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호

한국 주류사회의 파수꾼을 자임하는 사람들

  •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 kimhoki@yonsei.ac.kr

    입력2004-11-16 13: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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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지식인을 대표하는 ‘지식인’을 선정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보수주의가 우리 사회의 주류임에도 불구하고 이념적으로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지식인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지식사회의 주류(主流)가 보수주의라는 점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지식사회가 대학을 중심으로 언론과 문화계를 포괄하고 있는 것이라면, 보수주의는 지난 1950년대 이후 한국 지식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왔다. 이 가운데 보수주의의 영향력은 특히 언론으로 대표되는 공공영역에서 두드러진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 지식사회에서 보수주의는 1980년대 이후 민주화 과정과 함께 서서히 약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우리 사회의 보수주의는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강제된 게 아니라 시민사회에서의 풀뿌리 보수주의(grassroots conservatism)와 긴밀히 결합돼 있으며, 또한 시민사회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보수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두 가지 사실에 기인한다.

    첫째, 해방공간에서 남북한 분단체제의 성립과 한국전쟁의 생생한 체험은 우리 사회를 ‘우익 주도의 사회’로 재편시켰다. 단적으로 1980년대 중반까지 반공주의는 가장 중요한 이념 가운데 하나였으며, 좌파 내지 진보주의의 이념이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 및 사회민주주의를 사실상 불허함으로써 보수주의에 유리한 이념적 공간을 부여했다.

    둘째, 전통적인 유교사상 또한 보수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유리한 토양을 제공했다. 일반적으로 급속한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사상은 철저하게 부정되기 마련인데 반해, 우리 사회의 경우 유교사상은 그것이 약화되는 과정 속에서도 경우에 따라서 적극 이용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서구 근대사에서 정치사상으로서 보수주의는 진보주의와 함께 쌍벽을 이루며 발전해 왔다. 어원적으로 보수주의(conservatism)란 말은 ‘보존한다(conserve)’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서구 보수주의의 선구자로 알려진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이 왜 실패했는가에 대한 분석에서 보수주의의 기본이념들을 이끌어내고 있다.



    ‘고전적 보수주의’는 19세기와 20세기의 사회변동 속에서 진보주의와 자유주의에 대응하여 이념적 변화를 모색해 왔다. 최근 1970년대 이후 서유럽과 미국에서 등장한 신보수주의는 하이예크와 프리드만의 자유주의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보수주의의 새로운 갱신을 모색해 왔다. 영국의 대처 정부와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이런 자유적 보수주의의 이념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보수주의를 검토할 때 이른바 수구(die-hard) 및 반동(reactionary)과 구분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흔히 진보주의에서는 보수주의를 수구(守舊) 내지 반동(反動)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엄격히 볼 때 보수주의는 과거를 그대로 지키려고만 하는 수구나 사회변화에 역행하는 반동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보수주의는 변화를 부정하지 않고 전통과 질서를 존중하면서 변화를 모색하는 이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을 선정하는 데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다. 보수주의가 분명 주류임에도 이념적으로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지식인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경우 대다수 지식인들은 보수주의와 애초부터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사회과학의 경우 보수주의 이론에 가까운 지식인들은 보수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에 적잖은 부담을 갖고 있는 듯했다.

    ▲ 송복·연세대 교수(사회학) : ‘통혁당 사건이 국가관을 바꾸다‘

    이기획을 연재하면서 가장 쓰기 어려운 지식인을 꼽으라면 다름 아닌 송복 교수다. 왜냐하면 송교수는 필자의 지도교수이자 학문적 스승이기 때문이다. 먼저 사적인 체험을 말해 보자. 1979년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사회학개론 시간에 송교수를 처음 보았다. 당시 40대 초반이었던 송교수는 강의노트가 필요없을 정도로 놀라운 암기력과 동서양 고전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으로 학생들을 매료시켰다. 이후 필자는 20여 년 동안 송교수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봐 왔는데, 그가 발표하는 날카로운 글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사에 대한 그의 너그러움에 감탄하곤 했다.

    1937년 경상남도 김해에서 태어난 송교수는 1956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송교수는 “6·25 종전 3년 뒤인 당시 대학에서는 사회주의가 만연했다”고 회고하면서, 자신은 정치와 문학을 연구하던 보수주의에 가까운 ‘정문회’라는 서클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당시 정문회 멤버들로는 노재봉(전총리), 고건(서울시장), 손세일(전국회의원)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송교수와 지속적인 교유관계를 유지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치사회학을 전공한 학자답지 않게 송교수는 사적 모임에서 가끔 시를 외우곤 하는데, 문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대학 시절에 연원하고 있는 것 같다.

