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호

‘란닝구’에서 ‘모시메리’까지, 한국 속옷 역사를 쓰다

(주) BYC 고진석 사장

  • 곽희자 < 자유기고가 >

    입력2005-04-14 13: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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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내 내의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는 BYC는 1946년 창업 이래 55년 동안 품질제일주의를 고수했다. 유보율 3800%의 탄탄한 재무구조를 자랑하지만 내의 만들기 외에는 단 한 번도 한눈을 판 적이 없다.
    광복 50년이 되던 1995년에 창립 50년이 넘은 우리나라 상장기업은 모두 23개사였다. 그중 은행이 5개, 일본인이 창업한 회사가 10개였고, 한국인이 만든 회사는 8개에 불과했다.

    기업의 장수(長壽)는 그 나라의 정치·경제·사회 안정도와 직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렇게 낮은 기업 생존수치만으로도 격동의 우리 역사를 짐작해볼 수 있다. 동족상잔의 전쟁과 치열한 이념대립, 갈등으로 점철된 정권교체, 유가파동과 외환위기 등 거듭된 고난을 버텨내면서 50년의 기업 역사를 일궈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1946년 회사를 설립, 올해로 창립 55년째에 접어든 (주)BYC 역시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쳐온 기업 가운데 하나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내의 만들기 한 우물만 파온 BYC는 ‘백양 메리야스’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백양’은 한때 우리나라 내의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다. 불모지였던 내의산업에 선발주자로 뛰어들어 제품의 규격화와 표준화를 이루고 끊임없는 기술개발로 품질 향상을 선도한 BYC의 사사(社史)는 그래서 우리 내의산업의 산 역사나 다름없다.

    BYC는 1958년 대·중·소로만 대충 구별돼 있던 내의 사이즈를 가슴둘레에 따라 4단계(85·90·95·100㎝)로 나눠 규격화하고, 아염소산 표백기를 개발, 누런 내의를 백옥같이 흰 오늘날의 내의로 탈바꿈시켰다. 거칠고 성글어 착용감이 떨어지고 수명도 짧았던 20수(목화 1g에서 20m의 실을 뽑아낸 것) 내의가 대부분이던 시절에 국내 최초로 100수 내의를 개발하기도 했다. 지금은 120수까지 나온다.

    창업주 한영대(韓泳大·76) 회장은 20대에 이 사업에 뛰어들어 여든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품질만큼은 최고라야 한다”는 품질제일주의 경영철학으로 속옷 만들기에 한평생을 바쳐왔다. 20년 늦게 이 업계에 뛰어들어 22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50대 그룹으로 성장한 후발업체를 보면서도 그는 “이 일, 저 일 다 하면 좋은 품질의 제품을 만들지 못한다. 처음부터 큰 돈 벌려고 시작한 일도 아니고 천직으로 한번 붙든 일이니 세계에서 제일가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고 했다.



    한 우물만 파온 무차입 경영

    BYC는 재무구조가 튼튼하기로도 소문나 있다. 이 회사는 99년 매일경제신문과 대우경제연구소가 국내 상장기업 중에서 선정한 재무구조 우량기업 5위에 올랐고, 경상이익률 부문에서도 유수의 재벌그룹 계열사를 제치고 30위 안에 들었다. BYC는 현재 자본금 42억 원에 유보율 3800%, 부채율 30%로 사실상 무차입 경영을 하고 있다. 75년 기업공개 이후 줄곧 흑자경영을 해왔으며, 지난해에는 1100여 명의 직원으로 3000억 원의 매출을 올려 업계 1위를 차지했다.

    매출의 35%는 해외시장에서 수출로 벌어 들였다. 일본 미국 중동지역을 비롯한 세계 70여 개국에 자체 브랜드로 수출하고 있는데, 중동지역에선 업계 1위를 고수하면서 BYC를 모방한 유사품까지 나와 상표 지키기에 신경을 써야 할 정도다. 일본에서도 시장점유율 10위권 안에 들면서 일본 내의업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이처럼 활발한 수출이 외환위기 탈출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BYC의 경영스타일에 대해 “너무 보수적이다” “고지식하다”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비난했던 사람들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BYC에 대한 시각이 180° 바뀌었다고 한다. 모두들 부풀린 몸집을 줄이기에 뼈를 깎는 고통을 겪던 당시에도 이 회사는 그 전까지 군살 없는 내실경영을 해온데다 고금리로 불어난 은행이자 덕분에 오히려 재미가 쏠쏠했다. 게다가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겨울 내복 판매량까지 예년보다 10% 정도 늘어 큰 어려움 없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BYC가 외환위기를 이겨내고 흑자경영을 해올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보다 한 업종을 전문화한 데 있다. 50년 넘도록 내의 생산 한 길에만 매달린 결과 기술을 축적하고 품질 높은 제품을 생산해 세계적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다.

