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호

해외자본 ‘한국점령’명세서

생리대회사에서 첨단빌딩까지

  • 박태견 < 경제 애널리스트 >

    입력2005-04-12 15: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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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국자본의 공격이 거세다. 금융, 부동산, 제조업 가릴 것 없이 전 분야에 걸쳐 외국계 자본의 파상공세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외국자본의 공세를 견뎌내고 국부를 지키기 위해 힘을 길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올해 경제의 최대 화두(話頭)는 미국이다.” 연초에 한국은행 고위임원이 한 말이다. 기업·금융 구조조정, 반도체값, 유가 등 국내외 여러 경제변수가 중요하나, 무엇보다 미국 경제의 연착륙 여부가 올해 우리 경제의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실제로 올해 상황은 그대로 돌아갔다. 기업인이나 펀드매니저, 주식투자자 등 국내 경제주체들은 미국 경제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며, 미국경제 동향에 따라 투자전략 등을 수시로 수정하고 있다. 주식투자자들의 경우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TV를 켜거나 인터넷에 들어가 간밤에 미국 다우지수와 나스닥지수가 어떻게 됐는가를 확인한 뒤 그날의 투자전략을 정하고 있다. 이렇게 시청자의 욕구가 크다 보니 3개 공중파 TV방송사도 아침방송을 시작하자마자 6시 뉴스시간대에 아예 월가의 주가동향을 고정메뉴로 선정, 뉴욕 현지특파원 등을 동원해 최우선으로 보도하고 있다. 우리가 아침에 눈뜨고 가장 먼저 접하는 게 미국의 경제동향인 셈이다.

    경제부처나 중앙은행 등 정부부문도 마찬가지다. 미국 경제동향을 현지 파견 공관원 등 해외 네트워크를 통해 수시로 모니터링한다. 또 외국인투자자들의 한국에 대한 시각이 어떠하며 그들의 요구조건이 무엇인가를 점검하기 위해 외국계 펀드매니저들과 빈번히 접촉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은 이제 좋든 싫든 우리와는 ‘경제 공동운명체’가 돼 버렸다. 이런 현상은 탈냉전 후 미국 주도로 본격화된 글로벌리제이션(세계화)의 결과 나타난 전세계적 현상으로 우리나라에서만 목격되는 특수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일각에서 “이럴 바에야 차라리 미국의 51번째 주(州)가 되자”는 역설적인 반발이 제기될 정도로 최근 그 정도가 부쩍 심해진 것도 사실이다. 이런 종속현상은 외환위기 후 급속히 심화된 우리 경제에 대한 미국 등 외국자본의 경제지배력 심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현재 외국자본의 경제지배력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문은 금융분야다. IMF사태 이후인 지난 98년에서 2000년까지 3년간 외국인들의 총투자자금 유입규모는 직접투자 401억 달러, 주식·채권 등 간접투자 219억 달러 등 도합 620억 달러에 달한다. 이중에서 주식시장의 경우, 2001년 3월 말 현재 외국인들의 국내 주식보유액수는 시가 기준으로 63조원에 달한다. 이는 시가총액 208조7000억원의 30.2%에 달하는 금액이며, IMF사태 발발 전인 97년 말의 14.6%보다 배 이상 높아진 수치다.



    외국인 투자가들은 특히 우량기업 주식에 집중투자하고 있어, 시가기준으로는 전체의 30.2%, 주식 수 기준으로는 총주식 수 193억7000만주의 13.9%에 해당하는 26억9000만주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꿔 말하면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핵심 우량기업 주식만 중점적으로 사들이고 있다는 의미이자, 핵심 기간사업에 대한 외국인의 지배력이 그만큼 강화됐다는 이야기다.

    이런 외국계의 금융지배력 강화는 금융시장의 헤게모니를 외국계가 쥐락펴락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비근한 예로 지난해 10월 이래 국내 거래소지수는 400대, 코스닥지수는 50대까지 급락, ‘제2 경제위기설’이 광범위하게 유포되기도 했다. 그 원인은 하나였다. 외국인 주식투자가들이 이 기간 중 순매도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투신권 위축으로 국내 기관투자가들의 매수여력이 없고 개인투자자들도 큰 손실로 시장참여 의지가 사라진 시점에서 그 동안 유일한 순매수 세력으로 주가 버팀목 구실을 해온 외국계 투자가들이 손을 털려는 조짐을 보이자 비상벨이 울린 것이다. 그러자 대통령이 그 동안의 경제운영 실패를 사과하고 경제팀 개편을 시사하는 등 경제비상사태 분위기가 조성됐다.

    외국인이 쥐락펴락하는 주식시장

    그러나 1월 들어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선제적 금리인하 등으로 위기감이 일부 해소되면서 외국인 투자가들이 기존의 투자전략을 바꾸어 한 달 동안 2조5000억 원어치의 주식을 순매수하자, 장 분위기는 순식간에 핑크빛으로 반전되며 거래소지수가 600선까지 일시 회복되는 ‘1월 랠리’가 가능했다. 그러자 이에 비례해 개각이 거의 기정사실화됐던 현 경제팀이 그대로 유임되는 등 집권층의 위기감도 완화됐다. 한마디로 외국계가 국정 운영까지 좌지우지하는 상황을 되풀이해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월 말 국내 최대 민간경제연구소인 삼성경제연구소가 ‘외자 경영의 빛과 그늘’이라는 시의적절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외환위기 이후 3년간 외국계의 한국경제 지배력이 얼마나 커졌는지를 부문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을 중심축으로 하는 외국계의 지배력이 가장 커진 산업부문은 주식시장 외에 금융업으로, 특히 은행업 부문에 끼치는 영향력이 두드러지게 증대했다. 제일(뉴브릿지 51% 보유), 한미(칼라일·JP 모건 컨소시엄 40.7%, BOA 9.98%), 주택(ING그룹 10%, 뉴욕은행 13.1%), 국민(골드만삭스 11.1%), 외환(코메르츠방크 32.5%), 하나(알리안츠그룹 12.5%, 국제금융공사 2.8%), 신한(재일동포 27%) 등 대다수 우량은행의 대주주 자리를 외국계가 차지했다. 특히 제일, 한미, 외환, 하나, 국민 등 5개 은행의 경우 1대 주주 자리를 외국계가 차지했고, 이들의 시장점유율도 41.7%에 달했다.

