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호

추적! 청와대 ‘民心회복’ 비상대책

  • 김기영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ades@donga.com

    입력2005-04-12 14: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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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뭄이 무서운 것은 맞설 만한 방안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하늘을 향해 기우제(祈雨祭)를 올리는 게 고작. ‘지지율 가뭄’에 애를 태우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심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녕 하늘의 도움 외에 돌아선 민심을 잡을 길은 없는 것일까. 김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이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아울러 이 난국을 돌파하기 위한 여권핵심부의 움직임도 포착되고 있다.
    지난 5월10일,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지난 3일 민주당 정세분석국이 비공개로 실시한 전화여론조사 결과가 언론에 공개된 것이다. 이 여론조사는 지난 7일 최고위원 워크숍에서 참석자들에게만 나눠준 보고서의 일부분에 포함돼 있었다.

    조사를 진행한 실무자와 정세분석국에서는 “철저히 보안을 유지했으므로 우리 쪽에서 보고서가 새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워크숍에 참석해 자료를 회람하고 이를 가져간 일부 최고위원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런데 일반인의 주목을 끈 것은 여론조사 내용이었다. 조사결과 차기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응답자 37.9%, 이에 반해 민주당 후보의 지지율은 22.3%. 당선 가능성에서도 민주당 후보가 16.9%인 데 반해 한나라당 후보는 42.2%로 두 배 이상 높게 나타났다. 이 밖에도 조사결과 한나라당 지지자라고 밝힌 응답자의 74.2%가 한나라당의 승리를 점친 반면, 민주당 후보 지지자의 47.1%만이 민주당의 승리를 예측한 것으로 나타났다.

    너무 참담한 여론조사 결과에 워크숍에 참석한 최고위원들은 말을 잊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최고위원들은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민주당의 앞날에 대해, 자신들의 앞날에 대해 격렬한 토론을 전개했다. 토론은 무려 4시간 동안 진행됐는데 참석자들은 ‘개혁 마무리론’ ‘작전타임론’ 등 그날 이후 며칠간 정가에 화제가 될 만한 말들을 쏟아냈다.

    최고위원들의 자기반성



    “큰 방향에서 정치를 복원해야 한다. 우리 스스로 모든 문제를 대통령에게 넘기고 피동적으로 있지 않았나 반성할 필요가 있다.”(김원기 최고위원)

    “남북간만이 아니라 여야간 햇볕정책도 필요하다. 정책도 중요하지만 대통령이 화해와 용서의 대통령으로, 큰 정치를 이룬 대통령으로 남도록 해야 한다. 민심이 좋지 않은 원인 중 하나가 정권의 정체성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사진도 나왔듯이, 총리를 포함한 여권 지도부가 모두 구여권 출신이라 민심이 좋지 않다. 청와대와 정부·정당이 서로 협조하는 종합적인 시스템에 의해 국정이 운영돼야 한다.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대통령에게 집중되고 책임 또한 대통령에게 집중된다.”(정대철 최고위원)

    “최고위원 개개인이 공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과 같이 가야 한다. 3년간 우리가 해온 일을 면밀히 평가하고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이제 개혁이란 단어를 쓰지 말고, ‘변화’ 등으로 바꾸었으면 좋겠다. 국민의 정부가 너무 전선(戰線)을 확대하다 보니 학계·법조계·언론계 등이 모두 등을 돌리는 상황이 됐다. 지금은 더 이상 일을 벌일 때가 아니라 그 동안 추진해 온 개혁작업들, 예컨대 교육·의료·언론 등을 잘 정리해야 하고, 그래야만 이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한화갑 최고위원)

    “국정의 큰 방향은 옳지만, 시스템과 스타일에서 문제가 없었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일을 벌이기보다 현재 추진하고 있는 정책을 철저하고 완벽하게 매듭 지어야 한다. 지금의 시스템으로는 사실상 종합적 판단이 어렵다. 실업문제만 하더라도 3D 업종에는 10만 명의 일손이 부족한데 실업자는 100만명이 넘는 구조다. 이를 통합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논의가 있어야 한다.”(김근태 최고위원)