    대학 졸업 후 1960년대 송교수의 주무대는 언론계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몸담았던 신문 및 잡지가 매우 다채롭다는 점이다. 졸업을 앞두고 입사한 ‘사상계’에서 1년 정도 기자 생활을 하다가, 군대를 갔다 온 뒤에는 3년 동안 ‘청맥’을 만들었으며, ‘청맥’이 문을 닫은 후 1967년부터는 ‘서울신문’ 외신부 기자로 일했다. 이후 그는 1971년 하와이대로 유학을 떠나 사회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1974년 돌아와 연세대 사회학과에 자리를 잡은 후 현재까지 정치사회학, 사회조직, 한국사회론 등을 가르치고 있다.

    송교수가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일간지에 왕성하게 칼럼을 기고하면서부터였다. 간결하면서도 주장이 뚜렷한 그의 칼럼은 언제나 크고작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산업화를 위해 집권화 불가피

    송교수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것은 1968년 ‘청맥’과 연관된 이른바 통혁당 사건이다. ‘청맥’ 편집을 주도했던 송교수는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보름 동안 조사를 받았지만, 통혁당과 관련이 없었기에 혐의 없이 곧 풀려났다. 송교수는 회고하기를, 이 보름 동안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으나 며칠이 지나니 마음이 아주 평온해졌으며, 그런 상태에서 만일 내가 정권을 잡는다면 어떤 사회를 만들고 어떤 정치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권력의 유형에 대해 ‘박정희식’ 말고 다른 어떤 방식이 가능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정부에 커다란 반감을 갖고 비판도 했지만, 결국 우리가 할 것은 산업화밖에 없으며, 이를 위해서는 권력을 집권화(集權化)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도달했다. 분권화(分權化)를 민주주의라 하고 집권화를 권위주의 또는 독재라 한다면, 산업화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인권이 다소 손상된다 하더라도 집권화가 불가피하다는 결론이었다. 그 이후 송교수는 박정희를 비판하는 글을 써본 적이 없다고 회고한다.

    정치사회학자로서 송교수의 일관된 주장은 정치와 통치를 구별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치의 목적이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통합을 이뤄내는 것이라면, 통치는 국가의 위기관리를 뜻한다. 훌륭한 정치가는 훌륭한 통치자가 될 수도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실패한 통치자가 될 수도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한 사회 발전에서 정치적 리더십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정치적 리더십에서 송교수가 강조하는 것이 이른바 형안(炯眼)과 총이(聰耳)다. 형안이 사람을 적재적소에 놓을 수 있는 능력이라면, 총이는 다른 사람의 견해를 귀담아 듣는 것을 말하는데, 정치가 내지 통치자는 모든 것을 다할 수 없기 때문에 현명한 위임을 위해서는 형안과 총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와 한국사회

    송교수가 발표한 책을 크게 세 종류로 나눠볼 수 있다. ‘조직과 권력’(1980), ‘한국사회의 갈등구조’(1990)가 대표적인 학술서라면, ‘열린 사회와 보수’(1995)는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칼럼을 모은 사회비평집이다. ‘동양적 가치란 무엇인가’(1999)는 그가 오랫동안 연구해온 유교의 사회학에 관한 연구서다. 이 가운데 세간의 주목을 끈 것은 흥미로운 제목이라 할 수 있는 ‘열린 사회와 보수’다. 왜냐하면 이 책을 통해 송교수는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보수(保守)란 중심을 찾고 중심을 지킨다는 의미다. 그에게 진정한 보수란 보전과 수정(conservation and correction)을 동시에 내포하되, 그 무게중심을 보전에 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송교수가 이렇게 보수주의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한국사회에 대한 그의 독특한 분석에서 찾을 수 있다. 그에 따르면, 198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치열한 경쟁과 이와 연관된 다양한 사회갈등의 폭발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 사회변동은 인구이동, 직업이동, 지역이동, 계급이동을 포함한 격렬한 사회이동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으며, 이것이 우리 사회를 ‘갈등사회’로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에서는 무엇보다 그 무게중심을 바로잡는 보수가 중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송교수는 우리사회에서 분명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는 몇 안되는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주요 사안이 있을 때마다 보수주의의 시각에서 담론을 주도해온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이른바 ‘송복식 문체’라 할 만큼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그의 필치는 흔히 칼럼의 전범으로 꼽힌다. 그의 장점은 일반 지식인들이 직접 개입하기 꺼려하는 이슈를 정공법으로 다루는 데 있는데, 이런저런 비판이 없지도 않지만, 상당한 고정독자를 갖고 있다.

