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을지문덕함을 필두로 한 한국 해군 함정이 건국 이후 최초로 중국을 방문해 환대를 받았다. 장보고 대사의 함정이 중국을 방문한 이후로는 처음으로 한반도의 함정이 중국을 방문한 것이다. 북한 함정은 아직 중국을 방문한 적이 없다. 왜 한국과 중국 함정은 상호방문해야 하는 것일까? 양쯔강과 황푸강을 가로질러 중국 동해함대의 본거지까지 찾아간 한국 순항분대가 그 해답을 제시해준다.
한국 군함이 중국 영해와 내해(內海, 영해보다 더 안쪽에 있는 강이나 호수 같은 수역)에 들어간 것은 이 순항분대가 처음이다. 이날 오전 8시30분쯤 황푸강 입구에서 기함(旗艦, 사령관이 탄 배)인 화천함에 타고 있던 순항분대 사령관 안기석(安基石·해사 29기) 준장과 기자는 중국 해군의 고속정을 이용해 을지문덕함으로 옮겨 탔다. 안사령관이 배에 오르자 을지문덕함의 마스트에는 파란색 바탕에 흰 별 하나가 그려진 ‘제독기(提督旗)’가 게양되었다. 이제부터는 을지문덕함이 순항분대를 지휘하는 기함이다.
함정을 조함(操艦, 조종)하는 함교(艦橋, bridge)는 전투함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조함중인 사관들은 극도로 긴장해 있었다. 황푸강은 벌크선(광석이나 농산물 등을 싣는 배)과 피더선(작은 컨테이너선) 등 수많은 배들로 붐볐다. 수심은 8m 내외로 매우 얕은데, 거슬러 올라가는 배들은 오른쪽으로, 내려오는 배들은 왼쪽으로 운항하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두 배 사이의 거리는 30∼50m에 불과해 여차하면 충돌할 가능성이 있었다. 수로 밖으로 나가면 배가 강바닥에 닿아 좌초할 위험이 있다. 그런데도 작은 통선들은 곡예운전을 하는 오토바이처럼 큰 배 사이를 쏜살같이 뚫고 다녔다. 이런 상황이니 사관들은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 군함을 선도(先導)하는 중국 항만국의 함정이 연달아 사이렌을 울리며 길을 터주었다.
칼날 같은 기세로 황푸강을 올라가다
함교 지붕은 레이더의 안테나 등이 복잡하게 설치돼 있어, ‘신호(信號)갑판’으로 불린다. 신호갑판은 군함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사다리를 붙잡고 이곳에 올라간 기자는 나도 모르게 “야-!” 하는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을지문덕함의 함수(艦首)는 잘 벼린 칼날처럼 뾰족하다. 함수 바로 뒤에 구경 5인치(127㎜)인 함포가 활시위에 재워진 살처럼 전방을 향해 힘있게 뻗어 있다. ‘을지문덕이 누구냐. 중국 수(隋) 양제(煬帝)가 끌고 온 100만 대군을 살수(薩水, 청천강)에 수장시킨 고구려의 장수가 아닌가. 한국 함대가 살수대첩을 이끈 을지문덕을 앞세워 중국 내해로 거슬러 올라가는구나!’
을지문덕함의 신호갑판에서 느낀 감흥을 기자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중국 해군 고속정 편대가 있는 부두를 통과하던 오전 9시20분쯤, 뒤쪽에서 거대한 폭음이 연이어 들려왔다. 중군 격인 화천함에서 21발의 예포(禮砲)를 쏜 것이다. 갖고 있던 쌍안경으로 바라보자 흰 예복을 차려 입은 사관과 수병들이 화천함 전 갑판에 ‘차렷’ 자세로 서있다. 정말 폼 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후군인 부산함은 다른 선박에 가려 볼 수 없었다. 화천함의 예포 발사가 끝나자, 중국 해군의 고속정 부두에서도 21발의 예포를 발사했다. 탄약 장전 속도가 늦어서인지, 중국 해군은 포 두 문을 이용해 예포를 쏘았다. 이때부터 지나가던 선박에서 손을 흔들어주는 승조원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마스트에는 중국의 오성홍기(五星紅旗), 함미에는 태극기(太極旗)를 달고 상하이에 입항하는 한국 순항분대를 알아본 것이다.