    “대통령에게 시중 민심이 제대로 전달되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은 분위기를 바꿀 때로, ‘작전 타임’을 불러 정국의 흐름을 한번 차단하고, 작전을 바꾸든지 멤버를 바꾸든지, 하여튼 흐름을 바꾸어야 한다.”(김기재 최고위원)

    “인사 면에서 적재적소 원칙이 지켜졌는지 짚어봐야 한다. 개혁과정에서 민주세력은 물론 합리적 보수세력의 지지도 함께 얻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민심이 흐트러진 것은 경제·의료보험·교육 등 세 가지 문제 때문이며, 특히 건강보험 문제는 재정대책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국민의 불편을 해소하는 방안들이 필요하다.”(박상천 최고위원)

    “경제 문제는 제때 결단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국민이 불안해하고 있다. 새만금사업이나 대우차, 한보철강 문제 등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흘러가고 있다. 관료들은 위험부담을 안지 않으려는 속성이 있다. 당에서 정부측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결단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요구해야 한다.”(이인제 최고위원)

    판이 벌어졌으니 말들이 쏟아진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민주당을 침울하게 하는 여론조사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 4·26 지방 재보궐 선거는 민주당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다. 당시 민주당은 “투표율이 낮아 민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선거”였다고 자평했지만, 실제로는 청와대와 정보기관 등이 나서 은밀하게 사후 여론조사작업을 벌였다. 그런데 청와대와 국정원 등 다른 곳에서 실시한 조사결과도 정세분석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대통령 지지도 21%

    여권의 한 소식통은 “4·26 지방선거 재보선 직후 실시한 국정원 여론조사 결과, 김대중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평가를 묻는 항목에 응답자의 21%만이 긍정적 반응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는 그전에 실시한 ‘한겨레’의 조사결과 17%보다는 높은 수치지만 대통령이 국민의 신임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수치였다”고 말했다.

    최근 1년 사이 김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가 가장 높았던 시기는 지난해 6∼7월. 조사기관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김대통령이 국정수행을 잘하고 있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60% 이상에 달했다. 당시의 최대 이슈는 남북정상회담이었다.

    결국 김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1년 사이 3분의 1로 줄어든 셈이다. 물론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최근, 정권차원의 악재가 겹친 것도 사실이다. 국민건강보험 재정 고갈, 교육문제와 대우자동차 폭력진압, 각종 개혁입법 지연, 그리고 지방 재·보궐선거 참패 등 최근 한두 달 사이 대통령의 지지도를 끌어올릴 만한 재료는 거의 없었다. 그렇더라도 20%를 밑도는 지지율은 여권 인사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최근 여권 핵심부에서는 돌아선 민심을 다잡기 위한 노력들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정보원은 5월 들어 전 부서 차원에서 민심수습 아이디어를 수집하고 있다. 이렇게 모은 아이디어는 5월 안으로 문서로 정리해 상부에 보고할 예정이며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참고자료로 활용될 계획이다.

    그러나 다른 어떤 부서보다 은밀하면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는 곳은 청와대 비서실이다. 특히 박지원(朴智元)수석을 중심으로 한 정책기획수석실의 움직임이 정가의 주목을 끌고 있다. 김대통령의 신임이 깊은 박수석인 만큼 그의 청와대 복귀 이후 김대통령의 정국운영에도 중대한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 관측이었다.

    박수석의 평소 언행으로 보아 지금 같은 정권차원의 위기상황에 손을 놓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취임 초기 기자들을 전혀 만나지 않던 박수석이지만 최근 들어 굳이 찾아오는 사람을 거부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박수석과 정책기획수석실을 ‘현정권의 컨트롤 타워’라는 묘한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

    여권 주변에서는 김대통령의 임기 말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한 강력하고도 구체적인 정국운용 보고서가 여권 핵심부에서 만들어져 대통령에게 보고됐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보고서는 철저한 민심탐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선언적 의미의 기존 보고서와 달리 상당히 구체적인 전술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격적인 프로그램’이 담긴 보고서라면 컨트롤 타워인 정책기획수석실이 그 출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정가의 중론이었다. 그러나 정책기획수석실 관계자들은 보고서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캐물으면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어버렸다. 한 관계자는 “물어보면 우리가 파악하는 민심에 대해 얘기는 해줄 수 있지만 보고서 같은 것은 없다”고 말했다.

