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호

‘박사 논문 결론은 오빠의 인간사랑’

노동학 박사된 전태일 여동생 전순옥

  • 곽대중 < 자유기고가 >

    입력2005-04-14 13: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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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흔히 ‘제2의 인생’이라는 표현을 쓴다. 무언가 특별한 계기나 사건을 통해 새로운 각오로 살아가는 모습을 ‘제2의 인생을 산다’고 한다. 인생을 살아온 연륜만큼 제2, 제3의 인생을 시작한 굵은 나이테도 늘어나겠지. 이러한 계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레 내 앞에 나타날 수도 있고, 때론 우연처럼 갑자기 인생의 가도(街道)에 튀어오를 수도 있으리라. 어떤 사람과의 만남이 그러한 계기가 될 수도 있고,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이 그 사건으로 될 수도 있다.

    이 사람 ‘전순옥(全順玉)’도 어쩌면 그런 평범한 인생의 과정을 밟아 온,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고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일지 모른다. 그냥 ‘전순옥’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누구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지 모르지만 ‘전태일(全泰壹)의 동생’이라고 하면 ‘그래?’ 하고 관심의 눈빛을 보일, 마흔일곱 살의 늦깎이 노동학 박사 전순옥 씨를 만나보았다.

    “제 인생에는 지금까지 세 번의 전환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첫 번째 전환점은 큰오빠가 죽었을 때이고, 두 번째는 무작정 영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던 지난 1989년, 그리고 영구 귀국해 돌아온 지금이 세 번째 전환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4월27일 순옥 씨는 인천공항 입국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본적인 의사소통마저 되지 않는 영어실력으로 무작정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지 벌써 11년. 그동안 그녀가 나가고 들어온 국제공항이 인천으로 옮겨갔고, 큰오빠 전태일은 정부에서 공식 인정한 ‘민주화 유공자’가 되었다. 1980년대 운동권 대학생들이 숨죽여 읽던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익명의 팸플릿은 ‘전태일 평전’이라는 버젓한 이름을 찾아 이젠 대학신입생 필독서로 팔리고, 그 글쓴이가 인권변호사 고(故) 조영래 씨라는 것이 그의 사후 밝혀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11년 만의 금의환향



    문성근, 홍경인 등이 열연한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개봉되었고, 전태일 분신 30주년을 맞아 지난해 서울 청계천에는 ‘전태일거리’도 생겨났다. 떠나갈 때 30대 중반이던 그의 나이는 불혹(不惑)을 훌쩍 넘겨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외적인 변화말고 순옥 씨 스스로 겪은 변화는 뭐가 있을까? 그 동안 전태일 가(家)의 근황에서 순옥 씨의 소식은 ‘영국에서 유학중’이라는 오래된 진행형 기사였다. 지난 99년에는 IMF 구제금융 이후 순옥 씨도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유학을 포기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귀국한 그의 여행가방 속엔 노동분야에서 세계적인 명성과 권위를 가지는 영국 워릭 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이 들어 있었다. 순옥 씨의 이 논문은 ‘학기 최우수 논문’에 선정되었고 미국, 영국, 호주 등에서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다. 영국 웨일스 소재 카디프 대학에서는 사회과학부 초빙교수의 신분을 주었다. 하지만 순옥 씨가 11년 전 홀연히 영국으로 떠난 것은 단순히 박사학위 받아 금의환향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순옥 씨의 인생에 두 번째 전환점이 된 ‘영국행 비행기’는 굴곡 많은 인생 역정에 비추어 보면 아주 단순하면서도 우연한 계기를 통해 다가왔다. 1988년에 그녀는 일본의 좌익 노동조합 중 하나인 전평노동조합의 초청으로 한 달간 일본에 머물며 그곳 노동자들에게 한국의 노동현실에 대해 증언할 기회를 가졌다. 그 이듬해에는 독일에 석 달 동안 머물며 독일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강의하고 또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일본, 독일 노동자들과의 만남은 당시 그에게 상당히 충격적인 고민을 던져주었다고 한다.

