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때부터 기적이 벌어졌다. 차범근이 드디어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골 넣어 2대4. ‘그래도 지는 건 마찬가지다’ 또 한 골 넣어 3대4. 서서히 몸이 달아올랐다. ‘제발 한골만 더’ 드디어 1분 남기고 슛 골인! 4대4. 기적의 무승부였다. 6분 동안 무려 세 골. 그것도 차범근 혼자서 넣은 것이다. 나는 좋아라고 만세를 불렀지만, TV가 없던 시절도 아니고 이거 완전히 미치는 노릇이었다. 아, 그놈의 정전….

    나중에 알고보니 그 시간대에 내가 살던 김천은 물론이고 경북 전역에 전기가 나갔다는 것이다. 다음날 신문들은 가십란에 경북 도민들의 빗발치는 항의전화 때문에 전신전화국은 물론이고 방송국, 신문사 직원들이 업무를 못볼 지경이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중계를 보지 못해도 스포츠 뉴스시간에 득점 장면을 볼 수 있지 않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엔 방송사 살림도 가난해서 별도의 녹화필름을 준비하지 않았다. 중계는 중계대로 하고, 별도의 무비 카메라로 경기 앞부분을 조금 찍어서 뉴스시간에 틀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고 스포츠 뉴스시간을 기다렸지만 역시 예상대로 엉뚱한 장면만 잠깐 나오고 그걸로 끝이었다. 이 경기를 못 봐서 억울한 사람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아마 차범근 본인에게도 이 경기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명승부일 텐데 녹화필름이 없으니 그냥 ‘전설의 고향’이 되고 말았다. 꼭 20여 년 전의 안타까운 사연이다.

    그러면서도 ‘1년만 빨리 전근 오지, 왜 이제야 왔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1년 전에 펠레가 우리나라에서 경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 싶다며 부모님께 텔레비전 사달라고 떼쓰다가 실컷 혼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축구의 매력은 TV라는 매체를 통해 어린 소년의 눈에, 가슴에, 머리에 하나씩 아로새겨졌다. 감수성 강한 소년에게 축구선수의 동작 하나하나, 멋진 골, 숨가쁜 명승부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추억이다. 최초의 TV중계 기억은 1973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74서독월드컵 아시아예선 이스라엘전이다. 한국은 이 경기에서 이겨야만 호주와의 최종결정전에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국민적 관심이 집중됐다.

    아카시아 향기가 그윽한 5월의 봄날 저녁, 시골학교에 사는 사람들은 저녁밥을 후다닥 먹어치우고 TV가 있는 옆집 마당으로 모였다. 아이들에서부터 기숙사 학생들, 숙직 선생님, 아줌마, 노인들까지 40∼50명이 마당을 꽉 채웠다. TV는 안방에서 마당으로 아예 옮겨져 있었다. 사람이 많아 마루에 다 앉지 못하고 땅바닥에 멍석을 깔았다. 슈팅이 터질 때마다 일제히 탄성이 흘러나오곤 했는데, 요즘처럼 두세 명 아니면 자기 방에서 혼자 축구를 보는 것과는 맛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마치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노천광장의 대형 벽에 비추인 화면을 보며 일희일비하는 1950년대 이탈리아 시골사람들을 상상해도 좋을 것이다.

    이날 밤의 스타는 단연 차범근이었다. 내 기억에 차범근의 플레이를 TV로 보긴 그때가 처음이다. 이제 막 대학 2학년이 된 차범근이 몸집 좋은 이스라엘 선수들을 제치고 오른쪽 터치라인을 따라 질풍같이 달리면 마당에 모인 동네사람들은 일제히 두 팔을 치켜들고 ‘우와’하며 함성을 질렀다.

    0대0의 팽팽한 접전과 애간장을 녹이는 연장전, 드디어 차범근이 회심의 오른발 강슛을 이스라엘 골네트에 꽂자 마당에서는 완전히 난리가 났다. 밤하늘에 일제히 울려퍼지던 그 함성소리가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귀에 생생하다. 축구가 아니라면 그 어떤 스포츠가 그렇게 시골사람들, 아니 온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 수 있었을까.

