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호

신노동 패러다임, 규제에서 협력으로

<노동문제>

  • 이광택 (국민대 교수·노동법·산업사회연구소장)

    입력2005-04-14 1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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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장경제체제 내에서 노동법과 기업경영은 상호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기술적·경제적 발전은 지속되어야 하며 이와 동시에 집단적 보호법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기업의 유연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근로자의 개별적 요구를 고려해야 한다.
    세계는 1980년대 이래 대두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 흐름에 의하여 커다란 사회적 변동을 겪고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1980년대 말 이래로 진행된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으로 더욱 힘을 얻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대량실업사태의 해결을 위해서는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인식으로부터 더욱 가속화되었다. 사용자의 부담은 계속적으로 늘어나는 반면 정부의 지출은 한계를 노출함에 따라 기존의 사회보장형 제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비판은 국민경제의 불안정성 증대, 고용사정의 악화, 높은 실업률의 지속 등을 이유로 하여 ‘탈규제’라는 개념하에 이른바 고용에 장애가 되는 복지국가형 법규를 허물자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경향은 경제의 세계화 또는 지구화와 함께 더욱 강화되고 있다. 세계화과정은 1980년대에 GNP 성장에 비해 국제교역의 증가가 2배에 달한 것과 교역증가에 비해 해외직접투자의 증가가 2배에 달한 사실로부터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더우기 세계화과정은 국제경제활동에서 다국적 기업이라는 새로운 주역을 등장시켰다. 이들의 활동은 국가경제의 활동에 비해 그 규모가 훨씬 큰 경우가 많다. 1000개의 세계적 회사의 시장가치가 미국경제규모의 2배에 달한다는 추산이 있다.

    또한 몇 개의 다국적기업 자산은 그 규모가 국제노동기구(ILO) 가맹국의 국민생산보다도 크다. 이와 함께 생산이 국제적으로 조직되는 결과 국제무역의 40% 가량이 기업내부에서 교환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국제경쟁력과 기술혁신이 세계각국의 시장과 조직을 급격하게 변화시키고 있다. 시장의 세계화와 분절(segmentation)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신기술은 개별기업 뿐만 아니라 전산업에 대하여 기업전략과 조직구조의 변경을 요구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기술이전이 날로 용이해지고 노동비용에서 비교우위를 가진 신흥산업국가(NICS)에서 노동자와 관리자의 능력이 향상됨으로써 선진국의 기업과 근로자에 대해 엄청난 비용압박이 가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고용조정이 이루어져 많은 직종이 사라지는가 하면 새로운 직종이 등장하여 노동시장에서는 혼란이 조성되고 근로자들에게는 불안이 조성되고 있다. 성장영역으로 신속히 이동한 근로자들은 곧 이득을 얻을 수 있지만 그밖의 상당수 근로자들은 임금하락, 비정형 저임금 직종으로의 이동, 실업 등으로 손실을 보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 지역협력체제의 구축에서 볼 수 있는 무역장벽 축소노력은 국가적 제도로서의 노사관계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노동법에 대하여 요구되고 있는 ‘탈규제’ 논의는 “노동법적 구속이 기업으로 하여금 시장의 요구에 유연성을 가지고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을 저해한다”는 공통적인 기본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기업 내지 기업인에게 노동법은 곧 ‘시장경제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신노동사회의 패러다임

    21세기에는 노동력에 대한 수요의 감소와 동시에 구직활동의 증가가 예측되고 있다. 20세기에 한때 경험했던 완전고용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종래의 노동사회는 질서 있고, 분화되고, 규율화된 사회였고 그 패러다임은 규제였다. 즉 종속 경제활동이 인간답게 기능하기 위해서는 질서와 규율이라는 보호막이 필요했던 것이다. 임금노동 형태의 종속 경제활동이 장래에도 지배적인 사회화의 모형으로 남을 것인가 의문이 제기된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사회의 종말 또는 노동으로부터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노동사회’에서는 사회적 노동의 조직에 기초가 되는 공간 및 시간의 모델이 변화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신노동사회의 패러다임에서는 협력과 자생조직이 이를 지탱하는 형성원리가 된다.

    생존공간을 개인적 영역과 사회적 영역으로,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으로 엄격히 구별하는 것은 점차 그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사적 영역과 시장 사이에 회색지대의 노동형태가 나타난다. 특히 전통적인 불법취업 또는 실업자의 비정형노동이 그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디지털화로 말미암아 경제활동을 공장과 사무실 밖에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경영상의 필요성과 개인의 희망이 보다 잘 맞아 떨어진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인적 노무급부’(즉 경제활동으로서의 탁아 및 간호),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수행할 수 있는 디지털화된 ‘생산·관리적 노무급부’(즉 제조업 또는 은행, 보험업에서의 고객관리), 임금형 경제활동이라는 종속구조로부터 벗어나려 하거나 아웃소싱에 의해 그러한 구조에서 벗어나는 1인 마이크로 기업, 장소의 구애 없이 수행할 수 있는 컨설팅활동의 증가 등이 그것이다.

