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호

10대에게 인권과 행복추구권을

<청소년문제>

  • 전효관 (서울시 하자센터 부소장)

    입력2005-04-14 1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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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문화평론가는 청소년 정책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는 선택에 직면해 있다고 통렬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10대의 자유권과 인권을 보장하려는 의지 없이 기득권을 가진 어른의 시각에서 진행되는 제반 정책과 단절하지 않고서는 청소년 정책이 청소년들에게 ‘왕따’당하는 사태에 직면하리라는 경고 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회의 10대들은 통제와 관리라는 차원에서 행해지는 ‘보호’ 정책, 그리고 시혜적인 가부장의 관점에서 행해지는 ‘육성’ 정책에 아무 관심도 없다. 명령과 금지, 도덕적 설교, 벌과 보상이라는 방식으로 행해지는 실천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다. 특히 청소년 ‘문제’를 계속 재생산함으로써 자신의 활동을 정당화하는 청소년 단체를 외면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현실은 청소년 정책의 원리와 철학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요구한다. 정말 필요한 것은 10대를 대상으로 한 정책보다는 기존 세대가 자신들의 소외를 인정하고 그것을 치유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국사회에서 청소년 정책이 실질적으로 시도된 것은 1980년대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도 청소년 비행과 범죄 예방 혹은 아동보호와 복지 등과 관련한 청소년 정책이 있기는 했지만 실제적으로 독자적인 정책 부서와 근거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형식적인 정책이었다. 이런 상황에 변화가 온 것은 1980년대 후반이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 청소년육성법, 청소년헌장 등이 제정되고 1990년대 초반 종합계획과 청소년 부서가 제도화된다.

    국가가 시도한 이 청소년 정책의 목표는 ‘선량한’, 즉 정치적으로 순응하는 국민을 만든다는 전략과 관련 있다. 사회적 측면에서 1980년대 중반의 3저호황 이후 ‘소비폭발’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 전통적인 의미의 ‘학생’과 다른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학생’이라는 신분이 특권을 의미하는 시대가 지나고 ‘여가’나 ‘놀이’에 대한 관심이 형성되면서 학교 밖의 활동을 관리할 필요성이 자연스럽게 대두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청소년 정책이 ‘수련활동’으로 영역화되고 체육부의 활동과 관련되어 정의되었던 점은 특기할 만하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국가는 1980년대 활발한 청년운동, 학생운동에 직면하면서 대학생과 고등학생의 ‘불온한’ 연결을 단절하고 청소년 단체를 국가주의적 목표에 동원할 수 있는 ‘관변단체화’하는 방식을 통해 청소년 정책을 수행했다. 이 시기 청소년 정책의 목적은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건전한’ 청소년을 ‘건전 육성’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당시 청소년 정책은 순응적인 ‘청소년 단체에 대한 지원’, ‘수련시설 확충’, ‘수련거리 보급’ 등으로 압축된다.

    지금도 청소년 정책은 가부장적 온정주의와 국가주의의 틀에 구속되어 있다. 청소년기를 ‘혼란기’로 정의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심기 위한 ‘보호’ 활동과 ‘육성’ 활동은 정책의 축을 이룬다. 특히 이러한 청소년 정책은 오늘날까지 별다른 변화 없이 낡은 언어를 통해 청소년 활동을 규정하고 있다. 여전히 청소년 공간의 이름은 ‘수련’관이며, 청소년을 만나는 사람은 청소년 ‘지도’사라는 자격증을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온정주의의 언어인 ‘보호’, ‘계도’ 등은 청소년 정책을 구성하는 핵심 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변화를 위한 시도, 여전한 한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책 변화의 징후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청소년의 정서, 욕망, 육체에 대한 관리, 통제를 위주로 하던 보호정책에서 청소년이 가지는 욕구와 가능성을 현실화하려는 새로운 방향 정립이 시도되었다. 청소년 헌장도 청소년을 권리의 주체, 삶의 주체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전향적으로 개정된 바 있다.

    하지만 헌장은 상징적으로만 존재한다. 여전히 청소년은 ‘문제’로 규정되고 ‘보호’를 통해서만 온전한 주체가 될 수 있는 미성숙한 존재로 담론화된다. 청소년은 학교 폭력과 범죄, 원조교제, 가출, 약물 중독 등의 병리적 현상과 관련해서 주로 다루어진다.

    또한 청소년 정책의 일원화와 관련하여 청소년보호위원회와 문화관광부가 대립하는 난맥상도 보이고 있다. 이런 권력 게임 과정에 청소년 정책의 핵심 문제로 부상한 것이 ‘보호정책인가 육성정책인가’라는 논쟁 구도다.

    보호정책과 육성정책의 대립은 청소년 정책의 한계를 드러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청소년 보호와 육성은 나름의 정당성을 갖는다.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인권의 기본 전제이고, 청소년의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지원 시스템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청소년 정책에서 말하는 보호와 육성이라는 단어는 너무 한정된 용례를 갖는 오염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보호론’과 ‘육성론’ 공히 보호와 육성의 주체를 청소년 외부에서 찾고 청소년을 정책 대상으로 간주하는 단체를 통해 정책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청소년 정책의 이념과 실천 주체의 설정은 이미 한계가 명백하다. 청소년 정책은 10대의 자치활동과 인권에 대한 개념화의 기반 없이 기존의 틀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 청소년에 대한 인식 자체가 사회적 변화와 조건과 분리된 채 허구적인 해결책을 찾고 있는 것이다.

