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호

‘압도적 인간’ 도올 김용옥

  • 이나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byeme@donga.com

    입력2005-04-18 13: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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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天才인가 賤才인가
    • 사람과 매스컴의 장막에 갇힌 기인
    • 고집·집중력·탐구욕·탁월한 감성
    • 은귀이개 분실 사건
    • 쭈꾸미와 조니워커블랙
    •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 ‘엄마’
    • 그이 안에 살고 있는 열두 살 소년
    • 66년 가을 ‘몸’을 발견하다
    • 강의는 내림굿, 책 쓰기는 살풀이
    • 주관의 절대화, 도저한 상대주의
    • 충동적 열정가, 결핍의 나르시즘
    • 감정을 위해 논리를 개발하다
    • 김우중 알레르기
    • 도올이 싫어하는 사람, 도올을 싫어하는 사람
    ‘애타게 수잔을 찾아서(desperately seeking susan)’. 미국의 여성 감독 수잔 세이들먼이 연출한 영화다. 주인공은 뉴저지주의 ‘정숙한’ 주부 로버타(로잔나 아퀘트)와 애틀랜타에 사는 ‘헤픈’ 여자 수잔(마돈나). 어느날 지루한 일상에 지친 로버타는 신문에서 ‘애타게 수잔을 찾습니다’라는 광고를 보고 강한 호기심을 느낀다. 수잔을 찾아나선 로버타는 정말 그녀를 만나고, 일련의 소동 끝에 자신을 수잔이라 착각하는 지경에 이른다. 로버타와 수잔, 수잔과 로버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여성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마침내 ‘한몸’이 된다. 자아찾기의 끝, 이들은 서로의 모습에서 자기 내부에 숨어 있던 ‘또 하나의 나’를 발견하는 데 성공한다.

    한몸, 혹은 한정신이 품고 있는 극단의 두 성향. 대개의 사람이 그중 하나를 자신의 얼굴로 선택해 살아가는 건 그 편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간혹 우리는 둘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함이 없이, 그리하여 일견 모순되고 맥락 없어 보이지만 그 자체로서 실존이요 완성인 압도적 인간을 만난다. 물론 거기에는 그를 단지 자아분열적 인간으로 폄훼할 수만은 없게 만드는 강렬한 재능, 자존감, 치열성이 있다. 누가 뭐래도 ‘그 자신’인 존재 앞에서 사람들은 종종 분노나 당혹감, 혹은 끝 모를 찬탄의 염을 느낀다. 도올() 김용옥(金容沃·53)은 우리에게 바로 그런 사람이다.

    지난 두 주일, 애타게 그를 찾았다. 도올을 찾아나선 길에 만난 것은 늙고 어리며, 천재(天才)이자 천재(賤才)이고, 스승인 한편 학생이며, 투사인 동시에 간부(奸夫)이자, 열정 그 자체이면서 철인(哲人)인 수많은 얼굴, 얼굴들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도올이 그중 어느 하나도 애써 숨김없이 모두 ‘나’임을 드러내놓고 산다는 점이었다.

    그 역설과 모순이 만들어내는 혼돈의 아우라 속에 분명 그가 있을 것이었다. 진면목(眞面目)이 있을 것이었다. 애타게 도올을 찾아서, 인간의 마을을 헤매이다….

    人의 장막, 매스컴의 장막



    대중(大衆)은 도올을 어떻게 만나는가. 이전의 그는 ‘글’이었다. 40여 권에 달하는 저서와 각종 기고를 통해 그는 비교적 소수의 지식인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오늘날의 도올은 ‘몸’이다. TV 속에서 그는 온몸으로 전국민에게 육박한다. TV는 ‘몸의 철학’을 주창하는 그가 찾아낸 최고의 소통 도구이자 ‘천재성’의 탈출구다. 그는 일찍이 저서 ‘여자란 무엇인가’에서 천재성이란 ‘천재를 천재답게 만드는 것, 자기의 살아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출할 수 있는 용기’라고 정의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 도올을 잡으려면 도올 코앞에서 쌈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바리케이드가 쳐 있다. 인(人)의 장막이요 매스컴의 장막이다. 장벽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그가 ‘인간 김용옥’의 모든 것일 수는 없다. 애초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알아버리겠다고 덤비는 것 자체가 하느님 앞에서 우주를 논하는 것처럼 본데없고 성공 불가능한 작업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사람의 눈으로 본 사람, 김용옥을 이야기할 밖에.

    도올을 이해하려면 자(子)가 아니라 컴퍼스를 들이대야 한다. 도올이 도달해 있는 최고치의 무엇, 그것이 지식이건 철학이건 열정이건, 그 절정의 것에 초점을 맞춰 크고 둥근 원을 그려야 한다. 뜻밖에도 그가 지닌 그 많은 ‘얼굴’은 모두 한 원 안에 살고 있는 존재의 나사 같은 것들인지도 모른다.

    감성·고집·탐구욕·집중력

    도식적이지만 사람 얘기를 풀어가는 데는 아무래도 편년체가 제격이다. 도올은 48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 4남2녀 중 막내였는데 장형 김용준 박사(金容駿·74)와는 21세, 형제 중 넷째인 누이 김숙희 전 교육부장관(金淑喜·64·재임기간 93년 12월~95년 5월)과는 11살 차이가 난다. 김용준 박사에 따르면 도올은 “어머니가 오래 병을 앓다 38세 무렵 어렵게 본 막내”, 그러니까 늦둥이다. 노산에 난산이 겹쳐 겸자를 써 겨우 ‘끄집어냈다’. 조금은 특이한 눈매도 “노산 탓”이라는 것이 집안 사람들의 중론이다.

