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인물탐구

‘압도적 인간’ 도올 김용옥

  • 이나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byeme@donga.com

‘압도적 인간’ 도올 김용옥

2/5
‘내 맘에 꼭 맞는 것, 내 눈으로 보기에 완성된 어떤 것이 아니면 참을 수 없는’ 도올의 취향은 유교의 가르침 중 특히 예(禮)를 강조하는 학문 세계와도 얼마간 관련이 있는 듯하다. 도올은 고려대 교수 시절 즐겨 학생들의 혼례를 기획하고 연출했다. 85년 11월에는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에서 열린 부모의 회혼례 행사를 자못 화려하게 치렀다. 도올은 저서 ‘여자란 무엇인가’에 그 과정을 장장 10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덧붙인다. “노동운동하시는 분들은 대뜸 너무 부르주아틱하다고 욕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날 초대된 모든 사람들로부터 일푼의 축하금도 받지 않았다…. 禮는 禮인 것이다.” 지극한 예(禮)는 도올에게는 곧 놀이요 예술인 것이다.

막내아들이 천안 제3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어머니 홍여사는 도올의 담임교사를 집 아래채에 머물게 한다. 그곳에서 도올은 같은 반 우등생들과 과외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도올은 성실한 학생이 아니었다. 다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주변의 과외 멤버들은 모두 나보다 훨씬 똘똘했다. 그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나보다 쉽고 명료하게 알아들었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정말 공부하는 것이 괴로웠다. 그러니 과외 책상에 앉기만 하면 졸음이 왔다. 그래서 소변 누러 간다고 하고 살그머니 빠져나와 위채에 있는 우리집 따끈따끈한 안방 비단이불로 쏘옥 들어가 새큰새큰 잠들어버리고 마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도올은 서울사대부중에 응시했으나 낙방해 보성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돈암동에 있던 장형 김용준 박사의 집에 살게 된다. 이 집이 바로 도올이 늘 하소연하는 ‘KS(경기고등학교-서울대) 콤플렉스’의 진원지다.

김용준 박사는 경기고, 서울대 화공과 졸업 후 미 텍사스A&M대에서 이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65년 고려대 화공과 교수가 된 이후 해직과 복직을 거쳐 93년 정년퇴임했고 지금은 수원대 화공과 대우교수다. 도올과 나이가 같아 형제처럼 지낸 장조카 김철재씨(金哲載·53), 그 동생인 숭실대 사학과 김인중(金隣中·49) 교수도 경기고, 서울대 출신이다.



그렇다면 도올의 다른 형제들은 어떨까. 둘째형 용균씨는 보성고, 전남대 의대를 나와 개업의로 활동했다. 셋째형 용균씨는 경기고를 거쳐 가톨릭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딴 후 가톨릭대·조선대·순천향대 피부과 교수를 지냈다. 지금은 개업의로 활동 중이다. 김숙희 전 교육부장관은 이화여고와 이화여대를 거쳐 텍사스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정신여고·이화여대를 졸업한 바로 위 누나 용주씨는 가정주부다.

아무튼 KS가 3명이나 되는 집안에서 도올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던가 보다. 형 김용준 박사는 “그때의 용옥이로 말하면, 한마디로 ‘샤이(shy; 수줍은, 숫기없는)’한 애였다”고 말한다.

“말이 없고 뭘 물으면 무척 쑥스러워했어요. 그때도 고집은 대단해서 맘에 안 들면 확 집어던질 듯 성질을 냈지요.”

큰형수 윤정로씨(72)의 회고다. 한편으론 집중력이 뛰어나 어떤 일에 몰두하면 먹고 자기를 잊을 정도였다고 한다.

김박사는 도올의 성격이 ‘튀는 쪽’으로 바뀐 시기를 대학 입학 후부터라고 말한다.

“방학 때면 고향 천안에 있는 절에 들어가 일주일씩, 열흘씩 머물곤 했지요. 돌아올 때는 스님들의 다 떨어진 가사를 입고 나타났어요.”