    증권업계도 외환위기 전인 97년 말 3.9%였던 외국계 증권사의 시장점유율이 2000년 말에는 10.7%로 높아졌고, 21세기 황금산업으로 불리는 생명보험업계의 외국사 시장점유율도 97년 말 1.3%에서 2000년 말에는 9.3%로 급상승했다.

    제조업 부문에서의 영향력도 금융업종 못지않게 커져 자동차, 전자, 정보통신, 중공업, 석유화학 등 기간산업을 비롯해 신문용지, 종자, 식품 등 각 부문에서 외국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화하고 있다. 자동차 부문의 경우 르노의 삼성자동차 인수, 다임러크라이슬러의 현대자동차 지분 15% 매입에 이어 대우자동차도 GM으로 넘어갈 전망이다. 자동차 부품업계는 이미 외국계 독무대로 바뀌어 미국의 델파이 등 세계적 자동차부품업체들이 만도기계 등 30여 개의 국내 핵심부품업체를 인수한 상태다. 전자 부문은 LG그룹의 핵심사업인 LCD부문의 지분 50%가 필립스로 넘어갔고, 삼성전자, 하이닉스반도체(구 현대전자), 아남반도체 등 반도체 3사의 지분 50% 이상이 외국인 소유로 바뀌었다. 정보통신의 경우 SK텔레콤의 지분 15%가 일본 NTT도코모에 매각될 예정이고, 쌍용정보통신은 통째로 뉴브리지캐피털에 팔렸다.

    중공업 부문도 미국 클라크와 볼보가 삼성중공업의 굴삭기와 지게차 부문을 인수하면서 시장점유율을 40%대로 끌어올렸고, 미국 오티스는 LG산전의 엘리베이터 부문을 인수해 시장점유율을 50%대로 높였다. 석유화학 부문의 경우 국내 4대 정유사 중 현대정유, LG정유, S오일 등 3개사의 최대주주가 외국계로 바뀌었고, 폴리우레탄과 카본블랙 등 기초화학제품 분야도 외국계로 넘어갔다.

    이 밖에 신문용지업계의 5대 업체 중 3개가 외자에 매각되고, 종묘(種苗)와 주류의 절반 이상이 넘어갔다. 또한 필름은 57.8%, 일회용 건전지는 98%, 살충제는 55%, 생리대와 종이기저귀는 75% 이상이 외국계로 넘어가는 등 거의 전 산업 분야에서 외국계의 독점적 지배력이 구축됐다. 보고서는 결론 부분에서 이런 외국계의 한국경제 지배력 강화가 ‘빛’과 ‘그늘’을 동시에 던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우선 ‘빛’에 해당하는 외자유치의 긍정적 효과로는 구조조정의 기회 확대, 경영 투명성 증대, 재무건전성·현금흐름 중시 경향 확산, 선진 인사관행 도입, 선진 기술·노하우 습득을 꼽았다.

    반면에 ‘그늘’에 해당하는 부정적 결과로는 주력사업 매각에 따른 성장기반 잠식, 급속한 미국식 경영 도입에 따른 혼선, 자금운용의 단기화, 구조조정 지원에 대한 어려움, 고용불안 증가, 조직 신뢰 붕괴, 핵심인력 유출, 세계전략에 대한 선진기업의 종속 등을 꼽았다.

    보고서는 외자유치의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해선 ‘기업을 포함한 사회 전반의 실력이 관건’이라고 결론지었다. 즉 외자유입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경제주체들의 의식과 경제관행 전반의 선진화가 필수적이며, 기업은 경쟁력을 강화해 외자의 시장 잠식, 국내산업의 하청화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정부 의존을 지양하고 시장의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신뢰를 얻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에서도 지적하고 있듯, 외국자본의 진출은 그 동안 ‘우물 안 개구리’식으로 안주해온 낡은 기업관행을 타파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01년 3월 말 현재 국내 증시에 등록한 외국인 투자자 수는 1만2038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개인은 4610명에 불과한 반면, 기관투자가가 7428명이나 된다. 전세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기관투자가 대다수가 한국시장에 참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높아진 글로벌 스탠더드의 중요성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들의 투자기준인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춘 경영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이들 외국계의 출현은 실제로 시간이 흐를수록 기업 경영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데, 우선 사업구조에서는 종전의 외형적 팽창보다 수익성 위주의 구조조정을 촉진하는 순기능을 하고 있다. 지배구조에서는 더 이상 황제경영이 용납되지 않는 대신 경영 투명성이 중요한 잣대가 되고 있다. 재무관리는 재무건전성과 현금흐름을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었으며, 인사·조직 문화 역시 성과주의 및 능력주의 문화가 급속히 확산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외환위기 후 정부가 추진해온 외자유치 정책의 대표적 순기능이다.