    아버지 김치수씨(金致洙·작고)는 천안에 두개밖에 없는 병원 중 하나인 광제의원 원장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용돈을 달라고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때마다 병자들이 들락날락하는 병원 문고리를 만졌다고 간호원에게 손을 소독수로 씻게’ 할만큼 철저한 분이었다. 한편으론 ‘퍽이나 취미가 없는 무미한 사람’으로 ‘개화문물을 무척 좋아했다’. 엄하지는 않아 자녀들에게 매를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반면 어머니 홍희남 여사(洪喜男·91)는 대단히 엄격했다. 자녀들이 잘못하면 가차없이 회초리를 들었다. 도올의 부모는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도올 역시 태어나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 받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머리는 좋지 않았으나 탐구력이 강했다. 그리고 매우 섬세한 감성과 탁월한 손재주의 소유자였다. 나는 홀로 있기를 좋아했으며 작은 일에 아픔을 감지하는 일이 많아 눈물이 특히 많았다. 지나가다가도 풀 한 포기가 이상하게 눈에 띄면 그것에 대한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쭈그리고 앉아 시간가는 줄 몰랐고 혼자 어두운 골방에 하루종일 앉아 생각하느라 배고픈 줄을 몰랐다.”

    도올이 말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다.

    어머니 홍여사도 “용옥이는 고집이 셌다. 길 가다가도 뭔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묻고 대답이 나올 때까지 움직이지 앉았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고집, 집중력, 탐구욕, 탁월한 감성. 이 네 가지는 도올의 타고난 유산인 셈이다.

    아버지가 의사인만큼 도올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일주일에 한번은 온 가족이 시발택시를 대절해 온양온천으로 목욕 나들이를 갔다. 온양온천 관광호텔에 가족탕을 두 개쯤 세내 푸근하게 씻고 돌아왔다. 도올은 한 수필에서 “당대 이러한 풍광은 사실 지극히 귀족적인 것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의 온양나들이는 ‘귀족적 습관’을 넘어 놀이로 이어졌다. 동년배들과 버스를 타고 가족탕이 아닌 공동목욕탕 나들이를 자주도 했던 것이다. 물론 그 비용은 대강 도올이 부담했다.

    그렇다 해도 사실 도올에게 ‘귀족적 취향’은 생애를 두고 이어온 습속이다. 어쩌면 막걸리를 즐겨 마실 듯한 도올이 자주 찾는 술은 조니워커블랙이라고 한다. 또한 그의 미식 취향은 유명한 것이어서 저잣거리에서 파는 ‘기가 다 빠진 주꾸미’ 따위로는 도저히 만족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비싼 음식만 찾아다니는 것은 아니다. 인공조미료가 들어 있지 않은, 그만의 독특한 ‘최고의 심미적 경지’를 만족시키는 음식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자주 찾는 식당, 술집이 따로 있다.

    그의 ‘취향’은 완고한 것이어서 때로는 집착으로 화하기도 한다. ‘은귀이개 분실사건’이 대표적 예다.

    지난해 4월경, 연세대 중문과 교수인 아내 최영애 박사(崔玲愛·55)가 도올이 40여 년 간 간직해온 은귀이개를 잃어버리는 ‘대사건’이 발생한다. 맘에 드는 것이면 작은 물건이라도 귀히 간직하는, 그래서 고등학교 때 쓰던 필통을 아직도 쓰는 그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순은으로 만든 귀이개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도올 부부는 그 귀이개를 이용, 아이들의 귓밥을 파주곤 했다. 그런데 최교수가 그걸 내다 쓰고는 늘 두던 자리에 갖다놓지 않은 바람에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부부는 꼬박 사흘 동안 집안을 뒤지고 또 뒤졌지만 끝내 물건을 찾을 수 없었다. 맘이 상한 도올은 친구인 가수 조영남에게 전화를 걸어 아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호소했다.

    도올은 자신이 운영하는 도올서원의 간행물 ‘도올고신(故新)’에 쓴 수필 ‘삼십여년일순간(三十餘年一瞬間)’에 당시의 참담한 심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통곡의 눈물이 쏟아져 나올 지경이다. 자연히 우리 둘 사이의 싸움은 프로이드 이론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나는 아내가 나의 사랑하는 ‘은귀지’를 분실한 것이,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나에 대한 사랑과 유념의 정이 희박해진 의식의 사태를 반영하는 중대한 사건이라고 휘몰아쳤다. 아내는 논박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나는 참으로 악랄한 남편이었다.”

    ‘내 맘에 꼭 맞는 것, 내 눈으로 보기에 완성된 어떤 것이 아니면 참을 수 없는’ 도올의 취향은 유교의 가르침 중 특히 예(禮)를 강조하는 학문 세계와도 얼마간 관련이 있는 듯하다. 도올은 고려대 교수 시절 즐겨 학생들의 혼례를 기획하고 연출했다. 85년 11월에는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에서 열린 부모의 회혼례 행사를 자못 화려하게 치렀다. 도올은 저서 ‘여자란 무엇인가’에 그 과정을 장장 10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덧붙인다. “노동운동하시는 분들은 대뜸 너무 부르주아틱하다고 욕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날 초대된 모든 사람들로부터 일푼의 축하금도 받지 않았다…. 禮는 禮인 것이다.” 지극한 예(禮)는 도올에게는 곧 놀이요 예술인 것이다.