    골이 들어가고 난 뒤에 좋아하는 모습도 가지가지다. 내 또래의 초등학생들은 폴짝폴짝 뛴다. 혈기왕성한 고등학생 형들은 자기네들끼리 걷어차며 한바탕 난리를 피운다. 선생님들이나 노인네들은 체면 차리느라 그냥 입을 헤벌리고 웃기만 한다. 가장 재미있는 사람들은 동네 아줌마들이다. 축구를 보러왔다기보다는 분위기에 휩쓸려 놀러 온 아줌마들은 경기 내내 따로 모여 앉아서 수다를 떨다가 ‘슛’소리만 나면 고개를 돌렸는데, 이 날도 차범근이 골을 넣는 순간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한편 이 경기를 서울까지 가서 직접 보고 왔다는 동네 아저씨는 “차범근의 결승골이 터지는 순간, 관중석에서 구경하던 어느 젊은 여자는 치마가 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만세를 불러서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스라엘 선수 중에 슈피글러라는 유명한 선수가 있었는데 0대1로 지고 있던 연장전 막판 자기편 선수와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다가 주먹으로 치고받는 코미디를 연출했다. 그러자 마당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싸워라, 싸워라” 하며 고소해 하던 기억이 난다.

    답답해서 미칠 뻔한 경기를 들자면 그해(1973) 가을에 열린 박스컵대회 미얀마(1970년대엔 버마로 불림)와의 준결승이 두고두고 머릿속에 남는다. 우리가 동남아시아 팀에 지는 날이 으레 그렇듯 그날도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당시 미얀마는 한국의 숙적이었는데 10년 이상 대표선수를 새로 뽑지 않고 조직력을 키워온 팀이었다. 선수 이름 앞에 전부 ‘몽’자가 붙어 모두들 재미있어 했다. 몽애몽 몽몽틴 몽하이퐁 이런 식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미얀마에서는 미혼 성인남자에게 ‘몽’을 붙인다고 했다.

    전반전에 역습으로 어이없이 한 골을 먹고 난 뒤 한국이 미얀마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후반전이 되자 미얀마는 아예 하프라인을 못 넘었다. 45분 내내 소나기 공격을 퍼부으면서 수십 차례 슈팅을 날렸지만 전부 골대를 비껴가거나 골키퍼 품에 갖다바쳤다. 그렇게 골이 안 들어가는 경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밖에 비가 내리는 탓에 TV가 놓인 안방은 발디딜 틈이 없었는데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에다 기다리던 골은 안터지면서 저마다 얼굴들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어떤 사람은 땀까지 흘렸다. 한국은 결국 0대1로 미얀마에게 졌고, 미얀마는 크메르와 공동우승을 차지했다(크메르가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그때가 최초이자 마지막이다). 그날 이후 나는 일방적으로 공격하다가 역습을 당해 0대1로 지는 경기만 보면 미얀마와의 수중전이 생각나서 몸서리를 친다.

    축구중계가 있을 때마다 옆집에 가서 아예 살다시피하자 어머니의 잔소리가 점점 심해졌다. 다행히 공부를 제법 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만날 끌려나올 판이었다. 어느날은 국제경기가 열렸는데 밤 10시에 녹화로 보여주었다. 워낙 늦은 시간이라 나말고는 아무도 구경꾼이 없었다.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있는 옆집의 젊은 부부는 연신 “이제 그만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밤 10시에 젊은 부부가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면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시간대일 게 뻔한 일. 그러나 그런 오묘한 음양의 이치를 알 리 없는 열 살짜리 꼬마에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차마 가라는 말은 못하고 남편이 이렇게 묻는다.

    “기룡아, 지금 몇대 몇이고?”

    “2대0으로 우리가 이기고 있습니다.”

    “에이, 그러면 보나마나 이겼네. 재미도 없겠다.”

    옆에 누워있던 아내는 또 이렇게 거든다.

    “기룡아, 너거 요새 몇시까지 학교에 가노?”

    “8시까지 가는데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되겠다. 그쟈?”

    그러나 나는 모른 척하고 끝까지 중계방송을 시청했다.

    거의 빼놓지 않고 TV중계를 본 덕분에 나는 시골마을의 꼬마 축구박사가 되었다. 고등학생 형들도 “몇시에 중계가 있냐”고 내게 묻고, 경기중에는 “저 선수는 누구냐” “지난 번에 골 넣은 선수가 누구냐” 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럴 때마다 친절하고 정확하게 설명해서 “기룡이 네가 해설자로 나서라”는 말까지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잘한다고 칭찬해주면 신이 나서 더 잘하는 법이다. 중계가 있을 때마다 나는 수준 높은(?) 해설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곤 했다.

