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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발굴

‘일본판 쉰들러’ 후세(布施辰治) 변호사

항일투쟁 조선인 구원에 평생바친

  • 정준영

‘일본판 쉰들러’ 후세(布施辰治)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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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1일 맑게 갠 가을, 경성원두에는 아침 일찍부터 개최된 ‘전됴선 정구대회’가 속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 우르르 쾅! 쾅!쾅 저 멀리 바다 건너 일본 도쿄에서는 사상 유례없는 관동 대지진이 엄습해서 도쿄 천지가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후세 선생은 죽창을 든 자경단에 쫓겨 우왕좌왕하는 조선인유학생들을 집으로 안내하여 따끈한 차를 대접하면서 안심시켰다. 이때 후세 변호사는 관동 대지진을 “오만불손한 일본 권력층에 대한 하늘이 주는 제1차 천벌(天罰)”이라고 하면서 일제의 반성(反省)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청과 계엄사령부는 그들의 죄과를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평소에 점찍어둔 ‘주의자(主義者) 조선인’을 처단하는 호기로 역이용하는데 혈안이 됐다. “주의자들이 집단봉기를 획책한다” “조선인들이 각처에서 방화 강간을 자행하고 우물에 독약을 뿌리고 다닌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도쿄시민들의 분노를 엉뚱한 방향으로 돌려 수천 명의 조선인 유학생 및 노동자를 학살했다.

이에 대하여 후세 선생은 1926년 3월4일 “일본인으로서 전조선인들에게 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하여 정중히 ‘사죄’를 드리고 자책을 통감한다”는 사죄문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우송한 바 있다.

후세 선생을 말하려면,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에 폭탄을 터뜨리려고 기도한 박열 사건을 무죄라고 변호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일본경찰이 끝내 박열(朴烈)·김자(金子)부부를 자경단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강제연행한 것은 바로 그 다음날 9월3일 오후였다. 그러나 박열이 치안경찰법 위반으로 기소되고 다시 ‘대역죄’로 확대하여 ‘사형’을 선고받게 될 줄이야 그 누가 짐작했겠는가! 사형 언도 직후 일본정부는 너무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은사’라며 무기형으로 얼버무리려 했다. 그러나 김자(金子) 여사는 작업중 삼끈으로 목을 매 끝내 자결했고 박열(朴烈) 열사는 23년간이나 옥고를 치른 끝에 일본이 패전하여 무조건 항복한 뒤에야 출옥했다.



후세 선생은 “겨우 25, 26세의 젊은 나이에 법정에서 어쩌면 그렇게 훌륭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는지 감탄할 따름이다”고 박열을 격찬했다. 박열은 일본경찰에 검속되었을 때부터 검찰에 넘겨진 후에도 심문에 일절 응하지 않았으며 단 한 장의 조서도 남긴 것이 없다. 보호를 위해 검속된 자기를 경찰이 취조할 권한이 없다고 했고 경찰령에 의한 구류를 선고받은 후에는 “기결수에 대하여 취조할 일이 있으면 구류언도를 취소하라”고 버텼다. 검찰의 심문에 대해서도 현행범이 아닌 한 강제심문권이 없다는 이유를 밝히면서 ‘청취서’ 한 장 남기지 않는 기지(機智)를 보였다.

박열 열사의 법정태도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은 동지들에 관해서는 철저한 ‘묵비권’으로 일관하여 14명 전원 면소를 유도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 문제에 대해서는 전후 17회에 걸쳐 예심판사를 상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남아의 기개를 한껏 펼쳤다.

“내가 말하려 하는 것은 내 조국 조선을 강탈한 강도 일본에 대한 증오를 그대(법정 판사)의 질문에 따라서 일본 국민과 일본 천황에게 알리고자 함이다. 우리 민족은 이와 같은 일본의 강도행위를 증오하기 때문에 차후로도 언제 누가 우리와 동일한 사건을 기획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판사를 통해 일황에게 통고하니, 하루라도 빨리 우리 조국 조선을 반환하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된통당할 것임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이는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이토’의 죄상을 논죄한 것에 비길 만하다.

1924년 5월12일, 제10회 심문조서에서 박열 열사는 또다시 천황과 황태자를 저격하려 한 목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첫째로 일본 황실이 얼마나 일본 민중의 고혈을 착취하는 권력자들의 간판이며 이 또한 일본 민중이 미신으로 숭배하는 것처럼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실은 그 정체가 유령과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해서 그 ‘신성’하다는 것을 땅에 떨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며, 둘째로 조선 민중은 이 세상 모든 실권의 총본산이 일본 황실이라고 생각하여 증오의 표적으로 삼고 있으므로 그 황실을 타도하여 조선민중의 혁명적 독립적 정열을 자극하고자 함이며, 셋째로 침체의 늪에 빠진 일본의 사회운동을 위해 그 혁명적 기운을 촉진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황태자 결혼식에 폭탄을 사용하려한 것은 조선 민중이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세계만방에 표명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박열은 사형에 직결되는 단심 최고 특별재판에 임하면서 추상 같은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조건을 요구하면서 담당판사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첫째, 나는 피고 아닌 조선민족의 대표로서 일본천황을 대표한 재판관과 동등한 자격으로 법정에 선 것이다. 재판관이 천황을 대신해 법관 법의를 입고 나온 것이라면 나도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이니 왕관왕의(사모관대)를 착용케 해줄 것.