    “일본과 독일의 노동자들이 과거에 한국의 노동자들을 미워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일본과 독일 등지에 있던 다국적기업들이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을 찾아 대거 한국으로 이주했고, 이것은 그곳 노동자들에게는 실직(失職)과 인원감축으로 다가왔죠. 그래서 엉뚱하게 그들은 한국 노동자들을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일본과 독일을 방문했던 80년대 후반에는 한국이 민주화되고 노동조합의 힘이 강해지면서 60, 70년대에 한국에 들어왔던 다국적 기업과 한국기업들이 한국보다 더 싼 노동시장을 찾아 다시 떠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때 순옥 씨는 “이제 노동자들이 자기 나라의 틀 안에서만 노동운동을 하는 것은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고 한다. “자본이 더 값싼 노동력을 찾아 흘러가듯이 노동운동도 국제적인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안목을 갖고 국제적인 연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거기에 대처하고 상황에 따라 싸우는 노동운동보다는, 한 10년, 짧게는 5년이라도 세계적인 자본질서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우리도 세계 곳곳에 사람을 보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해외에 나가 공부하면서 노동운동의 국제적인 연대를 위해 뛰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아니었다.

    “내가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처음엔 그냥 ‘사람을 키워야겠다’는 정도였어요.”

    그래서 주위의 선배와 동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냉담한 비판’뿐이었다고 한다.

    “완전히 사대주의자 취급을 하더군요(웃음). 지금 온 힘을 모아 우리나라에서 싸우기에도 바쁜데 무슨 외국에까지 사람을 내보내느냐, 어떻게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할 수 있느냐 하는 식이었죠. 당시는 당장 내일이라도 혁명이 일어날 듯 들떠있던 시절이었고, 세계화니 국제화니 하는 말들도 생소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고민 끝에 내놓은 제안이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때 순옥 씨를 부추겼던 사람은 현재 민주노총 여성위원장인 정인숙 씨. 여성인권 문제와 관련해 국제회의에 참석한 경험이 많은 정씨는 순옥 씨가 제안하는 문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멀리서 찾지 말고 순옥이 네가 해라’고 하더군요. 지금은 그런 문제의식을 모두에게 이해시킬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을 찾아 보낸다고 해도 그만큼 열성을 갖고 하기 힘들 테니, 차라리 가장 절실한 의지를 갖고 있는 네가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죠.”

    하지만 당시 순옥 씨의 나이는 35세. 전혀 생소한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만한 나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니 꼭 해보겠다고 마음먹고 일단 영어 공부부터 시작했다. 영어학원에 등록해 일주일쯤 다니던 어느 날의 일화 한 토막.

    “새벽에 일어나 영어 책을 읽고 있는데 같이 살던 한 후배가 그것을 보더니 책을 빼앗아 마당에 휙 던져버리면서 무슨 쓸데없는 짓이냐, 언니는 지금 사대주의에 빠져 있다, 이럴 시간 있으면 마르크스 레닌주의 책이나 더 읽으라고 하더군요. ‘알았다’고 말하고 책을 다시 집어드는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제는 지나간 일이어서인지 순옥 씨는 즐겁게 웃었다.

    무작정 짐을 쌌다. 어느 나라를 갈 건지 고민하는 과정도 어찌 보면 단순했다. 미국은 노동운동을 공부할 만큼 의미 있는 나라가 아닐뿐더러 당시 운동권의 반미 감정상 용납되지 않아 일단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래서 영어를 사용하고 노동운동의 역사가 비교적 깊은 국가인 영국을 ‘타깃’으로 삼았던 것. 주위의 도움으로 비행기 표를 예약해놓고 짐도 간단하게 꾸렸다. 출발하는 날 아침에 아래층에 사는 장기표 씨가 찾아와 “무슨 여행가방이야?” 하고 물어 “그냥 영국에 잠깐 여행 가려구요” 하고 얼버무렸다. 어머니 이소선(李小仙) 여사도 난데없이 웬 영국이냐고 공항까지 따라와 걱정을 했다. 하지만 장애물은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89년 11월19일, 문제는 영국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되었다. 왕복이 아닌 편도(便道) 티켓만 들고 온데다 여행용 여권을 소지하고 있으니 순옥 씨는 당연히 감시의 눈초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짐을 털어놓고 들춰보는데 영어 한마디 못 하니 변변히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통역을 위해 한국 항공사 직원이 달려왔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큰 화근이 되었다.

