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상황 변화에 따라 적과 동지, 승자와 패자가 한순간에 바뀔 수도 있는 정치의 동태성을 비유한 것인데 최근 복잡했던 여권의 사정을 보면 실감이 난다.
민주당이 10·25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한 뒤 그 책임소재를 놓고 동교동 구파와 당내 쇄신파들이 엎치락뒤치락 다투는 양상을 보이다가 마침내 김대중 대통령이 당총재직을 사퇴하는 양상으로까지 발전했다. 이 와중에서 민주당 최고위원들은 전원 사퇴했는데 유독 ‘튀는 듯한’ 행보를 한 사람이 있다.
이인제(李仁濟) 민주당 상임고문. 그는 대통령이 사퇴한 최고위원들을 청와대에 초청하자 “사퇴한 이상 하늘이 두쪽 나도 가지 않겠다”며 반발했고 청와대는 할 수 없이 명칭을 최고위원간담회에서 중진모임으로 바꾸는 소동을 벌였다. 민주당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굴러온 돌’에 불과한 이고문이 ‘국민적 지지’에 힘입어 청와대와 민주당을 쩔쩔 매게 하며 “내년 지방선거는 새 후보의 깃발아래 치러야 한다”는 ‘역린(逆鱗)성 발언’까지 서슴지 않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동안 ‘이인제 대세론’에 만족하며 당 쇄신과 개혁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던 이고문의 정치적 입지에 어떤 변화가 온 것일까. 김영삼 전대통령처럼 이인제 고문도 대권 후보를 ‘쟁취’할 비장의 계획을 마련한 것일까.
11월13일 서울 여의도 정우빌딩 5층에서 이인제 민주당 상임고문을 만나보았다. 이곳은 이고문 진영의 본부인 셈인데 벌써부터 대권을 향한 ‘전투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100평에 달하는 사무실이 좁을 정도로 사람들이 들락거렸다. 이고문은 인터뷰 약속 시간보다 30분 늦게 사무실에 들어섰다. 도착하자마자 ‘1분간의 화장’을 한 뒤 자리에 앉았다. 최근 일련의 사태에 고심을 많이 했는지, 새벽부터 빡빡한 일정에 시달렸는지 약간 마른 얼굴이 피곤해보였다. 그러나 막상 인터뷰에 들어가자 이 고문은 자세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은 채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차분하게, 때로는 순발력 있는 유머로 2시간 동안 설명해 나갔다.
당초 예상과는 달리 이고문은 김대중 대통령과의 차별성보다는 ‘창조적 계승론’을 강조했다. 최근 며칠동안 청와대가 이고문에게 어떤 공을 들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고문은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시종 신중한 발언을 했다. 그러나 교육, 안보, 인사, 의료, 검찰중립 등 현정권이 실패한 것으로 지적되는 부문의 정책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차별성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총재직 사퇴는 새 질서 위한 것
―김대중 대통령이 왜 총재직을 내놓았다고 생각합니까?
“대통령 발표문에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민생, 경제, 남북문제 등 국정 현안에만 전념하고 당의 경영에 관해서는 손을 떼겠다, 당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 질서를 만들어라 이런 뜻이 담겨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민주당 스스로 자생력을 가지라는 뜻에서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말씀이죠?
“그렇죠. 어차피 민주당의 (대선)후보가 확정되면 후보한테 총재직을 이양하는 게 관행 아닙니까. 그게 좀 앞당겨졌다, 이런 의미로 해석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대선후보가 정해지면 그후에 총재직을 이양했는데, 후보가 결정되기도 전에 총재직을 내놓으신 것은 한편에서는 무책임한 행동으로 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관점에서 이야기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빠른 시간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게 함으로써 근원적으로 수습할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래서 일찍 총재직을 내놓으신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질문해도 ‘모범답안’을 벗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대통령의 총재직 조기사퇴’라는 극단적 처방에 ‘새 질서 형성’이라는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이고문의 사고방식이다. 이고문은 인터뷰 내내 ‘새 질서’ ‘새 면모’ ‘미래’ 등의 단어와 ‘이인제’를 등치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민주당이 정권을 재창출할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이 많습니다. 이고문은 민주당이 정권을 재창출하기 위해서 어떤 전제가 필요하다고 봅니까?
