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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 이제는 우주다

사업성 보고 뛰어든 우주 개발

이것이 한국의 위성이다

  • 이정훈 /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사업성 보고 뛰어든 우주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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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주 개발 선진국과 북한은 발사체부터 개발했으나 한국은 위성부터 개발했다. 발전한 정보통신(IT)과 전자산업을 바탕으로 실험용 위성을 몇 개 제작해보고는 금방 첨단 위성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위성으로 수익을 올리는 단계에 들어갔다.
  • 한국은 시장을 보고 기술을 만들어감으로써 놀라운 진전을 이뤄냈다.
  • 우주 개발에서도 압축성장하고 있는 한국의 신화를 살펴본다.
사업성 보고 뛰어든 우주 개발
선진국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한국의 우주 탐색은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타국의 발사체에 실어 위성을 올렸지만 선진국 못지않게 우주를 잘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를 개발하려면 항공 기술이 발전해 있어야 한다. 항공기는 하늘을 비행한다는 것이 다를 뿐, 땅을 달리는 자동차와 비슷한 원리로 힘을 낸다. 움직이는 기계인 자동차는 기계공학 분야에 속한다. 따라서 기계공업이 발전해야 항공 분야가 발전하고, 항공 기술이 있어야 우주 개발에 도전할 수 있다. 선진국들도 그러한 과정을 거쳐 우주로 진출했다.

한국 우주 개발의 메카인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하 (항우연)은 1989년 10월 10일, 한국기계연구소 부설 ‘항공우주연구소’를 뿌리로 삼아 탄생했다. 한국 최초의 국책연구소인 한국원자력연구원에 비하면 30년 늦다. 항공우주연구소가 독립해 한국항공우주연구소(KARI)가 된 것은 1996년 11월 15일이다. 이후 한국항공우주연구소는 모태기관인 한국기계연구소보다 유명해졌다. 그리고 2001년 1월 1일 한국항공우주연구원으로 개칭하면서 한국원자력연구원과 함께 대한민국을 이끌 양대 국책 연구기관으로 부상했다.

항우연의 출범이 늦은 만큼 대한민국의 우주 개발도 늦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ISAS(‘아이사스’로 발음)라고 하는 도쿄대학의 연구기관이 우주 개발을 이끌다가, 이후 NASDA라고 하는 과학기술청 산하 우주개발 기관이 주도했다. 한국도 일본과 유사한 길을 걸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든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한국의 과학기술이 발아한 시원(始原)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우연이 한국기계연구소 부설기관으로 태어난 1989년, KAIST가 한국 최초로 위성 제작에 도전했다.

KAIST가 선도한 위성 개발

그러나 기술이 부족해 선생을 모셔야 했다. KAIST는 영국 서리대학을 선생으로 삼았다. 1990년부터 학생들을 서리대학으로 보내 2년간 공동연구한 끝에 48.6kg의 마이크로 관측위성인 ‘우리별-1호’를 제작했다. 우리별 1호의 무게는 1970년 중국이 최초로 쏘아 올린 인공위성 ‘둥팡훙-1호’(173kg)의 3분의 1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러나 성능은 앞섰다. 그 사이 과학기술이 발전한 덕분이다. 둥팡훙-1호에는 지구 사진을 찍는 장비가 없었으나 우리별-1호에는 있었다. 왜 중국은 둥팡훙 1호에 카메라를 설치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의 중국 기술로는 인공위성에 카메라를 설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 음악만 발신하는 위성을 만들었다. ‘둥팡훙(東方紅)’은 문화혁명기인 1966년부터 1978년 사이 중국이 공식화하지 않고 사용한 애국가 제목이다. 둥팡훙의 가사는 마오쩌둥 찬양 일색이기에,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중국은 진짜 국가를 지어 대체했다. 지구 궤도에 오른 둥팡훙-1호는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둥팡훙’을 실은 전파를 발신한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이 전파를 접수하고, 중국이 세계 다섯 번째로 인공위성을 올렸음을 확인했다.

中 본뜬 북한 위성

이를 본뜬 것이 북한이다. 북한이 세 차례나 지구 궤도에 올리는 데 실패한 광명성 위성에는 북한의 애국가나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찬양하는 노래를 보내는 송신기가 실려 있었다고 한다. 1998년 8월 북한이 대포동-1호 발사체(북한 이름은 ‘백두산’ 발사체)에 실어 쏘아 올린 광명성-1호는 잠시 지구 궤도를 돌다 추락했는데, 그때 광명성-1호는 27MHz의 전파로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찬양하는 노래를 날려보냈다. 그리고 노동신문에 ‘황해도에 사는 한 주민이 밤하늘을 보다가 광명성-1호를 발견하고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는 허무맹랑한 기사를 게재했다.

KAIST는 그런 길을 걷지 않았다. 우리별-1호를 만들 때는 디지털카메라 기술이 나왔기에 KAIST는 우리별-1호에 광학카메라를 실었다. 그러나 작은 위성이라 최대 해상도 400m에 만족해야 했다. 서리대학이 선생이 되고 KAIST는 학생이 돼 제작한 우리별-1호는 1992년 8월 11일 오전 8시 8분 프랑스가 만든 아리안-4 발사체로 쏘아 올려져 지구 궤도에 올라갔다. 한국은 세계에서 25번째로 위성을 보유한 나라가 된 것이다.

KASIT가 주도한 우리별 사업은 유럽(아리안, 1호), 유럽(아리안, 2호, 1993년), 인도(PSLV, 3호, 1999년)의 발사체에 실어 띄우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우리별-2호의 사진 해상도는 200m, 3호는 13.5m까지 높아졌다. 13.5m 해상도에서는 얼추 물체를 식별할 수 있다. 3호는 1호보다 배 이상 큰 100kg짜리였기에 훨씬 더 정밀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싫든 좋든 우리의 맞상대는 북한이다. 남북한 대결과 관련해 우리별-1호 위성의 역사성은, 북한의 광명성-1호보다 6년 앞서 우주로 올라갔다는 데 있다. 물론 차이는 있다. 우리별-1호는 외국 기술로 제작했고, 광명성-1호는 북한이 자체 개발했다. 우리별-1호는 지상 촬영도 했으나 광명성-1호는 음악만 발신했다. 우리별-1호는 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지구 궤도를 돌았으나 광명성-1호는 바로 떨어졌다. 우리별-1호는 외국 발사체로 올라갔으나 광명성-1호는 북한 발사체로 올라갔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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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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