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호

기록문화 세워야 지식경쟁력 생긴다

<기록문화>

  • 안병우 (한신대 교수·교육대학원장·국사학)

    입력2005-04-14 15: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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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록문화가 확립된 나라에서는 비리나 불법, 밀실정치가 둥지를 틀 수 없다. 정부에서부터 기업이나 개인에 이르기까지 기록문화를 일상화하는 것이 민주국가를 세우는 지름길이다.
    기록이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기록하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귀찮은 일인가? 여러 사람이 음식점이나 찻집에 가서 각기 다른 종류의 음식이나 차를 주문하더라도 대부분의 종업원은 기록하지 않는다. 귀찮은 것이다. 기록하지 않는 습관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기업이나 정부 모두에 만연해 있다. 중요한 인물이 일기를 남기는 일은 아주 드물며, 웬만한 회의나 간담회에서는 기록을 남기지 않고, 남긴다 해도 대부분 결론만 기록할 뿐 과정은 기록하지 않는다.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은 우리의 오랜 습관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사실 자랑스러운 기록문화 전통을 가지고 있다. 개인 일기와 가정의 경제상태를 기록한 추수기(秋收記) 등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고, 국가 차원에서는 사관을 두어 늘상 왕의 언행을 기록했다. 승정원 같은 기관에서는 매일 업무를 일기로 남겼으며, 고려시대부터는 실록을 편찬하여 기록을 보존했다.

    기록하지 않으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기록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부족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정당하지 못한 행위를 숨기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목적에서다. 비리와 불법, 밀실정치를 일삼은 독재 정부나 정경 유착과 탈세를 일삼은 기업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피치 못해 작성한 기록은 비밀로 분류하여 열람을 한정하거나 임의로 파기 또는 반출해버렸다.

    기록은 민주사회 건설의 기초가 된다. 기록은 투명행정, 책임행정, 민주행정의 기본 요건이다. 외환위기 초래의 책임을 놓고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결정한 시점과 대통령의 재가 여부, 신·구임 경제부총리 임창렬(林昌烈)씨와 강경식(姜慶植)씨 및 경제수석비서관 김인호(金仁浩)씨 사이에 구제금융 신청 문제의 인수인계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엇갈리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결국 진상 규명은 기록이 아니라 관련자의 증언에 의존했다. 엄청난 환란을 겪고서도 우리는 내일을 위한 자료를 축적하지 못했다.

    둘째로 기록은 다가오는 지식기반사회에서 중요한 자원이다. 지식기반사회에서는 지식의 창조와 보급 능력이 국가나 기업의 생존과 발전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므로 기존 정보를 활용하고 재구성함과 동시에 인간의 주관적인 가치 판단과 창조적 고뇌가 내재되어 있는 역동적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지식은 기록으로 표현되어야 비로소 공유하고 활용할 수 있으므로 기록은 지식기반사회의 핵심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로 기록은 기업의 부가가치 창출에도 큰 도움이 된다. 서구의 선진기업들은 지속적으로 수집하고 관리해온 기록을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기록에는 각종 주변 지식과 경험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조직의 진단과 개혁, 제품 생산과 판매, 교육프로그램 개발의 기초자료가 되며,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이미지 개발과 문화가치 창출에 도움을 줄 것이다.

    넷째로 모든 기록은 궁극적으로 역사 연구 자료가 된다. 역사 연구는 자료 없이는 할 수 없으며, 자료가 없으면 역사도 없다. 그리고 편찬된 자료보다는 원자료가 더 강력한 증거능력을 갖는다. 역사 연구는 연구에 그치지 않는다. 노근리 사건에서 보듯이 미국의 언론은 미군의 양민학살을 주장하고 미국 정부는 반론을 폈지만, 거기에 동원된 자료는 모두 미국의 것이다. 우리 땅에서 우리 양민이 희생된 사건이지만, 피해자나 유족의 진술이 있을 뿐 우리에게는 기록이 없다. 기록이 없으면 주장의 신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기록은 개인사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조상이 남긴 기록은 친족의 일체감을 조성하는 통합 기능을 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귀중한 역사 연구 자료가 되기도 한다.

    기록과 관리 현황

    기록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그것은 활용되어야 가치를 갖는다. 기록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여기에서 기록관리의 문제가 대두된다. 기록관리란 기록의 생산에서부터 활용, 정리, 분류, 평가선별, 최종적인 보존 활용 여부에 이르기까지 여러 활동을 체계화하여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것을 이른다.

    우리는 기록을 잘 하지도 않았지만 관리하지도 않았다. 각급 기관에서는 책임이 따르는 문서일수록 보존연한을 짧게 해서 폐기하고, 등록과 이관을 회피하며 문서창고에 방치하거나 심지어 개인이 사사로이 가져가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난 2,3년 사이에 기록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체계적으로 기록을 관리하려는 노력이 시작된 것은 다행이다. 특히 일련의 기초적인 법률 제정은 기록에 관한 인식의 전환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99년에 ‘정보화촉진기본법’과 ‘公共機關의 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데 이어 2000년에 ‘지식정보자원관리법’이 공포되었으며, 올해 2월에 ‘전자정부 구현을 위한 행정업무 등의 전자화 촉진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들 법령의 제정으로 기록과 기록관리, 정보화에 관한 근거가 확보되었다.