    지난 14일 박지원 수석을 찾아가 직접 그 핵심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박수석은 첫마디에 “나는 말을 안 하는 사람”이라고 거리를 뒀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현정권의 지지가 이렇게까지 하락한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박수석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외국 언론들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국내 언론들은 독재정권의 서슬에 눌려 비판도 못한 채 정권을 칭찬하고 있을 때, 외국 언론들은 정권을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국민의 정부 들어 상황이 반대가 됐습니다. 외국언론은 우리 대통령을 칭찬하는데 국내 언론은 지나칠 정도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 하고 못한 것은 못했다고 비판해야 하는데, 우리 언론은 잘한 것은 말하지 않고 못한 것만 부각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국민에게 알리면 되지 않느냐”고 묻자 박수석은 “언론이 그런 장을 어디 마련해 줍니까?”라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할 때였습니다. 우리 정부와 정부산하기관에는 차량까지 제공받으면서 별로 하는 일 없이 한 달에 500만원씩 받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정부산하기관 고문이니 하는 게 그런 사람들을 위한 자리였습니다만 그 자리 다 없앴습니다. 아마 3000~5000명은 됐을 겁니다. 그 사람들이 누굽니까. 우리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그룹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 나와서 정부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보통사람들이 비판하는 것과 비교해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것 아닙니까.”

    박수석은 현정권에 대한 비판이 이런 왜곡된 경로를 거치면서 지나치게 증폭되고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이런 현실을 개탄하는 것만으로는 참모 노릇을 다했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정면돌파의 비책을 강구하고 있지 않을까. 굳이 대통령에게 보고할 민심보고서를 작성했을 것이라는 정보가 아니더라도 당연히 이런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대통령의 핵심측근’ 박지원 수석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계속 이렇게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김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기 위해서라도 정면돌파할 방법을 마련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박수석은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콰이강(江)의 다리를 내일 오후 2시에 폭파한다고 합시다. 적(敵)에게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알려줄 경우 작전을 펼칠 수 있겠습니까? 적이 모르게 전격적으로 움직여야 다리를 폭파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선문답 같기도 했으나 함축적 의미가 담긴 한마디였다. 이 말을 끝으로 박수석은 입을 닫았다. 끝내 박수석의 입에서는 보고서의 존재 여부도, 정권 말기 개혁프로그램에 대한 얘기도 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작전’이니 ‘적’이니 하는 표현들을 종합해볼 때 뭔가 대책이 있을 것이라는 심증은 확실해졌다.

    취재를 위해 다시 청와대 주변을 맴도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여권인사들을 접하는 과정에 문제의 보고서, 즉 김대통령의 임기말 구상이 담긴 보고서가 존재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런 소문을 뒷받침하는 것이 최근 달라진 청와대 인력구조. 3월26일 정책기획수석 임명장을 받은 직후 박수석은 정책기획수석실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당 출신 일부를 민주당으로 돌려보내는 대신, 여론조사에 능한 인력 일부를 채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일방적으로 여론조사기관에 의지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정책기획수석실에서 여론조사를 기획하고 지휘하는 방식으로 조사 방법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심각한 ‘문건 공해’

    이렇게 조심스러운 행보를 거친 끝에 최근 여권핵심부에서는 한 달 이상의 작업을 거쳐 김대통령의 임기 후반, 구체적으로 올 하반기 정국운영 방안에 관한 ‘비(秘)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 대체적 내용을 알고 있는 정치권 인사를 만날 수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권 핵심부는 보고서 작성을 위한 민심조사 작업 과정에서 상당히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 보고서의 내용을 알고 있는 인사는 “집권 말기 김대통령의 정국운영의 밑그림이 될 보고서는 분명히 존재할 뿐 아니라 조만간 그 핵심 내용은 정국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보고서에는 과거 보고서에서 볼 수 없는 공격적인 프로그램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재임 기간처럼 ‘문건 공해’가 심각했던 적은 없다. 여당은 물론 야당도 당 내·외부에서 만든 문건이 언론에 유출되면서 곤욕을 치렀다. 가장 최근에는 민주당이 ‘언론대책 문건’으로 따가운 눈총을 받은 바 있다. 그전에는 한나라당이 ‘언론인 성향분석’ 문건으로 홍역을 치른 바 있다. 가장 가까이는 지난 14일 민주당 일각에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정권재창출을 위한 특단대책 보고서’라는 문건이 언론에 공개됐다.