    순옥 씨의 짐 속에 있던 사회과학 서적들을 본 항공사 직원이 ‘수상한 사람’이라고 공항 경찰에게 이야기했던 것. 국제테러리스트 명단에 있는 사진들과 대조해 보는 해프닝이 벌어졌고, 하루종일 승강이를 벌이던 순옥 씨는 영문도 모른 채 영국에서의 첫날 밤을 ‘밀입국자 보호소’에서 보내야 했다.

    “마치 난민 수용소처럼 사람들이 꽉 들어찬 곳에서 하루를 보내니 영국에 정이 뚝 떨어졌습니다. 영국도 싫고, 공부도 싫고, 이게 무슨 짓이냐 그냥 돌아가자 하는 생각에 다음날 독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몇 달 전 자신에게 노동운동의 국제연대에 대한 의지를 갖게 했던 독일 노동자들을 찾아갔다. 그런데 너무도 피곤해 잠이 든 사이 이 사람들이 대책회의를 한 모양이다. 깨어 일어나 보니 모두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공부를 시작해보라고 설득했다. 정착할 때까지 도와줄 통역자까지 붙여주었다. 결국 일주일 뒤 순옥 씨는 다시 영국 땅을 밟는다. 어느 곳의 초청을 받은 것도 아니고 아는 이도 전혀 없는 지구 서쪽 끝 영국 땅에서의 10여 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영국에서 대학을 다녀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세계적인 노동운동의 현황을 알아보고, 한국의 노동현실을 세계에 알린다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따라온 통역자와 함께 슈퍼마켓에 놓여 있는 광고지를 보고 허름한 방을 구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학연수를 시작했다.

    이 기간 중에도 순옥 씨는 한국에서 온 못말리는 말썽꾸러기였다.

    “어느 날 아일랜드에 있는 한 노동조합에서 한국의 노동현실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당시 삼성에서 아일랜드에 공장을 설립하려고 준비중이었는데, 삼성이 어떤 기업이냐 하는 것을 듣고 싶었던 거죠. 저는 그 자리에서 삼성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그리고 노동조합 결성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서도 상세히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날 신문에서 빚어 졌다. 아일랜드 타임스가 순옥 씨의 증언을 톱기사로 크게 보도했던 것. 한 지면을 거의 다 차지한 그 기사 옆에는 당시 국무총리였던 강영훈 씨의 아일랜드 방문 소식이 조그맣게 함께 실렸다. 강영훈 총리의 방문 목적은 한국과 아일랜드 간의 경제협력을 논의하는 것이었는데 순옥 씨의 증언은 국무총리의 방문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아일랜드 대사관이 발칵 뒤집혔고, 그 사건 이후 순옥 씨는 여권을 연장하는데 한동안 큰 애로를 겪어야 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대사관에서는 1년짜리 단기 여권만 발급해주었다. 괘씸죄에 단단히 걸린 것이다.

    그날 이후부터 순옥 씨가 강의를 가는 곳마다 대사관은 촉각을 곤두세웠고, 순옥 씨의 발걸음도 함께 빨라졌다. 6개월의 어학 연수를 마치고 대학 야간강좌를 들으면서 그녀는 영국, 아일랜드, 독일, 핀란드 등을 분주히 다니며 한국의 노동현실을 유럽에 알리고 국제적인 노동운동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전령사 노릇을 맡았다. 한국 기업들이 하나둘 유럽으로 진출하던 시점이었다.

    93년에 순옥 씨는 옥스퍼드대 라스킨 칼리지에 입학한다. 노동문제를 체계적으로 공부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 그곳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95년 10월에는 영국 코번트리시에 소재한 워릭 대학에서 석사과정에 들어갔다. 96년 9월 석사 학위를 취득한 그녀의 논문 제목은 ‘한국 경제 성장의 값은 누가 치렀나’. 이 논문에서 그녀는 한국의 산업화 기간중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분석하며 오늘의 경제성장이 있기까지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을 학문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석사과정을 마치고 한 학기를 쉬면서, 그녀도 잠깐 ‘흔들린’ 시기가 있었다.