    막내아들이 천안 제3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어머니 홍여사는 도올의 담임교사를 집 아래채에 머물게 한다. 그곳에서 도올은 같은 반 우등생들과 과외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도올은 성실한 학생이 아니었다. 다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주변의 과외 멤버들은 모두 나보다 훨씬 똘똘했다. 그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나보다 쉽고 명료하게 알아들었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정말 공부하는 것이 괴로웠다. 그러니 과외 책상에 앉기만 하면 졸음이 왔다. 그래서 소변 누러 간다고 하고 살그머니 빠져나와 위채에 있는 우리집 따끈따끈한 안방 비단이불로 쏘옥 들어가 새큰새큰 잠들어버리고 마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도올은 서울사대부중에 응시했으나 낙방해 보성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돈암동에 있던 장형 김용준 박사의 집에 살게 된다. 이 집이 바로 도올이 늘 하소연하는 ‘KS(경기고등학교-서울대) 콤플렉스’의 진원지다.

    김용준 박사는 경기고, 서울대 화공과 졸업 후 미 텍사스A&M대에서 이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65년 고려대 화공과 교수가 된 이후 해직과 복직을 거쳐 93년 정년퇴임했고 지금은 수원대 화공과 대우교수다. 도올과 나이가 같아 형제처럼 지낸 장조카 김철재씨(金哲載·53), 그 동생인 숭실대 사학과 김인중(金隣中·49) 교수도 경기고, 서울대 출신이다.

    그렇다면 도올의 다른 형제들은 어떨까. 둘째형 용균씨는 보성고, 전남대 의대를 나와 개업의로 활동했다. 셋째형 용균씨는 경기고를 거쳐 가톨릭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딴 후 가톨릭대·조선대·순천향대 피부과 교수를 지냈다. 지금은 개업의로 활동 중이다. 김숙희 전 교육부장관은 이화여고와 이화여대를 거쳐 텍사스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정신여고·이화여대를 졸업한 바로 위 누나 용주씨는 가정주부다.

    아무튼 KS가 3명이나 되는 집안에서 도올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던가 보다. 형 김용준 박사는 “그때의 용옥이로 말하면, 한마디로 ‘샤이(shy; 수줍은, 숫기없는)’한 애였다”고 말한다.

    “말이 없고 뭘 물으면 무척 쑥스러워했어요. 그때도 고집은 대단해서 맘에 안 들면 확 집어던질 듯 성질을 냈지요.”

    큰형수 윤정로씨(72)의 회고다. 한편으론 집중력이 뛰어나 어떤 일에 몰두하면 먹고 자기를 잊을 정도였다고 한다.

    김박사는 도올의 성격이 ‘튀는 쪽’으로 바뀐 시기를 대학 입학 후부터라고 말한다.

    “방학 때면 고향 천안에 있는 절에 들어가 일주일씩, 열흘씩 머물곤 했지요. 돌아올 때는 스님들의 다 떨어진 가사를 입고 나타났어요.”

    그렇다면 도올의 지금 모습은 ‘후천적 노력’의 결과냐고 묻자, 김교수 부부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라며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어머니가 보통 분이 아니에요. 여성이지만 대차고 당당하고 다혈질에 고집스러운 분이지요. 저만 해도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훨씬 무서웠는 걸요. 자식들 모두 어머니의 그런 기질을 조금씩 이어받았는데, 그중 용옥이가 제일 많이 닮았어요.”

    김박사는 “우리 형제들이 겉으로는 다 평온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제 고집 때문에 안 할 고생도 많이 하며 살았다”고 했다. 김박사만 해도 이공계 교수로는 드물게 유신독재에 항거하다, 75년 재직중이던 고대에서 해직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인상은 그지없이 소탈하고 온유해, 날카롭고 열정적인 이미지의 도올과는 언뜻 연이 지어지지 않았다.

    결핍의 나르시즘

    도올은 사석에서 가족 얘기를 잘 안 한다. 예외가 있다면 어머니다. 그와 가까이 지내온 사람들은 도올로부터 어머니와 관련한 일화 두세 가지쯤은 꼭 들어 알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도올의 마음은 존경, 그리고 두려움이다. 김용준 교수도 “용옥이 마음 속에서 어머니는 여전히 두려운 존재일 것”이라고 말했다.

    도올은 많은 책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대부분 그 호칭이 ‘엄마’라는 것이다. 도올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엄격한 훈육을 받고 자랐다. 어머니는 도올에게 스승이자 위인의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한참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에는 서울 장형 집에 머무느라 그토록 기대고 사랑받고 싶던 어머니로부터 흡족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뻘이던 형이나, 그를 ‘도련님’이라 부르며 어려워했을 형수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애정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도올은 김용준 박사의 저서 ‘사람의 과학’에 붙인 서문 ‘나의 큰형, 김용준’에서 “오랜 세월 형 집에 머물렀지만 스킨십이라 할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박사는 “뭐, 내 자식들하고도 없었는데…” 하면서도 그 구절이 내내 마음에 걸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 책이라 좀 딴 얘기도 쓸 줄 알았더니만 결국 전부 자기 얘기더구만, 허허….”

