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 축구는 또한 축구 이상의 그 무엇이기도 하다. 월드컵은 4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축구잔치지만, 그 결과는 세계의 질서를 바꾸기도 한다. 21세기 지구촌의 패권을 다툴 것으로 보이는 미국과 중국은 내년 월드컵을 앞두고 묘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한쪽은 ‘귀한 손님’이고 다른 한쪽은 ‘기피대상’ 1호에 올라 있다.
조추첨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시드배정과 그룹편성이다. 시드는 관례에 따라 주최국과 전대회 우승국, 축구강국 등이 차지한다. 이번 월드컵의 경우 한국(D조), 일본(H조), 프랑스(A조)가 우선 시드를 받는다. 나머지 시드 5장은 11월28일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조직위원회의에서 결정된다.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시드를 받은 국가는 6개국(미국 브라질 독일 아르헨티나 벨기에 이탈리아)이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는 브라질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스페인 루마니아 네덜란드 등이 시드를 배정받았다. 1994년 주최국이었던 미국을 빼면 모두 유럽과 남미국가라는 게 특징이다. 이것은 월드컵 성적과 FIFA랭킹을 중심으로 시드를 배정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실제로 16차례의 역대 월드컵에서 유럽과 남미는 각각 8번씩 우승을 나누어 가졌다. FIFA랭킹에서도 2001년 10월 현재 유럽과 남미가 상위권을 독차지하고 있다(톱10의 경우 유럽 7, 남미 3).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도 이러한 기준이 그대로 적용될 전망이다. 따라서 남미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유럽의 이탈리아는 시드를 받을 가능성이 높으며, 독일도 플레이오프를 통과하면 유력하다. 이밖에 잉글랜드 스페인 등도 강력한 후보로 거론된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과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아프리카 돌풍을 일으킨 나이지리아와 카메룬도 시드를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지만, 유럽과 남미의 벽을 넘기는 힘겨워 보인다.
한국은 D조, 일본은 H조
그룹편성도 초미의 관심사. 98프랑스월드컵 당시 FIFA는 대륙별로 골고루 분산시키기 위해 고육책을 내놓았다. 즉 시드국 A그룹, 아프리카·북중미 B그룹, 시드를 받지 못한 유럽 8개국 C그룹, 아시아·남미·유럽 3개국 D그룹으로 편성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북중미 국가는 예선에서 같은 대륙끼리 대결하는 경우가 사라졌다. FIFA는 또한 “같은 조에 유럽 3개국, 또는 남미 2개국이 편성될 경우 재추첨을 실시한다”는 별도 조항까지 만들어 같은 대륙끼리 초반에 맞붙지 않도록 했다.
축구계에서는 이번에도 대륙별 안배가 고려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그렇게 본다면 최대 15개국(아일랜드가 플레이오프에서 이란을 누를 경우)이 참가하는 유럽은 8개조에 고르게 배정된다. 북중미와 아프리카는 이번에도 같은 그룹이 될 가능성이 크며, 남미는 유럽의 일부 국가와 짝을 이룰 듯하다. 따라서 한국이 속한 조에는 유럽 1국, 북중미·아프리카 1국이 확실하게 포함되며, 나머지 1국은 유럽 또는 남미가 유력하다. 확률적으로는 8개조 가운데 7개조에 유럽팀이 2개씩 들어간다고 가정할 때, 유럽 2팀과 예선전을 치를 가능성이 87.5%에 이른다.
한국으로서는 이번 월드컵이 역대 최상의 조건임에 틀림없다. 일단 시드를 받았기 때문에 세계 축구의 최강국을 피할 수 있다. 94미국월드컵 때는 이탈리아, 98프랑스월드컵 때는 네덜란드가 한국이 속한 조의 시드배정 국가였다. 역대 월드컵에서 한국은 시드배정 팀과의 승부를 ‘확실한 1패’로 정해놓고 예선 전략을 세워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전통적으로 유럽축구에 약한 징크스를 갖고 있다. 역대 월드컵에서 한국이 유럽팀을 상대로 거둔 성적은 3무7패에 득점 9, 실점 36이다. 히딩크 사단도 평가전에서 프랑스와 체코에 0대5로 대패했으며, 1.5군으로 구성된 덴마크와 노르웨이에도 패하는 수모를 당했다. 다만 주전이 대거 빠진 98프랑스월드컵 3위팀 크로아티아를 2대0으로 물리친 것이 유일한 승전보다.