    둘째 요인은 원료에서 완제품까지 모두 자사 공장에서 가공, 생산함으로써 품질의 누수를 막고 비용을 절감한 데 있다. 또한 70년대 초부터 사업부별로 독립채산제를 시행, 철저한 책임경영을 뿌리내리게 했다. BYC는 전북 전주(섬유가공 및 제품생산 공장)와 완주(편직·방적공장과 물류센터 및 연구소), 서울 구로공단(여성 란제리 ‘아미에’ 생산공장)에 공장을 두고 있다. 중국 상하이에도 송강공장과 하양교공장을 두고 있는데, 중국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중국 내수시장과 해외로 수출한다.

    셋째 요인은 합리적인 유통과정과 확실한 판매망 구축에 있다. BYC는 87년 내의업계 최초로 전문점 정책을 실시, 전국 주요 도시 30여 곳에 직영영업소(신한마트)와 물류기지를 설치, 24시간 배달체제를 갖췄다. 이와 함께 전국 백화점과 할인매장, 혼합점 등 3000여 개 판매망을 통해 BYC 제품을 어디서나 쉽게 구입할 수 있게 했다.

    넷째 요인은 과감한 연구비 투자로 고부가가치 제품 개발을 독려한 것. 93년에 기술연구소를, 95년에 디자인연구소를 설립해 70여 명의 연구진으로 하여금 기술개발과 디자인연구에 전력하게 했다. 이들은 소비자들의 다양한 욕구와 급변하는 패션의 흐름을 발빠르게 읽어 부가가치가 높은 기능성 제품을 잇따라 개발해냈다.

    최근 이 회사가 만들어낸 기능성 속옷으로는 여름철에 땀냄새를 없애주는 ‘데오니아’, 키토산이 함유돼 피부 알레르기와 세균증식을 막고 항균·소취기능이 있는 ‘BYC 크리스탈’, 키토산의 보습효과와 알로에의 약용효과를 원단에 접목해 자외선 차단과 보습, 살균, 소염, 혈행촉진 효과를 가져오는 ‘키토산 알로에 내의’ 등이 있다.

    이 밖에 전통섬유인 모시와 순면을 특수 가공해 만든 ‘모시메리’나 원단 중간층에 따뜻한 공기를 함유할 수 있는 특수 보온사를 넣어 두 벌의 내의를 껴입은 것과 같은 보온 효과를 내게 한 ‘에어메리’ 등도 기능성을 살린 제품이다. 그저 추위를 막기 위해 입는 속옷에서 신체에 미치는 효능까지 고려한 속옷의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것. 고진석(高鎭錫·64) 사장은 “이런 면에서 내의산업은 결코 사양산업이 아니다”고 강조한다.

    BYC는 75년 상장 후 전문경영인을 영입, 소유와 경영을 분리했다. 한회장의 전문경영인 영입은 기업의 공익성을 높이고, 경영이익을 사원과 소비자에게 환원해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회사는 수출과 고도성장으로 외환·금융전문가가 필요했던 80년대엔 주로 금융전문가를 전문경영인으로 영입했다. 그러다 90년대 들어서면서 회사가 커지자 조직관리에 능한 전문경영인을 영입했다.

    스피드 경영

    현재 BYC는 전문경영인인 고진석 사장과 한회장의 차남인 한석범(韓錫範·42) 사장 2인체제가 이끌고 있다. 군 출신인 고사장은 군에서 쌓은 조직관리 능력을 활용, 회사의 조직관리와 대외업무를 맡고, 한사장은 생산과 재무관리를 맡고 있다.

    고사장은 한회장의 사돈(한회장의 3남이 고사장의 사위)으로, 60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보병 2사단장과 한미야전사 부사령관, 2군 사령부 부사령관을 거쳐 92년 소장으로 예편했다. 예편하던 해 BYC 계열사인 (주)한경섬유 대표이사로 취임, 계열사인 바이콤광고와 중앙정관을 거쳐 97년 BYC로 옮겨왔다.