    김박사에게 도올은 여전히, 한없이 귀엽고 걱정스러운 막내 동생일 뿐이었다.

    어머니와 관련한 추억담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역시 수필 ‘삼십여년일순간’에 나오는 구절이다. 초등학생 시절, 온천 나들이만 가면 그의 머리를 탕 속에 눌러박곤 하던 장난기 많은 친구가 있었다. 어느날, 도올은 서울에서 놀러온 장조카 철재씨의 머리를 그 친구가 그랬듯 온천물에 박다 어머니의 눈에 띄고 만다. 홍여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를 나무랐다.

    ‘그때 엄마의 놀란 모습, 나라는 인간에 대한 아주 본원적인 실망과 절망감의 표정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어떻게 내 몸에서 나온 자식이 저럴 수가! 어떻게 저렇게 잔인할 수가!… 엄마는 그날 천안에서 돌아오는 시발택시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날 훈계하셨다.… “네 속엔 잔인한 기운이 있어!” 그 뒤로도 엄마는 계속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었다. 그러나 난 정말 억울했다. 그러나 성철이 흉내를 냈다고 변명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냥 잘못했다고만 어머니에게 빌었다.… 이 사건을 내가 이렇게도 명료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이러한 어릴 적의 사건이 나의 인생을 통하여 얼마나 강렬하고 깊은 반성의 끊임없는 계기가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보이는 꼬마 김용옥은 작은 아픔도 크게 느끼는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이자, 어머니를 절대적 존재로 여기며 그 말씀 한마디에 전 존재를 거는 애처로운 소년이다. 또한 착하고 생각깊고 자존심 강한. 그런 소년에게 혹여 자신이 어머니에게 만족스러운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이는 결코 가볍지 않은 마음의 짐이었을 것이다.

    “저거다! 저거다! 저거다!”

    김용옥 교수 집을 방문했을 때 어머니 홍여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홍여사는 아흔 넘은 나이에도 단아하고 기품이 넘쳤다. 또한 온유하고 정결해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어른이었다. 고령 탓일까, 막내아들 도올을 화제 삼으려 했지만 이야기는 내내 맏아들, 김용준 박사 곁만 맴돌았다.

    “언젠가 보니 웬 아주머니가 아이 셋을 데리고 가는데, 나도 곧 저렇게 되겠구나, 그러면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까, 맏이만 잘되면 다 잘 되겠지,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 우리 큰아들을 참 매섭게 가르쳤지. 맞을 일이 아니어도 때리고 그래가며 아주 엄하게 길렀어요. 그래서 그랬나, 속 썩이는 일 하나 없이 참 잘 커줬고 그러다보니 동생들도 다 그 본을 받아 가더라구요.”

    우리 옛 여인네들이 항용 그러하듯 홍여사에게도 제일의 의지요 자랑은 역시 ‘부모에 순종하며 바르게 큰 맏아들’ 김용준 박사인 듯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도올을 ‘충동적 열정가이자 나르시시스트’라고 말한다. 이중 어머니, 혹은 KS 콤플렉스와 관련지어볼 만한 것이 바로 나르시즘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나르시즘에는 거칠게 보아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과잉, 또 하나가 결핍이다. 도올은 어떨까.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에게는 아무래도 과잉보다 결핍이 우선한다. 세상을 향해 고군분투하는, 늘 칭찬받고 주목받기를 원하며, 스스로 자신의 위대함을 거듭 입에 올리는 행위는 분명 상식의 선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런 전제에서 볼 때 도올이 가장 인정받고 또 칭찬받고 싶은 이는 기실 어머니가 아닐까. 교수 시절 강의에 어머니를 초빙하고, EBS ‘노자와 21세기’ 마지막회에 어머니를 모신 후 큰절 올리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는 일은 아닐는지.

    대학생이 되면서 도올에게는 요즘의 그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특질들, 충동적이며 신기 어리고 유치하면서 때로는 과대망상적인 성격의 일단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그를 규정하던 고집, 풍부한 감성, 집요한 탐구력 또한 쇠락함 없이 오히려 더욱 강화된 형태로 자리잡았다.

    65년 서울대 농경제학과에 응시한 도올은 수학을 망쳐 낙방하고 만다. 대신 고려대 생물학과에 2차로 합격했다. 대학 입학 얼마 후 그에게 악성 관절염이 찾아온다. 학교를 휴학한 그는 고향집에 내려와 1년 반을 아버지 병원 2층 한구석 방에서 꼼짝없이 누워지내야 했다. ‘간호사들의 주삿바늘을 뺏어 내 손으로 직접 아편을 푹푹 찔러대며 그러한 마취상태에서 하루하루를 넘기고 살’만큼 혹독한 통증이었다. 66년 가을, 그에게 깨달음이 찾아온다. ‘나의 사상발전 과정에 가장 중요했던 사실은 독서를 통해 플라톤이나 예수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 몸의 발견이었다.’

