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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美 부시정권 출범과 한반도

대통령도 될 뻔했던 4성장군

최초의 흑인 국무장관 콜린 파월 스토리

  • 이흥한 < 미 KISON 연구원 >

대통령도 될 뻔했던 4성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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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월은 한 인터뷰에서 군인의 아내 알마를 이렇게 묘사했다. “전출 명령이 떨어지면 난 집에 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알마, 이동이다’ 그러면 아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알겠습니다. 이동’이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파월은 1995년 대통령 출마를 놓고 고심했을 때, 아내의 의견을 가장 존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알마의 의견이 그의 불출마 결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품 넘치는 자태의 왕성한 사회활동가인 알마는 워싱턴의 대형 공연장인 케네디 센터의 이사로 일하면서, 여러 사회단체의 자선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파월과 알마는 1남 2녀를 두었다. 그의 외아들 마이클은 그와 함께 독일에서 현역 군인으로 근무한 적도 있고 워싱턴 합동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또 큰딸 린다는 연극 배우, 둘째 딸 앤 마리는 ABC 방송국에서 일한다. ABC 워싱턴 지사의 저명한 앵커 테트 카플의 ‘나이트라인’ 팀이다. 또 친손자 제프리와 브라이언이 있다.

파월이 첫아들 마이클의 탄생 소식을 들은 것은 베트남에서였다. 수송기에서 공중 보급된 꾸러미 속에 장모가 보낸, 아들 탄생을 알리는 편지가 들어 있었다. 파월은 1962년부터 1년 동안 고문관으로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1968년 소령 계급장을 달고 두 번째로 베트남전에 참전, 아메리칸 사단의 제23 보병대대의 작전 장교로 근무한다.

백악관에서 워싱턴을 배우다



두 번째로 베트남에 갔을 때, 젊은 장교 파월은 첫 번째 베트남전 참전 때와는 다른 분위기를 느낀다. 처음 베트남에 발을 디뎠을 때 가졌던 ‘끔찍한 공산주의로부터 세계를 구한다’는 열정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아직도 살아 있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어제까지 같이 밥을 먹었던 전우가 오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하기 일쑤였다. 베트남은 그렇게 삶과 죽음의 교차점이었다.

파월은 베트남전 참전 용사로 돌아와 1971년 조지 워싱턴 대학 경영학 석사 과정에 진학해 MBA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972년 인생의 전환점이 된 백악관 연구원 프로그램의 연구원으로 선발되어 백악관으로 들어간다. 백악관 연구원이란 직책은 훌륭한 보병이 되기만을 힘쓰던 평범한 육군 장교가 워싱턴 사람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파월은 나중에 자신이 백악관 연구원이 된 배경에 대해 “군 장교로서 뛰어난 업무수행을 인정받았고, 인터뷰 결과가 예상외로 좋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백악관에서 워싱턴을 배우기 시작한다. 운영예산처(OMB, Office of Man- agement and Budget)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연방 정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행정부 최고위급에서 정책은 어떻게 결정되며 의회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현역 군인으로서는 좀처럼 얻기 힘든 기회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워싱턴을 보고, 듣고, 냄새 맡아 가며 워싱턴을 공부하는 동안, 워싱턴은 워싱턴대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워싱턴은 사람을 골라내는 곳이다. 이후 파월 앞에 펼쳐지는 탄탄한 출세가도와 화려한 경력의 결과를 볼 때, 1972년에서 1973년까지 1년 남짓한 백악관 연구원 생활은 흑인 보병 장교였던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분수령이었다.

레이건의 1, 2기 행정부 국방장관으로, 후에 파월 장군의 펜타곤 보스가 된 캐스퍼 와인버거와 프랭크 칼루치와 인연을 맺은 것도 백악관 연구원 시절이었다. 펜타곤 인맥과 접촉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어느 모로 보더라도 백악관 연구원 경력은 워싱턴의 파월을 길러내는 밑거름이었다.

그는 백악관 근무 후 예정에 없던 한국 파견 명령을 받고 제32보병사단에 배치되어 2년 동안 근무했다. 36세 때다.

30대까지의 군생활이 파월 인생의 전반기라면, 40대에 들어선 1977년부터는 오늘날 파월을 있게 만든 후반기 인생의 발아기였다. 카터 행정부 시절인 1977년부터 1981년 사이에 그는 현역군인으로 국방부차관보선임군사보좌관 등 고위직을 역임한다. 파월이 처음 ‘워싱턴의 군인’이 된 것은 대령 때였다. 1977년 카터의 새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의 브레진스키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NSC 스태프가 된 것이 첫출발이었다.

그는 고위직 제의가 들어올 때마다 늘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끝까지 군인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었다. 1976년 101 공수사단의 2여단장을 맡고 있었을 때 국방부 차관보선임군사보좌관을 맡으라는 제의가 왔을 때도 자신이 정말 원했던 것은 진급이었다고 자서전에 밝히고 있다.

어쨌든 워싱턴의 펜타곤은 그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는 그 부름에 응했다. 1983년 레이건 행정부 때는 국방장관군사보좌관으로 와인버거 장관을 곁에서 지켰고,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미 육군 5군단장으로 잠시 펜타곤을 비웠으나, 1987년에는 레이건 대통령의 부름으로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이 된다. 처음으로 내각에 입각한 것이다. 현역 장성이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하는 것이 옳으니 그르니 말이 돌긴 했지만, 파월 개인의 능력에 대한 비난은 아니었다.

군인의 길을 가겠다고 했던 그는 1989년 마침내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자리인 미 합참의장에 임명된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에 들어갔을 때였고, 파월의 나이 52세였다. 최연소 합참의장은 개인의 명예였고, 최초의 흑인 합참의장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영광이었다.

은퇴 후,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최초의 합참의장이 되었을 때의 기분이 어땠느냐고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파월은 자신의 임명권자였던 부시 대통령에 대한 감사 표시를 잊지 않은 후 대답 첫머리에 이렇게 말했다. “과거 나 이전에도 군복무를 했으나 인종차별과 인종주의 때문에 합참의장이 될 수 없었던 흑인 군인들에게 이 영광을 돌린다. 내가 장교로 군 복무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밥을 먹으러 갈 수 없었던 식당이 있었고 잠을 잘 수 없었던 모텔이 있었다. 내가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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