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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의 인간탐구

권위주의자 박홍 원칙주의자 김홍신

  • 정혜신 < 정신과 클리닉 ‘마음과 마음’ 원장 > okopenmind@netsgo.com

권위주의자 박홍 원칙주의자 김홍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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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개인적으로 박홍이란 인물을 1991년 5월8일 ‘이전의 박홍’과 ‘이후의 박홍’으로 나누어서 인식하고 있다. 단순무지한 이분법이긴 하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난 박홍의 개인적 성향을 살펴보는 데는 요긴한 잣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1991년 5월8일은 어떤 날인가. 명지대 강경대씨 치사사건 뒤 이른바 ‘분신정국’이 이어지던 이 날 오전 8시7분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김기설 전민련 사회국 부장이 분신자살을 했다. 불과 네 시간여 후인 12시30분 박홍은 기자회견을 통해 “죽음의 블랙리스트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이 존재한다”는 충격적 내용을 발표했다.

망자의 양복 저고리에서 꺼낸 유서를 침통한 목소리로 읽은 뒤 성경에 손을 얹고 “진리와 정의에 목말라 하며 죽음 앞에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든 세력들의 정체를 깨닫도록 ‘식별의 지혜’를 베푸소서”라며 3분 동안 침묵기도를 하는 박홍의 모습은 많은 국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날 오후 검찰은 곧바로 죽음을 선동하는 배후세력 및 자살방조 여부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공안당국은 강기훈씨를 유서를 대신 써준 인물로 단정하고 죄목도 생소한 ‘자살방조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강씨를 “목적을 위해서 동료의 생명까지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는 좌경혁명 분자로서 비인간적, 반인륜적 성향을 여지없이 드러낸 천인공노할 범죄자”로 몰아세웠다. 결국 강기훈씨는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대부분의 언론기관과 그 언론을 통해서 상황을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일반 국민들은 박홍에게 심정적인 동조를 보냈다. 당시 한 일간지 논설위원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가 시정의 장삼이사(張三李四)도 아닌 대학총장의 신분이고 시종 성경에 손을 얹고 침통한 목소리로 말한 폼으로 보아 근거도 없는 허튼소리를 지껄였다고는 보기 어렵다. 물론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물증은 아직 없다. 그러나 그 개연성만은 부정할 수 없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말을 증명할 물증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당시 ‘사제총장’이라는 믿음직스러운 권위는 박홍의 말에 엄청난 힘을 실어 주었다. ‘사회평론 길’의 김진아 기자는 박홍의 권위가 가지고 있었던 부작용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박홍 총장의 증언은 오로지 신부로서의 권위나 민주적 이미지에만 기대고 있을 뿐, 사실관계 확인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굳이 되짚어 증명할 필요도 없다는 편리함 때문인지 그의 말은 필요에 의해 수시로 바뀌었다.”

어쨌거나 이 사건을 계기로 박홍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있고, 가장 저명한 ‘사상적 대부’로 자리잡았다. 그 후 박홍은 마치 뉴스메이커가 되기로 작심한 사람처럼 언론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행동을 쉼 없이 벌였다.

운동권 학생의 홀어머니와 함께 교도소를 방문하여 구속 중인 학생에게 폭력시위에 대한 반성문을 쓰도록 설득하고, 수배 중인 운동권 학생의 아버지와 함께 시위 도중 화염병과 쇠파이프에 맞아 치료를 받고 있는 전경들을 방문한다. 또 시위진압 도중 숨진 경찰의 영결식에 참석하여 “1000여 명이 넘는 조문객에서 대학생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서글픈 현실을 어디에 호소해야 할지 안타깝기만 하다”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한다.

그뿐 아니다. 그는 북측대표단이 참석한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 만찬 장소에선 가수들의 공연이 끝날 즈음 갑자기 무대로 올라가 ‘한반도 통일을 위해 수고하시는 두 총리께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한다’며 ‘사랑해 당신’을 불러 청중들의 열띤 박수를 받았단다.

그의 행동이 모두 옳지 않다거나 이벤트성 행동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큰 평수의 아파트를 장만한 뒤 그 집에 어울리는 새 가구를 마련하는 것처럼 박홍의 그런 행동들이 ‘사상적 대부’의 권위에 걸맞은 적절한 소재로 기능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이런 권위에 기대어 박홍은 특유의 거침없는 말투로 사회 각 분야를 향해 소위 ‘레드 바이러스’와 관련된 경고 메시지를 끊임없이 날렸다.

“요즘 대학생들은 표피적 지식만을 습득해 편견과 고집만 강할 뿐 사물의 전체를 이해할 능력이 없는 고등 놈팽이”라고 질타하기도 하고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말처럼 좌익적인 학생운동은 사회적 불신에서 나온 ‘사상적 서방질’이므로 정치인들은 이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는 희한한 충고를 하기도 한다. 본격적인 사상논쟁의 회오리를 예고하는 복선같은 메시지였다.

학생들과 어울린 ‘막걸리 총장’

그러나 ‘이전의 박홍’은 권위를 앞세워 마구잡이식으로 사상적 투망질을 하는 이상한 사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박홍이 사제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가톨릭대학 철학과에 다니다 군에 입대하여 DMZ에서 근무하던 중 동료병사들이 간첩을 사살하고 축하회식을 여는 것을 보고난 후라고 한다. 가톨릭대를 졸업하고 다시 대건신학대를 졸업, 사제서품을 받은 박홍은 1970년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로 교육자의 길에 들어선 후, 전태일 추모미사를 집전했다가 공안당국에 끌려가기도 하고, 크리스천사회행동협의체를 만들어 모든 종교인의 이름으로 ‘정의 구현사회의 위상’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조사를 받기도 한다.