그렇다면 도올의 지금 모습은 ‘후천적 노력’의 결과냐고 묻자, 김교수 부부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라며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어머니가 보통 분이 아니에요. 여성이지만 대차고 당당하고 다혈질에 고집스러운 분이지요. 저만 해도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훨씬 무서웠는 걸요. 자식들 모두 어머니의 그런 기질을 조금씩 이어받았는데, 그중 용옥이가 제일 많이 닮았어요.”

김박사는 “우리 형제들이 겉으로는 다 평온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제 고집 때문에 안 할 고생도 많이 하며 살았다”고 했다. 김박사만 해도 이공계 교수로는 드물게 유신독재에 항거하다, 75년 재직중이던 고대에서 해직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인상은 그지없이 소탈하고 온유해, 날카롭고 열정적인 이미지의 도올과는 언뜻 연이 지어지지 않았다.

결핍의 나르시즘

도올은 사석에서 가족 얘기를 잘 안 한다. 예외가 있다면 어머니다. 그와 가까이 지내온 사람들은 도올로부터 어머니와 관련한 일화 두세 가지쯤은 꼭 들어 알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도올의 마음은 존경, 그리고 두려움이다. 김용준 교수도 “용옥이 마음 속에서 어머니는 여전히 두려운 존재일 것”이라고 말했다.

도올은 많은 책에서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특이한 것은 대부분 그 호칭이 ‘엄마’라는 것이다. 도올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엄격한 훈육을 받고 자랐다. 어머니는 도올에게 스승이자 위인의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한참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에는 서울 장형 집에 머무느라 그토록 기대고 사랑받고 싶던 어머니로부터 흡족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뻘이던 형이나, 그를 ‘도련님’이라 부르며 어려워했을 형수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애정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도올은 김용준 박사의 저서 ‘사람의 과학’에 붙인 서문 ‘나의 큰형, 김용준’에서 “오랜 세월 형 집에 머물렀지만 스킨십이라 할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박사는 “뭐, 내 자식들하고도 없었는데…” 하면서도 그 구절이 내내 마음에 걸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 책이라 좀 딴 얘기도 쓸 줄 알았더니만 결국 전부 자기 얘기더구만, 허허….”

김박사에게 도올은 여전히, 한없이 귀엽고 걱정스러운 막내 동생일 뿐이었다.

어머니와 관련한 추억담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역시 수필 ‘삼십여년일순간’에 나오는 구절이다. 초등학생 시절, 온천 나들이만 가면 그의 머리를 탕 속에 눌러박곤 하던 장난기 많은 친구가 있었다. 어느날, 도올은 서울에서 놀러온 장조카 철재씨의 머리를 그 친구가 그랬듯 온천물에 박다 어머니의 눈에 띄고 만다. 홍여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를 나무랐다.

‘그때 엄마의 놀란 모습, 나라는 인간에 대한 아주 본원적인 실망과 절망감의 표정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어떻게 내 몸에서 나온 자식이 저럴 수가! 어떻게 저렇게 잔인할 수가!… 엄마는 그날 천안에서 돌아오는 시발택시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날 훈계하셨다.… “네 속엔 잔인한 기운이 있어!” 그 뒤로도 엄마는 계속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었다. 그러나 난 정말 억울했다. 그러나 성철이 흉내를 냈다고 변명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냥 잘못했다고만 어머니에게 빌었다.… 이 사건을 내가 이렇게도 명료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이러한 어릴 적의 사건이 나의 인생을 통하여 얼마나 강렬하고 깊은 반성의 끊임없는 계기가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글에서 보이는 꼬마 김용옥은 작은 아픔도 크게 느끼는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이자, 어머니를 절대적 존재로 여기며 그 말씀 한마디에 전 존재를 거는 애처로운 소년이다. 또한 착하고 생각깊고 자존심 강한. 그런 소년에게 혹여 자신이 어머니에게 만족스러운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이는 결코 가볍지 않은 마음의 짐이었을 것이다.

“저거다! 저거다! 저거다!”

김용옥 교수 집을 방문했을 때 어머니 홍여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홍여사는 아흔 넘은 나이에도 단아하고 기품이 넘쳤다. 또한 온유하고 정결해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어른이었다. 고령 탓일까, 막내아들 도올을 화제 삼으려 했지만 이야기는 내내 맏아들, 김용준 박사 곁만 맴돌았다.