서울에서 한강 남쪽인 강남(江南)이 신개발지로 번창했다면, 상하이에서는 황푸강 동쪽인 푸둥(浦東)지역이 새로 발전했다. 푸둥지구에는 높이 160m를 자랑하는 명물 동방명주(東方明珠)탑과 88층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높다는 금무(錦茂)타워 등의 마천루가 즐비했다. 오전 11시40분쯤 푸둥지구를 왼쪽으로 바라보며 을지문덕함은 ‘삼성’과 ‘LG전자’ 등의 입간판을 이고 있는 건물이 줄지어선 외홍교(外紅橋)의 중국 해군 부두에 접안해 홋줄을 던졌다. 중국 수병들이 홋줄을 부두에 있는 후크(hook)에 묶자, 중국 해군 군악대가 힘차게 중국 군가를 연주했다. 이어 한국학교에 다니는 초등학생 등 환영객들이 부두로 밀려나와 열렬히 손을 흔들었다.
을지문덕함에서 사다리를 내렸을 때 1착으로 하함(下艦)해 중국땅을 밟은 것은, 기자를 비롯한 취재진이다. 잠시후 안기석 사령관이, 공식적으로는 최초로 한국 함정에서 내려 중국땅을 밟았다. 을지문덕함에서 내린 안사령관이 중국군 장교와 포옹하는 순간 기자를 포함해 베이징(北京)에서 취재를 위해 달려온 한국 특파원, 그리고 중국 언론사 보도진의 카메라 플래시가 숨가쁘게 터졌다. 이날 오후 중국 해군 동해함대 사령원인 자오궈쥔(趙國鈞) 중장(한국군 소장에 해당)을 만난 안사령관은 두 번이나 ‘천년’이란 단어를 사용해 이렇게 인사했다. “제주도에서 상하이까지는 하루 만에 올 수 있는 200해리(약 390㎞)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군함을 타고, 천년에 걸쳐서 이곳에 왔습니다. 우리는 군함을 타고, 천년에 걸쳐 중국에 왔습니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조선과 고려시대 수군 함정이 중국에 갔다는 기록은 없다. 삼국시대 때는 나당(羅唐)연합군이 백마강에서 백제를 공격했으므로, 신라 수군이 중국에 갔을 확률이 높다. 청해진을 운영한 신라의 장보고(張保皐) 대사 또한 함정을 중국에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순항분대는 장보고의 함정 이후 최초로 중국을 방문한 한국 함정인 것이다. 5인치 함포를 꼿꼿이 치켜든 을지문덕함을 선두로 한 한국 함대가 황푸강의 누런 물살을 헤치며 와이탄(外灘)의 외홍교 부두에 정박한 데는, 천년 동안 끊어져 있었던 한중(韓中)간의 군함 외교를 복원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날 기자는 지난 4일간의 항해 여독이 한순간에 씻겨나가는 듯한 ‘아주 상쾌한’ 쾌감을 느꼈다. 지난 여정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떠올랐다.
“까-악 까악-.”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진해에는 까마귀가 많다. 산에서 내려온 것이리라. 옥포만에 면한 해안도시지만, 진해는 산으로 둘러싸인 산속의 도시이기도 하다. 산이 많으면 비도 잦은 법. 10월22일 진해에는 전날 저녁부터 내린 가을비로 부슬거렸다. 그 비를 뚫고 까마귀들은 해군회관 마당에 내려앉아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일체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 세상사는 마음을 어떻게 먹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까마귀는 길조(吉鳥)다. 저들은 내 출발을 전송하기 위해 저렇게 우는 것이리라.’