    한영대 회장은 3남1녀를 두고 있는데, 장남과 3남은 BYC를 거쳐 지금은 독립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장남 남용씨(44)는 유아복 업체 (주)베비라를, 삼남 기성씨(40)는 유아용 토털매장 (주)IBC마트를 운영하고 있다.

    고진석 사장은 37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50대 중반에 전혀 새로운 조직사회, 그것도 속옷을 만드는 기업의 전문경영인으로 BYC에 발을 들였다. 그가 경영일선에 나선 지도 벌써 9년. 그 동안 회사 조직을 성공적으로 관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예편 후 기업에 들어갈 생각은 해보지 않았지만,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예편하기 10년 전부터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고 한다. 틈틈이 경영관련 서적도 보고, 대학원에 진학해 행정학 공부도 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최고경영자 과정을 밟았다. 그래도 40년 가까운 군 생활로 몸에 밴 군대식 사고방식으로 기업을 경영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마인드를 바꾸는 게 시급했어요. 군에서는 필승의 논리를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상대방은 어떻게 되든 무조건 이겨라’인데, 기업 경영에선 기업도 살리고, 소비자도 살리고 협력업체들도 살리는 윈-윈 전략을 펴야 하거든요. 더욱이 BYC는 원칙을 중시하는 정도(正道)의 기업정신을 표방하는 회사였습니다. ‘이윤은 적게 내도 정도를 걸어라’는 것이었죠. 너도 살고 나도 살며,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이런 기업문화는 내가 체험한 군문화와는 판이했어요.”

    그가 처음 경영을 맡은 한경섬유는 직접 제품을 생산하는 곳이다 보니 전문용어도 많고 기계의 종류도 다양해 그 뜻과 용도를 파악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재무제표니 대차대조표니 손익계산서 같은 기본적인 서류를 보는 것도 서툴러 조금이라도 의문 나는 게 있으면 관련부서 직원들을 쫓아다니며 하나하나 배웠다. 사장 체면 때문에 점잔을 뺄 처지가 아니었다. 오로지 배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조금씩 일이 눈에 들어왔다.

    고사장은 이른바 ‘스피드 경영’으로 BYC를 이끈다. 남들보다 먼저 개발하고, 빨리 생산하고, 자주 생산하고, 제때 생산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소비자들이 필요한 물건을 필요한 때 원하는 장소로 신속하게 공급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결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담당자에게 결재에 소요되는 시간을 일일이 기록하게 했다. 여러 부서에서 함께 다뤄야 할 일은 한자리에 모여 협의한 다음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하고 결재까지 끝내게 했다. 그는 “경영인은 다섯 방향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경영인은 망원경으로 미래를 멀리 내다볼 줄 알아야 하고, 돋보기로 지금의 위치도 볼 줄 알아야 하며, 현미경으로 구석구석 세밀히 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이드 미러로 동종 업계와 국내 경제 전반, 그리고 세계 경제의 흐름도 볼 줄 알아야 하며, 백미러로 내가 과연 제대로 가고 있는지 뒤돌아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개인이 보유한 지식을 끌어내 조직의 지식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러려면 다른 사람의 말을 그 사람의 처지가 돼서 진심으로 귀기울여 들어야 해요. 개인의 지식을 조직의 지식으로 살찌우지 못할 경우 그 개인이 회사를 떠나면 그 사람이 맡던 업무가 이내 마비되어 공백이 생겨납니다.”

    개인이 가진 지식을 조직원 모두가 공유할 수 있도록 하려면 임직원 사이에 ‘관계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고사장은 젊은 직원들의 생각을 많이 듣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사원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 의견을 이메일 등으로 개진할 수 있도록 의사소통 창구를 열어놓고 있다.