    그리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나 동양사상은 송교수의 또 하나의 사상적 거처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쓴 ‘동양적 가치란 무엇인가’는 그의 정신적 고향이며 우리사회 문제들에 대한 그의 처방전이기도 한 ‘유교의 사회학’에 관한 책이다. 그의 동양사상에 대한 이해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한문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동양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다. 이후 서양 학문을 익히게 되면서 잠시 손을 놓았다가 미국유학 시절에 우연히 소동파의 ‘적벽부’를 읽은 것을 계기로 다시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송교수는 지속적으로 ‘논어’, ‘맹자’, ‘중용’을 공부해 왔으며, ‘논어’의 사회학을 다루는 ‘동양적 가치란 무엇인가’는 그 첫번째 결실이다. 앞으로 그는 제2권으로 ‘맹자’의 세계를, 그리고 제3권으로 ‘중용’의 세계를 다룰 것을 계획하고 있다.

    유교사상에 대한 송교수의 관심은 소박한 훈고학이 아니라 그것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적극 이끌어내는 데 있다. 고전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으며, 보편 철학으로서 유교가 갖는 사회학적 의미를 현대사회에 맞게 복원해 내는 것을 그는 자신의 마지막 학문적 과제로 생각하고 있다. 이와 연관해 필자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송교수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의 사서(四書) 못지않게 사마천의 ‘사기’를 자주 인용한다. 평소 그는 ‘논어’와 ‘사기’를 모르면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는데, 이 ‘사기’에서 ‘열전(列傳)’만은 사회학자들이 꼭 읽어야 한다고 했다. 위로는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회학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인간형이 모두 등장하는 ‘열전’은 개인과 사회간의 복합적 양태들을 다루는 일종의 사회학적 대하드라마라 할 수 있다.

    현재 학계에 있는 그의 제자들도 송교수 못지않게 적극적인 문필활동을 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외부에서 보기에 이색적일 정도로 그 제자들의 스펙트럼이 다양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유교자본주의론을 제시하는 유석춘교수(연세대)와 진보적 시민운동론을 주창하는 조희연교수(성공회대)는 송교수의 대표적인 제자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은 현재 각기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를 대변하는 논객들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 송교수는 같은 선생 문하에서 유가도 나오고 법가도 나오기 마련이라고 하면서 교수의 원칙은 무엇보다 학문적 다원주의를 존중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상우 교수는 개인적으로는 전혀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받은 인상은 대단히 ‘젠틀(gentle)’한 교수라는 점이다. 송복 교수와 함께 대표적인 보수주의 논객인 이상우 교수에게서는 송교수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송교수가 전통적인 선비를 지향하고 있다면, 이교수는 마치 서구적인 지식인의 전형 같았다.

    이교수는 1938년 아버지의 근무지였던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으나 본래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1946년 월남했다. 1957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으며, 졸업후 대학원에 진학해 국제법을 전공했다. 이교수의 독특한 이력 가운데 하나가 대학 4학년 때 일어난 4·19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인데, 당시 국회의사당 앞에서 서울대생들이 집회를 할 때 사회를 보았다고 한다. 이교수는 4·19와 5·16에 대한 세간의 역사적 평가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흔히 4·19로 싹튼 민주주의가 5·16으로 잘렸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인데, 자유당정권의 부패와 부정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난 4·19의 진정한 동기는 가난으로 좌절감이 컸던 당시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4·19와 5·16은 동일한 원인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그의 견해다.

    1961년 이교수는 공군장교로 입대했는데, 당시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 그에게 아르바이트가 가능한 곳이 군장교였다. 이 아르바이트는 그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인연을 선사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조선일보’와의 인연이다. 대학 4학년 때 ‘한국일보’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이교수는 ‘조선일보’에서 야근만 하기로 하고 편집기자로 4년간 근무했다. 그때 같이 일하던 사람들로는 최병렬(한나라당 국회의원), 김학준(동아일보 사장), 김대중(조선일보 주필) 등이 있었다고 한다.

    1965년 전역한 이교수는 미국무성 유학시험을 통과, 1967년 하와이대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하와이대에는 법대가 없어서 국제법과 관련하여 국제정치를 전공했는데, 1971년 럼멜 교수의 지도를 받아 중국의 대외정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취득한 후에는 1973년까지 하와이대 국가차원연구소 부소장을 지냈다. 그런데 1973년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이교수는 갑자기 귀국해야 했다. 돌아온 그는 언론계로 돌아가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할 예정이었지만, 당시 이런저런 사정으로 일단 경희대에 자리를 잡았다가 1976년에 서강대 정치외교학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교수는 농담으로 자신을 ‘조선일보’ 최장기 휴직기자라 언급할 만큼 ‘조선일보’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보수주의 지식인을 다루면서 발견하게 된 것의 하나는 함재봉 교수를 제외하면 모두 신문기자 출신이라는 점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 하기 어려운 것 같다. 필자도 기자들을 만날 때 느끼는 바지만, 기자들은 우리 대학 선생들보다 사회문제를 보는 눈이 현실적이다. 보수주의와 현실주의가 반드시 등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수주의가 진보주의보다 현실의 조건을 중시하고 실현가능한 해결방안을 선호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 점에서 이상우 교수는 물론 송복 교수나 이동복 교수 또한 기자로서의 체험이 그들의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국제정치학과 동북아시아 연구