    이 보고서에서는 민주당이 IMF체제를 극복하는 과정에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부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서민층의 반발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때문에 하루빨리 당의 정체성을 되찾고 영남지역과 직능단체 등 구여권 세력에는 현장방문 등을 통한 적극적인 위무 활동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보고서는 또 김영삼 전대통령을 포함해 영남의 유력한 정치인을 중심으로 하는 전선구축이 절실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4·26 보궐선거의 패인도 짚고 있다. 느슨한 조직을 강화하고 공직후보자 추천제도개선위원회를 구성해 내년도 지방선거에서 경쟁력 있는 후보를 선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그러나 ‘특단대책 보고서’라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이 보고서는 민주당의 시스템상의 문제점을 주로 지적할 뿐 특별한 내용이 없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한나라당도 수석부대변인 성명을 통해 ‘공작정치의 의도’라며 비난을 가하기는 했지만 그리 심각한 표정은 아니었다.

    정가에서는 어떤 경로를 거치든 외부에 유출되는 문건에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있다. 정국의 흐름을 좌우할 만한 고위층이 전략 참고자료로 채택한 문건, 즉 중요한 문건일수록 외부로 유출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 정치권의 정설이다.

    그러니까 반대로 어딘가 문제가 있는 문건, 즉 고위층의 낙점을 받지 못한 문건들이 허술하게 관리되면서 시중에 흘러 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문건을 만든 당사자가 자신의 문건이 고위층에 낙점을 받지 못할 경우, 반발로 이를 언론에 흘린다는 주장도 있다.

    정부의 한 사무관은 “소수파 정권이어서 그런지 현정부의 보안의식은 일반인의 상상 이상으로 엄격한 편”이라고 말했다. 가령 회의자료의 경우 참가자 수만큼 복사를 하되, 문건마다 고유번호를 매긴 뒤 배포해 회의가 끝난 뒤 일련번호대로 문건이 회수되지 않을 경우 문건 유출자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해 문건이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앞서의 최고위원 워크숍처럼 회의자료가 제대로 회수되지 않아 민감한 여론조사 내용이 곧바로 언론에 흘러나가는 경우는, 최소한 공직사회 내에서는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반에 유출돼 단기간에 사라지는 문건들과 달리, 여권 핵심부에서 최근 작성한 문제의 보고서는 거시적인 안목에서 김대통령의 후반기 정국운영전략을 기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충실한 민심 탐사를 근거로 떠나간 민심을 어떻게 되돌릴 것인가를 검토한 뒤, 그 대응방안을 정리한 것으로 전해진다.

    나아가 정권재창출을 위해서는 민주당의 대권주자로 어떤 조건을 갖춘 후보를 내놓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서 작성에 앞서 여권 핵심부는 여러 차례 자체적으로 치밀한 여론조사를 벌였다. 일반인을 상대로 한 무작위 여론조사뿐만 아니라, 숫자로 드러나는 민심의 이면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포커스그룹 인터뷰’도 여러 차례 실시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파악한 민심은 앞서의 민주당 정세분석국의 여론조사결과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형편없이 낮아 현정권으로부터 민심이 완전히 떠나간 것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국민들은 김대통령의 남은 임기 중 소득증대, 일자리 창출 등, 서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경제회복이 가능하리라는 기대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앞서의 소식통은 “그런데 이런 부정적 조사결과를 근거로 다른 여론조사와는 달리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민심의 변화를 읽어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 소식통은 “그 첫 번째로 최근 들어 김대통령을 떠난 민심이지만, 그 밑바닥에서는 각종 정책실패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김대통령 개인에게 돌리던 지금까지의 태도에서 벗어나, 경제위기를 전세계적 현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얼마 전까지 김대통령과 현정권의 실정에 실망하고 분노하는 ‘일차적 민심’에서 벗어나 경제 위기의 근본원인을 전세계적인 경기침체라는 외부적 요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판단을 근거로 보고서에는 김대통령의 국정운영 방향에 대해 다음과 같은 건의가 담겨 있다고 한다.

