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호

스톡홀름처럼 살고 로마처럼 먹고 아테네처럼 취하라

  • 권삼윤 < 문명비평가 > tumida@hanmail.net

    입력2005-04-14 13: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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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도지상주의가 빚어낸 불균형 성장이 삶의 질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개체를 중시하는 디지털 네트워킹 사회에서는 개인의 삶의 질이 국가경쟁력을 좌우한다. 마침내 ‘인간 안보’의 시대가 온 것이다.
    ‘질(質)’은 21세기를 리드하는 키워드의 하나다. 그것은 쫓기듯 허둥대며 달려온 부조화의 20세기에 대한 각성이자 삶의 충실화를 향한 욕구의 분출이기도 하다.

    ‘삶’이란 생물학적인 생명을 뜻하는 동시에 사회학적인 살림살이란 뜻도 갖고 있다. 이것은 다시 ‘사람’이라는 인간 개념을 형성한다. 사람은 문화적 가치를 생산하는 사회적 존재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삶’이란 ‘사람’의 준말이기도 하니 삶의 질 향상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다 지금은 허울이 아닌 알맹이를 추구하는 디지털 시대이고 모든 개체가 인터넷으로 서로 연결되는 네트워킹 사회다. 실질을 숭상하고 개체를 중시하는 이런 시대에 삶의 충실화를 모토로 하는 삶의 질이 화두로 떠올랐다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일하는 기계’는 이제 그만

    삶의 질은 개체의 차원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개체들의 삶의 질이 국가안보와 국가경쟁력의 중요한 요소로 등장했기 때문인데, 1995년 3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사회개발 세계정상회의에서 ‘인간 안보(Human security)’라는 새로운 개념이 채택된 것은 이를 반증하는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국가안보와 대비되는 인간안보 개념의 등장으로 사회·경제 발전의 궁극적 목표가 개인의 삶의 질 향상에 있다는 것, 또한 그것이 국가 운영의 기조가 돼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를 계기로 평화와 질서, 경제활동의 확산, 환경오염 방지, 지구온난화 억제, 질병퇴치, 군비감축과 비핵화, 생태계 보전, 부패방지 등에 대한 개인의 역할과 책임도 커졌다. NGO 활동의 비약적 발전은 이런 요구에 대한 당연한 결과다.



    개체의 중시, 경제와 문화의 결합, 성장에서 지속으로 가치가 전환됨으로써 이제 삶의 질 향상은 시대의 대세가 되고 있다. 미국 미시간대의 잉글하트는 경제적·물질적 조건보다 만족·즐거움과 같은 주관적 조건이 중시되는 이 같은 가치관의 변혁을 ‘조용한 혁명(Silent revolution)’이라 명명했다. 이에 발맞춰 기업은 고객만족을 최우선 과제로 삼게 됐으며, ‘내부 고객’인 종업원의 노동시간도 점차 줄이고 있다.

    중국의 수필가 린위탕(林語堂)은 에세이 ‘생활의 발견’에서 인간을 일러 ‘일하는 유일한 동물’이라 했는데, 인류는 삶의 질을 추구하면서 노동시간을 줄여가고 있을 뿐 아니라 일을 삶, 재미와 일치시키려 한다. 더 이상 일하는 기계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삶의 질 향상의 제일 조건은 바로 ‘일하는 기계’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질(quality)은 양(quantity)의 상대어이긴 하나 ‘삶의 양’이란 말은 없는데도 삶의 질이란 용어는 왠지 낯설지 않다. 삶의 양적인 측면도 결국은 질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인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경 인류는 이미 철기를 사용해 상당한 물질적 기반을 구축했으며, 물질적 욕망도 한껏 부풀어 있었다. 바로 그때 자비와 무욕(無慾)을 가르친 석가와 인(仁)과 예(禮)를 내세운 공자, “너 자신을 알라”고 부르짖은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들이 동·서양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나 그런 욕망을 자제할 것과 진정한 행복은 자신의 바깥이 아니라 내면에 있음을 가르쳤다.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상으로 메시지를 전하려 했지 국가나 사회, 집단을 들먹이지 않았다. 오직 개인의 삶의 충실화와 내면적 성찰만을 외쳤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개체의 중요성을 일깨운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세계 4대 성인 가운데 예수를 제외한 3대 성인이 태어나 활약한 기원전 5세기를 일러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인류의 정신적 지도자들이 출현했다고 해서 ‘인류의 추축(樞軸)시대’라 불렀다. 그는 시대가 그들을 원했기 때문에 그들이 출현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했다. 이들보다 약간 뒤늦게 나타난 예수 역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외쳤으니, 삶은 양이 아니라 내면적 가치인 질이 좌우한다는 사실을 일깨운 셈이다.