결국 한국축구의 16강진출 여부는 사실상 유럽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내년 월드컵에 출전하는 유럽국가 가운데 한국이 만만하게 상대할 팀은 하나도 없다는 게 현실적 고민이다. 유럽지역 조별예선을 1위로 통과한 러시아 포르투갈 덴마크 스웨덴 폴란드 크로아티아 스페인 이탈리아 잉글랜드 등은 모두 한국보다 한수 위의 전력을 갖추고 있다. 조2위로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있는 팀들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한국이 16강에 오르기 위해서는 북중미·아프리카 그룹을 반드시 이겨야 한다. 아프리카보다는 북중미팀과 만나는 것이 한결 수월하다. 아프리카 축구는 최근 유럽을 위협할 만큼 성장세가 빠른 반면 북중미에는 멕시코 이외에 뚜렷한 축구강국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올해 컨페더레이션컵에서 멕시코를 꺾은 바 있다.
확률로 보면 아프리카팀과 대결할 가능성이 62.5%에 이른다. 북중미는 3개국, 아프리카는 5개국이 참가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는 남아공, 나이지리아, 카메룬, 튀니지, 세네갈 등이 본선에 진출했는데, 이 가운데 한국이 노려볼 만한 팀은 남아공 튀니지 세네갈 등이다. 나이지리아와 카메룬은 이미 아프리카의 벽을 넘었다는 평가를 받는 반면, 나머지 3개국은 아직까지 강호로서의 위용을 보여주지 못했다.
‘신의 선택’ 확률은 12.5%
하지만 한국은 11월8일 세네갈과의 평가전에서 0대1로 무너졌다. 한국팀이 베스트 멤버로 짜여지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날 경기는 충격이었다. 세네갈은 추운 날씨에 여독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격전을 치렀기 때문이다. 한국으로서는 세네갈이 일본을 2대0으로 눌렀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 형편이다.
최종적으로 한국의 16강진출 여부를 결정짓는 변수는 남미·유럽 그룹일 공산이 크다. 한국이 최상의 전력으로 경기에 나설 경우 북중미·아프리카그룹을 꺾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럽의 강팀을 꺾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남미·유럽그룹과의 한판승부가 중요하다. 한국이 이 고비를 넘는다면 조2위가 가능해진다.
남미에서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시드국으로 빠질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한국이 속한 조에 들어올 수 있는 팀은 파라과이, 에콰도르, 우루과이(또는 콜롬비아) 대 호주 플레이오프 승자 등이다. 이 가운데 파라과이는 한국보다 한수 위지만, 나머지 팀들은 해볼 만하다.
남미국가는 유럽의 일부 국가와 같은 그룹에 편성될 가능성이 높은데, 이 경우 한국은 유럽보다 남미를 만나는 게 유리하다. 남미의 경우 체력싸움에서 불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 역대 월드컵에서 남미팀을 만나 1무3패에 득점 3, 실점 9를 기록했다. 비록 1승도 거두지 못했지만, 경기내용은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은 편이다.
결론적으로 한국이 월드컵 16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최상의 조편성’은 유럽 1팀, 북중미 1팀, 남미 1팀의 조합이다. 확률로는 약 12.5%. 8개조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이 속한 조에만 유럽이 1팀 편성된다는 행운이 뒤따라야 하는 셈이다(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다. FIFA 월드컵조직위원회가 시드배정과 그룹편성을 98프랑스월드컵과 다르게 할 경우, 이러한 분석은 의미가 없다).