    또한 부서별로 각 부원들이 알고 있는 세부적인 업무수순과 업무수행 방법을 누구라도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자세하게 기록해 매뉴얼로 만들었다. 다른 부서로 발령받거나 새로 회사에 들어온 사원도 특별한 견습과정이나 교육 없이 이 매뉴얼만 보면 바로 업무에 적응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직무교육을 위한 제도적·시간적 낭비를 줄인 것은 물론 업무의 신속화와 고능률화로 많은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시스템을 잘 갖췄다 해도 기업을 경영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경영’이다. 그래서 고사장은 직원들을 평가할 때 ‘핸드 스킬’보다는 ‘마인드 스킬’을 주로 본다. 요즘처럼 변화가 빠른 시대에는 변화에 신속하게 적응하고 대응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갖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어도 그런 마인드를 갖추지 못하면 발전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쌍방울은 BYC와 함께 우리 내의업계의 쌍두마차였다. 하지만 98년 쌍방울이 부도를 맞으면서 BYC의 독주시대가 열렸다. 강력한 경쟁업체가 도태된 것은 여러 면에서 BYC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대개 사람들은 경쟁업체가 망하면 시장이 커져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건강한 기업들이 정당한 시장논리로 경쟁할 때 서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야 소비자도 좋고 국가적으로도 바람직한데 이게 깨지면 모두가 힘들어집니다. 쌍방울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시장질서가 깨지고 있어요. 국가 정책에 따라 중국에서 생산한 제품은 전량 수출하게 돼 있는데, 그걸 국내로 들여와 싼값에 팔고 있어요. 국내 생산 제품은 원가 때문에 이 제품들과 가격경쟁이 되질 않죠. 그러다 보니 현재 국내생산 공장들까지 타격을 받고 있어요.

    결국 부실기업은 국민이 낸 세금으로 부채탕감에 싼 이자 혜택까지 받아 이익을 보고, 정상적으로 건실한 기업을 일궈온 쪽은 오히려 피해를 보고 있어요. 건실한 기업은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밀어주고, 부실기업은 부실에 대한 책임을 과감하게 묻는 것이 국가, 국민, 기업이 모두 사는 길입니다.”

    흔히 섬유산업은 한물간 사양산업이라고 한다. BYC가 지금까지 한 우물 파기로 빛을 보긴 했지만, 앞으로도 사업의 다각화는 고려하지 않고 있을까. 고사장은 이에 대해 단호하게 소신을 밝혔다.

    “섬유산업은 사양산업은커녕 최첨단 산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속옷은 전세계인들이 입습니다. 꾸준히 기술을 개발해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제품을 만들어 내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성장할 수 있는 산업입니다. 저희는 사업의 다각화를 계획하고 있지 않습니다. 창업주의 경영목표가 오늘도 변함없이 세계 제일의 내의를 만드는 데 있듯 누가 뭐래도 이 사업에 매진할 것입니다.”

    내의산업은 첨단산업

    창업주 한영대 회장은 스물한 살 때인 1946년 백부로부터 양말공장을 인수받아 내의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전북 정읍에서 포목점과 양말공장을 운영하던 백부는 연로해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고 싶다며 조카인 한회장에게 공장을 넘겼다. 백부에겐 아들이 셋이나 있었지만 그는 “너라면 잘 할 수 있을 거다”며 조카에게 공장을 맡겼다. 한회장이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포목점 일을 도울 때부터 그의 성실성을 눈여겨본데다, 그가 어린 나이에 자전거포와 미싱가게 등에서도 장사수완을 보였기 때문이다.

    청년 한영대는 포목점 자리에 ‘한흥 메리야스’를 설립하고 수동 양말기계 4대와 횡편기 2대, 그리고 직원 5명으로 양말 만들기를 시작했다. 당시 하루에 생산한 양말은 200켤레. 양말이 귀하던 시절이라 수입은 짭짤했다. 그러나 100% 면사를 사용하다 보니 원사 수급이 어려워 양말을 많이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솜을 사다 곱게 탄 후 길쌈 경험이 있는 농가에 나눠주고 베틀용 실을 뽑게 해 이를 가져다 양말을 만들기도 했다. 또한 손으로 기계를 돌리다 보니 아무리 힘좋은 장정도 2시간 이상 돌릴 수가 없었다. 그는 또 한 번 기지를 발휘, 자전거 바퀴를 이용해 회전바퀴를 크게 만들어 인력소모를 줄였다. 그러자 생산성도 높아졌다.

