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순옥 씨는 “이제 노동자들이 자기 나라의 틀 안에서만 노동운동을 하는 것은 한계가 있음”을 느꼈다고 한다. “자본이 더 값싼 노동력을 찾아 흘러가듯이 노동운동도 국제적인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안목을 갖고 국제적인 연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거기에 대처하고 상황에 따라 싸우는 노동운동보다는, 한 10년, 짧게는 5년이라도 세계적인 자본질서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우리도 세계 곳곳에 사람을 보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해외에 나가 공부하면서 노동운동의 국제적인 연대를 위해 뛰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아니었다.
“내가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처음엔 그냥 ‘사람을 키워야겠다’는 정도였어요.”
그래서 주위의 선배와 동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냉담한 비판’뿐이었다고 한다.
“완전히 사대주의자 취급을 하더군요(웃음). 지금 온 힘을 모아 우리나라에서 싸우기에도 바쁜데 무슨 외국에까지 사람을 내보내느냐, 어떻게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할 수 있느냐 하는 식이었죠. 당시는 당장 내일이라도 혁명이 일어날 듯 들떠있던 시절이었고, 세계화니 국제화니 하는 말들도 생소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고민 끝에 내놓은 제안이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때 순옥 씨를 부추겼던 사람은 현재 민주노총 여성위원장인 정인숙 씨. 여성인권 문제와 관련해 국제회의에 참석한 경험이 많은 정씨는 순옥 씨가 제안하는 문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멀리서 찾지 말고 순옥이 네가 해라’고 하더군요. 지금은 그런 문제의식을 모두에게 이해시킬 수도 없고, 다른 사람을 찾아 보낸다고 해도 그만큼 열성을 갖고 하기 힘들 테니, 차라리 가장 절실한 의지를 갖고 있는 네가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죠.”
하지만 당시 순옥 씨의 나이는 35세. 전혀 생소한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만한 나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니 꼭 해보겠다고 마음먹고 일단 영어 공부부터 시작했다. 영어학원에 등록해 일주일쯤 다니던 어느 날의 일화 한 토막.
“새벽에 일어나 영어 책을 읽고 있는데 같이 살던 한 후배가 그것을 보더니 책을 빼앗아 마당에 휙 던져버리면서 무슨 쓸데없는 짓이냐, 언니는 지금 사대주의에 빠져 있다, 이럴 시간 있으면 마르크스 레닌주의 책이나 더 읽으라고 하더군요. ‘알았다’고 말하고 책을 다시 집어드는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제는 지나간 일이어서인지 순옥 씨는 즐겁게 웃었다.
무작정 짐을 쌌다. 어느 나라를 갈 건지 고민하는 과정도 어찌 보면 단순했다. 미국은 노동운동을 공부할 만큼 의미 있는 나라가 아닐뿐더러 당시 운동권의 반미 감정상 용납되지 않아 일단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래서 영어를 사용하고 노동운동의 역사가 비교적 깊은 국가인 영국을 ‘타깃’으로 삼았던 것. 주위의 도움으로 비행기 표를 예약해놓고 짐도 간단하게 꾸렸다. 출발하는 날 아침에 아래층에 사는 장기표 씨가 찾아와 “무슨 여행가방이야?” 하고 물어 “그냥 영국에 잠깐 여행 가려구요” 하고 얼버무렸다. 어머니 이소선(李小仙) 여사도 난데없이 웬 영국이냐고 공항까지 따라와 걱정을 했다. 하지만 장애물은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89년 11월19일, 문제는 영국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되었다. 왕복이 아닌 편도(便道) 티켓만 들고 온데다 여행용 여권을 소지하고 있으니 순옥 씨는 당연히 감시의 눈초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짐을 털어놓고 들춰보는데 영어 한마디 못 하니 변변히 항의조차 하지 못했다. 통역을 위해 한국 항공사 직원이 달려왔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큰 화근이 되었다.
순옥 씨의 짐 속에 있던 사회과학 서적들을 본 항공사 직원이 ‘수상한 사람’이라고 공항 경찰에게 이야기했던 것. 국제테러리스트 명단에 있는 사진들과 대조해 보는 해프닝이 벌어졌고, 하루종일 승강이를 벌이던 순옥 씨는 영문도 모른 채 영국에서의 첫날 밤을 ‘밀입국자 보호소’에서 보내야 했다.
“마치 난민 수용소처럼 사람들이 꽉 들어찬 곳에서 하루를 보내니 영국에 정이 뚝 떨어졌습니다. 영국도 싫고, 공부도 싫고, 이게 무슨 짓이냐 그냥 돌아가자 하는 생각에 다음날 독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몇 달 전 자신에게 노동운동의 국제연대에 대한 의지를 갖게 했던 독일 노동자들을 찾아갔다. 그런데 너무도 피곤해 잠이 든 사이 이 사람들이 대책회의를 한 모양이다. 깨어 일어나 보니 모두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공부를 시작해보라고 설득했다. 정착할 때까지 도와줄 통역자까지 붙여주었다. 결국 일주일 뒤 순옥 씨는 다시 영국 땅을 밟는다. 어느 곳의 초청을 받은 것도 아니고 아는 이도 전혀 없는 지구 서쪽 끝 영국 땅에서의 10여 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부터 영국에서 대학을 다녀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세계적인 노동운동의 현황을 알아보고, 한국의 노동현실을 세계에 알린다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따라온 통역자와 함께 슈퍼마켓에 놓여 있는 광고지를 보고 허름한 방을 구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학연수를 시작했다.
이 기간 중에도 순옥 씨는 한국에서 온 못말리는 말썽꾸러기였다.
“어느 날 아일랜드에 있는 한 노동조합에서 한국의 노동현실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당시 삼성에서 아일랜드에 공장을 설립하려고 준비중이었는데, 삼성이 어떤 기업이냐 하는 것을 듣고 싶었던 거죠. 저는 그 자리에서 삼성이 노동자들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그리고 노동조합 결성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서도 상세히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날 신문에서 빚어 졌다. 아일랜드 타임스가 순옥 씨의 증언을 톱기사로 크게 보도했던 것. 한 지면을 거의 다 차지한 그 기사 옆에는 당시 국무총리였던 강영훈 씨의 아일랜드 방문 소식이 조그맣게 함께 실렸다. 강영훈 총리의 방문 목적은 한국과 아일랜드 간의 경제협력을 논의하는 것이었는데 순옥 씨의 증언은 국무총리의 방문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아일랜드 대사관이 발칵 뒤집혔고, 그 사건 이후 순옥 씨는 여권을 연장하는데 한동안 큰 애로를 겪어야 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대사관에서는 1년짜리 단기 여권만 발급해주었다. 괘씸죄에 단단히 걸린 것이다.
그날 이후부터 순옥 씨가 강의를 가는 곳마다 대사관은 촉각을 곤두세웠고, 순옥 씨의 발걸음도 함께 빨라졌다. 6개월의 어학 연수를 마치고 대학 야간강좌를 들으면서 그녀는 영국, 아일랜드, 독일, 핀란드 등을 분주히 다니며 한국의 노동현실을 유럽에 알리고 국제적인 노동운동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전령사 노릇을 맡았다. 한국 기업들이 하나둘 유럽으로 진출하던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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