    저서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 그 과정이 자세히 기술돼 있다. 병실 창 밖으로 천안극장 앞 행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화창하게 비갠 하늘에서 땡볕이 내리쬐는 어느날 어떤 남자가 큰 행길을 걸어나오는데 두 살 정도나 되어보이는 통통한 계집아이가 흰 드레스에 흰 모자를 쓰고 뛰퉁뛰퉁 아장아장 뒤따라 나오고 있었다. … 그 모습, 그 모습,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도 발랄하고 고귀한 생명의 움직임을 느꼈다. 저거다! 저거다! 저거다! 바로 저거다! …그 어린 아기의 모습과 연결되는 나의 생명의 기(氣)의 움틀거림에서 살아 움직이는 우주의 힘을 통찰했다.’ 도올은 웃어댔다. 미친 듯이 혼자 깔깔댔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간혹 홀로 환희에 차 열광하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물샐틈없이 장서로 뒤덮인 나의 방에서 혼자 미친 놈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쳐댔다. 깨달음이 올 때마다― 그 희열을 발산하기 위하여 또 나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그 거대한 우주의 모습에 경외감을 느끼며, 나는 소리쳤다’(‘여자란 무엇인가’ 중에서).

    그는 자신의 이런 지적 희열 상태를 ‘무병(巫病)을 앓는 것’으로 보았다. ‘나는 내 자신을 때때로 광인으로 생각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도올에게 강의는 일종의 내림굿이다. ‘그날 나는 교단 위에서 미쳐버릴 것이다. 그리고 작두를 탈 것이다. …그러면 나의 몸은 가뿐해질 것이다’. 이렇듯 거부할 수 없는 열정과 에너지의 폭발은 일생을 두고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의 젊은 날은 충동적 열정에 힘입은 결단, 그 뒤를 잇는 무지막지한 실천의 연속이었다.

    19세에 겪은 정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이후 도올은 병상을 박차고 나와 서울신학대학 신학과에 입학한다. ‘어머니의 강렬한 극기적 기독교신앙 속에서’ 성장함으로 인해 ‘종교적 체험을 탐구하고자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여기서도 도올 뒤에 거대한 그림자로 서 있는 어머니의 존재를 엿볼 수 있다.

    67년 가을, 도올은 관절 치료를 위해 찾은 광화문 ‘대원한의원’에서 한의사 권도원 박사를 만난다. 침술의 대가인 권박사를 통해 도올은 기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한편으론 당시 한신대에 출강하던 소흥렬 박사(전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논리적 사고란 무엇인가에 눈을 뜬다.

    68년 고려대 철학과에 편입한 도올은 막 부임한 김충렬 박사(고려대 철학과 명예교수)의 노자강의를 듣다 그 셋째 시간에 동양철학의 사유야말로 인류의 미래를 구원할 예지라 믿고 그 연구에 온 삶을 불사르기로 결심한다. 역시 충동적인 결단이었다.

    고려대 철학과 석사과정에 있던 72년, 도올은 김충렬 교수의 소개로 김교수의 은사이자 동양철학의 대가인 국립대만대 방동미(方東美·작고) 교수의 제자가 된다. 74년 6월 대만대 철학연구소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75년 다시 일본 도쿄대 중국철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한다. 역시 2년 만에 석사학위를 딴 도올은 곧바로 미 하버드대 박사과정에 진학, 6년 후인 82년 ‘王夫之(왕부지)의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금의환향한 도올은 곧 고려대교수로 임용됐다. 그리고 86년 4월, ‘양심선언’을 발표하고 돌연 교수직을 그만두기까지 수많은 학생과 화제를 몰고 다니며 명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국립대만대 재학 시절 도올은 평생의 반려 최영애 교수를 만난다. 중국 산동성 제남에서 태어난 최교수는 경기여중·고 졸업 후, 도올의 표현을 빌리면 ‘운좋게도 서울대에 낙방한 덕분에’ 외국어대 중국어과에 입학했다. 이후 국립대만대 중문과로 유학해 8년 만에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도올은 박사반에 재학중이던 2년 연상의 최교수를 처음 보는 순간 평생의 반려라는 ‘직감’이 왔다고 한다. 그리고 3개월 만에 둘은 부부가 되었다.

    “도올에게 중요한 것은 직관과 감성이다. 이는 그가 TV 강의에서도 자주 강조하는 말이다. 이런 사람에게 넘치는 것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정열이며 가장 결여된 부분은 논리적 성향이다. 도올은 진학, 전공 선택, 결혼 등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을 순간적인 감정적 확신에 따라 결정했다. 그래서 그의 깨달음에는 확신이 더하다. 감정적 근거는 논리적 근거보다 더 강렬한 에너지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도올의 학문적 논리라는 것은 기실 자신의 감정적 깨달음을 설명하고자 하는 이차적 도구일 수도 있다. 감정 이후에 그것을 설명하는 논리를 만들어내는 식이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의 말이다.

    감정을 위해 논리를 창안하다

    정씨는 “도올이 논어 대신 조선왕조실록을 강의했어도 그에 대한 논쟁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도올은 자신의 감정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오버’요 ‘과장’이지만 자신에게는 액면 그대로의 진실이다. 실제로 ‘그 순간’ 도올은 자기 느낌의 배후에 뭔가 독창적 진리가 있음을 온몸으로 ‘체험’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온갖 구절에 다 밑줄을 칠 스타일이다.

    이러한 도올의 성향은 잦은 주관의 객관화 혹은 절대화로 나타난다. 일종의 도저한 상대주의다. 그는 종종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자신의 것인 양 직설적으로 묘사한다. “내 강의에서 학생들은 폐부를 찌르는 감동을 느꼈다” “학생들은…매우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등등.

