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호

기업 대변신의 철학은 ‘인간 경영’

<기업경영>

  • 강수돌 (고려대 교수·경영학)

    입력2005-04-14 1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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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영자의 올바른 기업관과 인간관에 기초한 ‘철학 있는 경영’,
    • 그리고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풀뿌리들의 깨어 있는 의식과 단결된 힘, 이것이야말로 21세기 한국 기업 대변신의 토대다.
    21세기 한국 기업의 새로운 변신, 과연 어떤 방향성과 내용을 가져야 할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른 해법을 내놓을 수 있다. 어떤 이는 실추된 경쟁력을 복원하고 새로운 경쟁력을 만들기 위해 기술 투자나 신상품 개발, 인력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할 것이다.

    또 어떤 이는 한국 기업의 불투명성과 족벌 체제 따위를 혁파해야 한다고 지적하거나 아니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불균등 발전을 타파하자고 할 수도 있다. 나아가 기업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에 노사간에 협력적인 분위기와 신뢰를 재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제안들이 일정 부분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본질적 관점에서는 이 제안들도 한국 기업이 변신하는 데 별 도움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 본다. 왜냐하면 위기에 처한 한국 기업의 문제는 비단 기업의 문제만이 아니고, 또한 한국 기업만의 문제가 아닌 범지구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위에 제시된 아이디어들은 임기응변적 대응을 하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지붕이나 기둥을 바꾸기 전에 기초 다지기와 주춧돌 놓는 일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본다.

    이렇게 접근하는 원리가 기업을 넘어 온 사회로, 그리고 한국 사회를 넘어 온 지구로 번져나가야 올바른 변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이런 식의 근본적 재접근이 하나씩 실천되다 보면 다른 나라, 다른 기업의 비슷한 물결들과 자연스럽게 만날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변화의 물결이 훨씬 더 힘차게 전개되어 마침내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여기에서 한국 기업이 기초 다지기와 주춧돌을 다시 놓는 데 있어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무엇일까에 관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경영이론에서 기업을 바라보는 기본적 관점으로 크게 소유설과 협동설이 있다. 소유설에 따르면 기업은 소유자 개인의 재산으로, 민법상 사적 소유권 보호의 원칙에 따라 기업주가 자신의 기업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본다. 반면에 협동설에 따르면 기업은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이 협력함으로써 운영, 유지, 발전된다고 보며, 따라서 기업과 내·외적으로 관련되는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가능한 한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전자는 정태적·결과적인 관점인 반면, 후자는 동태적·과정적인 관점에서 본 것이다. 전자는 개인 소유주나 주주들의 이익만을 위해 기업이 존재한다고 보는 반면, 후자는 소유주나 주주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골고루 대변하기 위해 기업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가? 우리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기업주들이 기업을 사적인 재산이라 생각하고 당대에는 본인이 마음껏 이윤을 추구하다가 2세가 장성하면 이를 물려주는 사유물로 간주되어 왔다. 중소, 영세 기업들은 두말할 나위 없고 대기업들, 심지어 30위 규모 안에 드는 재벌 기업들도 거의 예외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경영학에서는 기업은 더 이상 사적 소유물(private property)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제도(social institution)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 기업들은 주주(shareholders)만이 아니라 이해관계자들(stakeholders)의 이익을 골고루 고려하는 공기(public institution)가 돼야 한다고 본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1979년에 독일의 헌법재판소가 내린, 매우 중요한 판결 하나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이 판결의 배경은 이렇다. 그 3년 전인 1976년에 발효된 신공동결정법이 상시 고용 2000명 이상의 민간 대기업에서 최고 의결기구인 감사회에 노사 양측을 동수로 참여시키도록 강제하자, 독일 사용자들이 이를 사적 소유권 침해라며 위헌 심사를 청구한 것이다. 그 판결은 이렇다.

    “비록 기업의 소유권은 주주에게 있지만 기업의 생산은 사회적인 것이며, 또한 기업에 소속된 노동자의 자유롭고 인간적인 노동이 보장되어야 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정당하다.”

    인간관의 재정립

    “존엄성과 자유권을 가진 인간을 그저 노동이라는 하나의 생산요소로 보아서는 안 된다. … 불신과 지시, 그리고 세부적인 규제가 아니라, 신뢰와 자율과 창의성이 미래를 여는 성공의 열쇠다. 노동자를 기업의 자산과 이윤에 자신의 몫을 가지는 공동경영자로 간주한다.”

    이 인용문은 1997년 1월에 독일의 가톨릭기업인협회 회장인 베르너 텐이 독일의 대중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과 가진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지금까지 경제(학) 또는 경영(학)에서 원료나 기계 등과 더불어 하나의 생산요소로 보아왔던 인간(노동력)을 더 이상 단순한 생산요소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을 인건비 요인으로 환원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 따라서 나름의 의견과 주장, 나름의 감정과 태도를 가지고 의식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존재로 재규정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베르너 텐 회장은 노동자를 “기업의 자산과 이윤에 자신의 몫을 가지는 공동경영자로 간주한다”고 했다. 물론 노동자를 공동경영자(co-manager)로 간주한다는 사실이 현실 속에서는 역설적이게도 노사 양측으로부터 회의적인 태도를 유발할 수 있을 것이다. 사용자측에서는 노동자의 능력에 대한 불신과 경영권 침해에 대한 우려가, 노동자측으로부터는 노동자의 자율성 침해와 자본의 포섭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베르너 텐 회장의 이 발언은 노동자의 인격을 존중하고 노동자를 경영의 동반자(partner)로 인정하려는 전향적 자세를 담고 있으며, 그러한 인식의 바탕 위에 “불신과 지시, 세부적 규제가 아니라, 신뢰와 자율과 창의성이 미래를 여는 성공의 열쇠”라는 바람직한 경영자의 리더십까지 도출하고 있다.