월드컵에서는 조편성의 불운 때문에 축구강국이면서도 예선에서 탈락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강호들이 같은 조에서 맞붙을 경우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진다. 98프랑스월드컵에서는 D조가 이른바 ‘죽음의 조’였다. 나이지리아와 파라과이가 돌풍을 일으킨 가운데 유럽축구의 강자인 스페인과 불가리아가 예선 탈락한 것. 스페인은 당초 우승후보로까지 거론됐지만, 나이지리아에게 역전패한 충격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C조의 주최국 프랑스는 ‘신의 선택’을 받았다. 프랑스는 덴마크 남아공 사우디아라비아 등 손쉬운 상대를 만나 예선전을 편하게 치렀다. 이것은 프랑스 선수들이 자신감을 키우는 데 기여했고, 결국 월드컵 우승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경우는 조편성이 결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죽음의 조’ vs ‘신의 선택’
주최국으로 시드를 잡은 한국에게 ‘죽음의 조’는 유럽 강호 2개국,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또는 카메룬의 조합일 것이다. 이런 상황이 온다면 한국은 16강은커녕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안방에서 망신을 당할 가능성도 있다. 역대 월드컵에서 주최국이 우승한 일은 6번, 반면 홈팀이 예선 탈락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따라서 한국이 ‘죽음의 조’에 편성된다면 월드컵 역사가 다시 쓰여질지도 모를 일이다.
조편성은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 마케팅 계획을 짜는 데도 중요한 기준이 될 듯하다. 지금까지는 막연하게 모든 국가를 상대로 월드컵을 홍보했지만, 조편성이 끝나면 주력해야 할 타깃이 분명해진다. 현재 한국과 일본이 가장 탐내는 팀은 중국이다. 한국과 일본이 주최국으로 빠진 틈을 비집고 사상 최초로 월드컵에 진출한 중국은 벌써부터 들떠있다.
11월10일 개장한 서울월드컵주경기장엔 지금까지 21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갔다. 처음에는 일본인이 주요 고객이었지만, 중국이 월드컵 본선 티켓을 따낸 뒤부터는 중국 관광객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중국이 한국에서 경기를 치를 경우 장기휴가를 오겠다는 사람도 많다. 한국이 일본보다 물가가 싼 데다 최근 일고 있는 ‘한류열풍’의 영향으로 보인다.
관광업계는 중국이 한국에서 예선을 치를 경우 중국 관광객 6만~10만여 명이 몰려올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것은 지난 1999년 시드니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한·중전의 열기를 감안할 때 결코 무리한 수치가 아니다. 당시 한·중전을 보기 위해 서울로 날아온 중국인은 6000여 명에 달했다.
현재 중국인들이 한국 관광에서 소비하는 규모는 평균 2000달러 플러스 알파. 따라서 10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든다면 2억달러(2600억원) 이상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중국이 일본에서 경기를 치른다면 관광특수는 고스란히 일본의 몫으로 돌아간다. 이 경우 전체 관광객은 줄고, 관광수입은 늘어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전망이다.
한국의 뜻대로 중국이 A~D조에 편성돼 한국에서 경기를 치른다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일단 경기장 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최소 6만여 명에 달할 중국 관광객이 투숙할 수 있는 도시는 서울 부산 대구 인천 제주 정도다. 따라서 중국팀의 경기를 이 지역으로 재배치할 가능성이 높다. 숙소를 구하지 못한 중국 응원단을 위한 캠핑장과 중국인들의 입맛에 맞는 식당타운이 조성되고, 중국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비빔밥 순대국 잡채 등이 ‘특수’를 누릴 것이다. 또한 숙소를 잡지 못한 중국인들이 월드컵경기장 주변에서 집단 노숙하는 장면도 상상해볼 수 있다.
중국인들의 이동경로도 관심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한때 경의선을 이용하는 방안을 제시한 일이 있다. 하지만 북한이 경의선 공사를 늦추고 있어 실현가능성은 별로 없다. 따라서 상하이에서 유람선을 타고 서귀포나 인천으로 들어오는 루트를 생각해볼 수 있다.