해군 작전사령부 부두는 이미 환송 인파로 붐볐다. 군악대와 의장대, 화천함과 을지문덕함·부산함의 승조원, 그리고 순항에 나설 해사 4학년 생도와 선배를 환송하기 위해 나온 해사 3학년 생도들이 찬비를 맞고 서있었다. 3학년 생도 중에는 여학생도 섞여 있었다. 해사에서 최초로 뽑은 여자 생도라고 한다. 열 지어 선 4학년 생도들은 우산을 들고 정렬 대형까지 찾아온 가족 혹은 애인과 인사를 나누기에 바빴다. 편승자인 기자는 비를 피해 기함인 화천함에 먼저 올라, 화천함 함교에서 환송식을 내려다보았다. 가을비가 매우 차갑게 느껴졌다.
해군 참모총장 장정길(張正吉) 대장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진 환송식이 끝나자, 3개 함 승조원들이 배에 올랐다. 4학년 생도들은 다시 한번 가족, 애인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예비 군인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대학 4학년의 ‘햇병아리’ 청년들이다. 10개국을 84일 동안 돌아보는 순항훈련이 이들에게도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니다. 긴 이별을 예정한 출항이건만,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인형을 건네주는 연인, 꽃다발을 건네주는 어머니를 뒤로 한 4학년 생도들이 승함해 화천함 승조원들과 함께 갑판에 줄지어 섰다.
때마침 비가 그치고, 부두에서는 해군 장병과 3학년 생도, 그리고 환송인파들이 늘어서서 손을 흔들었다. 마이크를 잡은 함교의 당직사관이 짧게 외쳤다. “함대 총원, 경례!” 갑판에 늘어선 정복 차림의 생도와 장병들이 일제히 거수경례를 했다. 그 순간 배는 긴 뱃고동을 울리며 출항을 알리고, 부두의 군악대는 신나는 행진곡을 연주했다. 눈물의 이별은 아니었다.
하지만 항구의 이별은 언제나 애잔하다. 가족과 애인 그리고 3학년 여생도 몇이 서서히 움직이는 배를 따라오며 손을 흔들었다. 4학년 생도는 그들을 향해 꽃다발을 힘차게 던졌다. 그러나 꽃다발은 부두에 닿지 못하고 선명한 색깔로 가을 바다에 떨어져 물결에 떠다녔다. 군악대는 이럴 땐 행진곡보다는 유행가를 연주해 주는 것이 차라리 나으리라.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하루하루∼ 바다만 바라보다…”
破虜湖의 역사를 안고 있는 화천함
기함인 화천함은 현대중공업에서 제작한 것으로 만재톤수 9180t, 길이 134m, 높이 37m며 최고속력은 20노트(시속 39㎞)다. 해군은 전통적으로 군수지원함에 저수지 이름을 붙인다. 최초로 건조한 제1번 군수지원함은 백두산 천지(天池)를 따서 ‘천지함’, 제2번함은 충남 대청호의 이름을 따 ‘대청함’이라고 한다. 제3번 군수지원함인 화천함은 강원도 화천군의 화천댐으로 인해 생겨난 화천호(華川湖)에서 따왔다. 그런데 화천호는 파로호(破虜湖)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6·25전쟁 때 한국군은 중공군에게 연전연패하다, 1951년 5월28일 육군 6사단과 해병대 1연대가 이 호수 부근에서 중공군 10·25·27군을 대파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이 승리를 기리기 위해 중공군을 파쇄(破碎)한 호수란 뜻으로 화천호를 파로호(破虜湖)로 고쳐 부르게 했다. 천년 만에 중국을 방문하는 한국 함대의 기함이 ‘파로호’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은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한국형 구축함 제2번함인 을지문덕함은 배수톤수 3885t, 길이 135m에 최고속력은 30노트(시속 약 56㎞)다. 한국형 구축함은 대우중공업에서 세 척이 건조됐는데, 광개토대왕함(제1번함)·양만춘함(제3번함) 식으로 모두 중국 민족과 싸워 이긴 고구려의 영웅 이름을 붙였다. 분당 45발을 발사하는 5인치 함포를 중심으로 근접방공체제인 30㎜ 골키퍼 시스템과 적함을 노리는 하푼 미사일과 적 항공기를 요격하는 시스패로 미사일, 그리고 대잠(對潛)작전용 슈퍼링스 헬기를 탑재하고 있다.