    더욱이 아직까지 한국 등 아시아시장에 대한 외국인 투자 비중은 미국이나 유럽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낮아, 정부 주장대로 국내 기업들이 글로벌스탠더드 수준의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외국인자본의 국내 투자환경을 더욱 개선해야 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영국의 IR(투자설명회) 전문기관인 톰슨 인베스터스 릴레이션스의 조사에 따르면, 99년 말 현재 전세계의 투자자금 시장 규모는 820조8700만 달러에 달한다. 이 가운데 기관투자 규모는 전체의 58%에 달하는데, 그중 아시아지역에 대한 투자규모는 기관투자 전체액의 7%에 불과하다. 반면에 런던, 뉴욕, 보스턴, 취리히 등 대부분 구미지역에 위치한 25개 대도시가 전체 기관투자액의 48%를 흡수하고 있었으며, 북미지역이 31%, 유럽지역이 21%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한국 등 아시아 블록은 그리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외국자본의 유입을 마냥 좋아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외국자본의 국내유입이 급증함으로써 초래하는 가장 큰 위험요소는 경제 헤게모니 문제이며, 이에 따른 과도한 국부유출도 우려된다.

    헤게모니란 시소게임처럼 상대적인 것이다. 한쪽이 바짝 정신을 차리고 대응하면, 아무리 막강한 물리력을 가진 상대방이라 할지라도 일방적으로 헤게모니를 쥐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쪽이 약점을 보이면 상황은 달라진다. 거친 야수가 먹이를 채듯, 순식간에 주도권을 빼앗기게 마련이다. 경기가 본격적인 침체국면에 진입한 지난해 하반기부터 우리가 목격하는 게 바로 그런 꼴이다.

    포드의 대우자동차 인수포기(2000년 9월16일), 네이버스의 한보철강 인수포기(9월30일), AIG의 현대투신에 대한 정부의 1조원대 추가 지원요청 등 지난해 하반기에 잇따라 터진 미국계 외국자본의 ‘한국 흔들기(Korea Bashing)’는 국내 금융시장을 크게 요동치게 하며 한국의 생명줄인 대외신인도를 위협했다. 2000년 10월에 들어서는 그 강도가 더 세져, 단기성 자본이 주류를 이루는 홍콩계 투자가들을 중심으로 ‘Sell Korea(팔자! 코리아 주식)’ 분위기가 빠르게 확산됐다. 홍콩의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그 무렵 이 같은 홍콩 금융계 분위기에 기초해 “한국이 제2의 금융위기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센세이셔널한 기사를 쓰기도 했다. 외환위기 도래 전인 지난 97년 가을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외국계의 움직임은 상당 부분 의도적이었고 과장됐다는 게 지배적 평가다. ‘목적이 깔린 위기감의 표출’이 아니었느냐는 의구심이 깔려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 후 상황은 외국계에 유리한 국면으로 돌아갔고, 외국계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포드의 인수포기 후 GM이 인수협상에 뛰어든 대우자동차건만 해도 그렇다.

    포드가 GM 등 경쟁자를 제치고 대우차 우선협상자로 선정된 것은 지난해 6월29일. 워크아웃에 들어간 뒤 신규로 지원된 자금만 2조5000억원에 달하고 매달 1000억원대의 적자를 내고 있던 ‘돈 먹는 하마’ 대우차가 포드에게 매각될 시점에, 정부는 이제 큰 짐을 벗게 됐다며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 과정에 국제관행을 깨고 포드의 입찰가격(70억달러)을 공개하는 등 마치 “우리가 큰 건을 하나 성사시켰다”는 식으로 자화자찬하는 실수를 연발했다.

    채권단과 대우경영진 역시 정부와 마찬가지로 이제는 모든 게 끝났다는 식의 안이한 태도로 일관, 포드의 실사가 한창 진행중이던 지난해 8월 임·단협에서 노사 양측은 “향후 5년간 정리해고를 하지 않는다”는 고용안정 특별협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신 꼴이다. 아니나 다를까, 포드는 인수가격을 당초 제시했던 70억달러에서 50억달러로 깎아줄 것을 요구했고 사전에 입찰가를 언론에 공개했던 까닭에 여론을 의식해 정부가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9월 말 미련없이 대우차 인수 포기를 발표, 한국경제를 일순간에 밑동째 뒤흔들었다.

    불행 중 다행일까. 포드의 인수 포기 선언 후 GM이 협상참여 의사를 밝히면서 대우차 매각협상은 한가닥 희망을 갖게 했다. 그러나 앞날은 여전히 암담하다.

    GM의 탁월한 협상력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GM이 협상참여를 발표한 직후인 지난해 10월8일자 칼럼에서 “대우자동차 채권단이 모든 교섭력(bargaining power)을 거의 잃은 반면 GM은 대우자동차 인수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 신문은 “포드가 70억달러에 인수키로 한 계획을 철회함으로써 훨씬 더 민감한 가격 수준으로 협상의 관심이 옮겨졌다”면서 “30억 달러 이상이면 가격이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요컨대 “매각협상의 일방적 승자(Winner)는 GM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GM이 어떤 회사인가. 지난 80년대 말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했을 때 일이다. GM은 국영기업체의 민영화를 선언한 동구권 여러 나라 중에서도 폴란드의 국영공장 인수에 군침을 흘렸다. 특히 폴란드의 국영자동차 공장이던 FSO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동구권 최고의 기술력과 제품생산력을 갖춘 FSO를 인수할 경우 동구권 자동차 시장 공략의 주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M은 FSO 인수협상을 시작한 이래 폴란드 정부와 장장 4년간 지리한 줄다리기를 했다. 한푼이라도 더 낮은 가격에 인수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대우의 김우중(金宇中) 회장이 중간에 끼어들어 FSO를 가로채지 않았다면, 아마도 폴란드 정부는 고철값도 안되는 헐값에 FSO를 GM에 넘겼을 것이다. GM은 이처럼 ‘가격 후려치기’에 관한 한 국제무대에서 정평이 나 있는 프로페셔널이다. 실제로 대우차 입찰 당시 3조3000억원을 썼던 GM은 지난해 말 채권단과의 비공식석상에서 인수가격으로 종전의 10분의 1도 안 되는 3000억원을 불렀으며, 최근 들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설비가 낡은 부평공장과 해외법인은 제외하고 군산공장 등 일부 최첨단 시설 공장만 분할 인수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이런 제반 여건을 고려할 때 대우차는 헐값에 매각되거나 최악의 경우 공중분해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제일은행을 뉴브릿지 캐피털에 매각하면서 매각 시기를 1년 늦추는 바람에 6조원의 추가부담을 떠안아야 했던 쓰라린 경험이 있다. 그런데도 또 한 차례 대우자동차의 구조조정 적기를 놓침으로써 자승자박의 처지에 몰린 것이다.