1983년 5월 한국땅에 불시 착륙한 중국 민항기는 한중관계를 질적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사례에 비추어볼 때 한달 동안 수만 명이 이동하는 월드컵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를 또 어떻게 바꿀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최근 축구계에서는 중국이 한국에서 경기를 벌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 떠돌고 있다. 확률상으로는 50%. 추첨에 의해 결정되는 만큼 중국이 한국에서 예선을 치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일부 축구계 인사들이 중국의 한국행을 낙관적으로 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조추첨식이 한국에서 열리는 데다, 한국이 그동안 홈에서 열리는 중요한 국제대회의 조편성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쳐왔다는 속사정 때문이다. 한 예로 88서울올림픽 축구의 경우 한국은 소련 미국 아르헨티나 등과 한 조에 속했다. 당시 소련은 세계 최강이었지만, 한국과의 개막전에서 무기력한 경기를 펼치며 득점없이 비겼다. 이것을 두고 체육계에서는 오랫동안 ‘사전담합설’이 떠돌았다. 하지만 소련의 ‘보이지 않는’ 지원에도 한국은 예선 탈락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월드컵 조추첨에서도 보이지 않는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올림픽에서 주최국의 입김이 강하게 반영되는 것과는 달리 월드컵은 FIFA 회원국들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치러진다. 어설픈 속임수가 통할 리 없다. 자칫 잘못하면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의 한국행은 아직까지 희망사항일 뿐 장담할 수는 없는 셈이다.
중국 다음으로 특수가 예상되는 지역은 서유럽이다. 전통적으로 축구열기가 뜨거운 잉글랜드,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대규모 응원단이 몰려올 것이 확실하다. 현재 일본 관광업계는 ‘관광은 일본에서, 축구는 한국에서’라는 구호를 내걸고 유럽인들을 이끌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반면 한국은 유럽 관광객들을 잡기 위한 프로그램이 부족한 실정이다. 개최일까지 남은 기간 홍보에 주력하지 않는다면, 유럽인들은 일본에 머물면서 자국팀이 경기를 치를 때만 한국으로 날아오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유럽인들을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다. 독일과 잉글랜드의 경우 특히 ‘훌리건’의 난동을 경계해야 한다. 98프랑스월드컵에서는 잉글랜드 훌리건들과 독일 우익계 청년들이 폭력을 휘둘러 유혈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이 철저한 대비책을 세우지 못한다면 월드컵이 피로 물드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훌리건 문제와 관련, 최악의 상황은 전통적인 앙숙이 맞붙는 경우다. 만일 잉글랜드와 아일랜드가 예선에서 만난다면 특단의 조치가 내려질 수도 있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당시 잉글랜드 아일랜드 네덜란드는 F조에 나란히 포함돼 격전을 치른 적이 있는데, 당시 F조의 경기장을 비교적 외진 곳으로 결정해 대형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조추첨에 울고 웃는 사람
한국과 일본이 내심 가장 경계하는 팀은 미국이다. 세계 어디를 가나 ‘귀빈’ 대접을 받던 미국이 기피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물론 9·11 테러사건의 후유증 때문이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보복공격을 감행하면서 이슬람권의 반미운동 세력들은 한목소리로 ‘복수’를 다짐하고 있다. 때문에 미국팀은 월드컵 기간은 물론 지금부터라도 ‘몸조심’을 해야 할 지경이다. 한국이 서귀포월드컵경기장 개장 기념경기 파트너로 미국을 지목해 놓고 막판까지 고심한 이유도 테러에 대한 위험부담 때문이다.
미국이 한국에서 예선을 치르면 우선 경호가 신경 쓰인다. 공항에서부터 경기장까지 삼엄한 경비를 펼치려면 4배 이상의 비용부담이 불가피하다. 이런 까닭에 일부에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숙소를 주한미군부대로 정하고, 미군 비행기로 이동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까지 내놓고 있다. 미국에 대한 테러위협이 구체화할 경우 경기장소도 대도시보다는 서귀포 같은 외곽으로 재조정될 것이다.