전투함은 그 배의 무게로 크기를 나타낸다(이를 排水톤수라 한다). 반면 군수지원함을 포함한 일반 상선은 실을 수 있는 물건의 무게로 크기를 표시한다(이를 滿載톤수라 한다). 전투함은 물건을 싣지 않기 때문에 배수톤수로 크기를 표시하는데, 대개 배수톤수에 ‘곱하기 3’을 한 상선과 그 크기가 비슷하다. 그러나 군수지원함은 군함인지라 상선과 달리 여러 무기를 달고 있다. 따라서 전투함을 군수지원함과 비교할 때는 전투함의 배수톤수에 ‘곱하기 2’를 해 비교한다. 톤수로만 따지면 화천함은 을지문덕함의 2.7배 정도다. 외견상으로 을지문덕함은 화천함보다 약간 작다.
한국형 호위함 8번함인 부산함의 배수톤수는 1800t에 불과하다. 하지만 3인치(76.2㎜) 함포와 39㎜ 쌍열기관포, 대함(對艦)용인 하푼과 대공(對空)용 미스트랄 미사일 등 수많은 무기를 장착하고 있어, 작지만 주먹이 매운 배로 유명하다. 화천함과 을지문덕함은 태풍만 불지 않는다면 순항분대가 지나갈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그리고 인도양의 거센 파도를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부산함도 이겨낼 수 있다. 그러나 황천(荒天, 파도가 높은 날) 항해에 익숙하지 않은 편승자(便乘者, 기자처럼 일시적으로 배에 탄 사람. 승조원의 반대 개념이다)라면 멀미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전사령부의 부두가 가물해지고 옥포만을 벗어나 남해로 나올 때쯤, 상하이 입항이 이틀 연기됐다는 소식이 순항분대로 날아들었다. 10월22일 상하이에서는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주석, 한국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미국의 부시 대통령,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이 열리고 있었다. 9·11 미국 테러사건 직후 열린 대규모 국제행사인지라, 중국의 공안 당국은 이 행사의 경비에 전력을 기울였다. 순항분대는 APEC이 끝난 바로 다음날인 24일 입항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중국측은 중국 정부 창설 이후 최초로 중국을 방문하는 한국함대 경호 경비에 만전을 기했다고 한다. 상하이에는 북한의 총영사관이 있다. 일본의 조총련처럼 북한출신 교포들의 ‘조교(朝僑)’ 조직도 있다. 지난해 북한의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은 상하이를 두 번 방문했는데, 이후 북한 유학생들이 다수 상하이에 파견되었다.
1992년 한·중 수교 전까지, 중국은 북한과 가장 단단한 외교관계인 ‘혈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도 북한해군은 단 한 척의 함정도 중국에 보내지 못했다. 중국만이 1997년 칭다오(靑島)에 있는 북해(北海)함대 소속 함정 두 척을 북한 남포항에 보낸 적이 있다. 이런 지경이니 중국 공안은 북한 조직이 한국 순항분대의 상하이 입항을 방해할 수 있다고 보고, APEC에 투입된 경비 인력을 한국함대 경비에 돌리기 위해 이틀 여유를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할일이 없어진 순항분대는 제주도 서남방에서 오락가락하며 경비업무에 들어갔다. 경비업무에 들어간 첫날 예기치 못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화천함의 갑판장인 주형렬 상사의 부친께서 작고하셨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순항분대가 예정대로 항진했다면 주상사는 중국 상하이에 입항해 비행기를 타고 고향인 부산으로 날아와야 했으리라.