    첫째, 기득권세력에 대한 공분(公憤)이 하늘을 찌르고 있으므로 현재 진행중인 개혁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것. 둘째, 차기 대권주자에 대한 민심의 기대도 ‘서민적이고 과감한 추진력을 갖춘 젊은 지도자’로 기울고 있으며, 이런 조건을 갖춘 후보를 대권주자로 내보낼 경우 민심을 끌어안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정권재창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를 더 자세히 살펴보면 여론조사 결과, 민심은 재벌과 언론, 그리고 정치권에 대해 특히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특히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70% 이상이 ‘정치적 이용 가능성은 있으나 이를 철저히 공개해야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언론사 세무조사와 더불어 현재 진행중인 각종 개혁작업도 더 철저히 밀어 붙여야 한다는 게 보고서의 전체적인 줄거리라고 한다. 무엇보다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민심이 개혁중단을 좌시할 분위기가 아니라는 해설도 붙어 있다고 한다.

    이런 판단의 근거는 설문조사의 전반부에 드러나는 국민들의 사회양극화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 국민들은 스스로 느끼는 사회적 지위에 대해 응답자의 70% 이상이 자신을 ‘서민’이라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과거 자신을 중산층이라 생각했던 응답자 가운데 상당수가 이번 조사에서는 한 단계 처지를 낮춰 답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고서는 분석하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실제 소득이 낮아진 것이고, 또 하나는 자신을 중산층이라 생각했던 과거의 허위의식이 깨졌다는 점이다.

    보고서는 이런 민심을 근거로 정권재창출을 위한 후보의 조건도 공개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을 서민이라고 느끼는 국민이 절대다수인 만큼, 귀족적 풍모의 후보, 상류층 이미지의 후보로는 당선이 어려울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김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낮아지는데도 이회창 한나라당총재의 지지율이 올라가지 않는 이유에 대해 ‘그가 기득권 세력이기 때문이며, 이총재가 외신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밝힌 이른바 주류론이 결정적으로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고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회창의 약점을 공략하라’

    보고서의 이런 해석은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분석과도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다. 정치사회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길리서치연구소는 현정권 출범 초기부터 매달 1회씩 여야정치인들의 지지도와 정치의식 변화 등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해왔다. 22회에 걸친 한길리서치의 여론조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 질문이 김대통령과 이회창 총재 두 사람의 역할수행 지지도.

    재미있는 것은 지난해 6∼7월 김대통령의 지지도가 높았을 때 이총재의 지지도도 덩달아 올라갔다는 점이다. 그러나 2000년 7월 24.7%까지 올랐던 이총재의 지지도는 그 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다가 지난해 11월에는 13.2%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그 후 다소 회복하기는 했지만 이총재가 ‘야당총재로서 잘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응답자는 여전히 1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권핵심부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고 있다. 김대통령이 아무리 ‘죽을 쒀도’ 이총재가 반사이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이총재 개인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며, 그 약점을 극복할 대안을 찾는다면 정권재창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앞서의 소식통은 “보고서에는 이런 이총재의 약점을 파고들어 갈 경우, 즉 젊고 개혁적이며 서민적 이미지의 인물을 여권의 차기주자로 내세울 경우 정권재창출이 가능하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로 이 대목, 즉 개혁성향의 젊은 후보를 낼 경우 이총재를 충분히 누를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정치권은 대단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여권 인사들은 나름의 논리를 덧붙여 ‘개혁후보 필승론’에 힘을 실으려는 태도다.

    청와대의 한 고위인사는 더 구체적으로 “한나라당 이총재를 극복할 방안이 있다”고 잘라 말했다.