    하지만 산업화에 내몰렸던 지난 세기에 우리는 질보다 양에 매달렸다. ‘잘살아보세’ ‘하면 된다’를 외치며 성장일변도로 내달렸다. 주위를 한번 살펴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여기서 ‘앞’이란 우리보다 앞서가는 선진국을 말한다. 그들을 보고 베끼는 일에 열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자본과 기술이 미약하다는 핑계로 특정부문에 집중 투자해 효과의 극대화를 노리는 불균형 성장을 꾀하다 보니 겉으로 나타난 그럴듯한 결과와는 달리 사회적·경제적 약자의 삶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어두운 면을 드러냈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 같은 것은 헌법 조문에서만 살아 있었을 뿐이다. 현실적 여건을 개선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보다는 법조문에서 선진국 흉내를 내는 것에 만족했으니 그 결과는 빛 좋은 개살구일 수밖에 없었다.

    복지천국의 ‘좋은 여행’

    그나마 불균형 성장 정책이 가진 자에게만이라도 긍정적인 구실을 다했다면 다행이었을 텐데 사실은 그렇지도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성질이 조급한 우리였는데, 성장지상주의 경제개발 과정은 ‘빨리빨리 병’을 더 깊게 만들어 갖가지 부작용을 낳았다. 균형과 내실을 꾀할 생각은 못 하고 모양만 그럴듯하면 만사가 다 되는 상황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말이라도 앞서지 말아야 할 텐데 말은 행동과 따로 놀기 일쑤였다.

    남들이 삶의 질을 부르짖고 그걸 이루기 위해 국가와 민간, 개인이 합심해 매진하는 지금도 우리는 과거의 잘못된 자세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돈을 벌어도 왕창 벌어 남은 인생을 놀면서 즐기자는 대박의 꿈을 안고 증권회사와 경마장, 도박장과 카지노를 찾고 있다. 이들보다 더 영악한 자들은 힘깨나 쓰는 사람들에게 눈도장이라도 찍히려고 그가 나타날 행사장에 미리 가서 기다리다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연기한다. 그 대열에 정치지망생만 있다면 다행일 텐데, 명색이 진리를 탐구한다는 학자라는 사람들도 끼어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런 재주도 없는 사람은 이 나라를 떠나려 한다. 이민을 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말고는 달리 택할 만한 길이 없기 때문이다.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자는 자신의 생존을 챙기기에도 힘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처지를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대안을 찾아야 한다. 풍부한 경험과 깊은 통찰력을 가진 친절한 의사였던 알랭은 일상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행복론’이란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행복이란 무엇이냐는 식으로 정공법을 취하지 않고 행복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인지, 왜 불행하게 느끼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는 식으로 접근했는데, 삶의 질에 대해서도 이런 접근방식은 유효할 것 같다. 질은 매우 주관적인 개념인데다 비(非)가시적이므로 ‘삶의 질은 이런 것이다’거나 국민소득처럼 계량화해서 나타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개체의 시대에 있어 삶의 질은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인생관 내지 가치관 같은 주관적인 요소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인자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인권, 환경, 소득수준, 주택, 교통, 의료서비스, 민생치안, 교육의 질, 안전시설, 법질서 준수, 남녀평등, 문맹률, 문화예술의 향유 정도, 인간관계와 가족관계 등의 즐거움을 주는 요소와 복지와 관련되는 요소를 두루 포함시켜 종합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또 가능하다면 그것들을 지수화해서 국가간 비교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질에 대해 말하자면 먼저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들은 ‘크발리테트(kvalitet)’란 말을 자주 입에 올린다. 크발리테트는 그들의 말로 ‘질’이란 뜻이다. ‘삶의 질’이란 용어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그들은 또 인생을 ‘좋은 여행’이라 생각하고 인생의 안전운행, 쾌적한 여정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한 바이킹의 후예들이다. 그런 그들인지라 지금에 와선 누구나 부러워하는 ‘복지천국’을 구가하고 있다. 복지란 삶의 질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사회적 장치를 말하는데, 영어에서 복지를 뜻하는 ‘welfare’도 바이킹들이 즐겨 썼던 ‘좋은 여행’이란 뜻의 ‘velfert’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그들은 삶을 그저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인생이 좋은 여행이 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한다. 여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스칸디나비아 땅은 그리 살기 좋은 곳은 아니다. 햇볕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은 여름 한 철이 고작이고 나머지 계절은 두터운 구름 아래서 지낸다. 겨울에는 온통 밤이 계속된다. 시간을 내어 스키나 사이클 같은 운동을 억지로라도 하지 않거나 여름철에 일광욕을 게을리하면 우울증에 걸리거나 피부에 곰팡이가 슬기도 한다.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삶의 조건이 그들을 괴롭힌다. 그래서 그들은 삶을 디자인의 대상으로 여긴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디자인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항로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일까. 이곳에선 도시의 어느 지역을 다녀도 큰 소리로 떠들거나 소란을 피우는 광경을 볼 수 없다.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언행을 삼가는 그들인지라 시비를 벌이는 일도 없고, 자동차들도 웬만해선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 대신 대낮에도 헤드라이트를 켜고 다닌다. 변덕이 심한 날씨 때문에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어떤 차는 시동을 걸면 자동으로 헤드라이트가 켜지도록 해놓은 것도 있다.