순항분대 승조원들은 여권 대신 ‘ID카드’로 신분을 보장받는데, ID카드에는 비자를 붙이지 않는다(ID카드는 상륙만 허가한다). 주상사는 상륙을 허가하는 ID카드만 있고 출입국을 보증하는 중국 비자는 없으므로, 비행기를 타고 중국을 출국할 수가 없다. 때문에 순항훈련에 나선 해군장병은 궂은 소식이 날아들어도 석달 후 진해항에 입항할 때까지 묵묵히 자기 일에 전념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상하이 도착이 이틀 늦어짐으로써 주상사는 빈소에 다녀올 수 있었다. 안사령관의 지시로 제주도에 있는 해군부대는 고속정을 보내 주상사를 태우고 나와, 제주공항에서 비행기에 태워 부산으로 보내주었다. 주상사는 2시간 동안 빈소에 머물며 마지막 효도를 한 후 24일 새벽 갈 때의 역순으로 화천함으로 돌아왔다. 이날 오후 안사령관을 찾아온 주상사는 울먹이며 이렇게 인사했다. “사령관님, 아버님 빈소에 잘 다녀왔습니다. 자식으로서 마지막 도리를 한 것 같습니다. 이 은혜 끝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수병들은 화장실에서 빨래를 한다. 함정에는 여자가 없으므로 수병들은 ‘훌러덩’ 옷을 벗어 원초적인 모습으로 돌아가 우람한 몸매로 옷을 빨고 샤워를 한다. 화장실 문을 닫는 사람도, 닫으라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이러한 모습을 보기 힘들 것이다. 여군 사관들이 승함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각 함정은 여군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여군 사관 침실은 함장실과 같은 가장 좋은 자리에 독방(獨房)으로 마련된다. 함정에서는 ‘여자 빼고는 없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내년부터는 옛말이 될 것이다. 대신 “옛날에는 원초적인 자세로 빨래했다”는 이야기가 수병들 사이에서 퍼져나갈 것이다.
夜艦의 정취
24일부터는 어수선하던 함내의 질서가 잡혀나갔다. 해사 생도들은 식당을 이용해 수업을 하고 수업이 끝난 저녁에는 함내 빈 공간에 모여 자습을 했다. 군악대와 사물놀이패는 한곳에 모여 연습을 했다. 기관부와 갑판부·포술부 등 화천함을 움직이는 업무를 맡은 승조원들도 제일에 열심이었다. 정작 할일이 없어진 것은 기자를 포함한 민간인 편승자였다.
편승자 중에는 서울대 농대를 나와 원양어선 선장이 된 소설가 천금성(千金成·60)씨도 있었다. 천선생은 헤밍웨이의 대표작 ‘노인과 바다’에서 바다 상황을 틀리게 묘사한 부분을 잡아내는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바다에 정통한 ‘시맨(sea man)’이다. 그는 5공 출범 초기 전두환 대통령의 전기인 ‘황강에서 북악까지’를 쓰기도 했다.
천선생은 대단한 유머와 입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는 기차 위에서 겪은 백계(白系) 러시아 여인과의 로맨스,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만난 한 소녀의 사연 등을 토해낼 때마다 편승자들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강에서 북악까지’를 저술하게 된 과정과 그 책을 쓰기 위해 만난 신군부 인사들의 백태(百態), 그리고 원양어선 선원들이 겪는 에피소드를 밝힐 때는 배꼽을 잡고 나뒹굴었다. 천선생은 출항 직전 출간한 소설집 ‘외로운 코파맨’ 수백 부를 배에 실었는데, 책에 손수 사인해서 수병들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이발을 하고 나타나는가 하면 과자를 들고 나타나기도 했다. “이봐요 기자선생. 배에서는 이렇게 사는 것이라오.” 천선생은 84일간의 전 항해를 모두 따라갈 예정이다.
