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호

“청탁·돈·술, 아무런 죄의식이 없었다”

  • 조성식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05-04-12 15: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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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무비리 브로커 대부인 박노항 원사와 ‘해결사’인 군의관들은 대체 어떤 관계였나. 박원사가 병무비리 세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배경은? 군의관 출신 A씨가 ‘신동아’ 인터뷰를 통해 낱낱이 밝히는 병무비리 커넥션의 비밀.
    1998년 12월부터 시작해 오늘날에 이른 군·검합동병역비리수사의 기반을 마련한 사람은 이명현 소령과 김대업씨였다. 이소령은 당시 국방부 수석검찰관이었고, 민간인으로 유일하게 수사에 참여한 김씨는 병무비리 전과자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약 5만 건의 병적카드를 석달 동안 분석, 그 중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2000여 건을 선별했다. 이렇게 해서 1998년 12월초 1차 군·검합동수사반이 설치되기 전까지 분석을 마친 자료는 400여 건.

    선배 군의관이 소개

    그러나 합수반 수사는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의심은 가지만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사의 첫 단계는 병역비리의 최종 관문에 해당하는 군의관 진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병역면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질병 관련 면제다. 그런데 이는 전문적인 분야여서 군의관이 “의학적 소견에 따라 정상적으로 판정했다”고 잡아떼면 브로커나 청탁자의 신분을 알아내기는커녕 병역비리 입증 자체가 힘들었다.

    합수반 설치 후 50여 일 동안 확인한 비리는 단 두 건. 이에 군검찰 수사팀장인 이소령은 합수반에 참여한 서울지검측과 상의해 군의관 면책방침을 정했다. 수사에 협조하는 군의관의 죄는 처벌하지 않기로 한 것. 물론 사전에 국방부장관의 허락을 받았다. 그에 따라 군의관들에 대한 설득작업이 시작됐다. 대다수 군의관들은 완강하게 버텼으나, 그 중 20여 명이 설득 4일 만에 수사에 협조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의 입을 통해 하루 동안 150여 건의 병역비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엔 박노항 원사와 관련된 진술도 많았다.

    그제서야 수사의 기본 틀이 짜여졌다. 군검찰로부터 군의관 진술서와 병적카드 진단서 등을 넘겨받은 서울지검 수사팀은 비리에 관련된 민간인들을 불러 조사했다. 군의관들은 1차 수사가 마무리될 무렵인 1999년 4월초까지 거의 매일 저녁 합수반에 출두해 수사에 협조했다.



    그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김대업씨였다. 의정하사관 출신으로 의무 및 병무행정에 밝은 김씨는 군의관들의 기억력을 되살려 비리를 찾아내는 데 비상한 능력을 발휘했다.

    1차 수사가 마무리된 후 병무비리수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국방부가 “비리에 관여했던 군의관들을 처벌하지 않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군내 일부 여론을 받아들여 군의관 면책약속을 깬 것. 그에 따라 비리를 털어놓은 군의관들만 처벌되는 모순이 생기자 군의관들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게 됐고 수사는 답보상태에 빠졌다.

    ‘신동아’는 당시 수사에 협조했던 군의관 출신 A씨(소령 전역·현재 S병원 원장)를 인터뷰, 박노항 원사와 군의관의 비리커넥션을 확인했다. 박원사가 구속된 후 A씨는 합동수사반에 출두해 조사를 받기도 했다.

    “어차피 누군가를 통해 해결”

    평상시 군병원에 근무하는 군의관들은 돌아가며 각 지방병무청 파견근무를 한다. 기간은 1년. A씨가 박원사를 알게 된 것은 1995년 서울병무청 징병검사장에서였다. 그 전에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근무했던 A씨는 박원사를 만나기 전 이미 병역비리 커넥션에 익숙해진 상태였다. 박원사를 소개해준 사람은 선배 군의관이었다.