    이교수는 5·16과 1960년대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1970년대 유신체제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비판한다. 즉 1960년대까지의 박정희는 정당화될 수 있고 필요한 사람이었으나, 유신체제는 민주주의를 유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시대 전반에 대한 그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의 역사적 과제가 경제건설과 민주화였다면, 박정희정권이 정치적 억압이라는 무리수를 두었다 하더라도 경제발전의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최근 박정희정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진행된 논쟁을 지켜볼 때 이교수의 평가는 보수주의적 견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칼럼니스트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교수의 주전공은 국제정치학이다. 스스로 자신의 이론을 현실주의 패러다임으로 분류하는 이교수는 특히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에 대한 전문가다. 이교수가 동북아에 관심을 두는 것은 이 지역이 우리의 생존환경이라는 데 기인한다. 동북아가 냉전이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공산주의를 연구했고, 통일을 내다보고 북한의 공산주의를 연구했다. 일본에는 게이오대학 교환교수로 두 차례나 갈 만큼 관심을 두어 왔다. 지난 30여 년 동안 발표한 ‘한국의 안보환경 1’(1977), ‘한국의 안보환경 2’(1986), ‘국제관계이론’(1988), ‘함께 사는 통일’(1995), ‘북한의 현황과 남북한 관계’(1997) 등이 이교수의 대표적인 연구로 꼽힌다.

    이교수는 보수주의에 대해 무엇인가 지키자는 태도, 즉 기질적인 것으로 ‘옛것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해한다. 단지 ‘지금것’이 좋으니까 이걸 지키자는 게 보수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볼셰비키 혁명 때는 공산주의가 진보지만 페레스트로이카 때는 오히려 공산주의가 보수라 할 수 있다는 거다. 정치사상적으로는 시대를 초월하여 지킬 가치가 있다는 태도가 보수며, 버크가 주장하는 의미에서의 보수라면 이교수는 스스로 보수주의자로 볼 수 있다고 자평한다. 왜냐하면 이교수 자신은 기질적으로 옛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과거의 것에 지킬 게 없다고 보는 주장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교수의 보수주의 사상을 잘 엿볼 수 있는 것의 하나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갈림길이라 할 수 있는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 이교수는 비교적 분명한 의견을 표명하는데, 자유와 평등 가운데 어느 것에 비중을 둘 것인가에서 굳이 편을 들자면 그는 자유쪽에 중점을 두고 싶다고 한다. 평등이 물론 중요한 가치지만 그것을 극대화하면 열심히 노력하고 능력이 우수한 사람들의 권리가 제한된다는 점에서 자유가 침해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두 가지 점에서 진보주의를 비판한다. 먼저 그는 우리나라에서 진보주의가 더 집단주의적 성향을 보여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교수는 전형적 집단주의 체제라 할 수 있는 북한에 대해 진보주의의 일각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데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다음으로 그는 진보주의가 갖는 역사에 대한 고정관념을 지적한다. 진보는 역사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가정하는데, 이교수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저항과 자연의 추세와의 균형점이 현존 질서며, 때로는 인간의 의지가 자연추세에 밀릴 수도 있는 것이 역사의 본질이다.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보수주의 논객으로 비춰지고 있음에도 이교수는 조직 및 일상생활에서는 매우 자유주의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속한 서강대 정치학과는 국내에서 교수들의 이념적 지향이 가장 다채로운 학과로 꼽힌다. 이런 현상은 이상우 교수가 선배로서 학문적 다원주의와 능력주의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이교수는 ‘개방적 보수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개방적 보수주의에도 불구하고 이교수나 송복 교수의 보수주의에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명시적으로 또는 묵시적으로 많은 지식인들이 보수주의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사적 영역이 아니라 공공영역에서 과연 고전적 보수주의든 자유적 보수주의든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수주의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결론에서 이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 함재봉·연세대 교수 (정치학) : ‘아버지 함병춘과 유교 민주주의

    내가 함재봉 교수를 처음 본 것은 1992년 연세대 교정에서다. 우리는 함께 1992년에 임용된 이른바 ‘입사동기’다. 나는 그때부터 함교수를 지켜봐 왔는데, 매우 이례적인 학자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함교수가 고등학교부터 미국에서 교육받았음에도 매우 ‘한국적인’ 풍모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 정치사상을 전공한 함교수가 그 정반대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는 보수주의 정치사상가로 서서히 변모해 왔다는 점이다.