어찌 보면 배에서는 먹는 게 일이다. 편승자들은 사관실에서 순항분대 참모들과 같이 식사를 했다. 식사는 세 끼 외에도 오후 3시30분쯤 과자와 음료수가 나오는 참이 있고, 저녁 9시쯤에는 야식(夜食)이 있어 사실상 다섯 끼다. 배가 흔들려서인지 배는 금방금방 꺼졌다. 오랜 항해에서는 먹는 일이라도 있어야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화천함과 을지문덕함에는 슈퍼링스 헬기가 뜨고내릴 수 있는 비행갑판이 있다. 이 비행갑판에서는 날씨가 좋으면 족구시합이 벌어진다. 함상 족구는 두 가지 방법으로 한다. 하나는 줄을 박아 맨 공으로 족구를 하는 것이다. 공이 함 바깥으로 날아가면 줄을 잡아당겨 공을 끌어올린다. 이 공을 찰 때는 줄을 밟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또 하나는 갑판 난간에 그물을 치고 하는 것. 그러나 대차게 내질러 공이 그물 바깥으로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함상생활의 압권은 야밤에 펼쳐진다. 해가 지면 수병들은 화천함 비행갑판에 소형 스크린을 세운다. 그리고 노트북에 DVD를 넣어 프로젝터(projector)로 쏘고, 성능 좋은 스피커를 설치해 볼륨을 최대한 올리는데, 이렇게 하면 멋진 함상 시네마가 만들어진다. 때마침 마스트에 상현달이 걸렸다.
배가 흔들릴 때마다 상현달은 까닥까닥 마스트의 좌우를 시계추처럼 오간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야참으로 나눠준 과자를 씹으며 ‘주라기 공원 3탄’과 ‘기사 윌리엄’을 보았다. 해군이 아니면 그리고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영원히 맛볼 수 없는 ‘야함(夜艦)의 정취(情趣)’였다.
매우 빠른 쿠로시오 해류
가장 단조로운 생활을 하는 것은 아마 사관생도일 것이다. 먹고 자고 공부하고 실습하는 것으로 그들의 하루해는 기울고 만다. 매우 바쁜 것 같지만 단조롭게 생활하는 생도들을 위해 순항분대 지휘부는 특강을 마련했다. 영광스럽게도 기자는 첫번째 특강 강사가 되었다. 공보참모 박순제 소령은 “언론의 처지에서 본 대양해군의 필요성을 이야기해 달라”고 주문했으나 기자는 전혀 그럴 의사가 없었다. 해사 생도들 앞에서 대양해군을 이야기하는 것은, 의과대학생 앞에서 수술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이나 따분할 것이다. 기자는 탈옥수 신창원(申昌源) 이야기를 꺼냈다.
기자는 신창원이 탈옥해 세상을 시끄럽게 할 때 ‘탈옥수 신창원’이란 책을 낸 적이 있다. 이 책을 신창원이 읽었다. 1999년 7월16일 신창원은 전남 순천에서 검거됐는데, 그때 그가 써둔 일기에는 기자 이름이 수없이 나온다. ‘이기자가 책에서 나를 악마로 묘사했다. 그렇다면 악마가 되어주지. 전두환·노태우 집을 털러 가야겠다….’ 신창원은 이렇게 허풍을 쳤는데, 이를 본 다른 기자들은 ‘신창원이 전두환 노태우 집까지 털려고 계획했었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그러나 신창원은 전두환·노태우 집을 털 수 있을 정도로 간 큰 도둑이 아니다. 그 책에서 기자는 신창원의 성장과정과 습성 등을 추적해, 교묘한 머리를 가진 잡범임을 밝혀냈다. 신창원은 대도(大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생도들 앞에서 신창원 이야기를 꺼낸 것은 신창원 검거가 우연이 아니라 과학의 결과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다. ‘탈옥수 신창원은 술집이나 카페의 여자를 만나 신혼부부로 위장해 중소도시에서 살았다. 그는 개를 좋아하고 낚시를 좋아했다’ 등 신창원의 습성을 설명한 후, 신창원이 이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내 집중 수색하면 신창원을 쉽게 잡을 수 있는데 경찰은 여기에 서툴렀다고 말했다. 그러고나서 동북아 4강으로 이야기를 돌렸다.