이후 미국을 거쳐 교황청 그레고리안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9년 만인 1980년 서강대 교수로 복직한 박홍은 다시 시국사건에 연루된다. 교수들의 민주화 성명 발표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2주간 조사를 받으면서 닷새 동안 단식을 했는데, 석방 후에는 홧병으로 눈의 모세혈관이 터지는 급성중심성 망막염에 걸리기도 했다고 한다. 암흑의 시기에 한줄기 등불이었던 ‘정의구현사제단’의 일원으로 활동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정의구현사제단을 ‘자칭’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박홍의 선의까지 매도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1989년 박홍 루까 신부는 대학 최초의 직선제 총장으로 서강대 7대 총장에 취임했는데, 그의 총장 취임 일성은 “대학생들의 사회참여는 당연하고 오히려 권장되어야 한다”였다. 그는 총장이 되고 나서도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취임 첫해에는 등록금을 둘러싼 갈등과 마찰이 일자 학사행정에 학생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해 학교와 학생의 원만한 타협으로 해결했다. 총학생회가 출범할 때는 관례를 깨고 그 자리에 참석해 축사를 한 후 총학생회장과 함께 어깨동무를 한 채 ‘아침이슬’을 부르고 학생들과 술잔을 나누어 ‘막걸리 총장’이란 애칭이 붙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반정부 활동으로 제적된 학생들의 복교를 허용하는 대통령령이 발표되자 그 영을 무시하고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제적생 11명의 재입학을 허용했고, 학생회비를 등록금 고지서에서 분리해 학생회 예산을 근원적으로 줄이려 하던 문교부 지침도 거부했다. 학생들은 박홍을 진보적인 운동권 총장, 대화가 통하는 민주적인 신부로 불렀다.

그러나 1991년 5월8일 분신 배후설을 제기하고 언론의 중심인물이 된 후 박홍이 보인 행태는 ‘권위주의’ 그 자체였다. 그런 권위주의적 경향은 1992년 총장에 재선되고 나서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최초의 직선총장 출신답지 않게 총장 선출과정이 밀실에서 이뤄지면서 여러 가지 구설수를 낳았고, 그에 따라 학사 행정의 보수화도 뚜렷해졌다는 게 당시 학생회의 평가다. 박홍은 학내신문인 ‘서강학보’를 학생기자들을 배제한 채 국내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교수와 직원 두명만으로 제작하게 했는데, 그 이유는 학생들이 지나치게 운동권 논리에 편중된 신문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또 원래 직선제였던 단대 학장과 보직 교수 선출을 간선제로 바꿔 총장의 권력을 강화했다. 모든 권위주의 체제는 그 성립의 시기가 곧 붕괴의 시작이라는 말을 박홍은 알고 있었을까.

이같은 권위적 행태와 함께 그의 ‘레드 바이러스’ 발언이 계속되자 재야 운동권에서는 박홍을 ‘돈키호테같은 극우신부’로 불렀다. 하지만 박홍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공산주의에 대한 자신의 전문적 식견과 운명적 사명감을 이렇게 강조했다.

“바티칸에서 5년간 공부하면서 기독교 신앙과 공산주의의 공존에 관한 연구를 했다. 나같은 사제들은 무신론적인 속성을 갖고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워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

쉼없이 사상적 ‘입질’을 계속하던 박홍은 결국 ‘대박’을 터뜨린다. 1994년 7월19일 청와대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과 전국 14개 대학 총장들과의 오찬 자리에서였다. 박홍은 그 자리에서 “학생 운동권 배후에 사노맹(사회주의노동자동맹)과 사노총(사회주의노동자청년동맹) 김정일이 있다. 그들은 북한 로동신문이나 팩시밀리를 통해 지령을 받는다”고 말했다.

박홍의 말에 제대로 귀기울이지 않으면 금방 북한에 의해 공산화가 될 것처럼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발언장소도 절묘했지만 박홍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의 신뢰도 그 발언의 파장을 증폭시키는 데 단단히 한몫 했을 것이다.

박홍의 말에 따르면 분신 배후설을 ‘눈치보지 않고’ 당당하게 제기한 다음해인 문민정부 초기, 김영삼 대통령이 교육부 장관 자리를 맡으라고 세 시간이나 설득했지만 자신은 교육자로서 본분을 지키기 위해 그 제의를 거절했단다. 그런 사이였으니 김대통령 입장에서는 박홍의 발언 하나 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박홍의 발언이 언론을 통해 경천동지할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건 그의 독특한 위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언론보도의 문제점을 일차적으로 거론해야 마땅하나 박홍의 권위주의적 성향을 알아보기 위한 글이므로 아쉽지만 잠시 시야의 폭을 좁혀 보자. 경북대학교 신방과 백선기 교수는 당시 박홍의 ‘주사파 발언’을 보도한 8일간의 신문보도를 기호학적으로 분석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대통령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여러 대학 총장들의 발언이 오갔고 그 내용도 박홍 총장의 발언과 비슷했다. 그러나 언론들은 그중 유독 박홍 총장의 발언만 부각시켰다. 그만이 지닌 성격 및 경력의 독특성이 이러한 부각을 부추긴 것으로 생각된다. 천주교 사제이며, 교수이며, 나아가 대학총장이고, 사회 운동가인 다소 복잡하지만 매력적인 요소들이 그의 발언에 높은 신빙성을 주게 되고 따라서 신문들은 그의 발언에 주목하게 된 것 같다. 즉 그의 종교인이라는 신분과 대학총장이라는 직분은 다른 사람들이 지닐 만한 사심, 이른바 명예욕과 출세욕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그의 발언이 높은 신뢰감으로 독자들에게 인식될 수 있으리라는 점이 참작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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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 < 정신과 클리닉 ‘마음과 마음’ 원장 > okopenmind@netsg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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