    현재 AIG와 막판 인수협상을 진행중인 현대투자신탁 문제도 사정이 복잡하기는 대우차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현대투신은 현대건설, 하이닉스반도체와 함께 2000년 들어 불거진 ‘현대사태’ 진원지 중 하나였다. 현대는 2000년 5월부터 한달 터울로 계속된 ‘왕자의 난’ 등 이른바 현대사태로 그룹 전체가 동반 침몰할 절대 위기에 몰리자, 8월21일 10억 달러의 외자유치를 전제로 로스차일드 등 6개 외국계 금융자본의 컨소시엄인 AIG그룹에 현대투신의 경영권 및 지분을 매각하기로 MOU(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로스차일드는 어떤 회사인가. 한국에서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곧바로 한국에 진출한 로스차일드는 97년 12월 한라그룹 부도사태가 발생하자 이른바 ‘로스차일드 구조조정 프로그램’이라는 명목 아래 10억 달러의 투자를 약속하고 정부와 채권단으로부터 3조8000억원의 부채 탕감 등 각종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로스차일드는 실제로는 약속했던 10억달러 가운데 2억4500만달러만 투자하고서도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IMF위기 당시 형제그룹이던 한라그룹의 구조조정을 로스차일드에게 맡긴 경험이 있던 현대그룹은 2000년 들어 불똥이 자신에게 떨어지자, 또다시 로스차일드를 찾았다.

    로스차일드가 주도하는 컨소시엄인 AIG는 지난 8월 현대투신에 10억달러를 투자하겠다는 MOU를 체결한 뒤 본격적 실사에 착수했다. “한국 기업은 까보면 반드시 하자가 발견된다”는 게 국제금융계의 통설. 아니나 다를까 뚜껑을 열자마자 ‘결정적 하자’가 발견됐다. 실사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현대그룹 관계자의 전언이다.

    “로스차일드가 찾아낸 결정적 하자는 지난 98년 말 현대투신의 한남투신 인수조건이었다. 당시 실사결과 밝혀진 한남투신의 부실은 6000억원대. 전라지역과 제주지역 상공인들이 출자해 세운 한남투신이 쓰러지면서 집권기반인 광주의 인심이 흉흉해지자 정부는 서둘러 한남투신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기에 인수사에게 한남투신 부실을 모두 털어준 다음에 넘겨준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재정경제부와 협상에 나선 이익치 회장이 결정적 실수를 범했다. 재경부는 ‘2조5000억원의 증권금융채권 자금을 연리 6.6%의 저리로 2003년까지 5년간 빌려주겠다’는 카드를 내놓았다. 당시 IMF의 초고금리 정책으로 콜금리가 11%에 육박하던 시점이었던 만큼 계산상으로는 6000억원의 손실을 보전해주는 모양새였다. 건설 출신이어서 금융에 밝지 못했던 이회장은 아무 조건을 달지 않고 덜컥 이 안을 수용했다. 당시 현대가 이 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판단, 또 다른 수정협상안을 갖고 협상에 임했던 재경부측은 협상 후 이회장과 현대그룹의 ‘단순무지함’을 비웃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계약 직후인 99년 들어 IMF의 정책이 바뀌면서 콜금리가 4%대까지 떨어지는 초저금리시대가 도래하자 사정이 180도 달라졌다. 정부가 약속한 저리의 이자특혜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선 확정금리가 아닌, 상황에 따라 금리를 바꾸는 변동금리로 계약을 맺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현대그룹의 최대 관심사였던 반도체 빅딜을 고려했기 때문인 이회장은 전혀 안전장치를 해두지 않았고, 결국 한남투신 부실을 그대로 현대투신으로 이전한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그 후 투신사 구조조정 과정에 ‘현대투신은 민간기업인 만큼 한국투신, 대한투신과는 달리 공적 자금을 투입하지 않겠다’고 밝혀 이른바 ‘현대 유동성 위기’를 촉발했다.