    “군의관이라면 누구나 기관(헌병·기무)요원을 알고 있었다. 군병원이나 징병검사장에 그들이 근무하기 때문이다. 보통 병무청 직원이나 선후배(군의관)들의 소개로 알게 된다. 신검 나가면 선배나 병무청 직원이 자연스럽게 식사 자리를 마련한다. 그런 자리에서 기관요원들은 대놓고 ‘잘 부탁한다’고 말하는데, 그 전통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A씨에 따르면 신검과 관련한 청탁은 대부분 병무청 직원이나 기관요원들의 알선을 통해 이뤄진다. 때로는 진단서를 내밀며 “되냐, 안 되냐”를 확인한다. 군의관이 거절하면 잠시 후 다시 들고 온다. 그래도 안 되면 술자리에 불러내 부탁한다. 그쯤 되면 웬만한 군의관은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군의관들은 기관요원의 청탁을 거절할 처지가 못 된다. 거절하면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브로커들은 일을 부탁할 때 또는 일이 해결된 다음 돈을 건넨다. 한 건에 200만∼300만 원이다. 하지만 가짜 진단서를 만들어야 하는 등 ‘일거리’가 늘어나면 액수가 커진다. 그 경우 한 건에 3000만 원도 받는다. 물론 중간에 연결해주는 병무청 직원이나 기관요원 같은 브로커들의 수입은 더 크다. A씨가 듣기로 한 건에 8000만 원까지 챙긴 병무청 직원도 있었다. 반면 군의관들이 청탁자한테서 직접 돈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A씨는 “청탁을 받을 때 갈등은 없었는가”는 물음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부탁을) 안 들어줘도 어차피 누군가를 통해 해결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줬다. 또 그들의 부탁을 거절하면 그 사회에서 버티기 힘들다. 기관요원에 잘 보이면 계속 서울 지역에 근무하고, 잘못 보이면 제대할 때까지 지방에만 있게 된다. 기관요원이 모르는 병역비리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들을 거치지 않은 청탁도 들어주는 판에 못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병역비리 커넥션은 워낙 깊고 단단해 특별한 현상도 아니었고 쉬쉬하고 감추는 일도 아니었다. A씨가 근무할 때 군병원이나 병무청엔 병역비리가 만연했다. 특히 서울(병무청)은 외부 감사도 받지 않는 치외법권지역이었다. 병무청 직원끼리 감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에 따라 군의관들도 신경 쓰지 않고 청탁을 들어줬다.

    그만큼 병역비리는 일상화돼 있었다. ‘서울을 건드리면 다 죽는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았다. 그래서인지 1998년 5월 병역비리수사의 계기가 된 원준위 사건이 터졌을 때도 군의관들은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국방부 합동조사단 소속 서울병무청 조사실장인 박노항 원사의 위세는 대단했다. 군의관들은 다 그를 깍듯이 대했다. 그의 부탁을 거절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마디로 자리에서 나오는 힘이었다. 박원사는 과거 수도통합병원에서 오래 근무한 덕에 군의관 인맥을 꿰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그 자리는 힘이 있는 자리였다. 기관요원들도 박원사를 통해 병역청탁을 해결했다. 서울(병무청)에선 박노항이 워낙 세니 기무요원들도 그에게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수도통합병원 조사실장을 지냈기 때문에 의무사령관(소장)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박원사와 군의관들은 자주 술자리에서 어울렸다. 주로 박원사가 술을 샀지만 군의관들이 사는 경우도 많았다. A씨도 박원사와 여러 차례 술을 마셨다.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 않았다. 평도 괜찮은 편이었다. 군의관들의 이런저런 부탁을 잘 들어줬다. 진급 인사를 꼭 챙겼고 여비나 명절 떡값도 건넸다. 자기 말로 10원을 벌면 7원은 쓴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챙긴 만큼 푸는 스타일이었다. 군의관들에게 술대접을 많이 했는데, 룸살롱 같은 데서 사치스럽게 마시지는 않았다. 주로 식사를 함께 한 뒤 맥주집에 가 한 잔 하는 정도였다.”

    A씨에 따르면 박원사의 전임자로 ‘박노항의 사부’로 불리던 B씨는 군의관 세계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짠돌이’였다는 것. A씨는 1998년 5월 수도통합병원에 근무할 때 B씨와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원준위 사건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A씨가 관련된 병역비리는 약 80건에 이른다. 서울병무청에 근무할 때는 병역면제에, 수도통합병원에서는 주로 의병전역에 관여했다. 그 중 수사팀에 자백한 박원사 비리는 열댓 건. A씨는 박원사로부터 한 건에 적게는 100만 원에서 많게는 500만 원을 받았다. 가장 많이 받을 때는 한 건에 1000만 원까지 받았다. 박원사가 쥐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때로는 청탁자가 직접 건넸다. 박원사의 주선으로 청탁자와 술자리에 동석한 적도 있다.