    성의 상품화나 도구화에 본능적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그들은 모든 사람을 같은 인간으로 대한다.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남녀, 나이, 직위, 피부색이나 용모 같은 것보다는 인간 됨됨이를 더 중요시한다. 사회적 존재로서 개체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주는 근로시간과 근로조건은 물론, 사회보장제도의 핵심이 되는 양로보험과 실업보험, 의료보험 등 각종 보험의 수준은 문제의 당사자인 노·사·정이 한데 모여 합의를 도출해 정한다.

    이곳에선 정년퇴직을 하고 양로보험의 혜택을 받는 경우에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을 하려는 사람이 많다. 그렇게 해서 수입이 생기면 그만큼 양로수당이 줄어드는 데도 그렇다. 자신이 일해 번 돈을 자식에게 물려주기보다는 잘 간수했다 자신의 심신을 살찌울 수 있는 여행경비로 쓰기도 하며, 자식은 부모에게 짐이 되지 않고 나이 든 부모 또한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자신의 삶은 스스로 계획하고 책임지겠다는 자세를 가능한 한 견지하는 것이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이다.

    도시의 역사가 몇 백년쯤 되고 보면 어딘가엔 슬럼이 있게 마련인데 그런 곳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전화, 인터넷 설비, VCR, 자동차, 별장 등의 보유 수준은 세계 최고를 자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민소득이 세계 최고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소득수준에 비해 삶의 질이 훨씬 더 높다. 이는 그들이 질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 결과로 볼 수 있는데, 이런 태도는 물건 하나를 만들고 파는 데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 있는 유명 백화점 엔코에서는 상품의 질이 의심스러우면 아예 들여놓지 않는다고 한다. 쇼핑을 하러 온 한 젊은 친구는 “문제는 가격이 아니라 질이다. 질이 좋으면 우선 기분이 좋고 오래 쓸 수 있으므로 물자의 낭비를 줄일 수 있는데다 쇼핑시간을 절약할 수도 있어 여러 모로 좋다”고 했다. 스톡홀름의 물가는 서울보다 3배 정도 비싸다. 이는 높은 질에 대한 대가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대가이기도 하므로 소득수준을 뜻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입고 있는 셔츠를 가리키며 “산 지 8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이렇게 멀쩡하다”고 했다. 한마디로 질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는 태도였다.

    미래를 희생시킬 순 없다

    여행지를 옮겨다니면서 방을 구하거나 택시를 타거나 물건을 살 때마다 옥신각신 흥정하느라 많은 시간을 빼앗긴 경험이 있는 필자로선 “질에 문제가 있거나 바가지를 씌우는 상품은 절대 팔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렇게 서로 신뢰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살기 좋은 사회가 아닐까 싶었다.