    “사실 민심이 김대통령을 등졌다는 주장에 대해 아쉽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김대통령을 떠난 민심이 이총재를 향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현재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총재는 얻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의 지지를 얻고 있다. 반면 여당은 아직 후보가 확정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인제 최고위원같은 이는 이총재와 대등한 대결을 펼치고 있지 않은가.”

    이 인사는 더 구체적으로 세 가지 이유를 들어 결국 민심은 이총재를 비켜갈 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민심이 절대 이총재를 선택하지 않는 이유는 세 가지다. 국민들은 첫째, 김대중 대통령도 못 한 개혁, 경제회복을 이총재가 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갖고 있다. 둘째, 이총재는 누가 뭐라 해도 특권층이라는 이미지를 지울 수 없다. 셋째, 국민들은 이미 이총재에게 기회를 줬다. 지난 대선이 그랬고 지난 연말 연초에도 이총재에게 눈길을 몰아줬다. 그러나 이총재는 그 기회를 놓쳤다. 한번 지나간 민심이 다시 이총재에게 돌아오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이총재 측은 거세게 반발했다. 이총재의 한 측근은 “세 가지 가운데 두 번째 주장, 즉 이총재가 특권층 이미지라고 한 대목은 이총재 본인의 뜻과 달리 외부에 그렇게 비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서 “그러나 나머지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특히 기회가 왔으나 잡지 못했다는 주장은 여권의 자가당착이다. 그럼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단번에 잡은 사람인가. 대권 4수 만에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 아닌가.”

    한길리서치 홍형식 소장은 “이총재가 특권층 이미지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 점이 국민들의 선택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홍소장은 “김대통령은 서민적이고 개혁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성공을 거뒀다는 평가를 받지 못하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이런 주변의 논란과 무관하게 당사자인 이총재는 특권층 이미지라는 주변의 평가에 대단히 거북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월13일∼14일 사이 이총재 관련 기사 몇 건만 살펴봐도 이총재가 얼마나 자신을 둘러싼 이미지를 벗어 던지기 위해 애쓰는지를 알 수 있다.

    지난 5월13일 이총재는 서울 명보극장에서 영화 ‘친구’를 관람했다. 이총재는 관람 전 곽경택 감독 및 장동건 유오성 등 출연진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자리를 같이한 영화배우 안성기 씨와는 사진기자들 앞에서 어깨동무를 해 보이기도 했다.

    이총재는 영화관람 후 부근의 한 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겨 영화 관계자들과 맥주잔을 부딪치면서 “남자 친구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우정을 잘 표현했더라”고 말했다. 이총재는 또 “옛날 건달 학생들은 교복 어깨에 ‘뽕’을 넣고 폼을 잡았지”라고 학창 시절을 회상하기도 했다.

    영화 ‘친구’ 관람에 맥주집, 그리고 교복시절 회고, 모두가 서민의 애환이 담긴 주제들로 이총재가 서민적 이미지를 풍기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꿈틀대는 충청민심

    지난 5월14일에는 이총재의 승용차가 화제가 됐다. 이날 한 언론은 이총재가 4년 넘게 타 주행거리가 10만㎞가 넘는 다이너스티 승용차를 방탄유리를 단 에쿠스로 바꿀 것이라고 보도했다. 기존 승용차가 오래돼 고장이 잦고, 대선국면이 가까워질수록 이총재의 기동력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보도가 나간 직후 이총재는 승용차 교체를 취소하라고 지시했다. “경제가 어려운 때 승용차를 고급으로 교체한다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특권층 이미지가 이총재의 ‘정치적 급소’냐, 아니냐에는 논란이 있지만 여권핵심부는 이 부분을 민감한 시선으로 주목하고 있으며, 이총재도 애써 감춰야 할 약점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편 앞서의 청와대 고위인사는 최근 들어 두드러진 지역간 갈등구조가 이총재의 지지도 회복에 적지 않은 걸림돌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대전·충남북의 민심을 특히 주목해 봐야 한다. 충청도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비교적 드러내지 않는 걸로 유명하지 않은가. 그런 충청권 유권자들 사이에 최근 들어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영남도 (대통령을 배출) 해봤고 전라도도 해봤는데 우리도 해봐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충청권의 표가 결집하는 상황은 절대 여당에 불리하지 않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은 보고서에도 고스란히 실려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 핵심부에서 작성한 보고서에는 이처럼 논란이 될 만한 주제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보고서는 김대통령이 성난 민심을 되돌릴 최후의 승부수를 던질 시점을 올 9월 말까지로 못박고 있다고 한다. 당장 뒤따르는 의문은 ‘왜 하필 9월 말이냐’ 하는 점.