미국의 처지에서 최악의 경우는 회교권 국가와 맞대결을 치르는 경우다. 98프랑스월드컵에서는 미국과 이란이 예선에서 만나 ‘전쟁’과도 같은 게임을 벌였다. 결과는 이란의 승리. 이란은 ‘성전’이라며 자축했고, 미국은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미국이 가장 피하고 싶은 나라는 뜻밖에도 우방국인 사우디아라비아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걸프전쟁 이래 미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는 반미세력도 상존하고 있다. 만일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같은 조에 속할 경우 응원단 틈에 섞여 들어오는 테러리스트를 걸러낼 방법이 없는 상황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한국이나 일본에도 탐탁지 않은 손님이다. 회교도 테러리스트도 부담스럽지만, 사우디가 자국으로 올 경우, 아시아권의 ‘대어’인 중국을 상대에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대륙별 참가국을 골고루 나눈다는 원칙이 지켜진다는 것을 감안한 분석이다.
남미 국가들도 그런대로 괜찮은 ‘손님’이다. 최근 남미 경제는 급속도로 쇠락해 축구열기도 식어가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 지역에는 골수 축구팬들이 많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지에는 ‘4년 동안 돈 벌어서 월드컵 관광을 떠나는’ 축구마니아들이 수두룩하다. 실제로 98프랑스월드컵 때도 남미의 열성팬들은 한달 이상 유럽에 머물렀다. 다만 이들은 중국인이나 서유럽 사람들처럼 풍족하게 관광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수입에는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할 전망이다.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예상치 못한 돌발사태로 월드컵이 ‘변칙’ 진행되는 상황도 가정해볼 수 있다. 최근 일본 기자들은 독가스 테러와 지진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일본으로 예정된 경기가 한국으로 옮겨올 수 있다. 물론 한국에서 대형사고가 터지거나 남북관계가 긴장국면을 맞는다면 반대의 시나리오가 가동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추첨이 축구 외적인 부문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을 살펴보자. 한국이 ‘신의 선택’을 받아 16강진출의 전망이 밝아질 경우 히딩크 감독과 국가대표 선수들이 가장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월드컵 특수를 앞세워 정치적 주가를 높여온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이다. 정회장은 보이지 않게 ‘대권행보’를 시작한 지 오래다. 하지만 한국의 월드컵 성적이 부진할 경우 그의 대권전략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정회장의 한 측근은 민주당 전당대회 일정에 대해 “지방선거 이후가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월드컵이 지방선거 기간에 치러지는 점을 감안한 정치적 발언이다. 정회장의 주변 인사들은 “민주당이 대통령후보를 조기에 결정할 경우엔 제3후보로 대선에 출마할 수도 있다”는 복안도 흘리고 있다. 물론 이것은 월드컵이 성공적으로 열리고, 한국이 16강진출 이상의 성적을 낼 때만 탄력을 받을 수 있는 구상이다. 만일 월드컵이 국민적 기대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정회장의 ‘축구정치’는 상당 부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정부도 월드컵 특수를 정회장이 독차지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월드컵조직위원회를 공동위원장 시스템으로 조정한 것도 그런 맥락이라는 분석이다.
월드컵과 정치적 변수
최근 한 기관에서는 월드컵 특수에 관한 연구조사를 벌인 일이 있다. 그 결과 ‘한국이 월드컵 16강진출에 성공할 경우 여당은 선거에서 40만 표 가량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내년 대통령선거가 박빙으로 치러질 거라는 분석이 우세한 상황에서 40만 표는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갖는다. 또한 불과 수천 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지자체 선거가 월드컵 기간과 맞물려 있는 점도 정치권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축구는 내셔널리즘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스포츠로 알려져 있다. 축구 때문에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전쟁을 벌인 일까지 있었다. 올림픽이 도시 행사라면 월드컵은 국가적 이벤트다. 그래서 월드컵 결과는 정치적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94미국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우승하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던 야당 후보 룰라의 기세가 꺾였고, 98프랑스월드컵에서 우승한 프랑스에서는 우파가 득세했다. 그렇다면 2002년 한국에서는? 12월1일 조추첨 결과는 이래저래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웃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