    우리는 1960년대 이후의 압축적 경제성장 과정이나 1997년 말 이후의 경제 위기상황에서나, 또 지금도 항상 노동자들이 한편으로는 동원의 대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정리의 대상으로 ‘객체화’당해왔음을 기억한다. ‘싸우면서 건설하는’ 1970년대의 ‘산업전사(industrial soldier)’들은 형식적으로만 경제 발전의 주체였지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목소리와 행위 양식을 표출하지 못한 채 오로지 ‘말 잘 듣고 일 잘 하는’, 게다가 ‘값까지 싼’ 양질의 생산요소에 불과했다.

    1997년의 위기는 어떤 면에서 바로 이러한 ‘물화된’ 인간관, ‘도구적’ 인간관에 의해 우리의 창조적 삶의 에너지가 체계적으로 고갈되고 소진된 결과로 생긴 것이 아닐까? 따라서 수천, 수만 명에 대한 정리해고 중심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보듯이 예전의 편협한 도구적 인간관을 더욱 강력하게 밀고 나감으로써 위기를 극복하려는 전략적 방향성은 내가 볼 때, 불행히도 실패의 싹이 내장되어 있었다.

    미국의 ‘밴 앤드 제리’라는 아이스크림 회사는 개업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는데 그 비결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제조과정에 원료를 재활용하지 않는 하청회사와는 단호히 거래를 끊는 방식으로 ‘환경 경영’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수익금의 일정 비율을 지역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소비자와 지역사회에서 신뢰를 얻은 것은 물론이요, 이를 바탕으로 짧은 기간에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또 의류 회사인 레비 스트로스나 에스프리 등도 ‘가치 경영’이라는 구호 아래 직원들에게 좋은 근로조건과 높은 임금을 보장했고 공익 사업에도 적극 참여함으로써 모범 경영을 실천했다.

    반면 우리 나라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10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금융권에서 불법으로 대출받았고 25조원을 해외에서 비밀 관리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IMF 관리 체제하에 진행된 재벌 기업의 투명성 제고라는 개혁 구호가 공허한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다. 10여 년 전인 1989년에 그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에서 “젊은 세대들은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번 사건으로 그의 달콤한 ‘공동체의식’은 진흙탕 속에 내팽개쳐졌다.

    물론 이러한 비교는 지극히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다. 모든 외국 기업이 일관성 있게 사회적 책임을 실천한다고 보기도 어렵거니와 또 대우그룹 등 한국의 재벌이라고 사회적 책임을 전혀 실천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없다. 나아가 대우만 잘못을 저지른 기업이라 하기도 어렵다. 한국 기업의 일반적 현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조그만 사례 속에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동일한 자본주의 기업이라 할지라도 기업의 경영 철학이 어떠한가에 따라 경영의 결과도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철학 있는 경영’은 어떻게 가능할까? 첫째는 아무래도 최고경영자나 이사진의 윤리의식이나 경영 이념이 중요하다.

    경영인의 진정한 윤리는 올바른 사회인식과 역사인식에서 나온다. 오늘날 세계의 기업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과 더불어 너나 할 것 없이 대량 실업, 노동 소외, 생태계 파괴의 주범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20 대 80 사회’라는 빈부 격차 확대, 노동권 억압, 민주주의 파괴, 삶의 질 저하 등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현시대 경영인의 올바른 윤리의식은 이런 현실에 대한 책임감과 그 개선의 절박함을 느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둘째는 그 기업의 모든 직원들, 또 노조나 다른 사회 단체들이 힘을 모아 기업들이 ‘철학 있는 경영’을 하게 밀어붙이는 방법이다. 현실적으로 치열한 세계 경쟁의 물결에서 각 기업들은 생존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노동권 억압과 근로조건 저하, 고용 불안, 생태계 훼손을 자행한다. 또 ‘철학 있는 경영’을 하게 된다면 그만큼 경쟁력이 떨어져 생존이 어려워진다고 그럴 듯한 변명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멈추어 보자. 우리가 날마다 밤늦게까지 땀 흘리며 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답게 잘 살아보자고 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경쟁력과 생산성이라는 절대명령 앞에 사로잡혀 노동의 비인간화, 삶의 피폐화를 평생 참고만 지낼 것인가? 일하면서도 우리 모두는 속으로 ‘이게 아닌데…’ 하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러한 느낌을 더 이상 감추어서는 안 된다. 동료와 더불어 그러한 느낌을 공유하고 힘차게 뭉쳐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경영,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경영, 자연 앞에 겸손해지는 경영을 사회적으로 함께 만들어야 한다. 요컨대 경영자의 올바른 기업관과 인간관에 기초한 ‘철학 있는 경영’, 그리고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풀뿌리들의 깨어 있는 의식과 단결된 힘, 이것이야말로 21세기 한국 기업 대변신의 토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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