    그가 내의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2년 후인 1948년. 그저 양말기계 몸통을 크게 만들어 양말을 짜듯 내의를 짜면 되려니 하고 대전의 한 양말기계 공장을 찾아가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기계공장 사장은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계를 만드느라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지만, 확신이 차 있던 한씨는 끈질기게 그를 설득해 마침내 기계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5개월 만에 만들어진 기계는 맞는 바늘이 없어 무용지물이 될 판이었다. 그러나 한회장은 양말기 바늘을 하나하나 숫돌에 갈아 기계에 맞게 끼워넣었다. 그렇게 완성된 기계는 성공적으로 내의를 만들어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내의 만들기에 뛰어든 한씨는 1950년, 회사설립 4년 만에 30명의 직원을 둔, 전북에서는 이름 있는 공장의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통에 한동안 공장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다 이듬해인 51년, 전주 교동에 땅을 사 공장을 옮겨오면서 제2의 출발을 하게 된다. 당시 부산에서 원사를 사 날르던 한회장은 죽음을 각오하고 다녔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데다 부산에서 전주로 넘어가는 하동, 구례, 남원 등지는 공비출몰지역이어서 언제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런 여건에서도 품질제일주의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아야 한다는 ‘금일완결주의’로 오직 한길로 매진했다. 그간 회사 이름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한흥메리야스’(46년)에서 ‘한흥실업주식회사’(55년)로, 다시 ‘한흥물산주식회사’(60년)와 ‘백양’(白羊·79년)으로. 그러다 96년, 국제적인 이미지를 갖는 ‘BYC(BAIK YANG Co.의 머리글자를 딴 것)’로 바꾸었다. BYC는 이미 브랜드명으로 사용하던 것을 회사명과 통합한 것. 세계인이 함께 입는다는 ‘세계인의 BYC’ 모토는 국내 소비자는 물론 세계 시장에서도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종합의류회사를 목표로

    초창기에 흰색 내의(‘백물’이라고 부른다) 5∼6가지를 만들어 냈던 BYC는 현재 내의류(80%), 준외의류(10%), 유아용(10%)을 합해 1000여 종에 달하는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내의의 발전과정을 보면 초창기부터 80년대 중반까지는 백물 내의 위주였고, 80년 초 컬러 TV가 등장하고 모든 분야에 컬러화 바람이 불면서 80년대 중반부터는 내의에도 컬러화 바람이 불었다. 컬러화는 90년대 들어 패션화 바람으로 이어졌는데, 남자들의 트렁크 팬티도 이때 나왔다. 그러다 90년대 후반부터는 고부가가치를 노린 기능성 제품들이 등장했다.

    이런 속옷 변화 바람을 선도해온 BYC는 수출에서도 앞서 나갔다. 가장 먼저 수출계약을 한 나라는 일본. 1962년, 자기들에게 수출을 하라고 찾아온 일본 바이어들에게 한회장은 “우리 물건은 아직 수출할 정도가 못 됩니다. 다음에 자신있을 때 할 테니 그때 오십시오”라면서 돌려보냈다. 일본 제품보다 품질이 낮은 제품을 수출했다가 한국산 속옷에 대해 나쁜 이미지를 갖게 할까 봐 ‘굴러들어온 호박’을 마다한 것. 그의 이런 정직성을 높이 산 일본 바이어는 그 다음해에 다시 찾아와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우리가 돕겠다”며 수출을 간청했다. 그렇게 신뢰가 쌓였기에 지금도 BYC의 수출액 중 일본 수출액 비중이 가장 높다.

    한회장은 처음부터 투명하게 사업하기 위해 물건을 사간 상인들에게 원칙대로 세금계산서를 발행하게 했다. 그러나 상인들은 대부분 이를 거부했다. 결국 그는 물건 판매 기록을 정확하게 남기기 위해 가짜 영수증을 만들어야 했다. 이 때문에 세무공무원들과 자주 부딪치고 압력도 받게 되자 그는 거래가 투명한 수출 쪽으로 눈을 돌렸다. 66년부터 76년까지 10년 동안 국내 판매는 전혀 하지 않고 수출 일변도로 나갔다.

    고진석 사장은 “BYC를 세계 제일의 종합의류 회사로 키우는 게 목표”라며 준외의류 생산이 그 목표를 향한 1차 시도라고 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주력 제품은 내의류가 될 것이라고 한다.

    고사장은 “그 동안 BYC가 속옷 한 길을 걸어왔기에 이 업계에 확고한 발판을 구축, 적어도 우리나라 남성 속옷 분야에서는 수입품이 전혀 발을 붙이지 못한다”며 “BYC는 이것만으로도 애국을 한 것”이라고 의미를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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