    “일단 한국을 떠나온 지 너무 오래됐고, 또 박사과정은 훨씬 어렵고 오래 걸리니까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생각했죠. 그런데 지도교수님의 권유도 있었고, 그땐 한국에 있는 동료들도 일단 시작한 일이니까 끝까지 해보라고 격려해줘 다시 박사과정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단돈 50만원을 움켜쥐고 시작한 영국 생활. 초기에는 그나마 파운드화(貨)가 싸 버틸 수 있었지만, 그래도 낯선 외국 땅에서 혼자 살아가려니 생활비가 만만치 않았다. 대학에 정식 입학하기 전 그녀는 낮엔 가정집 청소 등을 하고 밤에 강의를 듣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했다.

    “한국에서도 어렵게 살아 그다지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려울 때마다 주위 분들이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라스킨 칼리지에 입학한 후로는 독일의 한 장학재단에서 나오는 장학금으로 학비를 대신했고, 국내에서도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IMF 구제금융 당시에 잠깐 어려웠을 때는 국내에서 모금운동을 해 학비를 보내준 일도 있었다. 경제사정이 어려울 때도 꾸준히 후원해준 ‘두레장학재단’에 그녀는 특별한 감사를 표한다.

    “97년 3월부터 박사과정을 마친 지난달까지 계속해서 학비를 후원해준 두레장학재단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을 거예요.”

    순옥 씨가 이번에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제목은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위한 한국여성 노동자들의 투쟁(Korean women workers and their fight for democratic trade unionism in 1970’s)’이다. 이 논문은 심사위원들로부터 “매우 유니크(독특)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사전 한 권 두께의 그의 논문엔 일반적인 논문에서 볼 수 있는 각주(脚註), 통계 등 인용부호가 전혀 없다. 오직 발로 뛰면서 채록한, 당시 노동자들과 관련 인물들의 증언만을 토대로 논문을 작성한 것.

    “공식통계라는 것은 대단히 허위적인 측면이 많잖아요. 누가 무슨 목적으로 만드느냐에 따라 대단히 달라질 수도 있구요. 예를 들어 ILO나 세계은행, 한국은행에서 보고된 자료를 보면 70년대 당시 한국 노동자들의 평균 노동시간이 주 56.4시간으로 나와 있어요. 그런데 제가 직접 면접한 노동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최소 일주일에 76시간이에요. 평균 임금도 그래요. 평균임금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요. 2000원을 받는 사람과 1만원을 받는 사람의 임금을 평균해서 평균 6000원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의미 없는 통계죠. 그래서 저는 평균이나 객관적인 통계를 전혀 쓰지 않았고 오직 인터뷰를 중심으로 70년대 한국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인간의 목소리를 담고자

    처음엔 그녀도 특정한 이론을 중심으로 도서관에서 통계자료를 뒤져가며 ‘손쉽게’ 논문을 작성하려 했다. 하지만 연구를 진행할수록 기성이론의 틀을 갖게 되면 거기에 맞춰 현실을 조작해야 하고 때론 내게 필요한 것만 골라내야 하는 것에 염증을 느꼈다고 한다. 그녀는 지도교수에게 자신의 애로를 이야기했고 결국 얼마 후 한국행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다. 한국 노동자들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오직 녹음기 하나를 손에 쥔 채 말이다.

    인터뷰는 79명을 일 대 일로 만나 이야기를 듣되, 개인적인 증언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28명을 4개 그룹으로 나누어 서로 지난날을 회고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녹음시간만 180시간, 수십 개의 테이프에 70년대에 대한 증언이 고스란히 담겼다. 당시 청계천, 동일방직, YH, 반도상사, 삼원섬유 등에서 일한 여성노동자들은 물론이고 70년대 노동운동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여러 인물들의 증언을 모두 녹음했다. 당시 근로감독관, 사용주, 노동자들을 변호했던 이돈명 변호사, 고은 시인, 최장집 교수, 김영삼 전대통령도 인터뷰했다.