    ‘전통과 현대’를 만들다

    함교수는 1958년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함교수는 부친 고(故) 함병춘 선생의 유학과 외교관 생활로 어린 나이부터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성장해 왔는데, 함병춘 선생이 1974년 주미대사를 지내면서 미국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공식 약력으로 보면 함교수는 1976년 카알튼대에 진학했고, 1982년부터는 펜실베이니아대 경제학과 대학원을 다녔다. 1983년 ‘아웅산 사건’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한국에 잠시 돌아왔다가 1984년부터 존스 홉킨스대 정치학과로 옮겨 공부를 계속했다. 보통 유학하면 10년을 넘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만 함교수는 한두 해를 제외하고 20년 가까이 미국에서 공부했다. 그의 이런 특별한 사적 체험은 함교수의 보수주의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1992년 취득한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존재론, 인식론, 그리고 정치’로, 이 논문을 지도한 프라이스만 교수는 함교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푸코와 아렌트도 함교수의 정치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데, 푸코에게 상대주의 인식론을, 아렌트에게는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배웠다고 회고한다.

    함교수가 우리 지식사회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그의 첫 저서 ‘탈현대와 유교’(1998)와 1997년 여름에 창간한 계간 ‘전통과 현대’를 통해서다. 매우 이질적인 담론인 포스트 모던 정치사상과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대한 그의 지적 편력이 ‘탈현대와 유교’에 집약되어 있다면, ‘전통과 현대’는 1990년대 중반 당시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여전히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계간지 담론 시장에서 전통을 화두로 적지 않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함교수는 편집 주간으로 이 ‘전통과 현대’를 주도했는데, 이 잡지에는 함교수 이외에도 유석춘교수(연세대), 김병국 교수(고려대), 이승환교수(고려대) 등이 대거 참여했다.

    요즈음은 다소 관심이 줄어들었으나 ‘전통과 현대’가 1990년대 후반 우리 사회에 준 충격은 결코 적지 않다. 계간지가 대개 진보주의나 자유주의를 표방하고 현대와 탈현대에 관심을 두는 것이 통례인데, ‘전통과 현대’는 이를 뒤집어 전통을 전면에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념적으로 보면 ‘전통과 현대’는 전통주의 내지 보수주의와 일맥상통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 타깃의 하나를 서구 중심주의에 맞춤으로써 소박한 국수주의와도 거리를 두었다. 바로 이 점이 ‘전통과 현대’가 정치적 이념을 뛰어넘어 서구이론의 무분별한 수입에 회의하던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모은 원천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함교수를 포함한 ‘전통과 현대’의 편집진이 대개 유학을 통해 서양의 학문과 서양사회를 풍부하게 접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얼핏 보면 아이러니인 것 같지만, 찬찬히 생각하면 그런 유학 체험이 ‘우리’와 ‘그들’ 간의 가깝지만은 않은 거리를 자각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필자는 가끔 사회과학 분야에서 우리 전통사상에 커다란 관심을 둔 사람들의 상당수가 유학 경험이 있다는 점을 흥미롭게 발견하곤 하는데, 이는 서구사회에서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학문’을 할 수밖에 없던 비서구사회 지식인의 자의식 내지 내적 코드에 그 비밀이 있다고 생각한다.

    함교수가 서양적인 것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두고 한국적인 것을 탐구한 데는 부친의 영향도 컸다. 함병춘 선생으로부터 그는 ‘우리의 것’에 대한 자부심을 배웠으며 이는 자신의 학문에 적지 않은 그늘을 드리웠다고 회고한다. 아버지와 함께 학문적 토론을 해본 적은 없지만 아버지의 삶 자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목사이셨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아버지가 보여준 삶이 자상하면서도 조용한 권위였다는 것이다. 기독교도였으면서도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이고 유교적인 것을 옹호했으며, 미국을 누구보다 잘 알고 지인(知人)들이 많았음에도 미국에 비판적이었던 아버지야말로 함교수의 진정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함교수는 젊은 사회과학자들 중에서는 드물게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라고 규정한다. 그의 보수주의 사상의 출발점은 ‘철학적 보수주의’다. 후기 비트겐슈타인, 가다머, 오크셧으로 대표되는 철학적 보수주의는 인간의 불안정성에 주목하여, 문제를 전통에 의거한 대화로 풀려는 입장이다. 전통을 중시한다는 것을 괄호로 묶는다면 이런 사상은 푸코와 데리다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더니즘 정치사상의 상대주의 인식론과 곧바로 접목되며, 이 두 흐름은 함교수 정치사상의 풍부한 원천이라 할 수 있다.