    우리가 남을 믿지 못하기에 어쩔 수 없이 부담해야 하는 시간과 돈은 얼마이며, 신경은 또 얼마나 쓰는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그런 비용을 절감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복지사회의 기틀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질을 이루는 둘째 조건은 무엇을 하나 만들더라도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들을 만들고 소비하는 과정일진대, 거기에 정성과 최선을 다한다면 그 질이 높아지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 태도는 도시를 건설하고 가꾸는 데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스톡홀름은 흔히 ‘북유럽의 베네치아’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도시다. 호수 위에 떠 있는 작은 섬들, 이를 에워싼 푸른 숲, 중세풍의 건물과 현대식 빌딩들이 섞여 만들어내는 절묘한 조화, 그리고 이 모두를 조용히 비춰주는 푸른 물길…. 그중에서도 사각형 건물과 높다란 종탑으로 이뤄진 시청 건물은 호수 위에 우아하고 엄숙한 자태를 드리우고 있어 그 모습은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답다. 매년 12월10일이면 그해의 노벨상 수상자를 위한 파티도 그곳 대연회장에서 개최된다. 100여 년 전 건물의 설계를 맡은 라그나르 외스트베르그는 시의 상징물인 시청사를 어떻게 지을지 고민하다 중세 유럽의 중심도시였던 베네치아의 건축물에서 힌트를 얻어 외형을 구상했다. 그는 그 일을 위해 여러 차례 베네치아를 다녀오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시청 건물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사는 집에도 엄청난 정성을 쏟는다. 인테리어는 물론 외관에도 남달리 신경을 쓴다. 도시를 가득 채운 수많은 건물은 제각기 다른 색깔과 디자인을 자랑한다. 그들은 세계의 어느 민족보다 삶의 공간을 아름답게 만들고 이를 깨끗하게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그것은 삶의 질을 추구하는 그들만의 방식이 된다.

    스웨덴 북쪽의 노르웨이 사람들도 이 점에선 뒤지지 않는다. 수도 오슬로는 녹색을 마음껏 자랑하는 드넓은 수풀, 문득문득 나타났다 사라지는 진한 청색의 피오르드, 인간의 여러 가지 포즈를 묘사한 조각작품들로 가득한 프롱네르 공원, 공원을 찾은 사람들이 여유롭게 조깅과 산책, 일광욕을 즐기는 모습, 색깔과 크기와 디자인을 서로 달리하며 은은한 멋과 개성을 드러내는 건물들…. 무공해 자연과 다정다감한 인간들이 어우러져 지상 낙원 같다는 느낌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지방도시라고 해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인구 22만의 노르웨이 제2의 도시 베르겐은 유서 깊고 자연풍광이 아름다운 항구를 껴안고 있는데다, 이 도시 출신의 음악가 에드바르트 그리그가 피아노 협주곡 a단조에서 ‘잔잔하다가도 갑자기 강한 폭풍우 같으며 딱딱하다가도 또 우아해지는’ 선율로 표현한 바 있는 예사롭지 않은 피오르드를 가까이 두고 있어 찾는 사람이 많다.

    사정이 이쯤 되면 여느 도시 같으면 관광객을 한 사람이라도 더 받으려고 호텔 객실 수를 늘리고 레스토랑이나 기념품 가게를 세우고 길도 넓히고 항공기 운항 편수도 늘리겠지만, 베르겐 시민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관광객들이 뿌리는 돈에 현혹돼 자신들의 공간이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도시의 수용능력과 정화능력 범위 안에서만 관광객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관광객은 잠시 이 도시에 들를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래도록 이곳에서 살 사람들이다. 오늘 이 순간의 벌이를 위해 미래를 희생시킬 수는 없다.”

    그들은 이렇게 자기가 가진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또 그것을 지속시키는 데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하지만, 새로운 개념이라 할 인간과 자연이 숨쉬는 정원도시를 건설하는 데도 뛰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서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세운 신도시 타피올라가 그 좋은 예다. 타피올라는 정원도시로서 쾌적성, 자족성, 주도면밀한 계획성 등에서 단연 세계 신도시의 모범적 사례로 꼽힌다. 핀란드는 원래 숲과 호수의 나라이지만 타피올라는 온통 숲으로 둘러싸여 녹색의 천국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건축물은 그 사이사이의 빈터에 들어 있는 형국이다. 단지 안의 길도 폭은 넓지만 지형을 살려 오솔길처럼 구불구불하기 때문에 정감이 넘치고 오래 걸어도 지루하지 않다. 환경과 인간의 조화, 그리고 자연의 사이클에 따르려는 그들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 같아 동양의 자연친화 전통이 그곳에서 실현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스칸디나비아 제국에 속하는 또 하나의 국가 덴마크에서는 ‘휘게(Hygge)’란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기쁜 마음으로, 흐뭇하고, 쾌적하고, 친밀하고, 허물없다는 뜻이지만 자기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 말을 분석해보면 공간지향성이 강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아늑한 집과,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완전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호젓한 별장을 갖는 것을 인생의 큰 낙으로 여긴다. 삶을 충실화하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그들의 욕구가 고요함, 영혼의 쉼, 자궁 속의 아늑함 같은 것을 선호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과 정을 나누는 것까지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한번 마음을 준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다. 우정과 신용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며, 이런 자세는 일에까지 연장돼 흠 없고 질 높은 물건을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오디오 메이커 뱅 앤 올룹슨의 본사는 코펜하겐에서 비행기로 두 시간이나 걸리는 스트루엘에 있다. 이 회사는 1925년 농가를 개조해 문을 열었는데, 아름다운 경관 속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나온다고 믿기 때문인지 이 회사 사람들은 이런 곳을 차로 달리며 자연이 주는 신비를 만끽한다. 수석 디자이너 데이비드 루이스는 디자인의 방향에 대해 “우리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감각을 즐겁게 해주는 제품, 다시 말해 보고 듣고 느끼며 즐길 수 있는 제품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들려줬다.