    그해 겨울에 TV로 본 경기는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특히 어린 마음에 패배의 쓰라림이 얼마나 큰가를 뼈저리게 느낀 경기가 있다. 바로 74서독월드컵 최종예선 호주전이다. 앞서 말한대로 한국은 이스라엘을 이겼기 때문에 호주와의 최종전에서 승리하면 대망의 서독월드컵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호주에서 열린 1차전은 선전 끝에 0대0 무승부였다. 2차전은 11월의 쌀쌀한 날씨에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다.

    이제 홈경기니까 이길 수 있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한국은 초반부터 압도적인 경기를 펼치다가 전반전 중반 고재욱이 중거리슛을 성공시켰다. 3만 관중이 열광했다. 조금 뒤 꺽다리 공격수 김재한이 골키퍼한테 주는 백패스를 가로채 다시 한 골. 2대0. 월드컵이 눈앞에 보였다. 아! 한맺힌 월드컵 진출이 드디어….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후반 들어 호주의 반격이 거세지더니 끝나기 직전 연달아 두 골을 먹었다. 관중석은 쥐죽은 듯했다. 허탈함의 극치였다. 마치 1993년 카타르 도하에서 일본이 월드컵 본선 직전까지 갔다가 이라크의 자파르에게 동점골을 먹고 주저앉았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함께 TV를 보던 동네 사람들도 경기가 끝나자 모두 말을 잊었다. 나도 더 이상 축구 보기가 싫어졌다.

    결국 한국은 제3국인 홍콩에서 3차전을 벌였는데 통한의 중거리슛을 허용, 1대0으로 허망하게 패하고 월드컵 진출의 꿈을 날려버렸다. 3차전에서는 우리 선수들의 체력이 호주에 비해 현저히 떨어져 제대로 뛰지 못하자 ‘대표선수들에게 고기를 먹이자’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끌기도 했다.

    1970년대에 우리나라 최고인기 스포츠는 축구였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프로스포츠라는 게 없었고, 몇몇 구기종목 이외에는 스포츠가 활성화되지 않았다. 골프니 테니스니 하는 운동도 일부 상류층만 즐기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보니 공만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축구가 최고인기 스포츠가 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도시건 시골이건 어디를 가나 빈 공간만 있으면 공을 차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내가 살던 시골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운동장이 꽤 넓어 근처 동네에 사는 학생들이나 어른들이 평일이고 주말이고 할 것 없이 날마다 와서 공을 차곤 했다. 그중에서도 일요일마다 열리는 시합이 볼 만했다. 고등학생팀과 성인팀의 ‘일요정기전’이었는데 우리 동네 최고를 다투는 두 팀의 대결이라 TV로 보는 대표팀 축구시합만큼이나 인기를 끌었다.

    나는 일요일 아침만 되면 부리나케 아침밥을 먹고 형과 함께 운동장 스탠드로 달려갔다. 풀밭으로 이루어진 스탠드는 운동장보다 위쪽에 있어서 관람하기에는 명당이었다. 경사도로 말하자면 축구전용구장의 TV카메라 위치만큼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우리 형제뿐만 아니라 학교 사택에 사는 중고등학생 형들도 풀밭에 자리를 잡곤 했다.

    우리는 편의상 두 팀의 명칭을 정했다. 고등학생팀은 ‘청소년대표팀’, 성인팀은 ‘국가대표팀’이라고 거창하게 갖다붙였다. 유니폼을 맞출 형편이 안되던 시절이라 ‘청소년대표팀’은 웃통을 벗고, ‘국가대표팀’은 셔츠를 입는 것으로 상대를 구분했다. 축구화도 메이커 제품은 엄두를 못내고(당시는 진짜 국가대표 선수들도 메이커 신발을 제대로 신지 못했다) 운동화 아니면 맨발 차림이었다.

    언뜻 생각하기에 성인들이 고등학생들을 가볍게 이길 것 같았는데 요게 그렇질 않았다. 경기는 언제나 팽팽했다. 그냥 경기만 구경하면 재미가 없으니까 관람객들 중에 입담 좋은 형들이 중계방송을 진행했다. TV와 라디오에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이다.

    “전국의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경북 김천농업고등학교 축구장입니다. 여러분께 미리 예고해 드린 바와 같이 오늘은 국가대표팀과 청소년대표팀의 경기를 중계방송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경기장에는 10만 관중이 벌써 꽉 찼습니다(1명당 1만명씩 부풀려 계산). 먼저 해설자께서 양팀 선수를 소개해 주시죠.”