    함교수 정치사상의 특징은 이런 철학적 보수주의와 유교 사상을 곧바로 연결시킨다. 그에 따르면, 가족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공동체주의, 우주의 질서와 연결된 도덕의 강조, 뿌리깊은 전통주의, 배움을 바탕으로 정치를 하는 엘리트들을 강조하는 유교사상은 서구 보수주의와 공유하는 요소들이다.

    철학적 보수주의와 유교사상

    유교적 덕목을 강조한다고 해서 물론 함교수가 전통적인 사회로 돌아가고자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현대사회의 문제해결에 유교사상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적극 끌어들여보자는 데 있다. 이와 연관해 그가 발표한 ‘유교, 자본주의, 민주주의’(2000)는 유교사상을 자본주의 및 민주주의와의 관련 속에서 재해석하려는 야심찬 책이다. 그의 목적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유교화하는 동시에 유교를 보편화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걸맞은 유교 자본주의와 유교 민주주의 모델을 만드는 데 있다. 이는 서구적 기술과 아시아적 가치를 새롭게 접목시키려는 21세기식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함교수의 이런 주장은 적어도 학계 안에서는 어느 정도의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보주의와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볼 때 함교수의 주장은 그것의 현대화를 적극 강조했음에도 유교사상이 갖는 전근대주의적 성격을 여전히 과소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본다면 유교사상은 가부장주의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이며,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남녀불평등의 주요 원인은 다름 아닌 이 유교적 가부장주의에서 연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과연 동도서기와 서도서기(西道西器) 가운데 어떤 것이 우리 사회에 더 바람직한 모델이 될 수 있는가. 서구의 기술과 동양의 정신은 진정 양립불가능한 것인가. 19세기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이 본격화한 후 이 문제에 대해 속시원한 대답을 제시한 사회과학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문제는 최근 ‘아시아적 가치’를 둘러싼 논쟁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숙명과도 같은 이 문제를 새롭게 환기시키고 있다는 점만으로 함교수의 정치사상은 주목할 만하다.

    이동복 교수를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선택한 데는 사연이 있다. 현재 명지대 객원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이교수는 엄격히 볼 때 학자라기보다 언론인, 정치가, 정책전문가 등이 더 어울리는 게 사실이다. 주위의 이의제기에도 불구하고 이교수를 다루는 이유는 그가 다름아닌 통일문제 전문가라는 점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분단과 통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좌파와 우파를 구분하는 매우 민감한 사안 중의 하나며, 이는 다른 사회에서 볼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특수성이기도 하다. 이교수가 신문과 잡지 기고, 방송출연 등을 통해 보수주의 통일론을 대변해온 장본인이라는 점에 이의를 달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교수는 1937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 가족이 전부 서울로 올라왔다. 1957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이교수는 대학 2학년이던 1958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코리아타임스’에서 정치부 기자로 일했다. 당시엔 대학을 다니면서 기자가 되는 경우가 없지 않았는데, 이교수는 약관의 나이에 기자생활을 시작한 셈이다. 그는 4·19 직후 장기영 사장과의 갈등으로 퇴사해 잠시 동양통신에 입사했으나 1963년 다시 ‘한국일보’로 돌아와 정치부, 외신부에서 기자생활을 이어나갔다.

    기자에서 남북문제 전문가로

    이교수의 삶의 전환점은 1971년이다. 그는 청와대로부터 남북적십자회담을 위해 일해줄 것을 제안받는데, 그때 34세이던 이교수는 과감하게 언론계 생활을 청산했다. 이교수에 따르면, 처가가 해방후 월남한 함경남도 함흥 출신의 실향민이라는 점이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 같다고 한다. 이교수의 부인 이상희 여사는 서강대 이상우 교수의 동생이다. 그러니까 이동복 교수와 이상우 교수는 처남매부간이다.

    이후 이교수의 경력은 크게 네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우선 1982년까지는 남북회담을 위해 일하던 시기로, 남북적십자회담 사무국 회담운영부장, 남북조절위원회 대변인, 국토통일원 남북대화 사무국장 등 남북회담을 실무적으로 이끌었다. 1982년 정부가 발표한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은 그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번째 시기는 남북회담에서 잠시 손을 떼고 1982년부터 삼성그룹에서 일하던 시기로, 고(故) 이병철 회장의 고문과 삼성정밀 대표이사 겸 사장으로 재직했다.

    세번째는 다시 공직으로 돌아온 시기로,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자 대통령 취임준비위원회로 불려나가 정치가와 남북문제 전문가로 활동했다. 1988년 당시 민정당 공천으로 서초을구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김재순 국회의장 비서실장을 거쳐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을 지내다가 1993년 안기부법 개정과 이른바 ‘훈령 파동’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는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미국 조지 워싱턴대 개스턴·시거 동아시아문제연구소 초청연구원과 국제전략연구소(CSIS)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1996년 2월 귀국한 그는 김종필 총재의 권유로 자민련에 입당, 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전국구로 국회에 진출, 총재비서실장을 지냈다.