    전원적 분위기는 개인의 삶의 질뿐만 아니라 이렇게 제품의 질 향상에도 기여한다. 인간과 환경은 결코 둘이 아닌 것이다. 성장지상주의 시대엔 이 둘을 분리했지만 지금은 하나로 본다. 리우환경회의를 계기로 각광받게 된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은 그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한국여성 행복지수 21위

    삶의 질은 거창한 담론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일어나고 또 빛을 발한다. 스톡홀름 시청을 찾던 날 마침 시의회가 열리고 있어 방청할 기회를 가졌는데, 그곳에서 다루는 문제는 거창한 주제들이 아니라 주차와 거리의 개똥 처리, 자녀교육, 마약단속과 같은 생활에 밀착된 것들이었다. 그런 문제에 있어서는 남성들보다는 일상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여성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해서인지 여성 의원이 의석의 절반 가량을 차지했다.

    여성의 공직진출 비율이 높은 것이 지방의회만이 아니었다. 국회와 내각도 비슷하다.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는 국회의원의 30%, 핀란드에선 그보다 높은 39%에 이른다는 통계가 이를 증명해준다. 1906년 세계 최초로 여성의 공직 진출이 법제화되어 여성의 정치적 위상이 그 어느 나라보다 높은 핀란드에선 ‘여성의 세기’라는 21세기가 막 시작되던 지난해에 여성 대통령을 맞는 등 여성의 정계 진출이 활발하다. 이는 일상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높다는 것과 균형된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 인간을 성별로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함께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북유럽 여성들의 행복지수는 아주 높은 편이다. 세계 70여 나라에 지부를 둔 국제아동구호단체인 ‘아이들을 구하자(Save the Children)’가 지난해 어머니 날(5월9일)을 맞아 ‘2000 세계 어머니 실태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어머니의 행복지수라는 것도 공개했는데, 노르웨이가 1위에 올랐다. 20개 선진 공업국가와 86개 개발도상국가 등 106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캐나다가 노르웨이에 이어 2위를 차지했고, 한국은 21위였다.

    이 보고서에서 말하는 행복이란 건강, 교육, 경제적 여유 등을 포함한 종합적인 복지상태로서 구체적으로는 출산에 따른 산모의 사망률, 현대적인 피임도구 사용률, 출산과정에서 전문인력 동원가능 비율, 여성의 문자해독률, 여성의 중앙정부 참여율, 1인당 GNP 등을 산출하고 이를 영아 사망률, 초등학교 진학률, 안전한 식수공급률, 5세 이하 어린이의 영양실조 비율 등 어린이 관련 4개 지수와의 상관관계를 파악해 판단한 것이었다.

    노르웨이는 출산 중 산모 사망률과 중앙정부 참여율에서 각각 최고점을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기여도가 가장 큰 것은 중앙정부 참여율이었다. 노르웨이 여성의 중앙정부 참여율은 44%로 미국의 30%, 영국의 8%를 훨씬 앞섰다. 국제기구가 여성의 정치참여를 이렇게 높이 평가한 것은 여권신장과 어린이 보호를 위해서는 여성의 국정참여가 절실하게 요구된다는 생각에서였겠지만 삶의 질이란 차원에서 보더라도 타당성을 갖는다.