    “네, 먼저 청소년팀부터 소개하겠습니다. 골키퍼 000선수는 축산과 2학년입니다. 수업시간만 되면 졸지만 경기 중에는 절대로 졸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수비에 000선수, 빨간 삼각 팬츠 입은 선수 보이죠? 청소년팀의 주장입니다. 여기서 봐도 얼굴이 시커멓지만 가까이서 보면 더 심합니다. 공격에 000 선수, 저 선수는 파란 팬츠를 입었군요. 고3인데 나이는 마흔 살이 넘어 보이죠? 상대팀에서 부정선수라고 날마다 시비 거는 선수입니다.”

    “아, 말씀 드리는 순간 국가대표팀의 찬스입니다. 슈우웃, 그러나 헛발질…. 아니, 어떻게 저런 선수가 대표팀에 뽑혔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땅바닥이 고르지 못해 그렇지 저 선수는 개인기가 뛰어난 공격수입니다. 잔디구장 하나 없는 한국축구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어서 빨리 잔디구장을 만들어서 한국축구의 숙원인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야 하겠습니다. 다시 청소년팀 볼 잡았다! 그런데 해설자인 제가 왜 중계를 하죠? 아나운서는 중계 안하고 뭐하고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말도 안되는 우스갯소리를 해가며 중계를 하면 주위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경기하다 말고 운동장 한쪽 구석에 가서 오줌을 누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새카만 후배가 태클 한다고 한쪽 귀를 잡아당겨 끌고가서 기어코 한대 쥐어박고야마는 ‘대표팀 선수’도 있었다.

    두 팀의 대결은 한 게임만 하고 끝나는 법이 없었다. 3전 2선승제로 열리기 때문에 오전에 한 게임을 치르고 일단 점심 먹으러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오후 2시쯤 다시 모여 2차전을 치르는데 한 팀이 두 번 다 이기면 ‘시골리그 제 ○○일째 경기’는 그걸로 끝이 난다. 그러나 1승1패일 경우 30분 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3차전을 벌인다. 그래서 더블헤더도 아닌 트리플헤더가 숱하게 열리곤 했다. 3차전까지 끝나면 벌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황혼의 시간이 되곤 했다.

    하루에 세 게임을 뛴다고 하면 요즘 사람들 생각으로는 “별 무식한 놈들 다 보네”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만큼 마음의 여유,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고나 할까? 하루 종일 축구를 해도 즐겁던 세상, 순박함과 낭만이 있는 시절이었음에 분명하다. 붉은 석양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면서 무거운 신발을 끌며 집으로 돌아가는 청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어린 마음에도 왠지 모를 허전함과 아쉬움이 느껴졌다.

    나라고 항상 구경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 갔다오면 동네 형들과 운동장에 모여 공을 찼다. 어릴 때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유명한 선수들의 이름을 각자 정해놓고 축구를 즐긴다. 형들이 붙여준 나의 이름은 ‘박영태’, 그리고 ‘찬드란’이었다. 나는 주로 수비를 했었는데(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 공격보다는 수비를 하라고 형들이 권유했다. 축구를 못해서 수비를 맡은 것이 절대 아님!), 형들이 당시 유명한 국가대표팀 수비선수 박영태의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또한 찬드란은 말레이시아의 수비수이지만 역습에 능한 선수였다.

    나는 나이 많은 형들과 축구를 하다 보니 축구경기 자체보다는 형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더 재미있었다. 경기가 끝나면 운동장 한쪽 구석 풀밭에 앉아 형들의 대화를 유심히 들었다. 아버지가 학교 인부였던 어떤 형은 굉장한 수재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소문들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특히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형은 “박정희 이 새끼, 순 독재자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는데, 학교에서 ‘박정희는 위대한 대통령, 유신헌법은 우리가 살 길’이라고 철저하게 세뇌를 받던 나에게는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한때는 이 형이 ‘북한괴뢰’가 내려보낸 간첩이 아닐까, 신고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형이 박정희 이야기만 꺼내면 나를 비롯한 초등학교 친구들과 중학생 형들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 형은 “박정희 이 놈이 얼마나 나쁜 줄 알아?” 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부패상을 비판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게 대부분 정치적 스캔들이었다. 이밖에도 이 형이 들려준 연예인 이야기 식인종 시리즈 등도 엄청나게 재미있었다. 물론 이 형도 열렬한 축구팬이라 TV에서 축구를 중계하면 철저하게 경기분석을 해주었는데 어린 내 눈에도 그만한 축구전문가가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쯤 되자 나의 꿈은 확실하게 세워졌다. 바로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다. 국가대표 선수는 물론 유명한 스타플레이어가 되어 이름을 날리는 것, 그 얼마나 멋진 꿈인가. 내가 생각해도 대견했다.