    앞서의 소식통은 “여권 핵심부에서는 9월이 넘어가면 정국은 사실상 김대통령이 통제하기 힘든 상황으로 흘러갈 공산이 크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즉 9월 이후면 전당대회 일정이 정해진다. 그때부터 정치권의 관심은 당내 경선에 쏠린다. 대선국면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본격적인 대선국면에 돌입하면서 김대통령의 정국 장악력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9월이 가기 전에 지금의 분노한 민심을 가라앉힐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보고서는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 구실 못하는 각료 많아

    보고서는 민심을 사로잡기 위한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한다. 첫째는 김대통령 임기 내 개혁작업을 마무리하겠다는 구체적 개혁일정을 제안하는 것, 둘째는 김대통령 임기를 무난히 마무리지을 참모조직을 개편, 즉 임기 종반을 함께할 개각을 단행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

    보고서는 구체적으로 제 구실을 못하고 있는 일부 각료들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다는 것. 앞서 소식통은 “보고서에는 정치인 출신 장관의 이름이 거론돼 있는데, 이 장관은 ‘책임질 일에는 절대 나서지 않으면서 자기 잇속을 챙기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는 평가가 덧붙여져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몇몇 장관들이 제 구실을 못하는 인물로 거론되고 있다.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에 대한 평가도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체적으로 보고서에 실린 장관과 수석비서관들에 대한 평가는 우호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대통령에게 ‘이 일은 이렇게 하겠다, 이렇게 처리했다’고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 없으며, 각료들 대다수가 ‘이건 이렇게 할까요’라며 소극적으로 대통령의 의견을 구하는 정도”라고 지적하고 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보고서를 작성한 여권 핵심부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개각에 대비해 인사파일을 점검하고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런 보고서의 지적과 관련, 해당 장관 측은 “청와대 내에 그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듣고 있다. 그러나 일일이 그런 얘기에 반응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각자 대통령에 충성하는 방식이 다른 것인데 그걸 왈가왈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보고서는 개혁을 가로막아 ‘미래를 어둡게 한’ 세력의 실체를 만천하에 공개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국민들의 공분을 자아내게 하는 세력을 드러냄으로써 민심이 흘러갈 방향을 잡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공분의 대상이 없다면 나라의 미래를 위협하는 ‘가상의 적’이라도 공개해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주장도 실려 있다고 한다.

    보고서의 이런 제안은 현재 진행중인 각종 비리 사건을 확실하게 마무리하려는 주장으로 풀이된다. 서민들의 공분을 자아낼 만한 비리사건이라면 현재 진행중인 박노항 사건 등 병역비리를 연상할 수 있다. 재벌과 정치권의 비리사건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여론조사결과 응답자의 70%가 찬성했다는 언론사 세무조사를 강도 높게 마무리하는 것도 한 방안으로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구체적인 ‘공분의 대상’을 누구로 삼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청와대 일각에서는 “공분의 대상을 국민 앞에 공개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론도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다. 앞서의 소식통은 “여론조사를 주도하고 보고서를 작성한 여권핵심부 인사들 사이에서조차 김대통령이 비리세력의 전모를 공개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일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귀띔했다. “정권 초기에도 비리의 뿌리를 캐내지 못했는데 임기 말에 강력한 사정이 과연 가능하겠느냐는 게 여권 핵심부 일각에서 퍼지고 있는 비관론의 줄거리”라는 얘기다. 과연 본성을 되돌린 김대통령의 최후의 승부수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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