    이에 비하면 우리 나라 여성의 정치참여율은 고작 2%밖에 되지 않아 그들과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는 우리의 행복지수, 나아가 삶의 질의 수준이 뒤떨어져 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질을 높이는 셋째 조건은 사소한 일상에 주의를 기울이고 거기서 즐거움을 찾아내는 것이다.

    스칸디나비아를 떠나 그 남쪽의 프랑스나 이탈리아, 그리스 등지로 내려가면 삶의 질을 추구하는 방식이 상당히 다름을 느끼게 된다. 북유럽인들이 개인적이고 공간 지향적이라면 남유럽인들은 남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또 ‘음식 지향적’이다. 특히 이탈리아 사람들은 음식에 관한 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민족이다. 먹거리를 사고, 손질하고, 요리하고 또 그걸 먹어치우는 일을 빼고 나면 그들의 삶에서 남는 것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스칸디나비아인들처럼 집을 꾸미는 것보다는 어떻게 하면 맛있는 음식을 즐겁게 먹느냐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북유럽에선 이렇다 할 특징 있는 음식이 없으나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유럽 요리문화의 종주국답게 수많은 명물 요리를 탄생시켰다.

    식사시간도 보통 2시간이 넘는다. 제법 차렸다는 저녁은 그보다 더 길다. 촛불로 밝힌 식탁 위에 먼저 ‘아페르티보’란 이름의 식전주(食前酒)가 오른다. 입맛을 돋우는 식전주를 천천히 마시면서 메뉴를 고르는 것이다. 메뉴가 결정되면 거기에 잘 어울리는 와인을 주문한다. 음식도 다양한 전채요리를 필두로 해서 우리가 일품요리로 먹는 파스타나 빵이 첫 코스 요리로 나온다. 그 다음은 채소를 곁들인 고기나 생선으로 이루어진 메인디시를 먹으며, 디저트와 커피로 식사를 마무리한다. 서둘 것도 없고 서둘지도 않는다.

    식사를 오래 하는 것은 음식의 맛을 충분히 즐기려는 목적도 있지만 그 과정에 정보도 교환하고 서로 격려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갖자는 뜻이 담겨 있다. 양 위주의 생활이 결과를 중시하는 것이라면 질 위주의 생활은 과정을 중시한다고 할 수 있는데, 느긋한 식사 태도는 그 자체가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한다.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서양의 요리종주국이라면 이에 맞서는 동양의 요리대국은 중국이다. 린위탕은 “식사를 하는 자리에 모이는 벗들은 평화로운 마음으로 만나는 것”이라며, 중국인들은 말다툼이 일어나면 식탁에서 그것을 해결할 뿐 아니라 말다툼이 일어나는 것도 식탁에서 예방한다고 설명한다. 음식은 이렇게 타인과의 공존을 지향한다. 우리의 ‘식구(食口)’라는 말과 영어로 동료란 뜻의 ‘컴패니언(companion)’이란 말이 모두 ‘같이 먹는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린위탕은 먹고 마시는 문제가 우리의 삶에 끼치는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고 말한다. 혁명, 평화, 전쟁, 애국심, 국제적 이해, 다시 말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사회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는 이해를 돕기 위해 “프랑스 혁명의 원인은 무엇이었던가, 러시아 혁명과 소비에트 제도를 실험한 원인은 무엇이었던가”고 되묻는다. 물론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먹는 것”이다. ‘위가 편안하면 세상만사가 평안하다’는 중국인다운 발상이다.

    느긋하게 먹고 마셔라

    사람의 위는 느긋한 식사를 좋아한다. 급하게 먹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래서인지 먹는 것을 좋아하는 민족은 대개 성격이 느긋한 편이다. 먹는 것에 대한 느긋한 태도는 일찍이 에게문명을 일으킨 그리스인들에게서도 자주 목격되는 바다. 종일 에게 바다를 항해하며 포도주 빛깔의 바다와 하얀 집, 이글거리는 태양, 그리고 내놓고 자랑해도 좋을 몸매를 가진 벌거숭이들을 보았던 나는 아테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고 싶어 저녁나절에 아크로폴리스 기슭 아래의 환락가 플라카 지구를 찾았다. 벌써 카페와 타베르나(그리스식 간이 음식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 타베르나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는 수불리키 한 접시와 우조 한 잔을 시켰다. 수불리키는 생선이나 육류를 잘게 잘라 쇠꼬챙이에 꿰어 숯불에 구운 것을 말하며, 우조는 포도즙을 증류시켜 만든, 소주처럼 투명한 색깔을 띤 술로서 주신(酒神) 바쿠스를 숭배한 고대 그리스인들이 와인 다음으로 즐겨 마셨던 음료다.