    다행히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는 비록 성적은 형편없었지만 축구부가 있었다. 따로 축구선수 출신의 코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학교 선생님 한 분이 지도했는데 이 분이 참 멋있는 사람이었다. 얼굴도 잘생기고 축구부 아이들을 끔찍하게 사랑한 총각 선생님이었다. 다리에 상처가 나면 수돗가로 데려가 물로 씻어주고 약도 직접 발라주었다. 가끔씩 하숙집으로 데려가 고기까지 먹인다는 소문도 있었다. 고기 한번 제대로 먹기 힘든 가난한 학생들에게 축구부는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어느날 나는 불타는 마음으로 축구부가 연습하는 것을 혼자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런데 코치 선생님이 선수들을 다 부르더니 이러는 것이었다.

    “오늘은 더 연습해야 하지만 TV에서 좋은 경기가 있으니 가서 구경해라. 고려대학교와 일본 와세다대학교의 경기다. 고려대에는 차범근을 비롯해서 좋은 선수들이 많으니까 배울 점이 많을 거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그 선생님이 너무나 멋있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당장 달려가서 TV를 보았다. 붉은색 줄무늬 유니폼을 입은 고려대 선수들이 뛰는 것을 보고 나도 얼른 축구선수가 되어 고려대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하늘은 나를 저버리고 말았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축구부는 5∼6학년들로 구성되었는데 워낙 시골학교이고 학교의 지원도 신통치 않아서 대회에만 나가면 판판이 깨졌다. 유니폼도 없어서 보통 런닝에다 그냥 학교 이름만 써붙이고 출전했다.

    시내(김천시)에서 대회가 열리면 나는 친구들과 함께 구경갔는데 우리 학교에서는 그렇게 날고 기던 형들이 막상 다른 학교하고 붙기만 하면 맥을 못추고 대패했다. 참 실망스러웠다. 친구들은 “똥통 학교가 별수 있어?” 하면서 비하했다.

    성적이 그렇다보니 내가 4학년 여름방학을 맞을 무렵 학교에서는 그만 축구부를 해체해버렸다. 아깝도다. 조금만 기다렸으면 ‘스타 플레이어’ 하나가 나오는 건데…(이런 것을 보더라도 학교체육보다는 하루 빨리 지역단위 축구클럽 시스템이 정착되어야 한다).

    같은 반 친구들도 교장 선생 욕을 엄청나게 해댔다. 물론 나처럼 축구부 지망생들이었다. 나는 축구선수가 될 수 없는 게 너무나 분통터져 며칠 동안 밥이 제대로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닥친 상심과 좌절은 비슷한 일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총각 선생님의 애타는 심정에 비할 수 있겠는가. 비록 대회에 나가서 번번이 패했지만, 축구를 아끼고 아이들을 사랑했던 그 선생님의 가슴은 얼마나 아팠을까.

    일요일 하루 온종일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청소년팀’과 ‘국가대표팀’ 선수들, 운동장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똑똑한 형, 축구 꿈나무를 키워보려다가 좌절하고만 선생님. 나는 그들이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축구의 멋진 비상을 바라는 마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으리라.

    1974년 봄 나는 ‘소년동아일보’를 구독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신문에 나오는 문제를 풀어보라면서 구독시켜준 것이었다. 그러나 난 문제풀이보다는 김삼 아저씨가 그리는 만화 ‘소년 007’ 보는 재미로 읽고 있었다. 어느날 ‘소년동아일보’에 어린이 잡지 광고가 나왔다. 당시 어린이 잡지의 빅3는 ‘어깨동무’ ‘새소년’ ‘소년중앙’이었다. 물론 이 세 잡지 외에는 없었지만.