“우선 이번에 우리 당이 과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새로운 당의 면모를 세워야죠. 즉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고, 또 광범위하게 획득할 수 있는 인물을 후보로 내세우게 되면 승리를 향해 힘차게 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보다는 더 상향식의 민주주의가 숨쉬는 문민정당의 모습, 지역정당의 한계를 극복하고 전국정당으로 나가겠다는 강경한 의지가 배어있는 모습,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배격하지 않고 국민과 함께 그 과제를 풀어나가겠다는 정신이 배어있는 모습을 보일 때 국민들의 기대와 희망을 다시 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인제 후보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건 너무 지나친 확대해석이죠.”
―이인제 고문이 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돼야 정권 재창출의 최소한 필요조건을 갖추게 된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면 그렇게 쓰십시오. 하하.”
이고문 반대진영을 중심으로 “이고문이 예전과 달리 허리가 뒤로 젖히고 목이 뻣뻣해졌다”는 비난의 소리도 들려온다. 이를 의식해서일까. 이고문은 ‘교만’이라는 암초는 피하고 ‘자신감’을 보여주기 위해 순발력을 발휘했다.
―민주당의 정권 재창출을 위한 충분조건은 제3의 후보가 나오는 다자간 구도입니까?
“후보는 많이 나오겠죠. 그러나 의미 있는 후보가 나오기는 쉽지 않습니다. 만약 특별한 조건이 생긴다면 3파전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 상황에서 보면 2파전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당락에 영향을 주는 의미있는 제3의 후보는 나오기 어려울 겁니다.”
지방선거 승리로 대선 길목 열어야
―영남 후보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선 대통령은 전국의 국민들이 다 같이 한 표씩 행사해 그 표를 모아서 가장 많은 사람이 당선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역 이야기는 아예 할 필요가 없죠. 어느 지역 출신이건 국민의 표를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사람이면 되는 것이니까. 울릉도 사람이건 제주도 사람이건, 어느 지역 출신은 안되고 어느 지역 출신이어야만 된다는 건 아전인수식 해석이고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정치현안에 대한 질문에 이 고문은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 현정국이 그만큼 민감한 시기라고 나름대로 판단하고 있는 듯했다. 다른 후보의 전략에 대한 평가를 물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만 답할 뿐 가타부타 설명을 하지 않으려 했다. 당내 1위 주자의 여유일까.
―얼마 전에 이고문은 “내년 지방선거는 현 대통령의 깃발보다는 차기 대선후보 깃발 아래에서 치러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까지는 이야기하지 않고, 현 대통령의 깃발 아래 하는 것과 새 후보의 깃발을 가지고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유리한지를 판단해야 된다, 거기까지만 이야기했어요.”
―그 말씀에는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있는 후보가 깃발을 들어야 더 유리하다는 판단이 들어있는 것 아닙니까?
“제 판단은 있지만 아직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아니죠. 현재 당에서 정치일정을 논의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방법으로 제 의견을 당에 전달할 생각입니다. 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나름의 결론은 지금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청와대나 당지도부가 오해할 만한 발언을 피하려는 인상이 역력했다. 그러나 10·25 재보궐선거에서 여실히 증명됐듯이 민심이 떠난 현 대통령의 깃발 아래서보다는 새 후보의 깃발 아래 지방선거를 치르는 것이 낫다는 것은 일단 일리가 있어 보인다. 이고문을 한단계 더 압박하는 질문을 던졌다.
―지방선거 전에 대선후보를 뽑아서 그 후보의 영향으로 지방선거를 치를 경우, 만약 패배하면 대선후보가 책임을 져야 되는 겁니까?
“그건 그때 봐서 판단할 문제예요. 지금 미리 가정해서 생각할 문제는 아니라고 보는데요. 지방선거에서 패배하고 나면 대선으로 가는 길은 사실상 어렵게 되죠. 그러나 지방선거에서 패할 경우를 가정해서 대선후보 선출을 뒤로 미루자는 것은 전략이 될 수 없습니다. 지방선거에서 대선으로 가는 길을 열어야죠. 그러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해야죠.”