    밤이 무르익어 가자 그리스 특유의 현악기 부주키가 사람들의 흥을 돋우기 시작했고, 손님들은 한 손에 와인 잔을 쥐고 이야기꽃을 피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누구 한 사람 ‘왜 이 친구가 이렇게 늦지’ 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느라 옆에 있는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희생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는 것도 아니다. 술은 그저 대화를 이끄는 윤활유로 삼을 뿐이다. ‘술이 사람을 먹는’ 일이 이들에겐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하나 둘 일어서기 시작한 것은 새벽 2시가 넘어서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늦잠을 자는 것도 아니다. 아침 8시까지는 직장에 도착한다. 아침식사는 집이나 직장 근처의 타베르나에서 간단히 해결한다. 정오가 될 때까지 부지런을 떨다가 집으로 돌아가 점심을 먹고는 지난밤에 설쳤던 잠을 보충하기 위해 늘어지게 한잠 자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점심시간은 보통 3시간쯤 된다. 햇살이 얼마간 기울어지면 다시 일터로 나가 마저 일을 끝내고는 즐거운 기분으로 찾아오는 밤을 맞는다.

    그때그때 몸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그들은 약속시간 따위는 잘 지키지 않는다. 교통신호도 무시하기 일쑤다. 사람 또한 마음이 내키면 만나고, 만나다 서로 좋아지면 사랑을 나누고, 그러다가 싫어지면 헤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고정된 관념과 행동으로 자신을 속박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융통성과 자유를 무엇보다 소중히 생각하는 그들은 자신이 자신의 지배자이기를 원한다.

    그것은 헬레니즘 이래 그리스인들의 전통이기도 하다. 그들의 휴머니즘은 인간 본연의 자세를 회복하는 것이었고, 그들이 씨뿌린 ‘데모크라티아(Demokratia·민주주의)’는 시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 즉 자기 지배 정치를 실현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리스에 가서는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 해도 너무 타박해서는 안 된다.

    먹고 마시는 행위는 이렇게 삶의 실체를 이룬다. 그런데 유럽 음식문화의 토대를 마련한 이탈리아는 지금 ‘슬로푸드(Slow Food) 운동’에 열심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속도문화의 한 형태인 ‘패스트푸드(Fast food)’를 거부하며 자신들의 음식문화를 지키려는 의도가 저변에 깔려 있지만, 실제로는 생활의 속도를 좀더 느리게 하면서 음식의 맛과 향기, 다양성을 즐기자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북부 이탈리아의 브라(Bra)란 곳에 본부를 둔 슬로푸드 운동은 45개국에 400여 지부와 6만5000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는 국제적인 단체로서, 89년 11월9일 파리에서 채택한 이 단체의 선언문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는 이미 속도의 노예가 됐다. 습관을 망가뜨리고, 우리 가정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패스트푸드를 먹도록 강요하는 바쁜 생활, 즉 음흉한 바이러스가 우리 모두를 굴복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역 요리의 맛과 향을 다시 발견함과 동시에, 먹거리의 품위를 낮추는 패스트푸드를 추방해야 한다. ‘생산성 향상’의 이름으로 우리의 존재방식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환경과 경관을 위협하는 바쁜 생활태도를 몰아내야 한다. 이를 위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효과적인 방어수단이 바로 슬로푸드 운동이다.”

    이들은 우선 대량으로 생산되고 규격화, 기계화된 음식 대신 전통음식에 대한 정보를 수집, 널리 보급시키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이미 홈페이지를 개설했고 작년에는 이러한 일들을 해내는 사람들을 찾아내서 지원하기 위해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슬로푸드 시상대회’를 열기도 했다.

    슬로푸드의 물결은 이제 ‘슬로시티(Slow City) 운동’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그 진원지 또한 북부 이탈리아다. 작년 7월 그레베를 비롯한 33개 소도시가 일제히 ‘느린 도시’의 출범을 알렸던 것이다. 그들이 내건 목표는 바쁜 속도 경쟁에서 벗어나 좀더 느릿하고 조용하며 여유 있는 삶을 추구하자는 것. 그래서 달팽이를 심벌마크로 삼았다.