    더욱 심각한 부동산 국부유출

    귀신 같은 로스차일드가 이런 허점을 그냥 넘어갈 리 만무했다. 실사에 들어간 로스차일드는 곧바로 계약의 불평등성을 문제 삼으며, 2조5000억원의 증권금융채권을 연리 3%로 오는 2008년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청와대측에 정식으로 요구했다. 정부가 과연 어떤 태도를 보일지 미지수이나, 이 조건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로스차일드가 주도하는 AIG컨소시엄과의 투자계약은 물 건너갈 게 분명하다. 협상 상대가 IMF위기를 틈타 한라그룹을 고철값에 인수한 경험이 있는 로스차일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관계자의 전언대로 AIG는 정부가 명확한 답변을 해주지 않자 10월 말로 예정된 모린스 그린버그 AIG회장의 방한 및 청와대 방문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등 여차하면 협상을 깨겠다는 고압적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현대투신에 사실상 1조원대의 공적 자금 투입 효과를 보전해주는 선에서 현대투신 문제를 조기에 매듭 짓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현대투신 문제 역시 제때 청산해야 할 부실을 덮은 데서 온 부실 누적, 또 그에 따라 국부가 유출되는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부동산 시장의 국부유출도 심각한 지경이다. 지금 ‘고부가가치 부동산시장’은 거의 외국계가 싹쓸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기업자산 유동화시장이다.

    IMF 직후 숱한 거대기업이 쓰러지거나 부도 직전의 극한위기에 몰렸다. 부도위기에 몰린 기업들은 돈이 될 만한 물건, 예컨대 공장이나 본사 사옥, 계열사 등을 마치 ‘땡처리’하듯 눈물을 머금고 닥치는 대로 시장에 내놓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선택과 집중’이 아니라 ‘포기와 집중’”이라는 말이 재계에 나돌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이때 이 물건들을 사들인 곳은 자금력이 풍부한 외국계 금융기관, 또는 외국계 부동산전문회사들이었다. 국내 기업이나 은행들은 이를 사들일 만한 현금이 없었거나, 또는 부동산에 투자할 만한 정신적·심리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IMF사태 직후 외국계 자본은 성업공사가 사들인 부실기업의 부동산이나, 자금난에 봉착한 기업이 급매물로 내놓은 부동산을 헐값에 사들였다. 이들은 부동산가격 급등에 따른 매매차익을 빼고도 임대수익을 통해서만 최소한 매입가 기준으로 연리 25%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는 게 외국계 부동산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지난해 들어 또다시 신용경색이 재연돼 기업들이 위기에 처하면서 사옥 등을 내놓자 외국계는 또 한번 기업부동산 사냥에 나섰다.

    강남구 역삼동 현대중공업 사옥이 1250억원에 로담코에 팔려나간 것을 시작으로 금호그룹의 아시아나 빌딩(500억원), 광화문의 파이낸스센터 빌딩(3500억원), 시그마타워 10개층(330억원) 등이 싱가포르투자청(GIC)에 매각되는가 하면, 종로구 하누리빌딩(230억원)이 모건스탠리에 팔렸다. 이어 강남의 논노빌딩(240억원), 종로의 은석빌딩(715억원)이 골드만삭스에 매각됐고, 금호그룹의 광주은행 빌딩(380억원)은 싱가포르의 GRA에, 이에 앞서 대우그룹의 힐튼호텔(2700억원)은 싱가포르의 홍령그룹에 팔렸다.

    이 밖에 유동성 위기에 직면해 사옥마저 내놓을 만큼 궁지에 몰린 현대그룹의 계동사옥을 비롯해 강남구 역삼동 현대산업개발 사옥, 신문로의 금호 신축사옥, 필동의 쌍용그룹 사옥 등은 JP 모건 등이 중개자로 나서 매매협상을 진행중이다. 이와 함께 여의도의 동양증권 빌딩과 벽산125빌딩은 론스타 코리아가 매입계약 체결을 앞두고 있다.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대형 빌딩이 외국계 손에 넘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외국계는 이처럼 2000년 한 해 동안에만 재매각이 쉬운 건축연도 5년 이내이고 1000억 원이상 나가는 대형 신축건물만 최소한 1조원어치를 사들였다고 한다. 골드만삭스나 JP 모건 등 외국계 금융기관들은 매각 중개를 통해 막대한 수수료 수익을 올렸고, 부동산을 직접 사들인 외국계 부동산 전문회사들은 높은 임대료와 부동산값 상승으로 큰 이익을 올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들만의 리그’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IMF사태 직후에는 도매·소매 구분 없이 모든 은행이 생존의 위기에 봉착했고, 신탁계정 등에 숨겨진 부실이 많아 고객들이 은행을 외면하는 바람에 은행 금고에 돈이 바닥났던 만큼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그러나 2000년에는 상황이 달랐다. 이 기간 중 시중자금을 독식하다시피한 국내 은행들은 무엇을 했나. 지붕 위의 닭 구경하듯 멍하니 외국계의 빌딩 사냥을 구경하고 있거나, 이들 외국계에 국내 부동산 매입자금을 저리로 빌려준 게 고작이었다.

    한 예로 론스타 코리아가 매입계약 체결을 눈앞에 두고 있는 H증권의 매각협상 과정을 살펴보자. 론스타는 H증권 빌딩을 바이 앤 리스(Buy & Lease) 방식으로 매입하면서, 대략 700억원으로 추정되는 매입대금 중 40%는 자기자본으로 조달하고 10%는 임대시 H증권측으로부터 보증금으로 받기로 하고 나머지 50%는 외환은행에서 빌렸다. 외환은행으로부터 빌리는 방식은 페이퍼 컴퍼니를 세워 사채를 발행한 뒤 외환은행이 1순위 저당권을 확보해 이 사채를 인수토록 하는 방식을 택했다. 외환은행은 시중 대출금리보다 약간 높은 조건으로 발행된 이 사채 인수에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요컨대 론스타 코리아는 불과 매입대금의 40%에 해당하는 280억원만 갖고 H증권 빌딩을 인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론스타 코리아가 굳이 외환은행에서 돈을 빌린 것은 빌딩 인수의 위험을 분산하는 동시에, 원화로 자금을 조달함으로써 환차손의 위험을 차단하려는 두 가지 목적에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국내에 경쟁자가 아무도 없으니 원님 혼자서 나팔 불고 춤추는 식이다.