    도올에 대한 지적 중 자주 등장하는 것이 말바꾸기, 곧 일관성의 결여다. 한때 “노태우 대통령을 아내보다 더 사랑한다”던 그는 노대통령 임기가 중반을 넘어갈 무렵, ‘신동아’에 기고한 글에서는 ‘대통령’은커녕 ‘씨’라는 호칭조차 붙이지 않을 만큼 싸늘하게 식어 있다. TV 강의 중에도 어떤 날은 ‘교수 정년을 줄여 나나 내 아내 같은 늙은이는 빨리 교단을 떠나야 한다’고 했다가, 바로 그 다음 강의에서는 ‘노학자가 포진한 대만대가 부럽다’며 열변을 토한다. 그렇다면 도올은 그러한 자신의 습벽이 약점으로 작용함을 모르는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은 듯 싶다. 도올은 EBS ‘노자와 21세기’ 강연이 끝난 후 한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그런 것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에게 텐션(긴장)을 느낄 겁니다. 솔직히 내가 그런 것을 활용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끊임없이 언어적 장난을 합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말장난만 보면 안 되지요. 깨달음을 전달받는 게 중요합니다.”

    도올에게 말이란 순간의 진실을 담는 일종의 유희 도구일 뿐이다.

    감성이 논리를 앞서는 도올의 독특한 성향은 동학(同學)들로부터 그 학문적 수준을 의심받는 빌미가 된다. 도올은 여러 학설 중 가장 유력한 객관적 논리를 취하기보다, 자기 취향에 맞고 강한 감동을 주는 ‘변두리 학설’에 집착, 이를 주류로 끌어올려 열정적으로 설파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최근 성균관대 유학·동양학 부장 이기동 교수는 박사과정 제자인 배요한 목사와 함께 ‘도올 김용옥의 일본 베끼기’라는 책을 출간했다. 정통 유학자가 저서를 통해 도올을 정면 공격하고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교수는 논어에 대한 도올의 해석이 “일본 학계에서도 인정되지 않는 시라카와 시즈카나 오규 소라이의 학설을 단정적으로 끌어대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도올 자신도 저서 ‘도올논어1’에서 “시라카와 선생의 정신세계는 공자라는 한 인간의 내면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거나 “오규 소라이의 ‘론고초(論語徵)’로부터 받은 철학적 충격은 나의 내면세계를 굉동시키고도 남을 만한 그런 것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이 안의 열두 살 소년

    ‘도올 지지자 되기’를 가로막는 또 다른 장벽은 ‘자기망상적’ 언동과 어린아이 같은 치기다. 과도한 자화자찬이 좋은 예. 우주보(宇宙寶)로 자처하거나 자신을 ‘20세기에 살면서 플라톤이나 예수를, 러셀이나 사르트르를 우습게 알고 있는 철학자’로 지칭하기도 한다. “서태지가 원한다면 그를 만나줄 수도 있다”는 말을 하는가 하면, 한 달 배워 겨우 아리랑을 연주하는 수준의 아쟁 실력을 TV 강의를 통해 당당히 선보이거나, ‘지금도 깡패 서너 놈은 상대할 수 있다’며 흥분한 중학생처럼 주먹 자랑을 한다.

    부창부수랄까, 도올의 이런 특별함을 늘 사랑으로 봐주는 한 사람이 있다. 아내 최영애 교수다. DJ 노벨상 수상 소식으로 온통 떠들썩하던 지난해 10월, 한 식당에서 지인들과 식사 중이던 최교수는 TV뉴스를 보다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우리 그이도 빨리 노벨상을 받아야 할텐데….”

    전해들은 말인만큼 꼭 이런 식의 표현은 아니었을지 모르나, 분명한 것은 최교수가 도올의 영원한 지지자이자 흔들림 없는 동반자라는 사실이다. 도올에게 최교수는 아내일뿐 아니라 사랑으로 보살피는 엄마 같은 여성이다.

    도올은 희로애락의 감정 표현이 유난하다. 이런 면을 두고 그에게 애정을 가진 이들은 “도올은 12살 소년이다, 그만큼 순수하고 소박하다”며 추켜세운다. 반면 그를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나이값 못하는 유아 기질’로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도올은 맘에 드는 사람은 극도로 찬사하고, 미워하는 인간에게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는다. 도올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도올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 분노가 얼마나 폭발적인지, 화가 나면 새벽 2, 3시라도 상대 집에 전화를 걸거나 직접 찾아가 항의를 퍼붓기도 한다.

    그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와 쓴 책 ‘대화’는 김 전회장에 대한 극한의 찬사로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다. 대우 사태가 불거지자 몇몇 기자가 도올의 의견을 구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신동아’도 마찬가지였는데 도올은 기자 입에서 ‘김우중’이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뒷말은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납득이 잘 되지 않는 행동이지만 도올에게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전화통화를 하다가도 극도로 불쾌해지면 아예 전화 코드를 뽑아버리는 것이 바로 그, 김용옥이다.

    도올을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키워드는 ‘주목받는 삶’에 대한 집착이다. 도올의 한 지인은 그를 두고 “두 사람이 밥을 먹어도 자기가 중심이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박박 깎은 머리, 검고 흰 중국복식이나 두루마기, 화려한 목도리며 독특한 디자인의 모자들…. 외모의 꾸밈부터 그는 철저히 ‘주목받음’을 지향한다.