    신검은 매년 2월 중순에서 12월 중순까지 계속된다. 서울에서는 1차 판정이 서울병무청에서 이뤄진다. 내과 외과 등 각 과마다 2명의 군의관이 판정하는데 몸 상태가 4급(보충역)만 되면 군의관 재량에 따라 얼마든지 5급, 곧 면제판정이 가능하다. 질병에 따른 면제의 경우 군 지정병원의 진단서가 필요하다. 서울에 있는 군 지정병원은 주로 종합대학병원들이다.

    담당 군의관이 5급 판정을 내리면 대개는 그걸로 끝이다. 다만 누가 봐도 무리한 판정이거나 ‘표가 많이 나는’ 경우엔 수석군의관이나 병무청 징병관이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면 수도통합병원으로 넘어가 정밀진단을 받게 된다. 거기서도 박노항 원사와 같은 브로커의 입김이 작용한다. 통합병원에서는 1차로 과장이 진단한 후 진료부장 확인을 거쳐 마지막으로 병원장이 결정한다.

    신검업무와 관련해선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군의관 세계의 관행이다. 돈을 먹고 부정면제 판정을 내린 군의관은 알아서 상납한다. 진료부장이나 병원장은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청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인 아들 등 이른바 ‘사회관심자원’은 병무청에서 4급 판정만 받아도 통합병원으로 가 정밀진단을 받도록 돼 있다. 박노항 원사가 ‘무소불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서울 지역 병역비리의 두 온상인 서울병무청과 수도통합병원을 오랫동안 번갈아가며 근무했기 때문이다.

    병무청 파견근무를 끝낸 A씨는 2년 동안 지방 군병원에서 근무한 후 1998년 다시 수도통합병원에 복귀했다. 원준위 사건을 강 건너 불 보듯 하던 군의관들에게도 마침내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1998년 12월 발족한 1차 군·검합동수사팀은 군의관 자백에 승부를 걸었다. 최근 3년 이내에 서울 지역에서 근무한 군의관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A씨도 조사를 받았는데, 처음엔 혐의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런데 군검찰이 면책을 제의하면서 군의관들은 동요했다.

    “수사 초기엔 다들 끝까지 오리발 내밀자는 분위기였다. 설령 자백하고 싶어도 다른 군의관들 눈치가 보여 어쩔 수가 없었다. 병역비리수사는 군의관이 입을 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군의관이 돈 받은 적 없다고 버티면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수도통합병원 모 군의관이 수사팀의 감청에 걸려 구속될 위기에 처했다. 그것을 계기로 군검찰은 면책을 약속하며 압박해 왔다. 1억을 받았든 2억을 받았든 사실대로만 말하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했다. 군검찰에 양해를 구하고 군의관들끼리 장시간 회의를 가졌다. 격론 끝에 수사에 협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 길만이 우리가 살 길이었다.”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면책 약속을 받은 군의관들은 기억이 나는 대로 자신들이 저지른 병역비리를 털어놓았다. 수사팀은 20여 명의 군의관으로부터 300여 건의 병역비리를 확인했다. 1차 수사팀은 그 중 수사여력이 미치지 못한 100여 건을 후속 수사팀에 넘겨줬다. 1999년 4월초 1차 수사가 마무리된 후 면책약속이 깨졌다. 군의관들에게 면책을 약속했던 수석검찰관 이명현 소령은 크게 반발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후 수사 주도권은 고석 검찰부장에게 넘어갔다.

    A씨는 기무사와 군검찰 갈등의 한 원인이었던 김대업씨의 역할에 대해 “그가 없었다면 한마디로 병무비리수사는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병무비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방법을 통해 가능한지 꿰뚫고 있었다. 병적카드에 적힌 신검판정 기록과 진단서 등을 대조해 비리를 꼭꼭 집어냈다. 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도 그와 얘기하다 보면 기억이 되살아났다.”

    A씨는 박원사의 비리에 대해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역할을 했을 것”이라며 병무비리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임을 강조했다.

    “조직사회에서는 서로 협조해야 하는 것 아니냐. 서로 편해지기 위해 도움을 주고받고 비리도 함께 저지르는 것이다.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전엔 병무비리는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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