    자동차를 추방하는 대신 보행자 전용도로를 늘리고 자전거 이용을 권장하는 이 운동은 문명의 이기나 첨단기술을 배격하려는 데 목적을 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이 사는 도시를 편안하고 삶의 기쁨을 누리는 곳으로 만들자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유전자 변형 식품의 유통 판매도 금지할 만큼 생명에 대한 관심이 투철하다.

    이와 같은 우보(牛步) 도시 운동이 유럽의 전유물은 아니다. 맥도널드의 본고장인 미국의 일부 도시에서도 ‘저성장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는 고속성장이 교통난과 주택난, 범죄와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고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저성장 운동가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오리건주의 벤드(Bend)시 의회는 지난해 12월, 14년간 이 도시의 고속성장을 주도해온 시정담당관을 해고하고 보행자와 자전거 이용자들에게 편리한 도시로 만들어가겠다고 약속했다.

    느림의 미학

    초(超)스피드 시대의 패러독스를 지적한 책 ‘빨리빨리’의 저자 제임스 글릭은 현대인의 모습을 A타입의 인간으로 유형화하면서 엘리베이터 문이 저절로 닫히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닫힘 버튼을 누르고 마는 것이 A타입의 전형적인 행동이라고 했다.

    시간의 틀을 통해 현대문명을 관찰하면서 문명의 이기들의 가속화가 어떻게 시대적 변천을 겪는지를 살펴본 글릭은 인류는 점점 빠른 속도를 추구하다가 결국은, 생산성이 저하되는 함정에 빠지게 됐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인간의 조급증이 문명을 오히려 잘못 이끌고 있다고 지적했다. 글릭의 이런 주장은 ‘속도가 가치를 창조한다’는 빌 게이츠의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21세기 디지털시대에 느림의 미학이 각광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상소는 최근 저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서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그는 느리게 사는 지혜를 이렇게 제시했다.

    ‘나만의 시간을 갖고 발길 닿는 대로, 풍경이 부르는 대로 한가로이 거닐어 볼 것, 신뢰하는 주변 사람의 말에 완전히 집중할 것, 사소한 것들에 소중한 가치를 부여하고 애정을 가질 것,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예민한 의식, 다시 말해 꿈을 일깨울 것,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기다릴 것, 지나간 낡은 시간, 추억의 한 부분을 다시 떠올릴 것, 내면에서 조금씩 진실이 자라날 수 있도록 글쓰기를 할 것, 와인의 세계에 빠져볼 것, 절제보다는 절도를 실천할 것….

    상소가 개인적 자유를 일컫는 가치라면서 느림의 의미를 강조했다고 해서 속도가 추방되어야 할 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서 즐거움을 앗아간 것은 속도가 아니라 속도를 빙자한 우리의 조급함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진정한 속도는 그 안에 느림의 즐거움을 담아낼 수 있는 빔(虛)을 잉태하고 있음을 잊지 말라. 우리가 속도를 내는 이유는 느림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소설 ‘느림’에서 “속도는 기술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라고 한 작가 밀란 쿤델라는 “느림이란 감속의 기법을 다룰 줄 아는 지혜”라고 지적했으니 문제는 속도다, 느림이다 하는 그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무제이온(박물관 겸 도서관)의 뜰에 반드시 산책길을 만들었다. 걷는 것이 사고에 좋다는 것을 안 그들은 조용히 뜰을 거닐며 사색에 잠겼다. 그들의 위대한 발견은 산책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런 전통에 따라 서양의 도시에는 대개 ‘프로미나드(promenade)’라 부르는 산책길을 두고 있다. 이런 도시에선 아직도 느린 전차가 다닌다. 따라서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넷째 조건은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는 것이다. 느림은 우리의 체질이 되다시피 한 조급증과 안전불감증을 치유하는 데도 효과가 있을 테니 결코 미룰 일이 아니다.

    이제는 균형발전의 시대다. 그러므로 균형감각이 아주 중요하다. 일과 삶 사이의 균형, 질과 양의 적절한 조화, 타인에 대한 배려, 자연과 인간의 공존 같은 것 말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분에 넘치지 않는 것이다. 삶의 질 분야에서 선구자의 길을 걷고 있는 북유럽인들도 ‘로곤(logon)’, 즉 적도(適度)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동양의 전통적 가치인 중용(中庸)이 여전히 우리의 삶에 등불 노릇을 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지 크게 돈이 드는 일도 아니다. 삶의 질이란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해낼 수 있는 작은 일들을 꾸준히, 정성스레 해내는 가운데 축적되는 그런 것이다. 마치 우리의 덕(德)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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