    ‘새소년’ 잡지의 부록으로 손오공 만화가 나왔다. 나는 손오공이 보고 싶어 어머니에게 며칠간 떼를 썼다. 그때 잡지 한 권 값이 500원 정도였는데, 웬만한 부자 집안 아니면 사기가 힘든 시절이었다. 자장면 한 그릇에 100원 할 때였으니까 내가 하도 귀찮게 하니까 드디어 어머니가 500원을 주셨다. 난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시내 서점으로 달려가 ‘새소년’을 사서 ‘손오공’부터 보았다.

    ‘손오공’을 다보고 나서야 ‘새소년’을 뒤적거렸다. 그런데 책 중간에 아주 잘생긴 외국 축구선수 소개가 나왔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란다. 이름은 요한 크루이프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아는 세계적인 축구선수는 펠레와 자일징요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대충 내용을 기억하면 유럽 최우수 선수에다 소속팀(아약스)을 유럽 최고의 팀으로 만들었으며, 이번 서독월드컵의 MVP후보 0순위라는 것이다. 특히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크루이프의 동작을 연속사진으로 찍어놓았는데, 그 유명한 ‘크루이프 턴(Turn)’도 있었고, 상대 선수를 멋있게 제치는 모습도 배열해 놓았다. 나는 사진만으로도 크루이프가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외모는 얼마나 잘생겼던지. 호리호리한 몸매에다 잘 빗어넘긴 갈색 머리, 영리해 보이면서도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눈동자. 아무튼 모든 것이 멋있게 보였다. 그래서 서독월드컵이 열리면 꼭 봐야지 하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두달 뒤 서독월드컵이 개막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TV에서 월드컵 전경기를 중계하지는 않았다. 어쩌다가 빅게임 한두 경기 녹화해서 보여주는 수준이었다. 그런 까닭에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 집에서 TV를 샀음에도 나는 크루이프를 볼 수가 없었다.

    마침내 네덜란드와 폴란드의 경기를 녹화로 보여준다는 광고가 KBS에 나왔다. 방송시간은 일요일 밤. 그 시간은 MBC에서 장안의 최고 인기프로인 ‘웃으면 복이 와요’와 ‘수사반장’을 방영하는 때다. 나는 은근히 걱정됐다. 식구들이 모두 축구 안 보고 코미디 보자고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집의 채널 선택권을 쥐고 있던 아버지가 저녁에 외출하실 예정이어서 내가 우긴다면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경기시간이 되자 역시 예상대로 모든 식구들이 ‘웃으면 복이 와요’를 보자고 난리를 쳤다. 하지만 나는 “죽어도 축구를 봐야 한다”고 맞섰다. 한동안 실랑이을 하다가 결국 어머니가 “기룡이 소원인데 우리가 참자” 하면서 양보했다.

    짜안! 네덜란드와 폴란드의 경기가 시작됐다. 한국팀 경기만 보던 내 눈에 월드컵 축구는 정말 환상이었다. 그중에서도 네덜란드의 정확한 패스, 날카로운 센터링, 힘 있는 공격 등은 마치 기계가 돌아가는 것 같았다. 어린 눈에도 정말 뭐가 달라도 다르게 보였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게 네덜란드가 최초로 들고나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토털사커’ 아니었던가.

    가끔씩 크루이프가 화면에 잡혔는데 주장 완장을 차고 쉴새없이 동료들에게 소리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설설 움직이다가도 벼락같이 드리블하고 패스하는데 날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난 네덜란드 축구에 푹 빠져 들고 말았다.

    그런데 전반전이 끝날 무렵 갑자기 외출했던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방안에 들어오시자마자 “어? 수사반장 왜 안하노?” 이러시는 것이었다.

    난 가슴이 뜨끔했다. 그래서 “축구가 억수로 재미있는데요” 이러면서 아버지 눈치를 살폈다. 일부러 봐달라는 애교의 미소도 지어보였다. 아, 그러나 아버지는 귀여운 아들의 애처로운 눈망울을 너무나 잔인하게 외면하셨다. 그러고는 “뭐라 카고 있노? 빨리 수사반장 돌려!” 이러는 것이었다. 나는 힘이 쪽 빠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힘 없이 채널을 돌리고 그만 방안을 나오고 말았다. 그날 따라 최불암이 왜 그리 밉던지…. 난 지금도 최불암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끝내 보지 못한 후반전, 그리운 요한 크루이프. 그날 이후 나는 크루이프의 열성팬이 되었다. 몇 년이 지나고 중학생이 된 뒤 우연히 ‘주간 스포츠’라는 잡지에서 읽은 크루이프의 전기는 또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영국의 ‘월드사커’지 기자가 쓴 것으로 기억하는데 대여섯 번은 숙독한 것 같다.