“한반도를 둘러싼 미·일·중·러는 동북아 4강이자 세계의 4강이다. 이들은 한반도가 재통일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므로 통일 한국의 등장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신창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자세히 살피면 4강의 습성을 볼 수 있고 습성을 찾아내면 통일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생도들은 중국을 방문해 이것을 살펴봐 달라. 통일은 우연히 오는 게 아니므로 과학으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어둠이 짙게 깔린 화천함의 비행갑판에서 이러한 요지의 특강을 한 후 기자는 생도들로부터 경례를 받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함장(洪光男 대령)을 비롯한 순항분대 지휘부 인사들과 한반도 재통일을 놓고 깊은 대화를 나누는 기회도 가졌다.
함정은 대화의 공간이자 문화의 무대며 군사 외교의 장이었다. 중국으로의 항진이 본격화한 25일부터 녹황(綠黃)색 바다가 펼쳐졌다. 누런 색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은 얕다는 뜻이고, 중국이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중국에 다가갈수록 눈에 선명히 보일 정도로 해류가 빨라졌다. 해류는 동북 방향, 그러니까 상하이에서 본다면 제주도나 한반도 남쪽 방향으로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이 해류는 속도가 3∼5노트(시속 약 5.5∼9.4㎞)로 매우 빠른 쿠로시오(黑潮)해류다. 이 해류의 일부는 서해를 한바퀴 돌아 다시 내려오고 나머지는 대한해협을 통해 동해로 올라간다. 동력선이 나오기 전 중국인들은 상하이 부근에서 이 해류를 타고 한반도로 건너왔고, 한반도인들은 서해를 한바퀴 돌아 내려오는 이 해류의 지류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1997년 6월15일부터 7월9일 사이 동국대 윤명철(尹明哲·47·고구려사 전공) 교수는 상하이 바로 남쪽 저우산(舟山)시에서 뗏목배를 타고 흑산도까지 오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윤교수는 선사시대에도 한반도와 중국간에 배를 이용한 교류가 가능했음을 입증했다. 윤교수를 한반도로 보내준 건 바로 화천함이 가르고 지나가는 쿠로시오 해류다.
이날 저녁 화천함은 양쯔강(揚子江) 하류에 들어갔다. 짠물에서 민물로 변한 것이다. 양쯔강 하류라고 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땅이 보이지 않았다. 바다처럼 넓은 양쯔강은 완전히 흙탕물이었다. 이 물을 본다면 그 누구라도 이 바다를 황해로 이름 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음날 새벽 기자가 쿨쿨 잠자는 사이 화천함은, 양쯔강 물이 넘쳐 들어오는 바람에 기관부 승조원들이 물을 퍼내느라 한바탕 난리법석을 피웠다고 한다. 양쯔강 물이 화천함에 들어오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26일 새벽 3시30분쯤 화천함은 약속한 수역에서 중국 항해국의 도선사를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만만디(漫漫的) 기질인지 게을러서인지 중국 도선사를 태운 배가 5시30분쯤에야 약속 수역에 나타났다(나중에 중국측은 손님을 맞기 위해 손에 익지 않은 새 배를 끌고 나오느라 늦었다고 해명했다). 중국 해군과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있는데, 도선사가 두 시간이나 늦게 나타났으니 당직사관은 전속 항진을 명령했다.
