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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잊혀진 과거사, ‘4·19 교원노조’ 사건

혁명군 군화에 짓밟힌 교육 민주화의 싹

  • 글: 이남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irun@donga.com

또 하나의 잊혀진 과거사, ‘4·19 교원노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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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년, 전교조보다 30년 앞서 ‘교육 민주화’를 부르짖은 최초의 교원노조가 있었다. 교사들이 여당의 유세에 동원될 만큼 권력 앞에 무기력하던 시절이다. 노조원 2만명의 전국 조직으로 출범한 교원노조는 그러나 1년 만에 비참하게 날개가 꺾였다. ‘5·16혁명재판부’는 교원노조를 용공이적단체로 몰아 궤멸시켰다. 40년간 숨죽이며 살아온 교원노조 교사들과 유가족의 ‘명예회복’은 이뤄질 수 있을까.
또 하나의 잊혀진 과거사, ‘4·19 교원노조’ 사건

▲1960년 4·19 교원노조 대구지부의 출범식 광경.
▶1961년 11월16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4·19 교원노조’ 관련 기사. 이날 교원노조 교사들은 용공 세력으로 몰려 10년 이상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7대 국회 개원일인 지난 6월7일. 삼엄한 경비 태세의 국회 정문 앞에서 한 노인이 1인 시위를 벌였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꼿꼿한 자세는 좀처럼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안경 너머로 비친 단단한 눈빛이 세월의 풍상을 짐작케 할 뿐이다.

‘17대 국회는 군사문화의 뿌리 5·16 군사쿠데타 진상규명 특별조사위원회를 즉각 구성하라! 4·19 한국교원노동조합 총연합회 대표자.’ 그의 목에 걸린 피켓을 뒤로한 채 국회의원들은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 올 여름은 유난히 뜨거운 햇살이 아스팔트를 달궜다. 그러나 불볕더위도 매일 1인 시위에 나선 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그의 이름은 강기철(79). 4·19 한국교원노동조합(이하 4·19 교원노조) 총연합회의 대표자다. 44년 전 교원노조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오래 전 이야기를 꺼내고자 하는 이유는 무얼까. 어떤 분노가 그를 이토록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는 호기심. 4·19 교원노조와의 첫 대면이었다.

4·19 교원노조는 4·19혁명 직후 학원 민주화를 열망하던 교사들에 의해 탄생했다. 그러나 교원노조 1500명 교사들은 5 ·16 군사정권에 의해 용공세력으로 몰려 일제히 해직됐다. 졸지에 ‘수괴’가 된 노조 간부급 교사들은 10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교육 자주화와 학원 민주화를 꿈꾸던 교사들의 순수한 열망은 1년 만에 철저히 파괴됐다

강씨는 4·19 교원노조 총연합회의 대표자로, 혁명재판부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7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후에도 사회안전법이란 족쇄에 묶여 10년이 넘도록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1960년 당시 국학대학 사학과 강사로 재직하던 그는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매일같이 옥바라지를 하던 아내는 그가 옥에 갇힌 지 4년 만에 심장 마비로 숨졌다. 아들은 ‘연좌제’의 적용을 받아 군 장교에 지원할 수 없었다. 가족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는 가장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진실 규명’ 의지는 강해졌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

“4·19 교원노조 사건은 아직도 정치적으로 살아 있는 역사요. 정치적 음해와 조작으로 수십 년간 그 진상이 밝혀지지 못했지. 나는 몸이 아플 틈이 없소. 뒤늦게나마 용공조작된 교원노조 사건을 알리고 동지들의 명예를 회복해야 하니까. 갈 길이 멉니다.”

‘신동아’가 4·19 교원노조에 몸담았던 이들의 삶을 추적하기로 한 것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들의 마지막 증언을 담아내기 위해서다. “4·19 교원노조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역시 “이목(82·‘4·19 교원노조’ 사무국장·전교조 자문위원)씨 외에 연락이 닿는 관련자가 없다”고 했다. 군사정권 시절 ‘빨갱이’란 멍에를 지고 살아온 교원노조 관계자들은 자신의 이력을 감추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일부 노조 관련자들은 ‘진실 규명’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만, 제도적·정치적 한계 때문에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신동아’는 40년 전 혁명재판부의 공소장 기록을 바탕으로 당시 옥고를 치른 교원노조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을 찾아냈다. 이들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기억하는 사무치는 아픔의 흔적들이었다. 다음은 이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4·19 교원노조사(史)다.

“내한테 그렇게 말해도 싸다”

1960년 2월28일 대구. 자유당과 야당의 선거전이 한창인 일요일이었다. 야당의 선거유세(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예정된 이날, 각급 학교의 학생들은 환경미화나 잡초 뽑기를 한다는 명목으로 모두 학교에 등교해야 했다. 당시 경북여고 교사였던 여학룡(80)씨는 그때를 잊지 못한다. 초롱거리는 눈망울로 “진실이 무엇이냐”고 묻는 학생들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린 것이다.

“선생님, 질문 있습니데이. 하필 야당의 강연회가 있는 일요일에 모든 학생들을 등교시킨 이유가 뭡니꺼. 거짓말은 하지 마이소. 우리한테는 정의를 말하라고 가르치시면서, 선생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시니 이율배반 아닙니까. 선생님, 비겁합니더.”

“그래. 느그들이 내한테 그렇게 말해도 싸다.”

비통한 심정을 토로하는 여씨에게 학생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변명하기 급급한 다른 교사들과 달리 솔직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 경북여고, 경북고, 경북사대부고 등에 재학중인 수천 명의 학생들은 일제히 ‘일요일 등교지시 거부투쟁’에 들어갔다. 반면 교사들은 교문을 나서는 학생들을 막아서는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해야 했다. ‘대구 2·28 학생시위’로 불리는 이날의 궐기는 교사들의 양심에 파문을 일으킨 신호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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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남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ir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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