    도올을 무장해제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칭찬이다. 고려대 교수 시절 그의 강의를 들은 L씨(37)는 이런 일화를 소개한다.

    “도올 강의는 재미도 있지만 학점 잘 주기로도 유명했습니다. 도올에 대한 찬사를 솜씨 좋게 곁들이는 것이 필수였죠. 나 역시 그런 리포트를 제출하곤 했어요. 한번은 돌려받은 리포트에 빨간 색연필로 이런 말이 적혀 있더군요. ‘excellent! thank you! 그대도 언제가 나를 도울 날이 있으리라!’ 학점은 물론 A플러스였습니다.”

    반대의 사례도 있다. 그의 강의 중에는 간혹 ‘공개비판’을 당하는 학생이 있다. 그의 논리를 비판하는 리포트를 쓰거나 수강 태도가 불량한 학생이다. 칠판에 이름을 써놓고 혹독하게 몰아침은 물론 F학점을 주겠다고 공언한 뒤 그대로 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을 땐 뺨을 때리는 등 체벌을 가하기도 했다.

    도올은 친구 사귐도 독특하다. 남자들에게 ‘진정한 친구’란 대개 배꼽친구, 아니면 군대친구다. 계산이나 잇속 없이 만난 정의 공동체, 그 속에서 피어나는 의리와 우정에 때로는 목숨을 걸기도 한다. 그러나 도올에게 옛 친구를 만나는 일이란 ‘참으로 끔찍한 이야기’다. 30여 년 만에 재회한 초등학교 친구가 “다 같이 한번 모이자”고 하자 도올은 이런 생각부터 했다고 한다. ‘과거로의 퇴행이란 나에겐 있을 수 없는 모욕이다.’

    대신 그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건 각 분야에서 나름의 영역을 구축한 인사들, 아니면 열렬한 추종자다. 전문가의 경우 예외없이, 도올에게 스승 노릇을 하거나 혹은 도올이 생각하는 바, 자신의 격에 맞는 사람들이다. 박병훈 중앙대 안성캠퍼스 부총장, 고려대 최장집 교수, 서울대 김두철 교수, 가수 겸 화가 조영남씨 등. 도올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이해와 칭찬이다.

    도올은 자신의 사람사귐에 대해 측근들에게 “나는 어떤 분야가 알고 싶을 땐 그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가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이어 그가 소개하는 인사 몇 명을 만나 공부한 후 그들이 추천하는 서적을 독파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면모는 그에게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운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도올은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을 사람, 자신에게 변함없는 친절과 찬탄을 보여주는 사람, 그러면서 어울림이 부끄럽지 않을 사람들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정(情)의 관계에 약하고 공(公)의 관계에 강한 면은 뜻밖에 계산적이고 치밀함을 느끼게 하지만, 특정한 사람 위주로 교유하고 깊이 마음 터놓을 오랜 친구를 만들지 못한다는 점에선 역시 미성숙한 인격, 나르시즘이 엿보인다. 정신병리학 상 과도한 자기중심주의나 유아적 기질은 나르시즘의 전형적 증표다.

    ”남들은 거짓말이라 그럴 거야”

    그런데 도올의 이런 인간적 약점들이 무조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넘치는 열정과 격렬한 자기 표현은 전염성이 크다. 하물며 도올처럼 남다른 지력과 고도의 쇼맨십, 쉬 따라잡기 힘든 성실성을 겸비한 인물임에랴.

    김홍씨(KBS 방송콘텐츠 주간·50)는 천안고등학교 2학년이던 67년 초겨울, 신학대학생 도올로부터 새벽 영어성경 강의를 들었다. 도올 최초의 제자인 셈. 애초 4명으로 시작한 강의는 중반을 넘어설 즈음엔 김홍씨 한 명만 남아 있었다. 친해진 두 사람은 간혹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대개 도올이 새 책 몇 권을 읽은 다음이었다.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면 절 불러내 나름의 체계로 정리한 내용을 마구 쏟아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새 이론을 정리해 가는 거죠. 저는 일종의 지적 모르모트였다고나 할까요.”

    하루는 도올이 오토바이를 몰고 와 김씨를 태우곤 동네 뒷산으로 올라갔다.

    “오늘은 또 무슨 강의를 하려나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고급비단으로 화려하게 감싼 물건을 조심스레 꺼냈습니다. 비단을 고정하기 위해 끈이 하나 매여 있었는데, 그걸 또 그렇게 정중하고 우아한 손길로 풀더군요. 비단 속에 든 것은 퉁소였습니다. 남산 국립국악원에서 퉁소를 배우고 있댔어요. 퉁소와 국악이론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더니, 이윽고 수십 년 동안 몰두한 명인도 그럴 수 없을 만큼 멋드러진 자세로 퉁소를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영 아닌 거예요. 소리는 나되 도저히 멜로디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죠. 우스워야 정상인데 그 때는 정말 웃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분 표정이 너무 권위 있고 엄숙했거든요.”

    김씨에게 도올은 끝없이 자극을 주는 인물이었다. “방학이면 친구 하나를 데려와 둘이 대여섯 권의 원서를 독파했어요. 절 불러 공부한 책들을 보여주고는 ‘난 목표 세운 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남들은 아마 거짓말이라 그럴 거야’하며 씩 웃더군요.”