배가 전속력으로 달리면 고속으로 질주하는 모터보트처럼 함수는 들리고 함미는 가라앉는다. 화천함에는 순항분대가 84일 동안 쓸 각종 물자가 가득 차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전속 항진하니 함미는 더욱 깊이 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함수로 인해 갈라진 장파(長波, 긴파도)가 큰 너울을 만들며 함미 부근에서 높이 올라갔다.
전혀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세계에서 가장 염도(鹽度)가 높다는 이스라엘의 사해(死海)에 가면 둥둥 떠다닐 수가 있다. 물체는 민물보다는 소금물에서 큰 부력을 받는다. 화천함이 출항한 진해 옥포만은 바다지만, 양쯔강은 민물이다. 때문에 화천함은 물에 잠기는 부분이 더욱 늘어났다. 배에는 배에서 생긴 물을 빼내기 위한 배수관이 있는데, 화천함이 양쯔강에서 전속 항진하자 배수관이 물밑에 잠겨 양쯔강 물이 역류해 들어온 것이다. 기관부 승조원들은 전속 항진하랴, 물을 빼내랴 매우 시끄러운 새벽을 보냈다. 거창한 중국 입국 인사를 치른 것이다.
천년 만의 항해를 마무리한 후, 한국함대 승조원과 편승자들은 상하이 시내에 상륙했다. 상하이는 홍콩을 제외하면 중국에서 가장 번성한 곳이다. 중국 전체의 1인당 GDP는 805달러에 불과하나 상하이만큼은 4000달러에 이르고 있다. 상하이는 산으로 둘러싸인 진해와 달리 온통 벌판이다. 평균 해발 고도가 2∼3m라 5m만 넘어도 ‘산’으로 부른다고 한다. 황푸강 좌우로는 마천루가 즐비하고 사람들은 활기차게 움직였다.
우리가 중국 방문에 대해 관심을 갖듯 중국 언론 역시 한국 함대의 방중(訪中)에 큰 관심을 가졌다. 중국은 언론 시스템이 매우 특이해서 군을 취재하는 기자는 군인이고 계급이 있었다. 소령이라고 하는 신화사(新華社)통신의 기자는 안기석 사령관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많은 질문을 던졌다. 상하이에 상륙했던 한 편승자는 “상하이 시민과 술잔을 나누다가 ‘한국군은 미군의 개가 아니냐’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혀를 차기도 했다. 우리가 중국군을 궁금해하는 것 이상으로 상하이 시민과 중국군도 한국군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중국도 함정을 보내야 한다
서해는 폭이 200∼300해리에 불과해, 한국과 중국은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을 다 그을 수 없다. 이렇게 좁은 바다를 세계적인 강군인 중국 해군과 작지만 강한 군대인 한국 해군이 같이 쓰고 있다. 좁은 바다에서 두 해군이 움직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를 줄이려면 양국 해군은 부단히 만나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
산이 없어서인지 상하이는 전체적으로 잿빛 천지라는 인상을 주었다. 날씨도 상쾌하지 않았다. 잿빛 하늘과 잿빛 바다 그리고 황갈색의 황푸강을 배경으로 열린 상하이의 하늘로 한무리의 새떼가 흩어졌다. 진해에서 본 까마귀보다는 훨씬 작고 참새보다는 훨씬 큰 새다. ‘무슨 새일까?’ 중국 해군도 진해나 인천·부산항에 온다면 눈에 익숙지 않은 한국의 새떼를 보고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한국 순항분대는 1천년 만에 한중 군사교류를 다시 이었다. 그렇다면 중국 해군도 1천년간 끊어졌던 군사외교를 다시 잇도록 노력해야 한다. 28일 오후 기자는 이런 생각을 하며 베트남으로 출항하기 위해 준비에 들어간 순항분대와 작별하고 비행기를 타고 1시간 20분 만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