    하루에 한 명 이상씩, 70년대 여성노동운동과 관련된 증언을 할 사람이 있다면 전국 어느 도시를 마다않고 뛰어가 그들의 집에서, 직장에서, 식당에서 인터뷰했다. 수십 명의 증언을 꼼꼼히 기록하고 대조, 분석한 그의 논문은 논문이라기보다는 현장주의 정신에 투철한 ‘역사서(歷史書)’에 가깝다.

    “가장 어려운 일은 이제는 나이 많은 아줌마가 되어 있을 당시 여성노동자들의 현주소를 알아내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을 알아내고, 그 사람을 통해 또 다른 사람을 아는 형태로 인맥을 통해 하나둘씩 증언자를 확보했습니다.”

    동창회 하듯이 언제 어디서 모이자고 광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땠겠는가. 그녀는 그중에서 그룹 인터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20년이 지난 일을 여러 명이 모여 앉아 서로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복원해 내는 과정은 흡사 땅 속에서 발굴한 고대 토기(土器)의 조각을 맞춰 가며 옛사람들의 슬기를 느끼는 희열과 같았으리라.

    “흔히 한국의 노동운동은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고, 노동운동의 역사도 80년대 후반부터는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그 이전에 대한 기록과 의미는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논문을 통해 저는 70년대부터 한국 노동운동은 이미 탄탄한 자기 기반을 갖고 진행되었음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1970년 청년 전태일은 평화시장 노동자들과 함께 ‘삼동회(三棟會)’를 결성한다. 삼동회의 목적은 ‘연소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고,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공동으로 생동하는 것.’ 그 첫 번째 작업으로 전태일과 동료들은 13개 문항의 설문지를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돌린다. 설문 내용은 1개월에 며칠을 쉬는지, 왜 주말마다 쉬지 못하는지, 1주일에 몇 시간을 작업하는지, 건강상태는 어떤지, 1개월 수당은 얼마나 되는지 등이었다. 당시 삼동회는 126장의 설문지를 회수해 이 결과를 진정서로 만들어 노동청장 앞으로 보낸다. 아마도 한국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추진한 최초의 실태조사였을 것이다.

    전태일이 30년 전에 꿈을 안고 발로 뛰며 시작했던 노동현장 실태조사를 30년 후에 그의 막내 동생이 현대적인 방법으로 재현했다고 하면 적당한 표현일까. 이론적인 통계수치나 공식 보고자료에 기대지 않고 ‘인간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현실을 담고 있는 순옥 씨의 논문에서는 아직도 살아 있는 오빠의 맥박을 느낄 수 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인 16세에 접한 오빠의 사망 소식은 순옥 씨에게 큰 충격이었고, 인생의 첫 번째 전환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전태일을 알게 되면서 변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그 많은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전태일이 분신을 하자 당시 정부기관이나 공장 업주들이 거액을 들고 찾아와 조용히 넘어갈 것을 회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를 한푼도 받지 않았다. 돈을 받으면 그것은 자식을 팔아먹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직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며 사는 것이 아들의 죽음의 대가를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오늘까지 ‘노동자들의 어머니 이소선’을 있게 한 힘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저희 형제들을 조용한 곳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에게 큰 돈을 준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걸 받아야 되겠니, 말아야 되겠니’ 하고 물으셨죠. 그때 저는 ‘엄마 제가 오빠 대신 일 할 테니 그 돈 받지 마세요. 우리 떳떳하게 살아요’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그 돈이면 평생을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는 액수였다. 그날 이후 다니던 학교를 그만둔 순옥 씨는 곧바로 방직공장 보조인 이른바 ‘시다’가 되었다. 10대에 이 공장 저 공장 돌아다니며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고, 해고되면 다른 공장에 다시 취업하기를 반복했다. 집에서 생활하는 큰오빠 동료들의 밥과 빨래도 순옥 씨의 몫이었다. 몇 번이나 구속된 어머니의 옥바라지도 수월한 일은 아니었다.

    여성 노동운동을 한다고 분주히 돌아다니던 80년대 중반, 순옥 씨는 10대 여성 노동자들의 충격적인 현실을 접하게 된다.