    법령의 제정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실천되지는 않고 있다. 법에서 규정한 각종 기록관리 기관은 설치되지 않고 있으며, 전문 인력과 예산도 부족하다. 1996년 기준으로 정부 각급 기관이 생산한 기록은 연간 약 767만 권(1권은 A4 200매 기준)이며, 그 가운데 약 18만 권(2%)이 영구보존문서였다. 그러나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되는 문서는 연간 1∼2만 권에 불과했다. 나머지 문서들은 대부분 파기되거나 생산처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정보화사회에 부응하는 기록물 관리체계가 아직 확립되지 못해 기록보존 업무의 자동화, 신속한 검색, 온라인 공개는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국가기관은 나은 편이다. 공공기관, 예를 들면 대학이나 병원, 교회, 각종 단체, 특히 정당 같은 곳은 기록 관리의 불모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학적부 이외의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고, 정당은 최고 결정기구의 회의록조차 제대로 남기지 않는다. 그러한 정당 문화가 우리 정치의 후진성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억지일까?

    자본주의의 기반인 기업의 기록 실태는 더욱 열악하다. 많은 기업이 자체적으로 문서관리규정을 마련하여 문서를 분류하고 보존하기는 하지만, 체계적이지도 과학적이지도 못하다. 단기적인 이윤 추구에 매몰되어 중장기적인 이윤 추구와 기록관리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기업도 자신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기록유산을 통해 기업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할 때가 되었다.

    기록 남기기와 활용

    이제는 기록하는 습관, 기록하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기록 문화의 정착 없이 사회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가장 중요한 기록물 생산처인 정부 기관이 먼저 기록을 제대로 작성해야 한다. 기록물관리법 제11조에는 ‘공공기관의 長은 역사자료의 보존과 책임 있는 업무 수행을 위하여 업무의 입안단계부터 종결단계까지 그 과정 및 결과가 모두 기록물로 남을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여야 한다’고 기록물 생산을 의무화했다. 또한 시행령에서는 반드시 회의록을 작성해야 하는 회의의 종류와 영상기록물을 남겨야 하는 경우까지 세세하게 규정했다. 그러므로 이 법령만 준수한다면 정부 기관의 기록물 생산은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나 기록을 남기지 않으려는 경향은 지금도 여전하다. 특히 권력기관에서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 중요한 사안은 공식 회의가 아니라 사전에 은밀한 조정 과정을 거쳐 결정되는 경우가 많으며, 그 과정은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

    기록은 보존과 활용을 전제로 생산되어야 한다. 보존과 활용에 용이하도록 생산될 때부터 전자화, 표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자정부를 지향하는 현 정부는 전자형태로 기록물을 생산하도록 한다. 그러나 전자정부의 실현에 필수적인 기록물의 등록과 분류, 편철 기준은 2004년에야 작성 시행될 예정이다. 등록과 분류 같은 작업은 기록관리의 기본적인 영역이므로, 학적(學的)인 검토가 충분히 된 후에 결정돼야 한다.

    둘째로 지식정보 관리 차원에서 국가가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기록을 관리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기록을 가지고 있어도 필요한 때 필요한 사람이 쉽게 이용할 수 없다면 자원이 될 수 없으므로 각종 기록을 손쉽게 획득하여 활용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국가기록물은 지식관리시스템(KMS)에 따라 업무수행과 동시에 기록으로 보존되도록 해야 한다. 기록의 표준화와 디지털화는 필수이며, 기록을 관리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물적·인적 지원체계와 각종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기록 관리체계의 구축은 국가가 담당해야 할 과제다.

    셋째, 전문 인력을 배치해야 한다. 과학적인 기록관리는 전자문서시스템과 같은 첨단 기술의 도입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기록관리에서는 정보기술을 이용하여 기록을 수합하고 정리해내는 지적인 작업이 핵심이므로, 이러한 작업을 감당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각급 기록관리시설에 배치해야 한다. 그러나 기록관리 전문인력인 아키비스트에 대한 인식은 아주 낮고, 그 때문에 전문 인력 배치에 대하여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이다. 아키비스트를 채용한 기록물 관리기관은 정부기록보존소를 제외하면 국회 자료실과 대학 몇 군데 정도다. 그것도 임시직으로. 전문 인력의 양성과 배치 없이 지식정보자원의 효율적 관리와 활용은 불가능하다.

    넷째, 기록관리기구를 설치해야 한다. 정부기록보존소가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영구보존 기록을 관장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 법률에도 지방자치단체를 비롯한 공공 기관에는 자료관이나 전문관리기관을 두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제대로 설치하고 전문 인력을 배치한 곳은 아직 없다. 몇몇 대학과 기관이 자료관을 설치한 정도이며, 기업 가운데도 홍보를 위한 기념관이나 박물관은 건립하면서도 영구보존 기록을 모아서 관리하는 기록관을 둔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자료관을 규모가 작은 군 단위까지 모두 설치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며, 자료관은 자료보관장소로 그쳐서는 곤란하고 지역의 문화중심, 지식정보 교류의 중심 역할을 해야 한다.

    다섯째,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식을 확산시켜야 한다. 기록은 민주화를 진전시키고 경쟁력을 향상시켜 지식기반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는 자원이 되므로 무엇보다 과거의 기록을 살아 있는 지식으로 전환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과학적인 시스템의 구축에 앞서 기록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여 자산으로 활용하려는 의지, 기록을 공유하여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려는 문화가 먼저 정립되어야 한다. 기록은 지식과 정보의 원천이며, 기록을 가진 자가 결국 세계를 지배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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