    세계화 시대에서는 지역까지도 그 공고한 장벽을 잃게 된다. 지금까지는 노동이 공간에 기속됐고, 따라서 문화에도 강하게 기속됐던 것이 사실이다. 정보 전달기술의 발달로 거리의 개념이 용해되고 있다. 이로써 사회적 노동의 문화기속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동일한 생산라인내에서 상이한 문화 사이의 협력도 가능해진다.

    시간활용의 형태도 다양화되고 있다. 생활에서 부족한 자원은 바로 ‘노동’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사회학적으로는 새로운 개인화 경향이라 말할 수 있다.

    생애에서 경제활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줄어들기 때문에 종전의 가치규칙과 시간규칙이 그 기속성을 상실한다. 서로 다른 시간의 편린, 즉 경제활동시간, 교육시간, 가족시간, 시민시간, 혼자만의 시간 등은 유동성을 갖는다. 남성과 여성은 가정에 대하여 평등하게 또는 공동으로 시간을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시민으로서의 시간은 앞으로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경제활동의 중심적 역할이 약화됨에 따라 경제활동영역에서의 종속구조와 계층구조가 점차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참여적 시민이 되어 자원노동에서 구조변화를 기대하며 경제활동과 참여라는 두가지 활동의 조화를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노동사회는 시민적 노동사회라고 할 수 있다.

    노동의 사회적 조직의 고대적 모델과 봉건적 모델의 기반구조가 근본적으로 달랐으나, 이 두 시대의 사회적 노동은 모두 강제적 관계에 있었다. 시민사회에 이르러 비로소 협동적 관계에 기반을 두었다.

    그러나 사회적 협동관계로서의 노동은 인간이 완전히 자유롭고, ‘시간주권’을 행사하며, 구조적 조건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근로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사회적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경제사회가 관철됨으로써 사회적 강제가 없지는 않지만 오히려 인간이 자유의사에 의해 사용자에게 종속됨으로써 나타나는 종속모델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노동하는 인간이 자신의 활동영역의 구체적 형성을 타인에게 맡긴다는 것은 결코 당연시할 수 없는 일이다.

    질서와 규율의 틀이 무너지고 사회적 노동의 조직형태가 달라진다면 일차적으로 여기에서 종속적 임금노동이 지배함으로써 뒤켠으로 밀려났던 전통적인 경제활동영역, 즉 자영노동이 관철의 기회를 갖게 된다. 속인적인 노무급부와 관리에 가까운 노무급부는 자본집약적 산업 생산부문에 비해 자영업의 창업이 용이하다. 극소형기업은 종업원을 가진 통상의 자영활동과 통상의 종속활동 사이의 회색지대에 존재하기 때문에 질서와 규제의 확립이 어렵다.

    또 하나의 초점은 그 자체는 종속노동이 아니지만 바로 종속노동을 서로 다른 형태로 참여시키는 노동의 협동형태에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조직형태가 새로운 강제에 귀착되고, 종속노동이 아니라 해서 자유의 나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능성과 강제 사이의 이와 같은 변증법은 사회적 노동의 새로운 조직시스템을 일관되게 지향한다.

    스스로의 노동세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경제활동자라 하더라도 자신이 갖고 있는 사회적 자격 때문에 자동적으로 이것을 실현할 능력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와 같은 사회적 자격은 사회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것이며, 이때 개인적 실패를 완충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이 필요하다.

    다국적기업의 도전에 ILO의 만족할 만한 대응이 기대된다. 이는 이러한 기업들이 ILO의 원칙과 기준의 적용으로 부터 면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요하다면 다국적기업의 행태 또는 그중 어떠한 측면을 규제하는 정보청구 및 협의절차 그리고 투자정책과 같은 새로운 기준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정한 블록내에서 경제활동에 대한 국가적 경계가 없어지므로서 노동법적·사회보장법적 보호가 가장 취약한 지역으로 노동력의 이동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사회적 덤핑’(social dumping)에 대한 대처방법은 노동·사회보장법과 그 관행이 상향조정되는 통합과정을 마련하는 것이다.

    왹슬러(Oechsler)는 ‘노동법의 위기’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안정된 산업사회에서 등장한 노동법체계는 신축적인 정보사회로의 구조조정에 체계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경영·조직학 및 인사관리학 분야에서의 새로운 발전에도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 오늘날의 새로운 노동세계에 걸맞는 새로운 노동법체계를 위한 개념이 전체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왹슬러가 역설하는 새로운 노동법은 “결과를 중시하는 것이 아닌 과정을 중시하며 결정의 재량을 넓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노동법에서의 분권화와 규제완화를 하되 이는 근로자 개인의 능력발휘와 협력구조를 가능하도록 함은 물론 필요한 집단적 보호가 보장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조직론이 장래의 근로자를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있는 전문가’로 보고 또한 이와 동시에 구조적으로 노동법상 불리한 지위에 처해있음을 인정한다면 여기에 적절한 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해진다. 근로자에게도 공정한 참여의 기회가 주어지는 진지한 의미에서의 유연화는 오래전부터 ‘시간주권’의 이름하에 논의되고 있다.

    시장경제체제 내에서 노동법과 기업경영은 상호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기술적·경제적 발전은 지속되어야 하며 이와 동시에 집단적 보호법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기업의 유연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근로자의 개별적 요구를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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