    “당시 공장에서 여공을 모집하면 광고에는 기숙사가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공장 바로 위 천장 같은 다락에서 자는 거예요. 그곳에서 성폭력이 자행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만난 19세의 한 여성노동자는 임신을 네 번 했는데 낙태를 하려고 해도 사장이나 공장장이 돈 한 푼 주지 않았답니다. 오히려 ‘임신 사실을 주위에 이야기하면 앞으로 이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하겠다’고 협박했죠. 결국 입양기관에 가서 ‘아이를 낳으면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아기를 낳는데, 그 아이들은 낳자마자 얼마 안 있어 해외입양되는 겁니다.”

    “그들은 기계가 아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순옥 씨는 우선 ‘여성노동자 보호소’를 만든다. 여성노동자들이 방 한 칸이라도 장만할 돈을 모을 때까지 함께 살면서 공장에 출퇴근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리고 미혼모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영국 유학길에 오르기 전까지 순옥 씨는 ‘사람 사는 정을 심는 모임’이라는 단체에 참여하면서 미혼모 문제해결을 위한 활동을 벌였다. 당시 영국에 가지 않았다면 순옥 씨는 지금쯤 아마도 여성노동자와 미혼모, 성폭력 문제 등과 관련한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은 세계화, 국제화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무슨 일이든 국제적인 연대와 협력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제가 지난 10여 년간 외국에서 국제적인 흐름을 익혀 노동운동의 국제연대에 힘을 보탤 만한 능력을 갖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큰오빠 전태일의 이름이 혹시 순옥 씨에게는 부담스럽거나 원망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을까.

    “오빠의 삶과 죽음을 통해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해답을 찾게 되어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부담스러운 점도 있죠. 그냥 ‘전순옥’이라는 사람이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면 사람들이 그저 그러려니 할 텐데 ‘전태일의 동생 전순옥’이라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니까 말이에요.”

    영국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동안 힘들어 포기하고픈 고비를 맞을 때마다 순옥 씨는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으며 힘을 얻었다고 한다.

    “평전을 보면 오빠는 늘 대학생 친구가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렇게 좋은 배움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헛되이 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에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오빠의 평전을 읽다 보면 ‘어쩌면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저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목이 메인다는 순옥 씨는 카디프 대학의 초빙교수 자리까지 뿌리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몇 년간 그녀가 하려는 연구 주제는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실태분석’이다.

    그녀는 지금부터가 또 다른 인생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한다.

    “지금까지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고 도움을 주셨는데, 오히려 지금부터 더 관심을 갖고 도와주셨으면 고맙겠어요. 지금까지 10년은 앞으로의 활동을 위해 준비한 기간이었으니까요.”

    마흔일곱. 그녀는 아직도 미혼이다. 최근 한 일간지에 “이젠 결혼하고 싶다”고 보도된 것에 대해 순옥 씨는 불만이 많다.

    “그 보도가 나가고 어머니께 꾸중을 들었어요. 10년 공부하고 돌아와 기껏 한다는 소리가 시집간다는 말이냐고 역정을 내셨죠.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말이에요.”

    그녀의 오빠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어머니와 식구들이 지금도 살아가는 삶처럼 그녀 역시 남은 인생의 모든 것을 노동자들의 권리와 행복을 위해 뛰어 다닐 것이다. 인터뷰하는 도중에도 그녀는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에 대답해주고, 앞으로의 계획을 함께 맞춰보느라 차분히 대화를 진행할 틈이 없었다. 유창한 영어발음만큼이나 부쩍 큰 그녀의 경험과 능력을, 앞으로 노동자들과 노동운동은 더욱 필요로 하리라.

    순옥 씨의 졸업논문 표지에는 제목 위에 이색적인 구호가 하나 적혀있다.

    “They are not machines!(그들은 기계가 아니다!)”

    30년 전 그녀의 오빠는 불길 속에서 이렇게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입 안으로 들어차는 화염 속에 비명처럼 외쳐댔던 전태일의 메아리가, 붉은 표지로 묶인 막내 동생의 논문 위에서 이제는 전세계를 향해 울려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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