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개편이 정치권 최대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다양한 각도의 개편론이 정가를 휘젓고 있다. 4년 중임 정·부통령제 개헌론도 공공연히 거론된다. 구체적 정계개편의 모델이 드러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정계개편을 원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의 논쟁으로 시끌벅적하다. 과연 정치 현장에 있는 의원들의 속내는 무엇일까.
현재 나도는 정계개편론의 특징은 과거처럼 정가의 밑바닥 여론으로 떠도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굳이 얼굴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논쟁에는 여야 정치권의 수장(首長)들도 가세했다. 지난 1월8일 이회창 한나라당총재는 의원총회에서 강삼재 부총재에 대한 검찰수사를 비난하면서 “현정권이 정계개편을 위해 이번 수사를 강행하고 있다”고 했다.
또 “여권의 대표적인 정계개편 시나리오는 일부 우리 당 의원들과 군소정당을 합해 한나라당을 포위하는 위성정당을 창당하는 것”이라며 세부 전술까지 거론. 정계개편론을 경계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 1월11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자꾸 그런 얘기를 하는데 (나는) 들어본 일도 없고, 주위에서 논의한 일도 없다”며 반박했다.
정계개편론과 더불어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론도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고 있다. 정·부통령제를 부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중임제와 정·부통령제를 합쳐 미국식 대통령제로 헌법을 고치자는 제안도 있다.
최근에는 한화갑 민주당 최고위원이 이 문제를 제기했다.
지난 연말 이인제 민주당 최고위원도 “대통령 4년 중임제와 정·부통령제를 골자로 한 개헌이 김대중 대통령 임기 내에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최고위원은 “빠를수록 좋을 뿐만 아니라 개헌 논의가 활발해진다면 1년 정도면 개헌이 가능하다”면서 이례적으로 시한까지 제시하며 개헌론에 부채질을 했다.
이최고위원에 앞서 김중권 민주당대표와 김종호 자민련 총재대행 등 두 공동여당의 대표들도 약속이나 한 듯 중임제 개헌론을 거론해 정가의 관심을 끌었다.
중임제 개헌론 주장은 여당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김덕룡 한나라당부총재도 지난 연말 ‘주간동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여야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만나보면 개헌의 필요성에 동감하고 있다. 다만 개헌했을 경우 자기 당의 집권에 유리한지 불리한지 모르기 때문에 조심하고 있을 뿐이며 일단 개헌론에 불을 당기면 상당수 의원은 찬성하고 나설 것”이라며 중임제 개헌이 현실화될 조건이 무르익었음을 시사했다.
무르익어가는 중임제 개헌론
김부총재 외에도 한나라당에서는 박근혜, 이부영 부총재, 민국당의 김윤환 대표 등이 공·사석에서 4년 중임 정·부통령제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민주당과 자민련의 합당이 임박했다는 소문도 있다. 장재식 의원을 비롯, 4명의 의원이 자민련으로 건너가면서 DJP공조가 부활하여 차제에 두 당이 합당을 위한 수순을 밟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한마디로 정치권은 지금 ‘붕 뜬’ 분위기다. 변화를 제어하는 최소한의 ‘안전판’만 떼어내면 어디론가 날아갈 것 같은 상황이다.
그러면 이런 어수선한 정국 한가운데 서 있는 현역 국회의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안타까운 것은 언론의 주목을 받는 일부 중진의원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 정치인들의 목소리는 쉽게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떤 논쟁이든 최후에는 수 대결로 집단의 의사를 결정하는 민주주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대다수 현역 정치인들의 속내를 읽어내는 것은 정국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열쇠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과연 김덕룡 부총재의 주장처럼 정말 여야의원들이 개별적으로는 중임제를 지지하는 것일까. 정계개편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국회의원들에게 직접 정국전망을 물어보기로 했다.
‘신동아’의 국회의원 대상 설문조사는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총재 간 여야영수회담 결렬 소식이 전해진 직후인 지난 1월5일부터 1주일 동안 진행됐다. 설문조사가 진행되는 사이, 한국 정치권은 그야말로 숨가쁘게 돌아갔다. 이총재와 청와대 사이에 영수회담 결과 공개를 두고 치열한 설전을 벌였는가 하면, 안기부 예산을 선거자금으로 사용한 혐의로 강삼재 의원에 대한 검찰 수사가 강도 높게 진행되고 있었다. 한나라당은 이를 야당탄압이라고 규정하고 정권퇴진운동도 불사하겠다며 반발하고 있다. 그렇다고 여권도 고삐를 늦출 태세는 아니다.