    도올의 ‘뜻을 세우면 반드시 이루고 마는’ 치열성은 한의대 진학에서도 잘 나타난다. 김용준 교수는 “78년 보스턴에 있는 용옥이한테 갔는데, 귀국하면 한의학 공부를 할 거라고 해 말린 기억이 있다”고 말한다. 82년 귀국한 도올은 정말 경희대, 원광대 한의학과 진학을 추진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고려대 교수란 자리는 차선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90년, 도올은 마침내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에 입학한다. 학교 근처에 하숙집을 정해 놓고 공부에 몰두했다. 96년 7월에는 한의사 면허를 취득, 같은 해 9월 동숭동에 ‘도올한의원’을 개원했다. 무서운 집념이 아닐 수 없다.

    고려대 사직 후 도올은 좌충우돌이란 말이 딱 어울릴 법한 행보를 보였다. 영화 대본을 쓰고, 연극에 참여하고, 시를 쓰고, 지적 엔터테이너가 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이미 십수년 전 그의 인생 계획에 다 들어있던 것이라면, 그러므로 나름의 치밀한 계획과 노력 끝에 획득한 전리품이라면 어떨까.

    그는 86년 양심선언 직후 쓴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의 재판(再版) 서문에 이런 다짐을 밝히고 있다. ‘나는 철학자이며 과학자이다. 나는 시인이며 예술인이다. 나는 소설가이며 영화감독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원한다. 그리고 나는 되고 있고 될 수 있다고 자신한다.’ 15년이 지난 지금, 그의 계획은 완성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러나 도올이 학자냐, 무엇보다 실천을 중시하는 동양 철학자냐를 두고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학계의 비판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형 김용준 박사도 “용옥이는 분명 고전적인 의미의 학자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요즘은 세상이 바뀌지 않았는가. 새 시대에는 그에 맞는 지성이 필요할 것이다. 용옥이는 자신의 재능을 바탕으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아쉬운 것이 있어요. 그때(86년 양심선언 후) 용옥이가 학교에 계속 남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자신도 어느 정도는 그걸 바랐는데 잘 되지 않았어요. 똑같이 튀더라도 학교라는 조직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면, 타고난 자질과 많은 공부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동양철학계에 뭔가 큰 족적을 남길 수도 있었을 텐데. 형으로서는 그게 가장 아쉬운 점이지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학계요 교수사회지만, 도올에게는 분명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업적과 장점이 있다. 미국 유학시절부터 남다른 친분을 쌓아온 최장집 교수(고려대 정치학과)는 이렇게 말한다.

    “김교수(도올)는 깊고 폭넓은 지식과 거침없는 표현,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겸비한 사람입니다. 뛰어난 재능으로 국민의 지적, 문화적 수준을 높이고 생산적인 논쟁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어요. 대중과 교감하는 학자란 우리 사회에서 보기 드문 예입니다. 주저 없는 언행이 다소 남다르지만 그러면 좀 어떻습니까. 전 김교수와 대화를 나누면 아주 즐겁고 속이 다 시원해지는 걸요.”

    주류를 열망하는 아웃사이더

    온통 혼란과 모순이던 도올 김용옥은 그를 가린 장막 하나하나를 걷어갈 때마다 점차 피 돌고 근육 단단한 한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顯現)했다. 가장 큰 발견은, 맥락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그가 실상은 일관된 원칙과 원대한 계획하에 살아온, 대단히 치열하고 치밀한 사람이란 점이었다. 도올의 기행과 폭언과 말장난과 ‘대중추수주의’에는 하나같이 나름의 이유와 명분이 있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무당’이고, 늘 ‘현재형’이며, 감정적이고, 때로는 짜증나는 인간임을 잘 알 뿐 아니라 이를 당당하게 긍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오케이!”

    또한 빛나는 것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사는 철학자이길 선언한 그의 거침없는 세상 부수기다. 일찍이 도올은 ‘내가 지금 나의 존재에 대하여 가장 행복한 사실은 내 마음 속에 아무런 우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어 도올은 ‘나의 글(강의)은 나의 삶의 느낀대로의 발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전공은 영원히 살아 움직이는 나의 삶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철학이란 감수성의 꽃이며 좀 더 잘 살기 위해(禮), 즐겁게 살기 위해(藝) 공부할 뿐이라는 언명 또한 범인(凡人)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비록 파시즘의 독한 향기가 아련히 풍기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정상이 눈앞인 지금, 그는 가장 위험한 능선을 오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무 큰 욕망, 지나친 자기확신, 아웃사이더임을 자처하면서도 끊임없이 주류 진입을 노리는, 세상의 모든 ‘똥’이자 ‘영웅’이기를 열망하는, 유리그릇처럼 섬세하고 쇠처럼 단단한 빙화기인(火奇人). 도올에게 조금 더 낮추기를, 조금 더 느려지기를 권한다면 그의 자존을 모독하는 행위가 될까.

    방송인 전여옥씨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사회에 수백명의 도올이 있다면 다소 부담이 되겠지만, 한 명의 도올이 있음은 참으로 즐거운 일 아닌가.”

    도올을 내버려두자. 맘대로 울고 웃어 젖히도록. 구경하는 즐거움이 남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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