“언젠가 보니 웬 아주머니가 아이 셋을 데리고 가는데, 나도 곧 저렇게 되겠구나, 그러면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까, 맏이만 잘되면 다 잘 되겠지,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 우리 큰아들을 참 매섭게 가르쳤지. 맞을 일이 아니어도 때리고 그래가며 아주 엄하게 길렀어요. 그래서 그랬나, 속 썩이는 일 하나 없이 참 잘 커줬고 그러다보니 동생들도 다 그 본을 받아 가더라구요.”

우리 옛 여인네들이 항용 그러하듯 홍여사에게도 제일의 의지요 자랑은 역시 ‘부모에 순종하며 바르게 큰 맏아들’ 김용준 박사인 듯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도올을 ‘충동적 열정가이자 나르시시스트’라고 말한다. 이중 어머니, 혹은 KS 콤플렉스와 관련지어볼 만한 것이 바로 나르시즘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나르시즘에는 거칠게 보아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과잉, 또 하나가 결핍이다. 도올은 어떨까.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에게는 아무래도 과잉보다 결핍이 우선한다. 세상을 향해 고군분투하는, 늘 칭찬받고 주목받기를 원하며, 스스로 자신의 위대함을 거듭 입에 올리는 행위는 분명 상식의 선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런 전제에서 볼 때 도올이 가장 인정받고 또 칭찬받고 싶은 이는 기실 어머니가 아닐까. 교수 시절 강의에 어머니를 초빙하고, EBS ‘노자와 21세기’ 마지막회에 어머니를 모신 후 큰절 올리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는 일은 아닐는지.

대학생이 되면서 도올에게는 요즘의 그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특질들, 충동적이며 신기 어리고 유치하면서 때로는 과대망상적인 성격의 일단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그를 규정하던 고집, 풍부한 감성, 집요한 탐구력 또한 쇠락함 없이 오히려 더욱 강화된 형태로 자리잡았다.

65년 서울대 농경제학과에 응시한 도올은 수학을 망쳐 낙방하고 만다. 대신 고려대 생물학과에 2차로 합격했다. 대학 입학 얼마 후 그에게 악성 관절염이 찾아온다. 학교를 휴학한 그는 고향집에 내려와 1년 반을 아버지 병원 2층 한구석 방에서 꼼짝없이 누워지내야 했다. ‘간호사들의 주삿바늘을 뺏어 내 손으로 직접 아편을 푹푹 찔러대며 그러한 마취상태에서 하루하루를 넘기고 살’만큼 혹독한 통증이었다. 66년 가을, 그에게 깨달음이 찾아온다. ‘나의 사상발전 과정에 가장 중요했던 사실은 독서를 통해 플라톤이나 예수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 몸의 발견이었다.’

저서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에 그 과정이 자세히 기술돼 있다. 병실 창 밖으로 천안극장 앞 행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화창하게 비갠 하늘에서 땡볕이 내리쬐는 어느날 어떤 남자가 큰 행길을 걸어나오는데 두 살 정도나 되어보이는 통통한 계집아이가 흰 드레스에 흰 모자를 쓰고 뛰퉁뛰퉁 아장아장 뒤따라 나오고 있었다. … 그 모습, 그 모습,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도 발랄하고 고귀한 생명의 움직임을 느꼈다. 저거다! 저거다! 저거다! 바로 저거다! …그 어린 아기의 모습과 연결되는 나의 생명의 기(氣)의 움틀거림에서 살아 움직이는 우주의 힘을 통찰했다.’ 도올은 웃어댔다. 미친 듯이 혼자 깔깔댔다.

그의 책을 읽다 보면 간혹 홀로 환희에 차 열광하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나는 물샐틈없이 장서로 뒤덮인 나의 방에서 혼자 미친 놈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쳐댔다. 깨달음이 올 때마다― 그 희열을 발산하기 위하여 또 나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그 거대한 우주의 모습에 경외감을 느끼며, 나는 소리쳤다’(‘여자란 무엇인가’ 중에서).

2/5
이나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byeme@donga.com
목록 닫기

‘압도적 인간’ 도올 김용옥

댓글 창 닫기

2019/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