둘째, 재판관이 심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조선민족을 대표한 내가 먼저 법정에 서게 된 취지를 선언하게 해줄 것.(이에 대비해 박열은 이미 ‘일본의 권력자 계급에 주노라!’ ‘나의 선언’ ‘음모론’ ‘일하지 않고 먹어치우는 자들’ 등 4편의 선언문을 미리 작성해 두었다.)

셋째, 법정용어는 조선말만 쓰겠다.

넷째, 피고의 좌석을 재판관과 동등하게 높일 것.”

이중 첫째 둘째 조건은 어렵게 허용되지만 셋째 언어문제는 통역이 끼면 오히려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이유로, 넷째 재판관과 동등한 좌석배치 문제는 세론(世論) 등을 이유로 거부되었다.

법정 죄수복 대신에 사모관대로 성장한 박열 의사의 늠름한 모습은 전세계 법정사상 전무후무한 대사건으로서 당시 신문에 사진과 함께 대한남아의 기개를 또 한번 과시했다. 이 역시 담당변호사인 후세 선생의 적극적인 막후활동이 없었던들 실현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박열 의사는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74년도에 영면했다. 현재 평양 근교 애국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1989년 3월1일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사모관대로 법정에 선 박열

한편 金子文子의 법정 태도 역시 혁명가의 아내로서, 아나키스트 사회운동가로서의 진지하면서도 헌신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1945년 12월7일 도쿄에서 있었던 ‘朴烈 출옥축하대회’에 참석한 후세 선생은 이날을 보지 못하고 먼저 간 金子 여사야말로 “국경을 초월해 동지애를 훌륭하게 실천한 일본 여성의 모범”이었다고 극찬했다. 또한 사형언도 직후 소위 감 1등 무기징역의 은사장을 형무소장이 내밀었을 때 그것을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리며 그녀가 남긴 유언 아닌 유언이 우리 가슴에 감동적으로 와닿는다.

“천황의 이름으로 기왕에 사형을 언도했으면 그만이지 다시 은사니 어쩌니 하면서 인간의 생명을 농락하다니 말이 되는가! 박열에게 바친 아내로서의 文子, 조선에 바친 조선민족으로서 선택한 길인데 몸과 마음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간 무기징역의 일본감옥 속에서 더 살아보았자 그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차라리 죽어서 그 뜻을 부군 박열에게 바치고 조선땅에 내 뼈를 묻음으로써 모든 것을 조선을 위해 바친다면 그 뜻을 언젠가 누구라도 알아주게 될 것이 아닌가?”

金子 여사는 왜 황태자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느냐는 심문에 대해서는 “나는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떠받들고 있는 천황 또는 황태자가 실은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로봇에 불과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분명히 밝히고 싶었으며 또한 천황과 황태자는 소수 특권계급이 그 사복(私腹)을 채울 재원으로서 일반민중을 기만하기 위하여 조종하는 인형이자 괴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 했다”고 답했다.

또한 천황제를 어떻게 보느냐는 심문에 대해서도 “나는 천황이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동일한 인간이지 결코 신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폭탄을 던져 천황도 우리와 똑같이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라고 거침없이 토로한 바 있다.

1924년 5월14일, 제10회 예심조서에서 金子 여사는 ‘김상옥(金相玉)사건’으로 이미 형이 확정되어 복역중인 김한(金翰)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소상히 밝혔다.

문: 허무주의자인 피고 등이 어떻게 의열단의 김한 등과 제휴하게 되었는가?

답: 의열단(義烈團)은 조선독립을 위해 조직된 비밀단체이며 김한은 공산주의자이지만 그들은 그 수단으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시인’하고 있으므로 김한이 의열단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허무주의자이지만 의열단이 일본권력에 반해서 폭탄을 사용하려는 데 서로 공감한 바 있으므로 상호보완적으로 제휴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의열단이 사용한 폭탄은 살인용 건물파괴용 등 몇 가지가 있지만 우리는 주로 살인용을 의열단으로부터 분양받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진술함으로써 상해의열단과의 연대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후세 선생은 1946년 전후(戰後)에 출간한 ‘운명의 승리자 朴烈’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청년 박열이 도일한 직후부터 부당 단발사건, 잡지 ‘不逞鮮人’ 발행, 흑우회 운동 등에도 직간접으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역사건’ 변호 이후 20여 년간 동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대역사건 취급방식에 대하여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재판의 준비와 교섭 또는 사후처리에 있어 모든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등 동지의 우의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또 후세 선생은 박열과 金子 여사의 옥중결혼 수속을 밟아준 데 이어, 1926년 7월23일에 金子 여사가 자살하자 흑우회 동지들과 함께 그 유골을 화장하여 잠시나마 자기 집에 안치했을 뿐만 아니라 경찰 감시망을 피해 박열의 고향 경북 문경에 안장되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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