    현재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2001년 9월부터 명지대 객원교수로 신문과 잡지를 통해 문필 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그의 경력은 한국 현대사의 압축판이기도 하다. 20대와 30대는 언론계, 30대와 40대는 공직, 40대와 50대는 기업, 그리고 50대 이후는 공직과 정계에서 그가 보여준 정력적인 활동은 엄격한 성실성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인터뷰를 해보니 이교수는 세상사에 해박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현실적인 감각의 소유자다.

    그를 만나본 사람들은 대번에 감지할 수 있듯이 이교수는 논리가 명쾌하다. 이교수는 보수와 진보를 이데올로기적 분류의 패러다임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보수는 이데올로기적 선택이 아니며, 개혁을 인정하되 단지 개혁의 방법에서 차이를 갖는다는 것이다. 보수주의는 주어진 현상에 대해 검증된 방법으로, 급진적이 아니라 완만하게 개혁을 추진하자는 입장이라는 게 그의 견해다. 따라서 사회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보수주의를 수구 내지 반동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며, 오히려 보수주의야말로 현실을 인정하고 실현가능한 개혁을 모색하는 방법론이라고 강조한다.

    방법론적 태도로서의 보수주의

    보수주의에 대한 이런 이해를 통해 이교수는 현재 ‘한국적 보수주의’가 표류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가 제시하는 표류의 원인은 우리 사회에서 다수를 이루는 보수적 성향의 국민들의 에너지를 조직하고 집결시킬 지도세력이 부재하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보수적 기성세대는 그 동안 빈곤, 분단, 안보위협 속에서 개발시대와 고도성장을 주도해 왔지만, 그 과정에서 ‘도덕적 해이’가 나타나고 설득력 있는 체제옹호 논리를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도덕적 정당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1970년대 초반 언론계를 떠난 후 30년 동안 직간접으로 남북관계에 매달려온 만큼 자타가 공인하는 통일문제 전문가다. 이교수는 북한에 대한 접근이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을 때 북한당국과의 접촉을 담당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관찰한 북한은 그다지 낯선 곳이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해방될 때 여덟 살이던 그는 고향의 큰집에 있던 문학책들을 탐독했는데, 그 가운데는 일제시대 카프 작가들의 소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사상통제가 엄격해 사회주의에 조금이라도 관련되었거나 월북한 지식인들의 책을 거의 접하지 못했던 시기에 이런 독서 경험과 한국전쟁 당시 4개월 동안의 피란체험이 그로서는 북한을 이해하는 데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통일문제에 대한 이교수의 생각을 잘 정리한 책이 ‘통일의 숲길을 열어가며 1·2’(1999)다. 그 동안 이교수는 남북대화의 실무를 담당하며 정부의 입장에서 적지 않은 양의 글을 발표해 왔는데, 이 책은 그 가운데 일부를 가려 묶은 것이다. 이 책 출간 이후에도 이교수는 현정부의 햇볕정책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글들을 많이 썼다.

    이교수의 통일론은 통일지상론(統一至上論)에 대비되는 통일신중론(統一愼重論)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통일신중론은 통일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통일을 위해 노력하되, 그런 노력을 통해 앞으로 이뤄질 통일이 ‘내용’면에서 최선의 것이 되기 위해서 ‘방법’면에서 신중을 기하는 것을 말한다. 이교수는 이런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분단관리’라 명명한다. 그가 강조하려는 바는 현재의 시점에서는 ‘통일국가’라는 결과보다도 ‘분단관리’라는 과정이 중요하며, 이 ‘분단관리’ 단계를 도외시한 통일은 정치적 선전구호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교수가 제시하는 전략은 두 가지다. 하나는 분단관리를 위해서 분단주체로서의 두 주권국가간에 평화공존이 제도화돼야 한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북한의 ‘본질적 변화’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정부의 햇볕정책은 북한의 현체제를 안정시키고 그 수명을 연장시켜 주는 정책이라는 점에서 큰 문제를 갖고 있다고 그는 진단한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이른바 ‘일방통행식 퍼주기’는 북한의 대남(對南) 재정의존도를 높일 뿐만 아니라 북한의 ‘벼랑 끝 전술’에 말려들어 오히려 남한이 북한에 예속되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교수의 주장에 통일문제에 문외한인 필자는 두 가지 정도는 덧붙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이교수의 통일론은 현실적이면서도 보수적인 통일론을 잘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작년 6·15 남북 정상회담의 거품이 빠지면서 현재 햇볕정책이 크고 작은 장애들에 직면해 있는 것을 보면 이교수의 현실주의를 다시 한번 곱씹어보게 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이교수의 통일론은 너무 소극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든다. 북한의 변화를 기다리기에는 통일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관심은 여전히 높다. 참고 기다리는 게 올바른 지혜라 하더라도 때로는 과감하게 매듭을 자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한국 보수주의의 아이러니

