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역사발굴

‘일본판 쉰들러’ 후세(布施辰治) 변호사

항일투쟁 조선인 구원에 평생바친

  • 정준영

‘일본판 쉰들러’ 후세(布施辰治) 변호사

1/4
  • 일본 미야기현 태생으로 메이지 법률학교 졸업 후 검사대리를 거쳐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후세 변호사는 일생을 피압박민족·피차별자 등 소수 약자를 위해 바쳤다. 변호사 자격박탈 3회, 두 차례의 옥고를 치렀다.
1923년 8월1일 새벽, 경성역!

‘사회 각 단체 성대 출영’이라는 제하의 당시 동아일보 기사는, 아직도 새벽 기운이 감도는 경성역 플랫폼에 일본 법조계의 거성 포시진치(布施辰治, 1880~1953)(이후 후세 다쓰지 변호사 또는 후세 선생으로 병용함)씨가 비서를 동반하고 단상 위에 나타나자 동아일보사와 사합 단체(四合團體)를 비롯한 각 군소 사회단체들의 열렬한 환호와 성대한 환영식이 거행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환영기사보다 더 크게 ‘포시씨 강연 절대 금지’라는 제목을 붙이고 “시기가 좋지 못하다”고 하는 당시 미쓰야(三矢) 경무국장의 애매한 구실에 대하여 “납득하기 어렵다”는 후세 선생의 불만도 곁들여 싣고 있다.

동아일보는 이에 그치지 않고 제1면 사설의 주인공으로 후세 선생을 거듭 등장시켜 그가 관찰한 “조선에 대한 인상(印象)”을 일일이 적시하고 있다. 이 사설을 보면 후세선생은 ‘조선인을 위하여 무엇이 참다운 이익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동양 평화를 위하여 일본위정자들의 오산(誤算)에 크게 분개”하고 있다.

후세선생은 굽힐 줄 모르는 재야정신과 조선인 지원활동으로 총독부의 미움을 사 변호사 자격을 무려 세 번이나 박탈당하고 두 차례나 투옥된 보기 드문 인물이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그의 셋째아들(종전 직전 당시 교토 대학생)까지 옥사하게 되었다.

수 년 전 전유럽을 감동시켰다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와 비교될 만하다. 오히려 독일인 쉰들러는 그 활동기간도 무척 짧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을 위하여 자기 가족이나 제몸을 희생하지 않았으며 투옥된 적도 없고 보면 더욱 돋보인다고 하겠다.



후세 다쓰지(布施辰治)는 누구인가!

후세 선생은 도쿄 동북방 미야기현 이시노마키(石卷) 부근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0세 전후 어린 시절 인근서당에서 한문을 익힐 때부터 이웃나라 조선과 중국에 대하여 막연하나마 흠모의 정과 인간적인 친근함을 느꼈던 것 같다. 어느 날 청일전쟁이 끝나고 제대한 어떤 동네아저씨로부터 “허둥지둥 달아나는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일본도로 치고 베는” 호쾌무비한 전쟁무용담을 듣게 된다. 이때 어린 후세는 오히려 그 칼에 힘없이 쓰러진 비무장 조선인들에 대한 무한한 동정심을 느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명치법률학교(현 메이지대학 전신) 재학중 청국·조선 유학생들과 자주 어울리면서 그 당시 한반도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던 각 지방 의병운동을 다룬 ‘조선독립운동에 대하여 경의를 표함’이란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서슬이 시퍼렇던 검사국에 불려가 호되게 취조를 받게 된다. 이것을 시작으로 1953년 9월13일 73세를 일기로 영면할 때까지 그는 재야 법조인으로서 ‘사회적 약자’조선인들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

일제 강점기가 끝난 1946년 후세 선생은 지난날 조선을 사랑한 그 열정 위에 독자적인 국가관과 세계관을 압축하고 그의 심오한 법철학을 총동원하여 ‘조선건국 헌법초안(朝鮮建國憲法草案)’을 탈고했다. 이를 조선해방에 바치는 최대의 선물이라고 자축하는 자리에서 그는 수많은 조선독립운동가들과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와 같은 후세 선생의 업적에 매료된 필자는 1999년 12월 재일민단 고문 정동화(6·25전쟁 참전 재일 학도의용군 출신) 선배의 특별한 배려와 주일 대한민국대사관 K문화관의 소개로 아사히신문 동경본사 오다가와코(小田川興) 편집위원을 만날 수 있었다. 후세 선생을 찾아 멀리 한국에서 온 필자의 진지한 태도를 직감하고 오다가와코 씨는 철저한 직업의식이 동했는지 취재에 열을 올렸다.

그는 서울지국장 출신이라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일 근현대사에도 달관한 듯이 보였다. 필자의 고향 진주 남강에서 절명한 논개의 충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후세 선생의 고매한 정신을 미래의 한일우호협력 정신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필자의 소신을 전폭 지지했다. 그는 회사 공용차로 후세 선생과 그 셋째아들 묘소가 있는 이케부쿠로(池袋) 상재사(常在寺)까지 안내해주었다. 그는 이 일을 2000년 새해 삼일절 아사히신문에 대서특필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관련 서적과 자료 그리고 뜻있는 협력자들도 추천하여 주었다.

자료와 협력자들의 도움으로 후세 선생 탄신 120주년을 맞아 지난 11월13일 국회 소강당에서 ‘후세선생기념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위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근거로 그 당시 조선인들의 인권옹호와 조선해방을 위한 후세 선생의 빛나는 업적을 살펴본다.
1/4
정준영
목록 닫기

‘일본판 쉰들러’ 후세(布施辰治) 변호사

댓글 창 닫기

2018/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