    청소년 정책의 비전과 정책이 근본적으로는 식민지 시대, 가깝게는 군사정권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 10대의 가능성을 현실화할 사회적 인프라의 문제는 한때의 혼란을 치유하거나 건전하게 놀 공간을 마련하는 문제로 축소되어 논의되는 것이다.

    10대의 자유권과 인권을 인정하고, 사회적 구조와 10대가 관계 맺는 다양한 방식을 인정하는 문제는 여전히 외면되고 있다. 개인성과 사회성이 관련을 맺고 있으며 10대의 문제가 어느 한 축에서 자립적으로 다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10대가 탈맥락화된 채 거친 단일 범주로 묶여질 때 다양한 사회적 대안의 문제는 미온적으로 다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로운 정책은 시대적 전환기에 살아가는 10대의 존재형태를 검토함으로써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 이미 10대는 국가간 경계를 넘어 살아가고 있으며 획일주의에 동화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개인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조건의 변화는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동일한 경험 세계를 붕괴시키는 조건들과 그 격차로 생산되는 불평등, 발달단계를 뛰어넘는 체험의 조건들과 그 영향, 온라인 네트워크 생성과 자치적 경험 등이 그 사례일 것이다. 이때 사회는 10대와의 관계 재정립에 자원을 투입하면서 10대에게 기획력을 환원하는 과정을 숙고해야 한다.

    그 전제는 10대의 자치활동을 재개념화하는 것이다. 10대 자치활동의 재개념화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주체인 10대의 지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보호’개념으로는 10대의 자율적 성찰 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 스스로 문제를 보고 해결해 나갈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10대의 문제해결능력은 계속 유보되고 지연될 수밖에 없다. 10대를 보호 대상으로 묶어두는 한 10대의 자치 능력 향상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한 사회에서 10대의 사회적 역량은 역사적 과정과 사회문화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고유성을 갖고 있다. 10대가 주체가 될 수 있는 지점을 판단하고 사회적 노력을 기울여 갈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10대의 사회권을 인정하고 그들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담론화하려는 노력을 사회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대면하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우선적으로 펼쳐져야 그들의 생활 공간을 스스로 기획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10대를 보호한다는 사회 논리, 10대를 통제하려는 각종 정책의 허구성을 간파하는 10대가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다. 10대에게 청소년 정책이나 청소년 단체에 대해 평가하고 자신의 공간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 시스템이 필요하다. 10대가 자신이 활동할 공간과 환경을 보면서 일과 놀이를 연결시키고 자기관리를 통해 자신을 기획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획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정책의 핵심으로서의 ‘행복추구권’

    새로운 정책의 철학은 10대의 행복추구권이라는 테마가 아닐까 싶다. 10대의 감수성을 해방하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동질적인 단일 주체를 만들어 온 사회 시스템, 그리고 개인을 망각하게 하는 교육제도의 문제는 개인의 행복을 유보하게 했다. 최근 교육현장의 문제가 지적되고 교육제도의 개혁 필요성이 공론화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일부에서 우려하듯 이런 문제가 선정적인 이슈에 집중되어 있고 공교육의 문제틀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는 있다. 하지만 청소년 문제를 다루면서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교육 현장의 문제를 우회할 수는 없다. 대다수 10대에게 학교 현장은 일상을 지배하는 중요한 축이다. 따라서 교육 현장에 대한 개혁과 맞물리지 않는 청소년 정책은 한계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비단 학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10대를 둘러싼 가족, 학교, 시장은 10대를 다양하게, 혹은 분열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10대를 구성하고 분열시키는 힘은 세대간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고 10대 내부의 차이를 증폭시킨다. 이때 어느 한편의 가치를 추상적인 수준에서 인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개인 대 집단, 개인성 대 공공성의 문제를 추상적으로 분리시킨 채 어떤 위계를 설정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일례로 개인성을 우선시하는 태도는 기존 질서에 대한 안티 테제일 수는 있지만 소통의 문제를 개인의 수준으로 환원하는 문제를 가질 수 있다.

    문제는 10대의 감수성을 해방하면서 ‘공공성’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이때 공공성은 10대의 쾌락과 욕망을 거세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개인성과 공공성이라는 기존의 이분법을 뛰어넘는 제3의 실천이 시도되어야 한다.

    개인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차이의 정치학을 해석할 줄 아는 것,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소통과 네트워크의 능력을 제고하는 것, 바로 이것이 새로운 공공성의 핵심이다.

    서로 다른 너와 내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는 것, 너와 나의 꿈을 나누고 서로 만나서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하는 것, 바로 이것이 새로운 시민성이며 새로운 시민이 만드는 질서일 것이다.

    10대의 인권과 행복추구권을 바탕으로 만드는 새로운 정책 방향만이 청소년을 사회 자원화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새로운 정책 방향의 설정만이 세대간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10대를 살려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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