    흔히 은행으로 대표되는 금융업의 3대 기능으로 ‘지급결제 기능’ ‘위험분산 기능’ ‘자금중개 기능’을 꼽는다. 제 코가 석자인 부실은행은 현재 이 세 가지 기능을 모두 제대로 못 해내고 있다. 반면에 시중의 돈줄을 쥐고 있는 우량은행들은 앞의 두 가지 기능, 즉 고객이 원할 때 맡긴 돈을 제때 지급하는 지급결제 기능과 고객이 맡긴 돈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위험분산 기능은 부실은행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낫다. 그러나 현재 우량은행들이 못하고 있는 기능이 하나 있으니 바로 ‘자금중개 기능’이다. 자금중개 기능이란 자금을 갖고 있는 자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를 연결해주는, 쉽게 말해 돈이 막힘없이 돌게 하는 것이다.

    현재 우량은행에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규모의 시중자금이 몰려들고 있다. 이에 국고채나 A급 회사채와 가계대출 외에는 마땅한 운용처를 찾지 못해 역마진을 우려한 이들 은행은 자금 유입을 막기 위해 수신금리를 잇따라 인하했으나, 봇물 터진 듯 안전지대로 몰려드는 돈의 행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뒷짐 지고 있는 국내은행

    이때 무엇보다 아쉬운 것이 국내 우량은행들의 자산운용 능력이다. 한 예로 주택, 국민 등 수십조원의 시중자금을 저리로 동원할 수 있는 우량은행들이 현재 외국계가 독식하고 있는 ‘기업자산 유동화’ 시장에 뛰어든다면, 국내기업들은 외국계 금융기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으로 신속히 건물을 매각해 자금경색을 해소할 수 있다. 기업자산 유동화란 현금화가 안 되고 있는 사옥 등 기업의 고정자산을 팔아 현금이 돌게 만드는 금융기법을 가리킨다.

    미국의 경우 ‘마의 85년’을 분기점으로 미국 기업의 경쟁력이 일본 기업보다 크게 뒤처져 2류 기업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자, 기업들이 사옥 등을 유동화하는 적극적 금융기법을 도입해 자금을 마련한 뒤 이를 생산성 제고 투자에 사용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들 기업의 부동산을 사들인 부동산투자기업이나 금융기관들은 이를 담보로 자산담보부채권(ABS)을 발행해 자금을 회전시켰다.

    지금 국내금융기관이 이 시장에 뛰어든다면 외국계와 충분히 진검승부를 벌여볼 만하다. 한 예로 국내와 외국계의 자금 조달금리가 동일할 경우를 가정해 보자. 외국 금융시장에서 달러화로 자금을 조달한 외국계는 이를 원화로 바꿔 국내로 투자할 경우 환차손을 우려해 적잖은 액수의 리스크 헤지(위험 분산) 비용을 써야 한다. 반면 국내에서 원화로 조달해 투자하는 국내 금융기관은 이런 비용을 안 써도 된다. 외국계에 비해 헤지비용만큼 가격경쟁력이 있는 것이다. 그 혜택은 곧바로 매물을 내놓은 국내기업에게 돌아갈 수 있으며, 그만큼 국부유출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과거와 달리 우량은행들의 경우 국내 조달금리가 외국에서의 조달금리보다 더 낮아 국내의 가격경쟁력이 더 크다. 우량은행들에게는 돈을 신속히 기업에게 돌릴 책임이 있다. 사옥 등을 내놓은 한계 기업과 매각협상을 하는 외국계는 자신들이 산정한 가격대로 떨어질 때까지 협상을 질질 끌기 일쑤다.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기 때문이다. 이런 판에 수십조원의 저리 자금으로 무장한 국내 우량은행들이 외국계가 독식하는 자산 유동화 시장에 뛰어든다면, 현재의 외국계 독점 카르텔이 깨지면서 상대적으로 매각가격은 지금보다 높아져 기업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하다.

    이렇게 기업의 자금사정이 좋아지면 그 돈은 다시 이들 기업에게 빌려주거나 이들 기업이 발행한 회사채를 산 기업금융 전문은행이나 제2금융권으로 흘러들어가 신용경색 전반이 크게 해소되며 경기가 다시 상승하는 ‘선순환 고리’를 형성하게 된다.

    우량은행들이 ‘미필적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받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요컨대 IMF사태 이후 최근까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위기는 본질적으로는 우리나라의 ‘핵심 지적 자산 부재’에 따른 위기인 것이다. 모든 협상은 게임이며, 게임의 기본원칙은 ‘지피지기’다. 우선 상대방을 정확히 알아야 적확한 대응이 가능한 법이다. 이같은 게임이론에 기초할 때, 우리는 환란을 겪었으면서도 아직까지 협상의 상대방인 외국금융자본을 너무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가. 우선 문제가 되는 대목이 우리 자신의 과도한 ‘열등 콤플렉스’다. 97년 외환위기 후 우리 사회에서 상식화되다시피 한 고정관념 중 하나가 “한국 등 아시아금융계는 정경유착에 찌든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 lism) 집단, 서구금융계는 도덕적(Moral) 집단”이라는 이분법 공식이다. 실제로 외환위기 후 우리 금융계는 외국계로부터 ‘조롱’과 ‘모멸’에 가까운 비판을 받아왔다.