    잡지에는 아약스클럽의 선수식당 청소부였던 홀어머니 이야기와 소년클럽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미헬스 감독을 만나 토털사커를 꽃 피우게 된 내용 등이 실려 있었는데, 축구선수 전기가 그렇게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제목이 ‘위대한 오렌지 백넘버 14번’이었던가? 지금도 초등학교 때 못본 그 후반전이 생각나 녹화 테이프가 있으면 사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

    1975년 5월, 화창한 봄을 맞아 박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가 열렸다. 박대통령배 축구대회는 일명 박스컵(Park’s Cup)이라 불렀다. 성이 박씨였기에 망정이지 김씨나 이씨였으면 영 발음이 우스울 뻔했다. 화창한 봄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건 날씨가 그렇다는 얘기고 나라 전체는 완전히 전시체제나 다름없었다. 약 보름 전에 베트남 전쟁이 끝나면서 베트남이 공산화됐기 때문에 나라 전체에 초비상이 걸렸던 것이다.

    연일 대통령 특별담화가 나오고 TV에서는 반공특집 프로그램이 줄을 이었다. 김일성이 신이 나서 남한을 침공할 지도 모르니 전국민이 ‘총력안보’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는 천편일률적인 내용에다, 군사훈련중인 북한군대의 화면이 지겹도록 반복되었다. ‘실화극장’ 같은 반공드라마도 재탕, 삼탕 방영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것이 텔레비전 프로가 끝날 때마다 군가를 하나씩 의무적으로 틀도록 한 조치였다. 덕분에 동네 개구장이들도 동요나 유행가 대신 ‘너와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라든가 ‘싸우며 일하고 일하며 싸우자’ 하는 군가를 부르며 놀았다. 거기에다 민방위 훈련이 시작되어 멀쩡하게 길을 가다가 지하도로 대피하는, 어처구니 없는 코미디가 벌어졌다.

    나라꼴이야 어찌 됐든 봄은 찾아왔고 축구경기는 열렸다. 박스컵을 맞아 대표팀이 전면적으로 개편되었다. 1년 전 아시안게임에서 대표팀은 막강한 전력을 가진 북한을 피하려고 일부러 약팀에게 져주는 추태를 보이다가 결국 결승에도 오르지 못하고 예선탈락했다. 거기에다 일본에서 열린 한·일정기전에서 1대4의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빗발치는 여론에 못이겨 축구협회는 드디어 이회택 박이천 김호 고재욱 같은 늙은 선수들을 제외시켰다. 그리고 허정무 이영무 조영증 박성화 최종덕 같은 대학생 선수들을 새로 뽑았다. 이들 신인 선수들의 놀라운 파이팅에 힙입어 한국은 승승장구했다. 예선 마지막 경기는 일본전이었다. 몇 달 전의 1대4 패배를 설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한일전은 야간경기로 열렸다. 나는 당연히 중계방송을 보기 위해 저녁밥을 먹자마자 TV 앞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축구중계를 안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예선경기지만 역사적인 한일전인데 중계를 안하다니.

    알고보니 그날 밤 동대문야구장에서 또 하나의 빅이벤트가 열린다는 거였다. 바로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결승전 경북고 대 광주일고의 경기가 있었다. 잘 알겠지만 프로야구가 나오기 전까지 고교야구는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결승전인데다 경북고와 광주일고 하면 경북과 전남의 최고 명문학교 아닌가.

    고교야구의 인기에다 지역감정까지 결합되어 이날의 승부는 전국민적인 관심을 끌었다. 동대문 축구장과 야구장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두 경기가 동시에 펼쳐진 셈이다. 아마 역사상 두 경기장에 동시에 3만 관중이 몰린 경우는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방송3사 중 TBC(동양방송)는 삼성그룹 소유이고, 삼성 계열이었던 ‘중앙일보’는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를 개최하고 있었으니까, TBC가 축구를 포기하고 야구를 선택한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KBS와 MBC마저 축구 한일전을 외면하고 고교야구 중계로 돌아선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고교야구를 재미있게 보는 사람이었지만 어찌 축구 한일전에 비길 수 있으랴. 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젊은 선수들이 한창 날리고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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