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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군의관의 충격고백

“청탁·돈·술, 아무런 죄의식이 없었다”

  • 조성식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청탁·돈·술, 아무런 죄의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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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무비리 브로커 대부인 박노항 원사와 ‘해결사’인 군의관들은 대체 어떤 관계였나. 박원사가 병무비리 세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배경은? 군의관 출신 A씨가 ‘신동아’ 인터뷰를 통해 낱낱이 밝히는 병무비리 커넥션의 비밀.
1998년 12월부터 시작해 오늘날에 이른 군·검합동병역비리수사의 기반을 마련한 사람은 이명현 소령과 김대업씨였다. 이소령은 당시 국방부 수석검찰관이었고, 민간인으로 유일하게 수사에 참여한 김씨는 병무비리 전과자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약 5만 건의 병적카드를 석달 동안 분석, 그 중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2000여 건을 선별했다. 이렇게 해서 1998년 12월초 1차 군·검합동수사반이 설치되기 전까지 분석을 마친 자료는 400여 건.

선배 군의관이 소개

그러나 합수반 수사는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의심은 가지만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사의 첫 단계는 병역비리의 최종 관문에 해당하는 군의관 진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병역면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질병 관련 면제다. 그런데 이는 전문적인 분야여서 군의관이 “의학적 소견에 따라 정상적으로 판정했다”고 잡아떼면 브로커나 청탁자의 신분을 알아내기는커녕 병역비리 입증 자체가 힘들었다.

합수반 설치 후 50여 일 동안 확인한 비리는 단 두 건. 이에 군검찰 수사팀장인 이소령은 합수반에 참여한 서울지검측과 상의해 군의관 면책방침을 정했다. 수사에 협조하는 군의관의 죄는 처벌하지 않기로 한 것. 물론 사전에 국방부장관의 허락을 받았다. 그에 따라 군의관들에 대한 설득작업이 시작됐다. 대다수 군의관들은 완강하게 버텼으나, 그 중 20여 명이 설득 4일 만에 수사에 협조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의 입을 통해 하루 동안 150여 건의 병역비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엔 박노항 원사와 관련된 진술도 많았다.

그제서야 수사의 기본 틀이 짜여졌다. 군검찰로부터 군의관 진술서와 병적카드 진단서 등을 넘겨받은 서울지검 수사팀은 비리에 관련된 민간인들을 불러 조사했다. 군의관들은 1차 수사가 마무리될 무렵인 1999년 4월초까지 거의 매일 저녁 합수반에 출두해 수사에 협조했다.



그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김대업씨였다. 의정하사관 출신으로 의무 및 병무행정에 밝은 김씨는 군의관들의 기억력을 되살려 비리를 찾아내는 데 비상한 능력을 발휘했다.

1차 수사가 마무리된 후 병무비리수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국방부가 “비리에 관여했던 군의관들을 처벌하지 않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군내 일부 여론을 받아들여 군의관 면책약속을 깬 것. 그에 따라 비리를 털어놓은 군의관들만 처벌되는 모순이 생기자 군의관들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게 됐고 수사는 답보상태에 빠졌다.

‘신동아’는 당시 수사에 협조했던 군의관 출신 A씨(소령 전역·현재 S병원 원장)를 인터뷰, 박노항 원사와 군의관의 비리커넥션을 확인했다. 박원사가 구속된 후 A씨는 합동수사반에 출두해 조사를 받기도 했다.

“어차피 누군가를 통해 해결”

평상시 군병원에 근무하는 군의관들은 돌아가며 각 지방병무청 파견근무를 한다. 기간은 1년. A씨가 박원사를 알게 된 것은 1995년 서울병무청 징병검사장에서였다. 그 전에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근무했던 A씨는 박원사를 만나기 전 이미 병역비리 커넥션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박원사를 소개해준 사람은 선배 군의관이었다.

“군의관이라면 누구나 기관(헌병·기무)요원을 알고 있었다. 군병원이나 징병검사장에 그들이 근무하기 때문이다. 보통 병무청 직원이나 선후배(군의관)들의 소개로 알게 된다. 신검 나가면 선배나 병무청 직원이 자연스럽게 식사 자리를 마련한다. 그런 자리에서 기관요원들은 대놓고 ‘잘 부탁한다’고 말하는데, 그 전통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A씨에 따르면 신검과 관련한 청탁은 대부분 병무청 직원이나 기관요원들의 알선을 통해 이뤄진다. 때로는 진단서를 내밀며 “되냐, 안 되냐”를 확인한다. 군의관이 거절하면 잠시 후 다시 들고 온다. 그래도 안 되면 술자리에 불러내 부탁한다. 그쯤 되면 웬만한 군의관은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군의관들은 기관요원의 청탁을 거절할 처지가 못 된다. 거절하면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브로커들은 일을 부탁할 때 또는 일이 해결된 다음 돈을 건넨다. 한 건에 200만∼300만 원이다. 하지만 가짜 진단서를 만들어야 하는 등 ‘일거리’가 늘어나면 액수가 커진다. 그 경우 한 건에 3000만 원도 받는다. 물론 중간에 연결해주는 병무청 직원이나 기관요원 같은 브로커들의 수입은 더 크다. A씨가 듣기로 한 건에 8000만 원까지 챙긴 병무청 직원도 있었다. 반면 군의관들이 청탁자한테서 직접 돈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A씨는 “청탁을 받을 때 갈등은 없었는가”는 물음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부탁을) 안 들어줘도 어차피 누군가를 통해 해결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줬다. 또 그들의 부탁을 거절하면 그 사회에서 버티기 힘들다. 기관요원에 잘 보이면 계속 서울 지역에 근무하고, 잘못 보이면 제대할 때까지 지방에만 있게 된다. 기관요원이 모르는 병역비리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들을 거치지 않은 청탁도 들어주는 판에 못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병역비리 커넥션은 워낙 깊고 단단해 특별한 현상도 아니었고 쉬쉬하고 감추는 일도 아니었다. A씨가 근무할 때 군병원이나 병무청엔 병역비리가 만연했다. 특히 서울(병무청)은 외부 감사도 받지 않는 치외법권지역이었다. 병무청 직원끼리 감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에 따라 군의관들도 신경 쓰지 않고 청탁을 들어줬다.

그만큼 병역비리는 일상화돼 있었다. ‘서울을 건드리면 다 죽는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그래서인지 1998년 5월 병역비리수사의 계기가 된 원준위 사건이 터졌을 때도 군의관들은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국방부 합동조사단 소속 서울병무청 조사실장인 박노항 원사의 위세는 대단했다. 군의관들은 다 그를 깍듯이 대했다. 그의 부탁을 거절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마디로 자리에서 나오는 힘이었다. 박원사는 과거 수도통합병원에서 오래 근무한 덕에 군의관 인맥을 꿰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그 자리는 힘이 있는 자리였다. 기관요원들도 박원사를 통해 병역청탁을 해결했다. 서울(병무청)에선 박노항이 워낙 세니 기무요원들도 그에게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수도통합병원 조사실장을 지냈기 때문에 의무사령관(소장)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박원사와 군의관들은 자주 술자리에서 어울렸다. 주로 박원사가 술을 샀지만 군의관들이 사는 경우도 많았다. A씨도 박원사와 여러 차례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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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식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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