    “한국의 은행 경영진은 은행이 뭔지를 잘 모른다. 그들은 정부의 보호 아래 싼 이자로 자금을 조달, 정치권이 지정해준 곳에 대출해 주고 적당히 보장된 이자를 받았다. 정치인들과 골프나 치고 안주했던 사람들이다.”(미국 MIT의 돈 부시 교수, 98년 7월6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초청 ‘금융위기의 원인과 한국경제의 전망’ 특강에서)

    “한국의 은행은 주술사의 주문에 따라 움직이는 좀비 뱅크(Zombie Bank)다.”(미국 보스턴대학의 에드워드 J. 케인 교수, 98년 6월23일 한국은행 주최 국제학술회의에서)

    외국계의 이러한 비판은 과거 우리 금융계를 악몽처럼 짓눌렀던 관치금융의 폐단을 지적했다는 점에서는 크게 틀리지 않다. 또한 앵글로색슨계로 대표되는 서구 금융계가 리스크분산 관리나 금융기법 등에서 우리 금융계보다 크게 앞서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과정에 국내 금융계나 금융당국이 크게 주눅 들어, 마치 외국계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집단인 양 착각하는 ‘코리아 열등 콤플렉스’에 걸렸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외국계 관계자들은 국내 금융계의 독직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서구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서구의 은행장들은 도덕성의 잣대”라며 국내 금융계를 비웃었고 우리는 이를 당연한 지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국제금융사가 말하는 진실은 그렇지 않다. 월가의 대표적 투자은행인 JP 모건은 남북전쟁과 제1, 2차 세계대전 중 부실군수품 납품과 전비조달로 세를 확장한 전쟁상인이었다. 모건은 남북전쟁 과정에 격발사고가 잦은 불량 총기류와, 새로 배급받아 갈아 신고서 반나절도 행군하지 않아 밑창이 떨어지는 불량군화 등을 비싼 값에 군납해 장관이 경질되는 사회적 물의를 빚음으로써 전쟁이 끝난 뒤에는 국회에서 진상를 조사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JP 모건은 정치자금 지원을 통해 자신들에게 친밀한 역대 대통령을 가장 많이 배출한 금융자본으로 여지껏 맹위를 떨치고 있다.

    스위스은행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립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나치에게 유대인들의 금융자산 정보를 제공하는 형태로 학살에 동조했다가, 전후에 유대인들에게 12억5000만 달러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이들 ‘취리히의 금융 마피아’들은 지금도 전세계 부패정치인들의 비밀금고 노릇을 하고 있다. 유대계 금융자본의 대부격인 로스차일드는 나폴레옹 전쟁 때 워털루 전투의 결과를 시장에 정반대로 알리는 악질적인 정보조작을 통해 천문학적 인 부를 축적하는 대표적 모럴 해저드를 범한 바 있다. 서구금융이 본원적 부를 축적하던 시기는 곧 ‘모럴 해저드 시대’였던 것이다.

    서구 금융자본의 ‘모럴 해저드’

    이들은 세계 최고의 ‘하이 트러스트(High Trust: 높은 신용)’를 자랑하는 요즘에도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을 교묘히 넘나드는 수법으로 부를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외환위기 후 국내에서 불거진 몇몇 외국계 금융기관, 또는 외국계 펀드 관련 금융사고만 해도 그렇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99년 9월10일 도이체방크 서울지점이 LG, 중앙, 아세아종금 등 국내 종금사들과 탈법적인 손익조정 거래를 한 사실을 적발해 영업정지 전단계의 중징계인 문책경고를 내렸다.

    금감원에 따르면, 도이체방크 싱가포르지점은 지난 98년 7월 중앙종금으로부터 부실 원화채권(할인어음)을 장부가 1991억원에 매입해 대손충당금 부담을 해소시켜주는 대가로, 중앙종금에 2억4000만 달러어치의 외화예금증서를 15년간 분할회수하는 조건으로 팔아 큰 차익을 챙겼다. 또한 지난 99년 1∼3월에는 도이체방크 서울지점이 중앙, 아세아, LG종금과 정상적 시장환율보다 달러당 169∼450원 높은 환율로 6억5000만 달러에 이르는 달러화 매입 1년물 선물환계약을 체결해 선물환 이익을 제공했다. 도이체방크 측은 그 대신 이에 따라 입게 되는 손실은 별도의 스와프거래로 3년간 분할회수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국내 부실 종금사들의 어려운 사정을 최대한 이용, 불법적인 금융거래를 하다가 금융당국에 적발된 것이다.

    ‘정현준 게이트’로 가뜩이나 어수선하던 2000년 11월 말 또 한 차례 코스닥업계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만든 MCI코리아 불법대출 사건에도 외국계 금융자본이 깊게 연루돼 있었다.

    진승현이라는 한 30대 초반의 기업 인수합병(M&A) 전문가가 만든 MCI코리아는 자신이 2대 주주로 있는 코리아온라인(KOL: 리젠트퍼시픽 그룹 지주회사) 계열사인 리젠트종합금융으로부터 600억원을 불법 대출받아 대유리젠트증권 등의 주가조작에 사용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MCI코리아가 보유중인 KOL지분은 15.6%. 따라서 MCI코리아는 KOL자회사인 리젠트종합금융으로부터 자기자본 대비 20% 이상을 대출받을 수 없는 ‘동일인 여신한도 규정’에 묶여 있었으나, 이를 무시하고 불법대출을 받았다가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의 중심축인 리젠트퍼시픽 그룹은 지난 90년 영국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금융전문가 존 멜론이 설립한 신흥 투자전문회사다. 본거지는 런던과 홍콩에 두고 있으며, 운용자산 규모는 20억 달러로 알려져 있다. 설립 당시에는 사회주의 붕괴 후 신흥시장으로 급부상한 러시아와 동유럽이 주 타깃이었으나, 아시아 외환위기 후 동아시아 지역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