또 같은 기간, DJP 공조를 확인하는 김대통령과 김종필 자민련명예총재의 회동이 있었고, 두 사람의 회동 직후 장재식 의원이 자민련으로 이적해 원내교섭단체 정족수를 채워주는 고단위 ‘정치쇼’도 있었다. 한마디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정국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설문조사가 진행됐다. 그런 주변 분위기 때문인지 일부 의원들은 설문 여기저기에 격한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이번 여론조사에는 273명의 현역의원 가운데 155명이 참여했다. 155명 가운데 한나라당 의원은 82명, 민주당 자민련 등 여권 의원은 70명이었다.
민국당·국민신당 무소속 의원 일부도 설문조사에 응했으며 야당으로 분류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133석인 한나라당보다 의석이 많은 공동여당(135석) 의원들이 설문조사에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과거 민주당이 야당이었을 때 민주당의 전신인 국민회의 의원들은 설문조사에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반면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의 전신 신한국당 의원들은 설문조사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정권이 바뀌면서 설문조사를 대하는 의원들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긴 셈인데, 여당의 한 의원보좌관은 “국정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다 보니 상당수 의원들이 의원회관에 들를 겨를이 없어 조사에 응하지 못한 것일 뿐 설문조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질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정계개편의 필요성과 그 방향 ▲현재 대치정국의 원인과 해결방안으로 거론되는 김대중 대통령의 당적이탈 및 거국내각 구성에 대한 의견 ▲중임제 정·부통령제 개헌에 대한 찬반 여부 및 정·부통령제 개헌 이후 부통령에 추천할 만한 후보는 누구인가 등이었다.
이 밖에도 올해 뜨거운 이슈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 ▲급랭정국을 풀 해법에 대해서도 의원들의 의견을 물었다.
‘새해 첫 영수회담이 결렬된 원인’에 대해 여당의원 67.1%(33명)가 ‘이회창 총재의 무리한 요구’가 원인이라 답했고, 한나라당의원 84.7%(72명)는 ‘김대중 대통령의 자세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응답해 양당간 큰 시각차를 드러냈다.
첫째 주제인 ‘정계개편의 필요’에 대해 조사에 응한 민주 자민련 등 여당 의원 54명(77.1%)이 찬성했다. 반면 한나라당 쪽에서는 정계개편에 반대한 응답자가 65명(76.5%)에 달해 아직까지 정계개편은 여당인 민주당과 자민련의 ‘희망사항’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설문조사에 응답한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 18명(21.2%)이 ‘정계개편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강창희 의원이 자민련에서 제명된 뒤 현재 민주 자민 두 공동여당의 의석은 135석. 과반수인 137석에 2석이 모자란다. 두 당의 굳건한 공조에도 다수당이 될 수 없는 상황이니, 정계개편에 긍정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20% 가량의 한나라당 의원은 두고두고 정치권 요동의 ‘진앙지’로 주목받을 것 같다.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 정계개편의 필요성에 동의한 의원들은 주로 수도권과 경북, 부산 등의 초·재선 의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수도권 초·재선 의원들은 개혁성향의 소장파들로 김덕룡 부총재를 따른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부산과 경북의 초·재선 의원들은 이회창 총재의 노선에 반발하는 당내 영남세력의 일부인 것으로 해석된다.
‘만약 정계개편이 이뤄진다면 어떤 방식이 바람직한가’에는 한나라당 응답자의 37.6%(32명)가 ‘이념이나 노선에 따라 보수 중도 진보정당 등으로 개편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40%에 가까운 응답자가 ‘철저한 정계개편’을 요구한 것이 이채로운데, 이는 보수 혹은 진보 성향을 막론하고 한나라당 의원의 상당수가 현재 이념과 노선에 관계없이 뒤섞인 한나라당의 인적구조에 내심 불만이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만약 정계개편이 된다면 ‘뜻맞는’ 정치인들끼리 흩어져 다시 뭉치는 ‘제대로 된’ 정계개편이 돼야 한다는 데 적지 않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생각을 함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현정국의 안정을 위해 민주당과 자민련의 합당이 필요하다’는 소규모 개편론에 대해서는 4명(4.7%)만이 ‘필요하다’고 답해 민주당, 자민련 두 당의 합당에는 냉소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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