    앞서 네 명의 보수주의 지식인을 살펴보았다. 네 사람의 사상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첫째, 보수주의는 기본적으로 전통을 존중한다. 둘째, 보수주의는 질서 속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다. 셋째, 우리 사회에 걸맞은 이념은 다름아닌 보수주의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네 사람은 모두 전통, 질서, 개혁을 보수주의의 핵심으로 이해하고 이 보수주의야말로 자유민주주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임을 부각시킨다. 또한 네 사람은 예외 없이 전통사상으로서 유교의 중요성을 주목하고 현대적인 계승을 강조한다.

    흥미로운 것은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지식인들이 적지 않음에도 우리 사회에서 보수주의가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해 의문 또한 만만치않게 제기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강정인 교수(서강대)는 보수주의를 ‘기질적 보수주의’, ‘상황적 보수주의’, ‘정치철학적 보수주의’로 구분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기존 정치질서를 옹호하는 집권세력의 ‘상황적 보수주의’, 즉 ‘철학 없는 보수세력’만 존재할 뿐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김용민 교수(외국어대)도 이와 유사한 견해를 표명한다. 즉 우리의 보수주의는 철학적·종교적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하며, 통치를 위한 정치적 지배이데올로기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보수주의는 사상적으로 그 정체가 불투명한 가운데 집권세력과 수구세력, 보수적 중간층을 결집시키는 이데올로기로 발전되어 왔다고 진단한다. 요컨대 보수세력 내지 보수주의 정당은 존재해도 진정한 보수주의 철학은 없다는 게 한국 보수주의의 현주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사회에서 보수세력만 존재하고 보수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리고 이 경우에 보수세력과 보수주의의 차이는 무엇일까. 먼저 후자의 문제부터 보면 일반적으로 보수세력은 주어진 상태를 유지, 지속하려는 사회집단을 가리킨다고 볼 때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이념이 굳이 보수주의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이들은 수구주의 내지 반동주의를 선택할 수도 있으며, 많은 나라들의 역사적 경험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주의가 아닌 독재를 선호할 수도 있다.

    보수세력과 보수주의가 이렇게 구분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는 사실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우리 현실을 객관적으로 돌이켜볼 때 자유민주주의가 유보된 1970년대 유신체제나 전두환정권에서 보수세력이 보수주의를 자신의 정치적 이념으로 표방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본래의 보수주의와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수주의가 민주주의의 한 유형이라면, 유신체제나 전두환정권을 이런 민주적 보수주의와 동일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 보수주의의 한계와 과제

    객관적으로 한국의 보수주의는 1987년 이후 민간정부의 출범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간정권들도 보수주의의 정치적 이념에 입각해 통치했다기보다도 보수주의를 정략적으로 이용한 감이 작지 않았다. ‘보수적 민주주의’라기보다 오히려 1980년대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 관찰할 수 있는 집권자에게 권력이 고도로 집중되는 ‘초대통령주의’가 한국 정치현실에 오히려 가까운 것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당과 야당이 모두 보수주의 정당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정작 정치학자들이 보수주의가 부재하다고 말하는 것은 한국 보수주의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보수주의는 ‘상처받은’ 이념이라 할 수 있다. 한편에서 그것은 보수세력의 정치적 지배이데올로기로, 다른 한편으로 수구주의와 반동주의의 이념으로 동일시됐다. 필자는 보수주의를 지지하지 않지만, 우리 사회에서 상처받은 보수주의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물론 세계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식에서 보수적 대안과 진보적 대안 가운데 어떤 게 더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 선험적인 해답은 없을 것이다. 서구의 근대역사가 웅변하듯이 바람직한 사회발전은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사이에 열린 경쟁과 토론을 통해서 성취되어 왔기 때문이다.

    필자는 바로 여기에 한국 보수주의의 과제가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보수주의는 무엇보다 정치철학으로서 보수주의 이념을 적극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버크가 강조했듯이, 보수주의의 본질은 단순한 수구나 반동이 아니라 전통과 질서를 존중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모색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보수주의가 상층 계급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인간의 불안정성을 깊이 이해하고 그에 바탕하여 유기체로서의 전체사회를 위해 실현가능한 정책 대안을 모색하는 이념임을 상기해야 한다. 이런 철학과 정책 대안을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야말로 한국 보수주의의 미래에서 중대한 갈림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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