―지방선거 후에 경선을 하자는 주장에는 대통령의 레임덕도 막고, 새로 뽑힐 후보가 치명상을 입는 것도 막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보는데 둘 다 의미가 없다는 겁니까?
“예, 저는 의미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노무현 고문은 자신이 대선후보가 되어서 지방선거를 치렀을 때 부산 경남 울산 등 세 곳 자치단체 중에서 한 곳이라도 승리를 못하면 후보를 사퇴하겠다, 경선을 다시 치르겠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지방선거에서 패배한다면 이고문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고문이 후보가 된다면 필승한다고 생각합니까?
“반드시 승리로 가는 길을 열어야죠.”
창조적 계승 발전론
―우선 경선(競選)에서 대의원들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 급선무일텐데, 최다 득표를 위해 다른 주자들과 제휴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
“저는 모든 분들에게 지원과 지지와 협력을 요청할 겁니다. 그리고 계파의식이나 파벌의식이 없는 사람이니까 모든 분들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할 겁니다.”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이고문은 한순간 당혹스런 표정을 짓다가 이내 “도와주리라 믿는다”는 낙관주의로 돌아왔다. 그러나 현재 민주당내 사정은 간단치 않다. 2, 3, 4위 후보가 연대해서 1위를 떨어뜨릴 것이라는 얘기도 공공연히 흘러나오고 있다.
―당내 후보 가운데는 자기가 “민주당의 제일 적자다”라며 ‘적자계승론’을 주장하는 분도 있고, “김대중 정권이 잘한 점과 잘못한 점을 모두 챙겨서 가겠다”는 ‘부채·자산계승론’을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고문에 대해서는 “DJ를 딛고 올라설 것이다, DJ와 차별성을 내세울 것이다”라는 지적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김대중 대통령이 IMF위기 타개를 위해 시작한 사회 경제 구조조정과 개혁, 그것을 통한 새로운 시장경제, 지식기반경제, 생산적 복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포용정책, 이런 큰 흐름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나갈 겁니다. 또 우리에게 새로운 시대적 과제들이 계속 도전해올 텐데 이러한 도전을 국민과 함께 개척해 나갈 비전을 제시하고, 새로운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정책과 전략을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일종의 ‘창조적 계승 발전론’이란 말씀이죠.
“그렇습니다. 그것은 저의 역사관입니다.”
―그런데 적자계승론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보면 결국 이고문은 양자라는 이야기인데요, YS의 적자였다가 민주당에 양자로 들어온 사람이 DJ를 계승할 수 있겠냐는 얘깁니다.
“지금은 봉건시대도 아니잖습니까. 봉건시대의 정통성은 아들, 아들 중에서도 적자, 적자 중에서도 장자에게 있잖습니까. 그런 것들은 이 시대에는 맞지 않는 이야기죠.”
이고문은 21세기에 치르는 첫 대선에서 ‘적자·양자론’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듯 자신이 대선후보가 되는 것은 ‘전후세대의 등장’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국민이 YS를 선택한 것은 문민정부를 선택한 것이며, DJ를 선택한 것은 정권교체를 선택했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고문이 만약 대선후보가 된다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만약이 아니라 꼭 돼야 됩니다. 하하. 이제 3김시대가 끝나는 것입니다. 저는 3김시대를 위대한 성취의 시대였다고 평가합니다. 3김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확고한 지평을 열었고, 중진국을 넘어 산업사회의 기초를 닦게 됐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이후에 제가 후보가 된다는 것은 광복 이후에 교육을 받은 세대, 그리고 산업사회에서 인생관을 확립한 세대의 등장을 의미합니다. 또 동족간에 이데올로기 때문에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대포소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의 등장을 뜻합니다. 이제는 대결과 투쟁의 시대가 끝나고 창조, 개척, 도전의 시대입니다. 우리 정치의 구조나 시스템, 관행, 체질, 문화 등 모두가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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