    리젠트그룹은 아시아시장에서도 특히 한국시장을 집중공략, 지난 98년 외환위기로 경영난을 겪고 있던 대유통상의 대유증권을 인수하며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리젠트퍼시픽 그룹은 조세회피지역(tax heaven)인 말레이시아 케이만군도에 코리아온라인(KOL)을 세운 후 본격적으로 부실금융기관 사냥에 나서, 2년여 만에 대유리젠트증권(자회사 리젠트자산운용 포함)을 비롯해 리젠트종합금융(구 경수종금), 리젠트화재(구 해동화재보험), 아이리젠트닷컴(인터넷금융), 일은증권 등을 거느린 국내 최대 외국계 종합금융그룹으로 발돋움하게 됐다. 한때는 대형 투신사인 대한투신 인수에 나서기도 했다.

    리젠트그룹이 맨 처음 국내에 갖고 들어온 돈은 1000만달러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진다. 100억원을 약간 넘는 종자돈으로 부실 금융기관들을 싹쓸이하다시피해 금융지주회사급의 종합금융그룹을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이 밖에 제일은행을 인수한 뉴브릿지 캐피털이 당초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선진금융기법 전수보다는 윌프레드 호리에 행장 등 경영진에게 수백억원대의 과도한 스톡옵션(주식매입선택권)을 탈법적으로 부여하려다가 금융당국의 제재를 받은 점이나, 지난해 11월 한미은행 전체 지분의 40.7%를 인수한 미국의 칼라일 그룹이 지분인수 후 더 높은 단기차익을 노려 거의 성사 직전에 있던 하나은행과의 합병을 결렬시킨 일 등도 정부당국이 외국계를 지나치게 신뢰하여 생긴 대표적 부작용으로 지적되고 있다.

    최근 잇따르고 있는 외국계 금융기관 또는 외국계 펀드 관련 금융사고의 공통점은 사고가 표면화되기 전에 이미 여러 차례 불법의 징후가 포착됐으나, 금융당국이 이를 간과해 사고를 키웠다는 점이다. ‘설마 외국계가 그럴 리 있겠냐’는 열등 콤플렉스에 금융당국이 사로잡힌 탓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힘센 외국계를 건드려 좋을 게 없다’는 또 다른 형태의 열등감 때문이었을까.

    지난해 7월19일 김정태 주택은행장은 동원증권 산하 동원경제연구소가 주최한 조찬회에서 ‘금융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던 중 ‘제2의 중남미’가 되지 않기 위해선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설파해 참석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단기간에 금융기관을 대형화하고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합병을 통해 몇 개 소수 은행으로 재편될 경우 자산집중도가 증가하면서 불공정 경쟁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부정적 지적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국내시장의 보호장벽이 이미 무너져 세계 거대은행이 진입하고 있다. 또 정보기술의 발달로 국내은행이라는 지역적 장벽의 이점은 갈수록 무의미해지고 있다. 국내은행들의 영세성을 하루빨리 극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시점이다.

    선진국 은행들은 이미 자국 내에서 시장을 통합한 후 규모의 경제 달성을 위해 공격적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금융위기를 겪은 나라들을 집중 공격하고 있는데, 이미 외국은행들의 공격적 M&A 결과 98년 말 현재 자산기준으로 선진국 은행들의 시장점유율은 아르헨티나의 경우 55%, 베네수엘라 40%, 멕시코 22%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최근 들어서는 브라질에서 외국은행들의 공격이 본격화돼 현지 은행산업의 붕괴가 우려되고 있다. 지역적 확장을 꾀하는 금융선진국의 일류은행들은 해외시장에서 해당 국가를 상대로 협상하는 강력한 교섭력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적 금융기관을 육성하지 못한다면 중남미와 같이 금융산업의 대외경쟁력 하락이 우려되고, 경제와 금융정책에서 독자성을 상실할 위험이 크다.”

    거대은행 만들어 대처해야

    김정태 주택은행장은 만약 IMF사태가 발발하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위치에 오르지 못했을지 모르는 대표적인 ‘IMF스타’다. 특히 그는 외국인투자가들이 한국정부보다도 신뢰하고 좋아하는 한국의 간판급 CEO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외국인투자가들은 주택은행의 주식을 60% 가까이 매수한 상태다. 그런 김행장이 ‘제2의 중남미’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공개리에 표명했다. 여기서 그는 외국계 금융공룡들과 진검승부를 할 수 있는 세계적 금융기관을 육성해야 한다는 해법을 제시했다. 실제로 그는 지난해 12월22일 노조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민은행과의 합병을 단행해 자신의 지론을 실천에 옮겼다.

    김행장은 국민은행과 합병해 자산순위 세계 61위의 거대합병은행을 탄생시킨 뒤 가능하다면 한미, 하나은행 등과 제2차 합병을 단행해 빠른 시일 내에 랭킹 50위 안의 거대은행을 만들어 국내외 금융시장에서 HSBC(홍콩상하이은행) 등과 정면승부를 벌이겠다는 야심 찬 청사진을 갖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김행장이 보여주는 공격적 태도일 것이다. ‘외국계로부터 받아들일 것은 철저히 받아들인다. 그 대신 열등의식에 빠지지 않고, 그들과 정면격돌할 실력을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갖춘다.’ 이것이 해법인 것이다.

    “들판에 서 있는 나무가 언제 폭풍이 몰아칠까 염려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폭풍에 대비해 뿌리를 튼튼히 내리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다.”

    지난해 6월 김행장이 월례조찬회에서 직원들에게 한 말이다. 이 말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격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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