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윽고 오후 4시가 됐다. 약간 설레는 마음으로 웰컴센터로 갔더니 기자의 반명함판 사진이 부착된 ‘메디테이션 패스’가 발급돼 있었다. 출입증의 유효기간은 2001년 3월26일까지. 이 기간을 넘기면 에이즈검사와 함께 출입증을 재발급받아야 한단다.
아쉬람을 출입하는 사람들은 옷 차림새로 오쇼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다.
대문의 외국인 수문장이 입고 있는 것처럼 목에서 발목까지 통으로 이어지는 적갈색 원피스 형태의 옷을 이곳에서는 ‘머룬 로브(maroon rove)’라 부르는데, 오쇼는 생전에 이 머룬 로브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옷차림을 한 사람들은 대개 오쇼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산야신(명상 수행자라는 의미)’으로 독특한 산스끄리트 이름을 갖고 있다. 오쇼 아쉬람에서는 본명보다는 산야신 이름이 더 통용된다. 반면에 일반 옷차림을 한 사람들은 이곳을 탐색하거나 관광차 온 이들이다. 물론 산야신이 아니더라도 머룬 로브를 사 입을 수 있다.
기자는 내친 김에 아쉬람 밖의 옷가게에서 400루피를 주고 머룬 로브를 사 입었다. 인도인 옷가게 주인은 어리벙벙한 초짜 외국인임을 알아챘는지 처음에는 그 10배 가격인 4000루피를 불렀는데, 마침 옆에 있던 한국인 산야신이 보다못해 거드는 바람에 정상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인도에서 10일을 머무는 동안 인도상인의 터무니없는 바가지 씌우기와 오토릭샤(세발 달린 자동차) 운전사들과의 요금 문제로 한번도 싸우지 않은 날이 없었다. 뻔히 알고 있는데도 돈을 더 받으려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이 탄로나도 태연한 참으로 뻔뻔스런 얼굴들이었다. 조용히 명상 하러 왔다가 인도 사람들과 돈 문제로 다투는 다른 외국인들을 보면서, 영혼의 성찰은커녕 인간성만 버리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스모킹 메디테이션
바깥 세상과는 달리 아쉬람 안의 세계는 그야말로 정적과 평화가 감도는 파라다이스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루 입장료 150 루피를 내고 출입증에 그 증표를 붙이는 것으로 파라다이스에 들어갈 수 있다. 총 40에이커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오쇼 아쉬람은 푸른 숲이 우거진 열대의 오아시스 분위기를 내고 있다. 또 흰색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길, 아름드리 나무들 사이로 난 산책로, 올림픽 경기장 규모의 수영장과 테니스장, 레스토랑 등 자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도록 내부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아무튼 자주색 로브를 사 입고 아쉬람 안으로 들어가 이곳저곳을 탐색하는 동안 ‘스모킹 메디테이션(Smoking Mediation)’이라는 이름이 붙은 외딴 장소가 눈에 띄었다. 아쉬람 안에서 유일하게 흡연할 수 있는 장소인데, 담배 피우는 것도 명상이라는 풀이가 재미있다. 이미 예닐곱 명의 애연가들이 담배 명상을 즐기고 있었다.
그중에 검은 색 로브(나중에 확인한 바지만 이 옷차림을 한 사람들은 명상 수련을 이끄는 지도자라고 함) 차림의 한 서양인 남성과 젊은 여성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성이 주로 진지하게 질문을 하고 남성이 대답하는 쪽이었는데,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포옹을 하고, 다시 대화하다가 ‘느낌’이 통했는지 키스를 하는 행동을 반복했다. 마지막에는 여성이 자기 질문에 만족한 듯 ‘댕큐’하면서 남성과 헤어졌다.
한국인의 눈으로는 낯선 장면이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보통의 행동인 것처럼 보였다. 이런 장면은 수시로 목격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남녀 두 사람이 구면인 듯 반갑게 만나더니 깊은 포옹을 나누면서 서로의 감정을 느껴보는 듯했다. 그것은 서구사회의 일반적인 포옹과도 달랐다. 입을 다문 채 가슴과 가슴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던 두 남녀는 비로소 무언의 대화를 마쳤다는 듯이 밝은 얼굴로 헤어지는 식이었다.
오쇼 아쉬람이 성(性)에 관해 개방적이라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쉬람의 화장실과 사우나실은 남녀 구별이 없다는 점이다. 특히 사우나실은 남녀가 벌거벗고 함께 이용할 수 있다. 이것은 폐쇄되고 기피돼온 성을 오히려 드러내서 적극적으로 명상에 활용해야 한다는 오쇼의 지침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섹스는 명상의 수단
흔히 오쇼가 기성 종교로부터 이단시되거나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빌미가 되는 것이 바로 성에 대한 그의 진보적인 사상이다. 그가 남긴 ‘대담하게 죄를 지어라’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신이 그대에게 성욕을 주었다면 그것은 성욕을 통해 배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대의 창조적 에너지다. 그것을 억누르지 말라. 그것을 다듬어 가능한 한 순수하게 하라. 왜냐하면 삶에서 많은 것을 창조해내는 것은 그대의 성적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신의 성욕을 받아들이고, 성욕이 신의 선물이므로 거기에는 발견되어야 할 무엇이 틀림없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서, 신을 향한 깊은 사랑과 감사로 그것을 포용한다면, 그것은 거부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탐욕을 부린다거나,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지 말라. 그것은 그렇지 않다. 인생에는 더 많은 것이 무수하게 존재한다. 섹스는 다만 기초일 뿐이며 사원 전체가 아니다.…
다만 그대의 성적인 순간들을 순수한 기쁨과 행복과 평화로움으로 삼도록 하라. 섹스는 기쁨이며 슬픔이고 황홀경이면서도 고뇌이기도 하다. 그대는 이 역설을 이해하여야 한다. 잠시 동안 그대는 다른 사람 속으로 녹아들며 그러한 순간에는 에고(EGO)도 없다. 그리하여 커다란 기쁨이, 오르가즘의 기쁨이 있다.…”
오쇼는 성적 억압이 성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성에 강박되도록 만들었으며, 심한 경우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사실 섹스는 고대인도 전통에 따르면 강력한 생명력이자 에너지이며, 그 에너지는 억압되거나 반대로 낭비되는 대신 올바른 통로를 열어주면 깨달음과 사랑으로 성화(聖化)될 수 있다고 한다. 한국의 한 오쇼 연구자의 말을 빌려보자.
“오쇼는 기피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성이 아니라 명상의 수단으로써, 즉 삶의 최고 경지를 이루는 수단으로써 성을 말했다. 이러한 그의 설파는 당시 횡행했던 히피물결을 타고 물질문명의 무게에 짓눌려 정신적 황폐함을 느꼈던 서구 젊은이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그가 서양권에서 많은 제자들을 두게 된 것도 상당 부분 ‘명상으로서의 성’ 문제를 적극적으로 펼쳤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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